|
# 7월 25일 토요일 맑음
아침 식사는 라면이다.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이번 여행에서는 전기냄비를 하나 사서 갖고 왔다. 숭늉도 끓이고 계란도 삶아서 들고 다니면 식당이 없는 곳에서도 점심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발면은 춥거나 입맛이 없을 때 끓여 먹으면 얼큰한 국물이 아주 좋다. 많은 부피를 차지함에도 아내는 꿋꿋하게 준비를 해서 갖고 왔다. 여행 첫 날 아침은 순탄하게 라면을 끓였다. 전기 코드만 있으면 가능하다. 배낭을 메고 스톤헨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마땅히 짐을 맡길 곳이 없다. 호텔에 맡기자니 다시 돌아오기가 어렵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니 그런대로 괜찮고 스톤헨지에 가서는 짐을 맡기는 곳이 있으면 맡겨볼 요량으로 출발을 했다. 카운터에서 공항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기쁘게도 111번 버스를 타면 공항에 무료로 갈 수 있단다. 호텔 건너편 정류장에 가면 여러 가지 버스가 있는데 그 중 몇 가지가 무료로 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어제 저녁 거금 2만원을 주고 타고 온 것이 배가 아팠다. ‘정보가 돈이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호텔을 나서니 해가 쨍하여 코끝에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와 화사한 햇살이 너무 반가웠다. 길 건너 정류장에 서서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히드로 공항 2터미널에서 내렸다. 여기에 버스 터미널이 있다. 터미널 매표소에서 솔즈베리를 가는 기차와 버스를 알아봤다. 11시에 가는 기차는 가격이 적당 했으나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고속버스와 기차를 같이 이용하여 솔즈베리로 가기로 했다. 교통비가 장난이 아니다. 엄청 비싸다. 일정은 고속버스를 타고 WOKING 역에서 내려 기차를 타고 솔즈베리로 가는 것이다. 오전 9시 고소버스로 가면 WOKING역에 9시 55분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솔즈베리 행 오전 10시 16분 기차를 타면 11시 20분에 도착한다. 두당 31.40 파운드(6만원)로 엄청난 요금이다. 11시에 출발하면 17파운드인데........ 잠시 숨을 돌린 후에 터미널에서 701번 National Express 에 올라탔다. 별로 손님이 없다. 5명 정도다. 첫 날 여정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공항 5터미널에서 잠시 멈춘 후 다시 출발했다. 고속도로가 아닌 좁은 시골길을 달려간다. 완만한 영국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창밖에 펼쳐진다. 숲이 많은 나라다. 작은 마을 WOKING 역에 예정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마을을 잠시 둘러본다. 영국다운 건물들과 사람, 그리고 차량을 보니 ‘여기가 영국이구나.’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잠시 여유를 갖고 기차역에서 기다리다가 10시 16분 솔즈베리 행 열차를 탔다. 기차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완행기차로 마을 마다 들려서 간다. Whitchurch 역을 지나니 누렇게 변한 벌판과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Andover 역을 지나니 곧 솔즈베리 역이다. 붉은색 벽돌로 아담하게 지어진 역사는 나이 들어 보인다. 역 벽에는 특이하게 바늘들이 모퉁이 붙여져 있다. 비둘기들이 앉지 못하도록 설치해 놓은 구조물이었다. 서둘러 빠져 나오니 바로 투어 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스톤헨지를 가는 2층 투어버스다. 스톤헨지와 Old Sarum을 돌아보는 데 27파운드(54000원, 입장료 포함)다. 1시간 마다 한 대씩 있는 것 같다. 시내를 잠시 들린 후에 버스는 외곽으로 달려간다. 드디어 스톤헨지를 가는 것이다. 환상열석유적(環狀列石遺跡)이라고 부르는 영국의 스톤헨지(고대 앵글로색슨어로 ‘공중에 매달린 바윗돌’이란 의미)는 그 특이한 구조 때문에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건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돌을 의미하는 ‘스탄(stan)’과 돌쩌귀를 의미하는 ‘헹그(hencg)’라는 고대 영어 단어에서 유래한 말인 스톤헨지는 헨리 시대보다 수백 년 앞서 영국을 정복한 색슨족이 이름 붙인 것이다.선사시대인 BC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했고, 영국 윌트셔의 솔즈베리에서 북으로 13㎞ 떨어진 곳에 있다. 드루이드와 관계가 있다고도 하나 근거는 없으며 주로 1919년부터 특히 1950년 이후 런던 고대유물협회가 실시한 발굴을 근거로 해석되고 있다. 이 발굴에 따라 스톤헨지 건축은 크게 3기(Ⅰ, Ⅱ, Ⅲ)에 걸쳐 이루어졌고, 마지막 시기는 다시 3단계(Ⅲa·Ⅲb·Ⅲc)로 나눌 수 있음이 밝혀졌다. 스톤헨지 Ⅰ기(BC 3100경)에는 신석기시대인들이 사슴의 뿔을 곡괭이로 이용해 직경 98m, 폭 6m, 깊이 1.4~2m 크기의 원형 도랑을 파고, 거기서 파낸 자갈은 도랑에 높은 둑을 쌓는 데 사용했다. 둑 바로 안에는 원형으로 배치된 56개의 구덩이(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오브리 구덩이'로 불림)와 북동쪽 둑이 터진 곳에서 밖으로 뻗어난 통로에 35t 무게의 사암표석덩어리를 세웠다. 이 구덩이들은 파고난 직후 다시 메워진 것으로 보인다.
