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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문화재] (15)신선의 풍류런가...윤선도의 보길도
더리포트 기사 입력일 : 2022.05.09.
기자 신정일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정원을 거닐지만, 중국에서는 정원이 사람 속을 거닌다고 보았다. 그런 연유로 옛날에 어떤 사람은 “꽃을 보러 정원으로 나가지 말라. 그럴 필요는 없다. 그대 몸 안에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라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우리 선현들 중 많은 사람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정원을 만들고자 하였다. 화담 서경덕의 화담, 율곡 이이가 조성한 석담구곡 등인데, 나라 안에 조성된 대표적 정원이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가 조성한 세연정이다.
고산 윤선도가 완도의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것은 병자호란 이후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세상이 환멸을 느껴서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를 발견하고 지은 정원으로 이곳에서 윤선도는 글을 쓰면서 풍류를 즐겼다.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이며/옛날 꿈꾸던 바 그곳 전경 얻었네./세인들은 신선이 산다는 선도 알지 못하고/다만 기화와 요초만을 찾고 있네.
<고산유고> 에 실린 시 한편인데, 그가 이 곳에 있을 때 어떻게 살았는 가를 알 수 있는 글들이 여러 편이 남아 전한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세연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된 보길도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윤선도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는 1587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후사가 없었던 윤씨 종가에 입양된 윤선도는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두루 읽었고 의약, 복서卜筮, 지리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한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0세가 되던 해에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반대파의 반격을 받아 함경도 경천으로 유배 길을 떠났으며, 1년 뒤에는 귀양지를 기장으로 옮겼다. 인조반정 이후 윤선도는 송시열과 함께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부터였다. 해남에 있던 윤선도는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왕손을 비롯한 왕가 사람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에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갔는데, 그때는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뒤였다. 할 수 없이 배를 돌려 귀향하는 길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의에 찬 그에게 서인들로부터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고생하고 있을 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비난까지 빗발치듯 들려왔다. 그는 세상을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풍랑이 거칠어 보길도에 오게 된 윤선도는 이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에 매혹되어 제주행을 포기하고 기암절벽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보길도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정착한 곳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정치 싸움에서 찌들고 멍든 마음을 이곳에서 풍류로써 달랬던 듯하다.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막아 연못(세연지)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섬을 조성해 큰 바위와 소나무들을 옮겨놓았으며, 그 둘레에 정자를 세우고 세연정洗然亭이라 이름 지었다.
윤선도의 5대 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한 뒤 쓴 <보길도지>에 윤선도가 보길도의 세연정에서 지냈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였다.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또는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하였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 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하였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일지라도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초호화 생활을 하며 지은 그의 작품에는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과 같은 민중의 애환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이 남긴 <가장유사家藏遺事>를 읽어보자.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술과 안주를 충분히 싣고 고산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이르면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감상하였다. 때로는 정자 위로 악공들을 불러과 풍악을 울리게 하였다.
그는 낙서재에서 마주 보이는 앞산 기슭에 있는 동천석실을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수레엔 소동파의 시요./집에는 주문공의 글이다./어찌 육중문이 있으리오마는/뜰에는 샘이요. 대와 못이 갖춰 있네
<고산의 석실>이란 시를 남긴 윤선도는 주변의 산자락이 낙서재 터를 연꽃잎이 피어나듯 둘러서 있어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천석실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동천석실 근처의 반석에서 차를 달이면서 세월을 보낸 윤선도의 당시 풍경을 한 편 더 살펴보자.
공은 이곳을 몹시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고서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찾아와 놀았다. 이곳에 앉으면 온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격자봉과는 나란히 마주하게 되며, 낙서재 건물이 환하게 펼쳐진다. 대체로 사건이 있으면 무민당과 기(旗)를 들어 서로 호응하기도 하였다.
공은 때때로 암석을 더위잡고 산행하기도 했는데, 발걸음이 매우 경쾌하여 나이가 젊은 건각들도 따라가지 못하였다.
다도해의 한 가운데에 있는 부용동 정원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 정원의 정취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이곳에서 윤선도는 <오우가>, <어부사시사>등 빼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그 후 몇 차례 벼슬자리에 나간 적이 있으나 금세 당파 싸움에 휘말려 그때마다 해남과 보길도에 와서 숨어 지냈는데, 그 기간이 19년이나 되었다. 그를 아끼던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효종의 무덤을 쓰는 문제와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두고 서인의 송시열 등과 치열하게 싸우다 결국 함경남도 북쪽에 있는 삼수로 귀양을 갔다. 당시로는 유례가 없는 85세의 장수를 누렸던 윤선도였지만, 세 차례의 유배 기간이 20년을 넘었으니 그의 삶이 순탄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지만 지금도 그의 문학은 남아 후세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
고산 윤선도가 자리 잡은 풍수명당 ‘보길도 부용동’
충청매일 기사 승인일 : 2018.08.02.
