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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제 23장 인자의 수난과 죽음
본장은 수난사의 절정인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축으로 판결 과정, 장사되심에 관한 기사가 묘사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 성격에 있어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두 가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를 믿고 따랐던 제자들과 백성들은 충격과 실망, 슬픔 등의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고, 예수의 처형을 고대하던 대적자들에게는 승리의 쾌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반향은 모두 예수의 죽음을 패배로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의 죽음을 패배로 보지 않고 부활의 승리로 보았다면 제자들이 그토록 슬픔에 잠기지도 않았을 것이며, 대적들은 감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1. 사형 선고 (눅23:1-25절)
예수에 대한 고소와 헤롯의 심문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급적이면 예수를 방면하려는 빌라도와 기필코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 재판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데 재판의 순서는 안나스 앞에서, 가야바 앞에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빌라도 앞에서, 헤롯 앞에서, 빌라도 앞에서 진행되었다. 이 중에 헤롯 앞에서의 재판은 본서만의 기록이다. 이 기사의 강조점은 거짓과 술수를 동원하여 예수의 사형을 확정지으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완악성을 나타내는데 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동틀 때 시작되었으며 공회의 결정 후에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왔는데 아마 오전의 어느 시간이었을 것이다. 빌라도는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했던 로마의 총독이다. 그의 군대는 가이샤라에 주둔했고 본인은 예루살렘에 머물기도 했으며 지금은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각 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대비하여 치안 유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끌고 간 사람들을 누가는 ‘무리들’이라고 언급하고 그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즉 산헤드린 공회의 대표라고 공개하고 있다. 누가 역시 ‘무리가 다 일어나’라는 말은 공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는 없다. 누가는 예수를 ‘끌고 갔다.’라고 하였으나 마태와 마가는 ‘결박하여 끌고 갔다.’라고 강하게 표현한다. 누가는 예수께서 희롱당하는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처럼 여기서도 예수의 치욕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를 피하려는 의도를 볼 수 있다.
무리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소했는데 사복음서가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누가의 표현은 차이가 있다. 첫째, 누가만이 예수를 고소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즉 민심을 현혹하여 질서를 위협하고,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을 선동하였으며, 자칭 왕이요 메시야라고 지칭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모의된 내용이다. 고소자들이 종교적 내용을 뺀 이유는 종교 문제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고소 내용은 빌라도에게 매우 민감한 현안이기 때문에 쉽게 재판이 가능하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둘째,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직접 심문하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누가는 고소자들에 의해 나열된 죄목 중 마지막 항목인 자칭 왕이라는 말에 대해 빌라도가 예수께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서 누가의 묘사가 더 합리적이고 사실임을 알 수 있는데 무리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와서 고소했다면 먼저 죄목을 밝히는 것이 당연하며 마태와 마가처럼 무리들은 함구하고 있는데 빌라도가 먼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어색하다. 결국 누가가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사람들이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점을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적들의 고소 내용 중 첫 번째 것은 예수가 민심을 현혹하여 질서를 위협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올라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지가 조금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두 번째 죄목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으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두 가지 죄목은 기각하고 세 번째 죄목을 문제 삼았다. 사실 세 가지 죄목이 모두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역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 번째 문제만 확인하면 판결은 자연스럽게 내려지는 것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예수께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다. 원문 상으로 이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그 말은 네 말이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로 번역했는데 ‘네가 생각하는 대로’ ‘네가 판단하는 대로’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왕의 개념과 그들이 생각하는 왕의 개념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피하고 질문에 맞지 않는 대답을 하신 것이다. 