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자리를 인식하고 보고 느끼는 주체는 무엇인가?
진아라고 하면 상대를 벗어난 절대, 있다 없다를 초월한 절대,
의식이전, 천지미분전이란 말도 합니다.
천지미분전, 천지가 생겨나기 전이란 말입니다.
‘저 공(空), 자존자가 나의 진아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불교는 나의 진아라고 말하는데 ‘아니다.’ 그거예요.
한발 더 나아가 보니까 그 본성자리, 절대 공의 자리가 공부할 때 드러나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경계가 견성이어요.
드러나는데 그것을 인지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없으면
그것이 훤한지 캄캄한지 주객이 다 허물어져 버렸는지 어떻게 압니까?
모르지요?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어서 ‘아! 견성하면 주객이 다 무너져버리고
경계가 뒤집히고 훤~한 빛뿐이더라.’ 그것을 보니까,
그것을 느끼니까 느끼는 놈 보는 놈이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의 불교는 보는 그놈을 간과(看過)하고 있다니까요.
지금까지의 불교에서는 나의 당체인 영혼체,
그놈을 긴과하고 있다니까요. 그렇게 알아두십시오.
기독교에 설교 잘하는 사람은 며칠도 한다고 그러데요.
불교에서도 정말 책을 어마아마하게 보고 두루 다 봐서
대장경을 앞뒤로 꿰고 한 사람을 세워놓으면 법문 잘 하지요.
그러나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이죠?’ 하고 딱 들이대면 대답을 못 해요.
견성한 사람 같으면 공의 자리 마음자리를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 마음자리를 인식하고 보는 느끼는 주체를 모른단 말이어요.
그 주체를 몰라요.
그래서 명 법문을 해야 공덕이 되지,
말만 잘하면 중생을 오도(誤導)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중생을 오도할 수 있는 거예요.
자, 이 몸, 오온은 진짜 나(我)가 아니예요.
그 이유는 이제 알겠지요?
(신도 : 예~) 그럼 진짜 나는 뭐죠? 말하겠지요? (신도 :예~)
기존 불교에서는 진아를 찾는 것이 불교라고 하는데,
영산불교에서는 대답하겠지요.
그러니까 오늘 이 법문을 녹음하면 테이프를 여러 번 들어 보십시오.
여러 번 들어보면 됩니다.
출처:2014년 자재 만현 큰스님 불교대학 특별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