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정상 과학(normal-science), 즉 수수께끼 풀이(puzzle-solving)의 활동>은 과학 지식의 범위와 정확성의 꾸준한 확장이라는 그 목표에서 볼 때, 크게 성공적인 고도의 집적된 활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상 과학은 과학적 연구의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에 매우 정확하게 잘 맞는다.
(나) 그런데 여기에는 과학적 활동의 표준적 산물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정상 과학은 사실이나 이론의 새로움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움이 저절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그리고 뜻밖의 현상들이 과학 연구에 의해 끊임없이 베일이 벗겨졌고, 과학자들에 의해 첨단의 새로운 이론들이 거듭 창안되어 왔다.
(다) 역사는 과학 활동이 이런 종류의 경이로움을 낳게 하는 고유의 강력한 테크닉을 개발해 왔음을 시사한다. 과학이 이런 특성에 따른다면 어떤 패러다임(paradigm)하의 연구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유발하는 데 효율적인 특수한 방법이라야 한다.
(라) 그것은 사실과 이론의 근본적인 새로움(novelty)이 하는 일이다. 그런 새로움들이 어떤 규칙 체계에서 우연히 생겨나면, 그것은 그와 관련된 다른 규칙의 세밀한 완성도를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것들이 과학의 일부로 동화된 뒤에는 적어도 그 새로움이 끼어든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하는 일은 이전과는 결코 같지가 않다.
(마) 우리는 이제 ‘사실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과정과 그 다음으로 ‘이론의 새로움을 창안하는’ 과정을 고찰하면서 이 두 개념의 변이 과정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발견과 창안 사이의 차이, 또는 사실과 이론 사이의 차이는 지극히 인위적인 것임이 곧 판명될 것이다.
1. 이 글로 보아 밑줄 친 ⓐ에 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정상 과학에서는 모순되는 이상 현상들이 누적될 수 없으며 이것이 누적될 경우 정상 과학은 위기를 맞게 된다.
② 정상 과학의 출현은 그 분야가 아직 미성숙 단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③ 정규적 연구에서 패러다임과 상치되는 결과를 얻는 경우, 이론의 성립 여부에 관한 의심보다 과학자의 능력 여부가 의문시될 수 있다.
④ 정상 과학에서는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 예를 들면 기본 이론의 성립 여부에 대한 논의는 제기되지 않는다.
2. 다음 글의 밑줄 친 ‘길’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 것은?
논두렁 길에서 시작된 나의 길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깊고도 짧았다. 어느덧 삶의 오후가 왔음을 의식한다. 약간 아쉽고 초조해진다. 갈 길은 더욱 아득해 보이는데, 근본적 문제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겠다.
① 그는 그 <길>에 통달한 사람이다.
②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
③ 인간의 삶의 <길>은 결코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④ 그는 먼 <길>을 떠났다.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제,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이 네 갈래의 백성들 중에서 가장 귀한 이가 선비이고, 바로 선비를 불러 ‘양반’이라 한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이 없음이라. 이들은 제손으로 농사도 장사도 할 것 없이 옛 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 정도이면 곧 과거를 치러 크게 되면 문과요, 작게 이루더라도 진사는 떼어 놓은 것이다. 문과의 홍패(紅牌)야말로 길이가 두 자도 못되어 보잘 것이 없지만, 온갖 물건이 예서 갖어 나게 되니 이는 곧 돈자루나 다름 없다. 그리고 진사에 오른 선비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늦지 않아서, 이 높은 음관에 될 수 있고, 게다가 남인(南人)에게 잘 보인다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해쓱해지고, 배는 헌 사령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지게 되는 법이다.” 증서가 겨우 이룩되었다. 부자는 어이 없어서 혀를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아이구, 그만두시유, 참 맹랑합니다 그려, 당신네들이 나를 도둑이 되라 하시유”하고, 머리채를 휘휘 흔들면서 달아나 버렸다.
3. 윗글의 결말로 보아 지은이의 궁극적인 의도를 볼수 있는 것은?
① 양반들의 부귀영화는 타고난 것이다.
② 신분상승을 꾀하는 부자를 비판한 것이다.
③ 양반의 무능함과 횡포를 비난한 것이다.
④ 봉건적 신분 제도를 칭송한 것이다.
4. 다음 문장 중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분법적 사고에만 의존하는 데서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에 가까운 것은?
①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② 가진 것이 없더라도 가진 듯하고,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해도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이 가져다 줄 듯하다.
③ 천하에 두 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고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④ 기예를 이용하면 많은 이로움이 있으니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우리의 사대주의는 하나의 정책이었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려 시대에 있어서는 사대 일변도라는 것은 없었다. 고려 성종 때 거란군 10만이 침입해 들어왔을 때 그들은 제한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즉 거란과 송(宋)의 대립에 있어서 고려가 송나라의 동맹국의 역할을 방지함으로써 배후의 위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희는 혼미 분란한 상황 속에서 거란군의 목적을 통찰하고 중립을약속함으로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10만 거란군을 물러가게 하였을 뿐 아니라, 종래 소속이 분명치 않던 압록강?청천강 사이의 완충 지대를 확실한 고려 영토로 인정받는 등 그야말로 ( ㉠ )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거니와, 17세기 초 광해군 때의 북방 정세도 서희 당시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즉 신흥 만주족은 조선이 맡은 명나라의 동맹국 역할 ( ㉮ )을우려하고 있었다. 광해군의 말과 같이 우리의 힘이 이들을 대적할 수 없다면 헛되이 고지식한 주장을 내세워 나라를 위험한 경지로 몰 것이 아니라 안으로 자강, 밖으로 유화의 책을 써서 고려와 같이 하는 것이 보국의 길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식견( ㉯ )과 선견지명은 홀로 뛰어난 것이었고, 고관들은 반대를 일삼았으니 왕과 그의 정부와의 불화는 마침내 다년간 정계에서 침체하였던 서인들에게 반정이라는 이름의 쿠데타의 기회를 주었으며, 인조 정권은 광해군이 명에 대한 사대의 의리에 충실치 않았던 것을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던 만큼 대명 일변도적(對明一邊倒的) 사대를 `입국지본(立國之本)'으로 삼은 것은 필연적인 귀결( ㉰ )이었으며, 그것은 ㉡외교 정책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복잡 다단한 정세에서 그러한 비현실적 융통성 없는 정책이 전쟁을 자초 유발 ( ㉱ )하리라는 것은 예견될 수 있는 필연적인 사태의 발전이었다. 두 차례의 호란과 굴욕적인 삼전도에서의 항복은 이러한 사태의 결산이었으며, 그것은 정책으로서의 사대주의가 이성과 주체성을 잃고 사대의 명분을 중시하는 자아 상실의 사대주의 중독증에 걸린 탓이었다. 사대주의의 중독적 단계를 모화(慕華)라고 부른다.
5. 다음 중 이 글의 내용에 부합하는 진술은?
① 사대주의는 우리 나라를 중국에 예속되게 만들었다.
② 사대주의는 중국을 교란시키기 위한 외교 정책이었다.
③ 사대주의는 민족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④ 사대주의는 중국 문화에 대한 선망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