결국 질문자인 빌라도가 판단하기를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그 말이 옳은 것이고,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면 예수는 정치적 왕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 역시 옳기 때문에 스스로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대답을 듣고 빌라도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무죄 판결을 분명하게 기록한다. 즉 빌라도는 예수가 반역을 도모한 흉악한 범죄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반역자는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력적 힘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증거가 있어야 하지만 예수에게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의 처신이 우유부단했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즉 무죄함을 알고도 대제사장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으로 석방 의사를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마태는 독특하게 빌라도의 판결에 그의 아내가 개입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빌라도의 무죄 판결은 합법적 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기회주의적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한다. 반면에 누가는 빌라도의 판결이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고소자들이 승복하지 않고 더욱 강력하게 자기들의 의사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활동에 대해 다시 근거를 제시했는데 두 가지이다. 첫째,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활동 반경이나 영향력이 유대 전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예수의 활동 영역은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베레아, 가이샤라 빌립보, 이두매, 두로와 시돈까지이다. 이는 이방 지역을 포함한 팔레스틴 전역이었다. 둘째, 그가 민중을 선동하였다는 것이다. ‘소동하게 하나이다.’라는 말 ‘아나세이오’는 ‘흔들다.’ ‘충동하다’ ‘선동하다’라는 의미로서 2절에서는 ‘백성을 미혹하였다.’고 말하여 예수가 단순히 백성들을 속이고 거짓으로 가르쳤다고 한 반면 여기서는 더욱 강한 표현을 써서 판결에 불복하고 거세게 예수를 고소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를 갈릴리로부터 온 것을 밝힌 것은 당시 폭력 혁명을 추구하던 헤롯당 저항 운동의 근거지가 갈릴리였기 때문이며 예수의 반란이 선동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빌라도는 두 번째 고소 내용을 듣고 놀라는 어투로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빌라도의 재판을 헤롯에게 넘기는 좋은 구실이기 때문이며,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 ‘호 안드로포스 갈리라이오스’는 촌놈이라는 경멸적 표현이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가 시골에서 올라온 시시한 촌놈으로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헤롯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헤롯 안티파스를 거론했는데 이 사람은 빌라도 총독 아래에 있는 분봉왕이다. 그는 이두매 족속으로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오래 전부터 예수가 과연 누구인지 보고자 했다.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이유는 예수의 재판에서 손을 떼기 위함과 헤롯의 관할 사건을 자신이 맡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헤롯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예수를 본 헤롯의 반응은 의외로 ‘매우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고 싶어 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누가는 9:9절에서 헤롯의 마음을 언급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가리켜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온 것이라고 말하거나,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온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소문대로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왕들은 이적을 행하는 자들을 불러 자신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경우가 있었다. 헤롯은 예수를 마술사 혹은 특출한 재주꾼으로 인식하고 그를 불러 유흥을 즐기고자 한 것이다. 누가는 헤롯이 예수를 호의적으로 맞이하고 여러 말로 물었다고 한다. 이는 헤롯이 예수의 고소에 대한 재판에는 관심이 없고 그동안 궁금했던 일들에 대해 말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내용에 대해 질문했는지 알 수 없으나 헤롯의 질문에 대해 예수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예수께서는 조용하고 위엄 있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것이다.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빌라도가 예수를 무죄 판결 했을 때 무리들이 거세게 항의하며 격렬하게 고소한 것과 마찬가지로 헤롯이 예수를 호의적으로 대하자 무리들은 또 다시 강력하게 고발하였다. 누가는 빌라도 법정에서는 무리들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헤롯은 예수를 정죄하지 않고 군인들과 함께 그를 업신여겼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태도가 거만했고 자신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소한 사람들이 거세게 정죄하기를 촉구했고 특히 저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라는 점에서 헤롯이 압력을 느꼈던 것이다. 