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송년의 밤
2018.12.21. 금요일 17시, 한국출판콘텐츠센터 대회의실
지난 해에 이어 올해 두번째로《푸른사상》 송년의 밤에 갔다. 풋내 나는 작가로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일이 송구스럽기만 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란다. 망설이다가 서명을 하면서 내가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직원이 내민 검정 에코 가방엔 《푸른사상》겨울호와 2019 책상달력, 핸드크림과 독일제 빨간 치약이 들어 있었다. 아... 이빨 잘 닦고 손 잘 씻으라는... 내년 한 해도 건강하라는 축복이었다. 말을 담을 입 안을 깨끗이 하고, 손을 잘 쓰라는 뜻 같기도 했다. 책상달력 속 빈 날들을 보니 가슴이 설렜다. 한 칸 한 칸이 다 선물 아닌가. 어김없이 다가오는 한 해도 기쁘고 아플테지. 나는 검정 에코가방을 백팩에 접어넣으며 생각했다. 기쁨도, 아픔도, 슬픔도 이젠 날것으로는 보이지 말자. 검정 에코가방으로 꼭꼭 덮어 속 깊이 쟁여두자. 발효의 시간을 거치면 내년 이맘때쯤엔 잘 익은 단내가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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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행사 시작 시간은 삼십 분이나 남았다.《푸른사상》을 열어 권두시를 읽었다.
|너를 사랑하는 힘
안효희
믿음이라는것이 어디까지 유효한가!
한쪽이 짓무른 사과를 베어 문다
냉장고 속 차고 어두운 곳, 힘에 짓눌린 양파는 썩는다 살이 맞닿은 사과는 물러진다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적절한 거리는 몇 미터인가!
달은 지고 꿈은 선명하였다
침묵하거나 침묵하지 못한 변명을 삼키며 맨발로 이상한 밤을 걸어간다 손을 내민 채 잠이 들면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온 네가 마주 잡아 줄 것인가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마지막 이별, 주황삭 불빛이 그림자를 당기는 거리에 선다 아를(Arles)의 밤처럼. 외롭고 스산한 별빛이 머리 위에 빛난다
썩고 싶지 않았던 고백과 뉘우침이, 느린 구름을 머리에 이고천천히 걸어간다 또다시 발이 푹 빠지고 두근거리는 의심으로
(안효희 시집 《너를 사랑하는 힘》)
*김준태 시인의 축사를 시작으로 행사가 막을 올렸다.
"항상 푸른 상록수의 정신으로 책을 만들어가시기를 빕니다."
*김종상 시인
"제 동시집과 시집을 내 준 푸른사상에 감사드린다.
말씀은 말을 쓴다는 것이고, 말씨는 말의 씨앗이니 좋은 말씀과 말씨로 멋진 한 해 맞으시기를..."
*우아영 소설가,
《아무도 그가 살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책이라는 것은 건강을 주는 좋은 물건이고 또 겁나는 물건이다. 겁나는 물건을 만드는 한봉숙사장도 겁나는 분이다. 세상을 뒤집어놓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게 있는 책만 책이 아니다. 프랑스혁명을 유도했던 것은 포르노물이었다. 상류계층도 우리와는 다르지 않구나, 우리도 세상을 바꿀 수 있겠구나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푸른사상은 대학 출판물을 많이 찍는 것으로 유명한 출판사다. 소설집, 시집, 어린이를 위한 책, 등 가림없이 책을 내는 《푸른사상》은 겁나는 출판사이고, 이곳에서 일하는 모두는 겁나는 사람들이다.
이제 많은 작가들은 글을 쓰기보다 에디터, 편집자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 예감으로 소설 《아무도 그가 살아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를 썼다. 오늘 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 책을 나눠드리고 싶다. "
*이은봉 시인
"《푸른사상》이란 이름을 짓던 때가 떠오른다. 이 이름을 갖기 전에《시와 시》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초창기에 함께 일했던 날들이 추억이 되어 떠오른다. 이제《푸른사상》은 한국 최고의 인문학 출판사로 성장했다."
*멀리 삼천포에서 온 김은정 시인의 시 낭송이 있었다.