스톤헨지 Ⅱ기(BC 2100경)에는 전반적으로 개축하여 통로를 동쪽으로 약 3.2㎞ 떨어진 에이번 강까지 연결시키고, 유적 중심부에는 청석(靑石)이라 불리는 4t짜리 화성암 기둥을 2중 동심원 형태로 세웠다. 이 돌은 약 385㎞ 떨어진 웨일즈 지방의 프레셀리 산에서 바다나 강, 또는 육로를 통해 직접 또는 시간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는 2단계에 걸쳐 수입한 것들이었다. 최초에 세운 청석의 입구는 하지에 해가 뜨는 방향에 맞추어 배치되었고, 스톤헨지에 가장 가까운 통로도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중원의 석렬(石列)은 완성되지 못했고 다음 시기에는 해체되었다. 스톤헨지 Ⅲa기(BC 2000경)에 이 기념물은 전체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거대한 표석덩어리로 된 30개 기둥으로 구성된 원이 가운데 말발굽 모양으로 배치된 5개 삼석탑(三石塔)을 에워쌌는데, 이 삼석탑은 1쌍의 큰 돌에 상인방돌 하나를 얹어 이루어진 것으로 길이 8m, 무게 50t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보여준다. 이것은 유럽 거석기념물 중에서 독특한 것이다. 겉면이 돌 해머로 두드려 잘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리스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 미노스 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은 고고학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스톤헨지 Ⅲb기에는 스톤헨지 Ⅱ기에 세웠던 청석 중 약 20개를 다시 다듬고 타원형으로 배치하여 세웠다. 그 배치형태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내부의 말굽형 청석의 선과 대체로 일치한다. 스톤헨지가 세워진 마지막 단계인 스톤헨지 Ⅲc기는 BC 1400년 전에 끝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 시기에는 스톤헨지 Ⅲb기에 건립한 타원형 구조를 해체하고 오늘날과 같은 원형과 말굽형 구조로 재배치했다. 돌기둥들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처럼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되어 있는데 분명 원근법의 영향을 감안하여 밑에서 올려다볼 때 기둥이 직선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안쪽의 상인방 돌들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게 깎여 있다. 스톤헨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고인돌과 같이 거석유물로 분류하지만 그리스 신전과 같이 중앙 집중적인 배치방식으로 공간을 한정했다는 점에서 건축물로도 간주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 놀라운 구조물이 왜 건조되었는지 규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스톤헨지가 방어를 위한 성채도 아니고 거주 공간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곳에서 생활한 흔적이 없다는 것은 토기의 파편 등 거주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의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증명된다. 스톤헨지의 구조를 볼 때 천문학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스톤헨지가 제사 등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고 추정한다. 초기 목조 건축물 단계에서는 유물의 중심부에 목재를 원형으로 세워 중심부로 일반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통제했다. 이 유적의 심장부에서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던 소수의 특권층은 태양이 하짓날 아침 진입로 위로 뜨는 순간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때임을 인식하고 감격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중심축을 1년 중 중요한 날에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방향과 나란히 배치한 사실은 스톤헨지가 하늘을 숭배하던 사원이었다는 일반의 생각을 뒷받침해주지만 이 증거 역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스톤헨지는 일종의 종교적 숭배 장소로 건설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어떤 성격의 종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키가 작은 누런 보리밭과 벌판에 아무것도 없더니 갑자기 많은 차량 특히 승용차와 캠핑카가 줄 맞추어 세워져 있다. 무슨 일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이 스톤헨지의 주차장이었다. 맘이 설렌다. 이번 여행에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다. 차는 약간 외곽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나중에 이곳에 와서 투어버스를 타라는 안내와 함께......... 스톤헨지 입구로 걸어갔다. 입장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매표소 건물에는 작은 박물관과 기념품가게 그리고 셔틀버스정류장과 야외 박물관이 있다. 우리는 단체인데 아무 표시도 없는데 그냥 들어가도 잡는 사람이 없다. 여기에서 스톤헨지까지는 무료 셔틀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물론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눈치껏 아내와 셔틀버스를 타려고 줄을 섰다. 차는 금방금방 들어와 줄을 서자 곧 탈 수 있었다. 5분정도 달려간다. 드디어 스톤헨지가 보인다. 내렸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다. 벌판이 넓어서 사람들도 개미같이 보이고 스톤헨지의 바위들도 작아 보인다. 어디서 왔는지 사람들이 참 많다. 반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구경을 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부 덕분에 우리도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어디서 돌이 왔을까? 주변을 둘러봐도 바위가 있을만한 곳이 없다. 무슨 용도로 만들어 놓았을까? 누가 만들었을까? 푸른 잔디 위에 세워진 바위 덩어리들은 세워져 있지만 편안해 보였다.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소박해 보이고 더 낡고 나이 들어 보인다. 무거운 배낭의 무게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서있는 자태가 감격스럽기 보다는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이산가족을 만난 것 같은 감격이다. 만나보아 소원을 성취했으니 이제 돌아가야지. 발걸음을 돌리려니 좀 아쉬웠다. 이렇게 잠깐 만나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단 말인가? 기다리며 준비한 시간에 비하면 너무 짧은 순간이다. 사진에 넣고 또 넣고 넣어서 돌아섰다.