헤롯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굴욕감과 막강한 종교 세력가들의 압력 때문에 예수를 멸시하고 희롱했지만 고소자들의 요구대로 구체적 죄목을 붙여 정죄하지는 못했고 도리어 예수를 희롱하기 위하여 왕이나 고관들이 입는 빛난 옷을 입혀 희롱의 효과를 극적으로 나타낸 후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헤롯과 빌라도가 어떤 이유로 원수지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예수를 넘긴 일로 인하여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어 협조했던 것이다. 아마도 정치적 권력의 이유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었을 것이며 전에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하여 헤롯이 자기 관할을 침범한 것으로 여겨 빌라도를 미워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 예수를 자기에게 넘겨준 일로 인하여 화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누가는 예수의 무죄에 대한 확증으로서 원수지간이었던 두 사람이 의견 일치를 보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며 반대로 예수에 대한 치리를 미루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두 사람 모두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를 다시 넘겨받은 빌라도는 분명한 판결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대제사장, 관리들, 백성들을 모으고 공식 재판을 열 채비를 했다. 빌라도는 판결 뒤에 올지 모르는 잡음을 없애려고 공개 재판을 시도한 것이다. 빌라도는 고소한 사람들이 주장한 첫째 죄목인 백성을 미혹한 죄에 대해 판결한다. 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추궁했으나 자신이 무죄 판결을 내렸고 이제 백성을 현혹시킨 죄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앞서 무죄 판결을 내렸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판결한다. 동시에 헤롯도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고 도로 보낸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빌라도는 자신의 객관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예수를 선동가 내지는 모반 지도자로 선고할 증거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헤롯을 끌어들이고 있다. 빌라도의 최종 판결은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협안으로 채찍으로 때린 후 석방시키겠다는 것이다. 즉 고소한 사람들의 비위를 일단 맞추어 주고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겠다는 의도였다. 빌라도는 무려 네 차례에 걸쳐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했는데 그는 죄 없는 자를 벌함으로써 로마의 영광인 공정과 정의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재판관의 기본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빌라도는 이 고소는 종교적 문제이기 때문에 유대인들 끼리 해결하라고 했다. 17절은 ‘없음’이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사본에는 ‘절기가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다.’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다.
빌라도의 석방 제안에 고소자들의 반응은 격앙된 아우성이었다.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고 충동질하여 무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른 것으로 소개된다. 무리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는데 반해 그들의 요구는 구체적이고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배후의 충동질과 동시에 미리 준비된 것으로 여겨진다.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하면서 예수는 죽이라고 외치는 요구는 선후가 바뀐 듯하다. 왜냐하면 죄수 석방에 대한 결정권은 총독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제안 없이 무리들이 요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먼저 ‘명절 때마다 죄수 하나를 좋아주던 관례를 적용하자.’고 제안했다고 했다.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옥에 갇힌 자’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이며 살인을 일삼는 혁명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영웅시되었다. 유대인들은 사랑과 인내를 가르치는 예수보다는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바라바가 더 귀한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자신의 판결을 굽히지 않고 무리들에게 다시 석방을 제안하는데 누가는 빌라도의 석방 노력을 부각시키고 동시에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과 죄악상도 부각시킨다.
무리들은 더욱 흥분하여 또 다시 거센 반발을 하고 있는데 ‘소리 질러’라는 말 ‘에페포눈’은 크게 부르짖어 외치는 것을 의미한다. 무리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빌라도를 향하여 거세게 항의하며 폭도들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처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외쳤는데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여 외쳤다. 처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요구가 제기되었는데 이는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죽이고자 하는 음모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가는 이러한 음모가 대제사장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허용된 것이지만 계획이 실제적으로 진행된 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대적들의 손을 통해서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를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진 것이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자들은 사탄의 사주를 받고 구세주를 살해한 범인들로 증명되었다.