5월 15일, 선생님께
김은정
지금 이 순간, 오전 8시 55분, 내 코앞을 한 송이 청보라 수국꽃 향기가 지나갑니다. 깊은 호흡을 힌며 적극적으로 들이마십니다. 이 꽃, 선생님께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이곳은 봄이라는 계절이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온대 기후, 이 순간을 마다하면 또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요. 부드러운 마요네즈 빛깔의 커튼이 시곗바늘 같은 오전 9시의 햇살을 혼신을 다해 머금고 있습니다.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를 들을 때처럼 가슴속에는 스스로 진화하는 물결을 세공하는 아지랑이와 평화가 가득합니다. 나는 이제 창을 열면서 나의 머리카락 끝에 닿는 수국꽃 향기와 나의 속눈썹 한 자락 한 자락 빗겨주고 있는 초록 침엽을 지닌 거대한 전나무의 의연함과 어깨동무합니다. 말할 수 없는 신성을 맞이하며 우주의 사투리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창밖에는 하얀 구름을 입에 물고 까마귀 한 마리 날고 있는데 선과 악 흑백 논리 뭐 그런 의미 부여 상징 진부하다 싶어 그저 그 움직임에서 공존을 보며 마음의 각질을 떼어냅니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한가지 밝혀둘 건, 위의 모든 느낌은 선생님께 꽃을 보내드리려다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 우르남무 법전에서부터 대한민국 헌법까지, 알파벳에서부터 훈민정음까지 함께한 지도자. 서툴러도 섣불러도 허약해도 망설여도 칭찬하고 기다리며 기대해주신 선생님. 선생님은 울창한 마법의 숲을 지닌 등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좋은 날 좋은 시간을 함께하며 어마어마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연마하여 곧 세상과 어여쁘게 만나겠습니다. 선생님!'
*이어《푸른사상》신인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여국현 신인 문학상 당선자/시인
"언제인가부터 나는 시가 내 삶이 될거라는 생각을 했다. 26년 전이었다. 지금 사회를 보는 맹문재 선생께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던 날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김남주 시인께서 악수를 하는데 그 느낌이 특별했다. "시가 삶이 되지 못한다면 시를 쓸 수 없을거야." 김남주 시인이 해 준 그 말을 들으며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는 시를 쓸 수 없겠구나.' 그런데 살아오는 동안 김남주 시인이 해 준 그 말이 망치가 되고 끌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잠시 시를 떠났을지언정 시를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이은래 신인 문학상 당선자/ 시인
"나이 60에 신인상 수상과 함께 시집을 내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다 내 생애에서 처음 겪는 일이다. 이 시대에 시가 사람들을 타인의 비통에 감전시킬 수 있을지, 그 비통을 감싸는 반창고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아픔들에 대해 시를 씀으로써 위안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나의 글은 세상과 체온을 나누고 타인의 상처에 살을 맞대고자 하는 노력이며, 곳곳에서 마주치는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해 몸으로 맞서지 못하는 데 대한 반성문이기도 하다. 비록 오랫동안 월급이라는 안정제에 중독 돼 있지만 시는 나를 세상과 소통의 끈을 놓지 않고 걸어오게 한 힘이었다. "
*《푸른사상》에서 책을 낸 작가들의 소감이 이어지고....
올 한 해 책을 출간한 저자들의 인사말이 이어지고...
2019년의 계획을 들어보았다.
세계문학전집과 청소년 시집, 일본문화 총서 발간과 푸른사상 학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2019년의 계획 발표와 함께 도서출판《푸른사상》한봉숙 사장님의 감사인사가 있었다.
올 한 해《푸른사상》은 100여권의 책을 펴내며 <책의 날>기념식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오직 좋은 책을 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운영하는 출판사 같았다. 오늘 행사도 그 마음을 담았으리라.
행사 시작 30분 전부터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한봉숙 사장님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행사 후, 뷔페 식당에서도 테이블을 돌며 겸손한 모습으로 일일이 챙기는 모습도 감동이었다. 그래서 그냥 힘이 났다. 이런 출판사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작가들에게 힘이 되고 독자들에게는 선물이 될 것 같아서다. 2019년에도《푸른사상》의 큰 발전을 빈다.
첫댓글 또 다른 첫 걸음 내딛는 자리에 참석하신 원로 문인분들을 찾다가 꼼꼼하게 기록해 놓으신 글을 만났다. 마침 문재형이 지도하는 문학반 분이시다. 감사한 마으로 옮겨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