셔틀을 타고 와서 기념품 가게를 지나 박물관으로 향했다. 각 종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모형을 만들어 궁금한 것들을 규명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대형 화면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스톤헨지의 모습이 영상으로 보여 지는데 특히 눈이 덮인 겨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해가 뜨고 지는 24시간의 스톤헨지의 모습도 보이는데 일출과 일몰과 어우러진 스톤헨지의 모습이 멋지다. 밖에는 커다란 바위를 어떻게 옮겼는지 설명하려고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둥근 통나무를 바퀴삼아 옮긴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기거하던 초가집도 재현해 놓았다. 스톤헨지가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려보니 누런 벌판에 잘 말아진 보릿단의 둥근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겨울에 가축들에게 줄 건초 더미를 참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 요즈음 우리나라 농가에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다시 투어버스를 기다렸다. 내린 곳에서 기다리는데 10여분이 지나니 버스가 왔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들판에 특이한 모습이 보인다. 밭인데 작은 창고 같은 것이 낮게 만들어져 있다. 자세히 보니 돼지 집이다. 넓은 벌판에 돼지를 방목하고 있다. 돼지들이 편안하고 깨끗해 보인다. 제법 큰 돼지는 누워서 새끼들의 젖을 먹이고 있다. 구역 구역으로 나누어져 집들이 지어져 있고 돼지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다. 참 특이해 보인다. 이렇게 돼지를 키울 수도 있구나.
우리가 탄 차는 Old Sarum에 내려 주었다. 길을 건너 다른 사람을 따라 산책길을 걸어가니 솔즈베리의 옛 성, 고대 거주지라고 할 수 있는 올드 새럼이 나온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체크한다. 단체관광객이라 그냥 통과다. 5000년 전 철기시대 이 후 노르만 족이 살았던 곳이다. 13세기 이후에 도시가 쇠퇴하였고 현재는 건물의 흔적만 남아있다. 성처럼 되어있고 성 둘레에 땅을 파서 보호하는 형태가 갖추어져있다. 물은 보이지 않지만 일종의 해자인 셈이다. 건물의 잔해만 남아있지만 약간 언덕이라 올라서면 주변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시원하다. 넓게 펼쳐진 초록 초원과 시원한 바람이 편안함과 시원함을 준다. 성이 있고 성주가 있을 당시 모습을 알기 쉽도록 안내판들이 곳곳에 붙어있다. 화장실이 재미있게 생겼는데, 터키의 에페소에서 봤던 로마 시대의 화장실 모습이다. 뉴질랜드에서 본 그림과 같다. 당시 다른 성에서도 비슷한 모습들이 보인다. 성벽을 만드는데 이용한 돌은 대리석처럼 표면이 매끄럽다. 이런 돌들이 주변에 많나보다. 성을 이룰 수 있었던 물을 해결했던 우물터도 있다. 교회 터도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잔디밭에서는 고고학 발굴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흙이 묻은 유골을 만들어 놓고 발굴에서 나올 법한 도자기 등을 펼쳐 놓고 연미복 차림을 하고 모자를 쓴 중년 강사가 설명을 하고 있다. 20여명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듣고 있다. 고고학에도 관심이 있고 이렇게 수업을 하는구나. 둘러보고 다시 버스를 타려고 내려왔다. 투어버스는 기다리면 온다. 시내버스를 타도 무료라고 여기에서 만난 한국여학생들이 알려준다. 우리는 솔즈베리 시내에서 내렸다. 솔즈베리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대성당으로 눈길을 끄는 도시다. 대성당의 120M 높이의 첨탑은 도시에서 벗어난 곳에서도 뚜렷이 보이는데 이는 신에게 조금이라도 근접해 보려는 사람들의 소망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 소망이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이 마을은 750년 이상이나 평화를 유지해 왔다. New Sarum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솔지베리는 Old Sarum의 신시가지에 해당된다. 노르만인이 개척한 Old Sarum은 언덕위에 있었기 때문에 물 사정이 나빴다. 