빌라도는 세 번째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데 누가는 ‘세 번째’라는 말로 그의 석방 취지를 더욱 강조한다. 누가의 이러한 표현은 빌라도를 호의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로마 정부와 대립적 관계를 가급적 피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이 로마 정부의 고위직에 있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는 사무적이 아닌 안타까운 감정을 담고 있으며, 예수를 석방하려는 그의 노력이 인간적인 정의감에 바탕이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즉 빌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불의한 일에 동조할 수 없다는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그래서 판결의 결론으로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한 것이다. 세 번이나 반복한 빌라도의 판결은 유대인의 거센 반발에 묵살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소리가 판결을 번복시켰다. 빌라도가 무리들의 시위와 폭동의 기미에 밀렸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보다는 유대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마침내 빌라도는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므로 예수에 대한 판결은 종결되었다. 누가는 넘겨받은 자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했던 유대인이라고 하는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이 총독의 군병이라고 한다. 이는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인 묘사와 아울러 유대인들이 예수를 처형했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마가는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넘겨주었다고 했으나 누가는 어쩔 수 없이 내어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과 법의 공정성을 묵살한 채 악인들과 부화뇌동했던 명백한 죄악을 범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무죄한 자였으나 민중의 폭동을 무릎 쓰고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2. 인자의 처형 (23:26-49절)
십자가형의 언도를 받은 예수의 처형과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과정, 예수의 죽음 직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의 마지막을 기록한 본문은 인류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재판이 끝나고 예수를 사형집행 장소로 끌고 가는데 36절에 ‘군병들’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군병들이 끌고 간 것으로 보이나 누가는 그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마가는 빌라도의 군병이라 하고 마태는 총독의 군병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누가는 빌라도에게 보였던 호의적인 입장과 로마인들이 예수의 처형에 깊이 관여했다는 인상을 가급적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인계 받아 희롱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을 기록했지만 누가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한다.
군병들이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워 형장으로 끌고 갈 때에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는데 구레네 도시는 지중해 연안에 있으며 현재 리비아의 트리폴리이다. 시몬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군병들에게 잡혔다고 세 복음서는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구레네 사람들의 회당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초기 기독교인 중에 구레네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몬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로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것이다. 마가는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밝혔다. 누가는 그에게 십자가를 지웠다고 했으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라고 함으로써 이제까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왔음을 암시한다. 당시 예수는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행군에 지장을 초래했던 것이다. 군병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워 예수를 따르게 했는데 누가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과 시몬을 비교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가 가는 고난의 행렬에 동참한 백성들과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누가만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가슴을 치고 애통하여 울면서 예수의 뒤를 따랐다. 본문을 직역하면 ‘백성과 여자들의 큰 무리가 가슴을 치며 울면서 뒤를 따랐다.’는 말이다. 누가는 특히 여자들의 애통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당시 천대 받던 여자들이 제자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과 하늘나라는 가난하고 천대 받는 자들의 것임을 암시하려는 동시에 여성의 인격적 지위를 옹호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께서 뒤따르는 무리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것을 보고 말씀을 주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 말씀은 소극적으로는 울며 십자가를 따르는 여자들을 의미하지만 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애통하고 슬퍼해야 할 일이지만 예수는 구원사적 의미에서 마땅히 갈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길이기 때문이다. 둘째, 애통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정작 마음이 아프고 가슴을 칠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모르고 선지자를 죽이며 메시야까지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이다. 그러므로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에 대한 무지였던 것이다.
‘보라 날이 이르면’ 이 표현은 종말에 관한 언급인데 ‘날’에 해당하는 ‘헤메라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날이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날’을 예루살렘 함락으로 한정해서는 안 되며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의 날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날’이 복수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한 시점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최종적 종말의 때까지 계속되는 심판의 모든 날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에‘종말의 심판 때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보라 날이 이르면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결과적으로 보면 같은 내용이나 슬퍼하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여인들을 향하여 완곡어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는 다산과 많은 자녀가 축복이라는 당시의 가치관에 충격을 주었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심판의 날에 당할 고통에 대하여 사람들이 ‘산들이 무너져 자신들 위에 덮어 달라.’고 호소하게 되는데 심판과 저주의 가공할 무서운 상황을 호세아 10:8절에 근거하여 말씀하셨다.
*호10: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리라 하리라.
두 가지 내용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을 가려주고 막아달라는 것이고, 그 다음은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차라리 산들이 무너져 자신들이 죽음으로 고통을 잊게 해달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의 비유를 하시는데 푸른 나무는 무죄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며, 마른 나무는 늙고 힘없는 것으로 거짓되고 죄악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에게도 이렇게 엄중한데 하물며 죄인인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심판의 엄격성과 위력이 어떠하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누가는 예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과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한다. 이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질문과 대답을 이끌어내는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일반 사형수인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심을 보여준다. 이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서 시편22:37절과 사53:12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며 두 사형수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죄명에 대해 강도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살인과 방화 같은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처형되신 곳은 로마군의 공식적인 처형 장소인 성 밖의 어느 무덤 근처로서 그곳에는 해골이 많이 있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해골’이라는 말을 ‘칼바리움’이라 번역하여 ‘갈보리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마태와 마가는 이곳의 이름을 히브리말로 ‘골고다’ 라고 했으나 누가는 ‘해골’이라는 뜻의 ‘크라니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방인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예수의 양쪽에 두 명의 범죄자들이 함께 못 박혔는데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좌우에 사랑하는 제자들이 아닌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받는 치욕과 아울러 예수가 마시는 잔을 마시겠다던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킨다. 이에 비해 누가는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하신 예언 즉 눅22:37절의 말씀의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 군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마태와 마가는 못 박힌 시각이 제 3시라 하여 오전 9시라 밝히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동시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명패를 언급한 반면 누가는 단순히 못 박았다고 전한다. 즉 마태와 마가는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써 붙인 명패를 강조한 반면 누가는 나중에 조롱하는 장면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 효과를 완화시킨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셨다. 이 기도는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으며 여기서 용서의 대상인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을 포함하여 주범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유대인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고전2:8절에 저들은 무지 가운데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행3;15절에 저들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들의 무지를 긍휼히 여기시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가상칠언의 첫 말씀이며 ‘용서’에 대한 기도요, 용서 그 자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하여’라는 헬라어는 ‘사면’이라는 의미보다는 ‘형의 집행유예’에 해당한다. 즉 성령이 오시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형의 집행을 유보해달라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후손들 중에는 회개하고 예수께 돌아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에는 사도 바울이 있고, 오늘 날 우리들이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서 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가지고 있었다. 사형수의 옷을 제비 뽑아 가지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었지만 실상은 시편 22:18편의 예언의 성취이다.
*시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러한 예언 하나 하나가 성취되지 아니하면 주님의 대속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누가는 십자가 형장에 있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마치 백성들은 조롱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지나가는 사람도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했다고 한다. 즉 누가는 예수에 대한 모욕과 조롱의 대상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신 지도자들의 모욕 장면을 부각시킨다.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라고 했는데 여기서 ‘구원했다.’라는 말은 예수의 치유 행위나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을 말한다. 유대인의 관리들은 예수의 치유 행위나 기적을 믿지 않았으며, 또한 그 기적을 정말 베풀었다면 그것을 예수 자신을 위해 직접 나타내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정하신 길로 가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택한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군중들은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예수가 기적을 베풀어서 십자가 사형을 면해보라고 했다. 이 조롱 행위 역시 시22:6-8절의 예언의 성취이다.
*시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도 예수에게 신 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했다. 군병들이 신 포도주를 준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예수를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억지로 먹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시69:21절의 예언의 성취로서 조롱의 목적이 강한데 먹을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먹게 하여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이다.