게다가 대성당 건설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이미 건물도 과밀 상태여서 대성당을 새로 세울 만한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1220년 새로운 대성당의 장소로 선택한 곳이 Old Sarum에서 3km 정도 떨어진 뉴 세럼이었다.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정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인공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조용한 차분한 구시가지와 조용히 흐르는 에이번 강이 도시의 공기를 부드럽게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스톤헨지에 미치지 않지만 가볼 만한 가치는 오히려 뒤지지 않는 곳이 솔즈베리 마을이다. 마켙 광장 주변은 보행자 도로가 있다. 오래된 집들과 가게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이 많이 걸어 다닌다. 우리는 대성당을 향해 걸어간다. 서당 부근에는 그곳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오래되고 멋있는 집들이 많다. 그 중의 하나인 왕의 집에는 박물관도 있다. 드디어 솔즈베리 성당이 보인다. 대성당은 주변은 교회의 토지로 정원 같다. 잔디와 나무 사이로 솟아있는 첨탑이 정말로 아름답다. 주변 정원에는 동상들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 마그나 카르타 88주년 기념상이 잔디밭에 만들어져 있다. 하늘에 손이 닿을 것 같은 솔즈베리 대성당은 1220년부터 1258년에 세워진 고딕풍의 건물로 첨탑은 나중에 덧붙였다고 한다. 대성당 내의 채프터 하우스에는 마그나 카르타의 네 개의 오리지날 중의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대헌장으로 번역되는 마그나 카르타는 근대 헌법의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215년 영국 귀족들이 국왕 존(John)의 잘못된 정치에 분노하여,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왕에게 강요하여 받은 법률 문서. 17세기에 이르러 국왕의 전제(專制)로부터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거로 받아들여, 권리 청원(權利請願), 권리 장전(權利章典)과 더불어 영국 입헌제의 기초가 되었다. 대성당 앞에서는 흰색 복장을 한 주민들이 민속 무용을 하고 있다. 현악기와 아코디언을 든 악사 4명의 반주에 맞추어 60cm 정도의 막대기를 든 10여명의 중년들이 춤을 춘다. 군대 스타일의 약간 딱딱해 보이는 무용이다. 흰색의 깨끗한 복장과 무릎에 찬 장식이 인상적이다. 다시 보행자 거리를 걸어 역으로 향했다. 남미에서 온 팬플릇 연주자의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운다. 에이번 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시냇물 같다. 맑은 물이 흘러 정이 간다. 거기에 주변 꽃들과 잔디 그리고 고목들과 고풍스러운 집들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예쁜 시계탑이 오후 3시 40분을 가리킨다. 기차역에 도착했다. 이제 런던으로 간다. 런던 가는 기차표는 왕복을 끊으면 더 저렴하다고 역무원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원 웨이는 두 명이 74파운드인데, 왕복 요금은 두 명이 40파운드이다. 알 수 없는 나라다. 16시 21분 런던의 워터루 역 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런던에 들어와 Clapham Junction에서 내려 숙소를 찾아간다. 역에서 전철을 타고 숙소를 어렵게 찾아갔다. 숙소는 오래된 아파트를 개조해서 만들어 놓은 낡은 방이다. 그래도 따듯한 물과 불을 사용할 수 있고 주방기구도 설치되어 있다. 슈퍼에서 계란 6개와 여러 가지를 사가지고 왔다. 짐을 메고 다녀서 인지 아내는 녹초가 되었다. 혼자 슈퍼를 다녀왔다. 계란 6개를 삶다가 새로 구입해온 전기냄비가 터져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간 것이다. 이번 여행에 새로 등장한 탁월한 선택의 아이디어 제품인데 사용 이틀 만에 버리게 되어 너무 아쉬웠다. 이제 라면은 어떻게 끓여먹고 누룽지는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혹시 수리를 할 수 있을까 해서 아내와 식사 후 밖으로 나왔다. 숙소 건너편에 있는 테스코에 갔다. 포터 종류는 없었고 수리할 곳도 보이지 않았다. 사과, 귤, 토마토만 사가지고 숙소로 왔다. 이렇게 해서 여행 둘째 날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