*시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둘째, 사형 집행자가 관례를 따라 죄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마시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마취 효과를 내는 쓸개를 포도주에 탔다는 마태의 기록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는 다른 복음서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쓸개를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맑은 정신과 온전한 육체로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으셔야만 온전한 구속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 군병들은 정치적인 면에서 예수를 희롱하였는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이라는 말 외에는 더 이상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이 함께 조롱하면서 종교적인 문제로 시비했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 보자.’ ‘하나님의 아들이 증명되는지 보자.’하면서 희롱했다는 것이다. 마태는 유대인의 문제인 종교 문제를 부각시켰고 누가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마태는 명패에 ‘이스라엘 왕’이라고 언급한 반면 누가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여 이방인에게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명패는 3개국 말로 썼는데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이다.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 결국 예수의 부활을 통해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예수의 좌우에는 두 명의 죄수가 함께 못 박혔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예수를 비방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죄수는 유대인이며 종교적 의미로 예수를 비방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했으며 범죄자까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혹자는 두 죄수가 셀롯당에 속한 독립 투쟁가였을 것이라고 하나 41절에서 한 명의 죄수가 자신들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시인한 것으로 보아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이 논쟁을 시작했으며 다른 행악자는 그 사람을 꾸짖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이 말로 미루어 보면 이 사람은 여호와 신앙에 투철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은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을 의미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경외심은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경외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 죄에 대한 보응 역시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그가 지은 죄에 대한 솔직한 자각과 인식이다. 즉 살인과 방화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총독이 내린 판결에 이의가 없음을 나타내었다. 이는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 사람은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 있게 예수의 언행에 있어서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람의 말이 회개에 합당한 것으로는 인정할 수 없고 다만 죄인에 의하여 예수의 의로움이 증명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관점이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 대적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토포스’라는 말 ‘옳지 않은 것’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십자가는 예수가 처형될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 죄수는 죽음을 앞두고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는데 제자들을 포함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를 가다렸다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는 표현은 그가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그 왕국의 주인이신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가 예수의 대속의 은혜까지 알았는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것과 도래할 메시야 왕국의 주인임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이다.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 ‘밈네스코’는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로서 자신의 허물이나 죄는 보지 말고 메시야와 그 왕국을 대망하는 신앙을 너그럽게 보아달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겸손하고 소박한 요청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함께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 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인정했지만 예수에 대한 죄수의 믿음이 빛나고 돋보이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믿음과 통찰이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죄수에게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오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진실로’라는 말은 ‘아멘’이다. 예수께서 죄수의 고백과 서원에 대해 ‘아멘’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혹자는 이 말을 ‘골고다의 아멘’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요구와 청원에 대해 ‘아멘’하신 것이다. ‘낙원’이라는 말 ‘파라데이소스’는 ‘정원’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지만 70인 역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할 때 사용한 말이다. 여기 언급된 낙원은 사51:3절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다.*사51: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어떤 학자들은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는 것과, 바울이 환상 속에서 잠시 낙원에 이끌려갔다는 것이며, 계시록 2:7절에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한 것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낙원이 천국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예수께서는 죄수에게 ‘오늘’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며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누리고 있는 영혼의 기쁨과 평안을 강조하고 그 기쁨과 평안이 죽은 후에도 단절됨이 없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킨 것이다.
예수의 운명에 대해 누가는 정확한 시간을 언급하지 않고 ‘제 육시 쯤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마태는 ‘제 육시로부터’ 마가는 ‘제 육시가 되매’라고 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언급한다. 현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오전 9시이며 그로부터 3시간이 흘러 정오가 되었다. 정오로부터 오후 세 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한다. 마태와 마가는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천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하루 중 가장 밝은 시간에 캄캄한 어둠이 3시간 동안 계속해서 임했다는 것은 단순히 구름에 해가 가려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둠은 가견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으시고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신 시간이었기 때문에 빛은 사라지고 어둠만 임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낮이 사흘, 밤이 사흘이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천지를 재창조하실 때에 빛이 3시간, 어둠이 3시간이었다. 천지 창조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여 6일 동안 창조되었으며, 예수의 재창조는 빛이 3시간, 어둠이 3시간 동안 계속되면서 6시간이 지나서 완성된 것이다. 세 시간에 걸쳐 어둠이 계속된 후 오후 3시 경에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친 휘장이다.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또는 안식일과 제사 때마다 들어갔으며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성소에는 제사장의 제사 도구와 예물이 있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지성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구별했던 것이다. ‘찢어졌다.’라는 말 ‘에스키스데’는 수동태로서 휘장이 저절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을 암시한다. 누가는 휘장의 한가운데가 찢어졌다고 했고 마태와 마가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했다. 이는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 그런 관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예수의 육체와 동일시했다. 이는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며 마지막 외침을 외치셨는데 누가의 표현은 마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첫째, 누가는 예수의 운명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뒤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죽은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했다. 둘째,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두 번 크게 소리를 지른 것으로 밝히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친 후에 운명 직전에는 크게 소리만 질렀다고 했다. 셋째, 마태와 마가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 신포도주를 예수에게 주며 희롱하는 장면을 언급하지만 누가는 이를 생략했다. 이런 차이는 누가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상징적 사건을 예수의 죽음 직전에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구속 역사를 온전히 성취하신 후 운명하셨음을 강조한 것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후 운명하셨다고 했는데 누가의 견해와 일치한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고뇌에 찬 부르짖음을 하셨다고 했지만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예수께서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시는 모습을 묘사하여 순종하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했다. 동시에 희롱당하는 예수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숨지시니라.’는 말 ‘엨세프뉴센’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만 사용했는데 ‘숨을 거두셨다.’ ‘마지막 숨을 쉬다.’라는 뜻으로 마태는 독특하게 ‘영혼이 떠났다.’라고 언급했다.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의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했다. 이는 예수의 의로움을 증언하는 말로서 앞서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고백했던 예수의 의로움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예수가 당했던 수치와 고통이 정당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예수의 언행이 모두 옳았다는 것을 극적으로 선언하는 말이다. ‘그 된 일’이란 세 시간에 걸쳐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덮이고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한다. 마태는 휘장만 찢어진 것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려 성도들이 부활하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백부장과 군인들이 함께 고백한 것으로 묘사한다.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신적 능력이 나타남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반응이다. 마태와 마가는 백부장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하는 반면에 누가는 ‘의인이었다.’라고 하는데 이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보다는 법정 용어인 ‘의인’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백부장의 증언을 소개한 후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는데 ‘구경’이라는 말 ‘데오리아’는 극장에서 쇼를 구경하는 말이다. 이 무리들의 대부분은 예수의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참혹한 형 집행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저마다 일종의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껴 가슴을 치며 돌아갔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회개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아팠던 것은 사실이었다. 오순절 날 베드로가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한 것을 보면 저들은 결국 회개의 길로 돌아선 것이다. 세 번째 무리들은 예수의 측근자와 고향 사람들이었다. ‘예수를 아는 자’라는 말은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 특히 예수의 제자들까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신분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나 누가는 더 이상 밝히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다 멀리 서서 그 일을 지켜보았는데 일종의 관망이거나 두려움으로 멀리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의 일당으로 체포될 것이 두려워 멀리서 예수를 따라간 것처럼 이들도 예수의 일당으로 오해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이 사실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삭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고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만 보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시각은 오후 세 시였으며 안식일이 시작되는 6시 전에 예수를 나무에서 내려 장사해야 했는데 이 일을 감당한 인물은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마가는 ‘안식일 전 날 저문 때’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금요일 마지막 시간에 가까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장례식이 거의 끝났을 때를 ‘안식일이 거의 된 때’라고 밝히고 있다. 누가는 요셉을 등장시키면서 유대 민중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이라 소개한다. 열두 제자들은 거의 다 도망해 버린 상황에서 예수의 살해 음모의 주역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장례지내는 것은 의외의 사건이다. 그는 이 장례 때문에 그동안 쌓아왔던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하고 온갖 수모를 겪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결연히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요셉에 대해 첫 번째 언급한 내용은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는 것이다. 이 결의는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실을 말한다. ‘행사’는 예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성사시키게 했던 공회 의원들의 모든 음모와 실행을 뜻한다. 그렇다면 요셉은 공회 의원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할 때 가담하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에 대한 사형 결정에 반대한 의원들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요셉이 부자이며 예수의 제자라고 언급하고 공회 의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산헤드린 전체가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아리마대’라는 지명은 유대 땅에 속한 곳으로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며 사무엘의 출생지 ‘라마다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요셉은 유다 지파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요셉의 신앙에 대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다. 마태는 ‘예수의 제자라.’고 했는데 요셉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였음을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는 시므온 장로와 안나처럼 메시야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굳게 확신하였으며 모든 사람이 절망과 비탄에 빠져드는 순간에도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요셉은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는데 이는 사형 집행 후 시체 처리에 관한 권한이 로마군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직 예수의 시신이 십자가 위에 있었는데 총독의 허가를 받은 후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렸다. 마가는 이 사실에 대해 요셉이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표현했는데 ‘당돌하게’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상황으로는 누구든지 예수의 추종자로 밝혀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는데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 이를 증명한다. 마가는 빌라도가 요셉의 요구에 보인 첫 반응으로 ‘벌써 죽었을까.’하는 것이었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렸는데 오후에 이미 죽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의 요구는 상식보다 빨리 있었는데 요셉은 형장 가까이 있었고 예수의 운명을 목격했으며 예수의 주검을 공중에 오래도록 방치할 수 없다는 것과, 유대인의 안식일 이전에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은 요셉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주검을 내려 받고 장례를 치르기 시작한다. 세마포로 시체를 감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시체 처리 방법인데 세마포로 싸기 전에 시체를 물로 깨끗하게 씻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시체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여 개들과 새들의 밥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죽을죄를 지어 사형당한 죄인을 나무에 매단 후 당일에 반드시 장사지내도록 되어 있었다.
*신21:22-23 사람이 만약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산헤드린 공회가 율법을 지키는 기관이라면 당연히 예수의 시신을 내려 장사지내야 마땅했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로마의 법대로 방치했던 것이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시신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었다.’고 한다. 이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고급스럽고 정결한 무덤이었다. 아마도 요셉은 이 무덤을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을 위한 무덤으로 조성해 놓았을 것이다. 요19:41절에는 예수를 장사 지낸 무덤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곳에 있는 동산에 위치하였음을 밝히는데 이는 당시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무덤인 것으로 보이며 이 무덤 역시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
*사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께서 장사되신 시간은 안식일이 준비되는 저녁 시간이었다. 안식일이 박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서 장례가 매우 촉박하게 끝났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신에 향유를 바르지 못한 것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요한에 의하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 쯤 가지고 와서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유대법에 따라 여유 있게 장례를 치른 것으로 전한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니고데모가 장례에 협력한 사실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는 것과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 것은 요셉과 사전에 예수의 장사를 의논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예수를 장사 지낸 무덤에서 예수의 시체를 확인한 증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여자들이었다. 이 여인들은 49절에 멀리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던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안식일이 지난 후에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과 동일한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마가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여인들이 요셉의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가 자세히 살펴보았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 후에 빈 무덤에 대한 증언 역시 확실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증하게 된다. 저들은 예수의 장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안식 후 첫날에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하였으며 또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의심하지 않고 사도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여인들이 무덤을 떠나 숙소로 돌아가 시체에 바르지 못한 향유와 향품을 준비했는데 누가는 이 시간이 안식일 전이었던 것처럼 암시한다. 그러나 마가는 안식일이 지난 뒤 향품을 샀다고 언급하는데 당시 상황이 매우 촉박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가의 증언이 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 밖에 있던 사람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 향품을 산다는 것은 거의 무리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니라.’고 했는데 마태와 마가 요한은 모두 안식일을 건너 뛰어 사건을 진행시키지만 누가의 견해는 당시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보여 주고 예수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이야기의 진행이 긴장되고 급박했던 반면 부활을 앞둔 하루의 공간이 침묵과 적막감에 휩싸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하루는 죽음을 넘어서고 부활을 앞둔 새로운 긴장과 침묵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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