글 : 김정인 교수(서경대 경영학과)
고산 윤선도(1587~1671)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하고 가솔들을 이끌고 제주도로 뱃길을 돌렸다. 완도의 보길도를 지나는데 풍랑을 만나 잠시 들린 곳이 보길도다. 배에서 내려 산세를 보니 고산이 꿈꾸던 이상향 풍수명당이 전개됐다. 제주도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이곳에 둥지를 틀었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이곳의 산세가 막 피어오르는 연꽃과 같다해 부용동(芙容洞)이라고 이름을 짓고 거처를 마련했다.
보길도에서 가장 우뚝하게 솟아오른 격자봉 아래 터를 마련하고 격자봉을 오르내리며 깃대에 깃발을 달아 높낮이를 재어가며 향배를 맞추었다. 그리고 거기에 움막을 짓고 낙서재(樂書齎)라 이름하고 학문을 강론하고 생활하였다. 물이 모이고 연못이 있는 곳에는 정자를 짓고 세연정(洗然亭)이라 부르며,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세연정이란 ‘물이 빙빙 도는 정자’라는 의미도 있고 “물에 씻은 듯 깨끗해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곳에서 고산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 낙서재 산 중턱 건너편에는 기암괴석 위에 한 칸의 집을 짓고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해 신선처럼 살고자 독서와 사색을 하며 개인별장으로 활용했다.
고산은 1637년 2월, 51세에 보길도에 들어와서 85세까지 살았다. 정치적 열세로 그 후에도 유배와 은거생활을 하였다. 65세에 보길도 생활을 어부사시사로 지었고, 이것을 고산의 아들 학관(1643~1724)이 사후에 정리했다. 고산 사후 78년에 고산의 5대 후손 윤위(1725~1756)가 찾아와서 고산의 흔적을 답사하며 기행문을 남겼다. 그리고 100년 후 정조대왕(1752~1800)이 사도세자의 능을 잡으면서 고산이 화산을 효종의 능침으로 추천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고산의 유고집을 만들게 되었다.
고산이 보길도 부용동에 터를 정한 동기는 ‘산봉우리가 수려하고 골짜기는 열려 있어 진기(眞氣)가 눈에 넘친다. 좌우의 계곡들은 감돌아 합류하니 여기야 말로 살만한 곳이다’라고 보길도지는 기록하고 있다. 보길도는 바닷가에 위치하는 섬이지만 고산이 잡은 부용동은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다 안쪽이다. 바닷가에서 명당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고산의 거처를 마련한 낙서재는 부용동의 주산 격자봉의 맥을 받는 곳, 북향이지만 풍수가 가장 좋은 곳을 선택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기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장소 세연정은 물이 모여드는 낮은 곳에 자리 잡았다. 사색을 하고 독서를 하는 개인공간 동천석실은 산 중턱에서 찾았다. 고산은 부용동에 25개의 집을 짓고 그의 이상을 펼쳤는데 용도에 맞게 자리를 선정하였다. 보길도 부용동의 풍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에도 주거의 공간, 일터의 공간, 문화의 공간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연구하는데 참조가 된다.
이제 그 기록들을 찾아 삼사백년 전의 부용동을 복원하고, 보길도 부용동원림(정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진행 중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보길도 부용동이 풍수적 대명당이고 기록이 남아 있음이다. 기록을 남기고 유지함은 역사적 가치를 보존한다.
[별책부록 | 섬을 걷다]
부용동 원림(園林)에서 윤선도 발자취 느껴볼까
주간동아 기사 입력일 : 2012.07.02.
글·사진 양영훈
보길도는 넓이가 33km2, 해안선 길이가 41km쯤 된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완도 제일의 관광섬으로 손꼽혔다. 풍광이 빼어난 데다 고산 윤선도(1587~1671년)의 자취가 또렷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성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도 보길도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꾸준한 것도 그래서다.
고산은 51세 때인 조선 인조 15년(1637년)에 제주로 향하다 우연히 들른 보길도에 정착했다. 그는 85세를 일기로 부용동 낙서재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보길도의 부용동 일대에 세연정, 동천석실, 곡수당, 무민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지었다. 고산이 죽은 뒤 윤선도 원림(園林)을 그의 서자와 후손들이 관리했으나 점차 황폐해졌다. 300여 년 동안이나 폐허처럼 방치했다가 1993년부터 세연정, 동천석실, 곡수당, 낙서재 등을 하나씩 복원했다. 현재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은 명승 제34호로 지정돼 있다.
보길도에서 하룻밤 묵기에는 예송리가 제격이다. 보길도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예송리는 울창한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과 자잘한 깻돌해변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상록수림이 울창한 이 해변에 앉아 파도와 깻돌이 자아내는 해조음을 듣노라면 그 옛날 고산의 풍류가 부럽지 않다. 이곳 해변은 여름철에는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고, 겨울철에는 완도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만큼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여름철 피서지로 해송숲과 모래해변을 거느린 통리해수욕장과 중리해수욕장을 권할 만하다. 교통, 민박, 편의시설 등 여러 조건을 잘 갖춰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고 야영지로도 적합하다. 중리해수욕장을 지나 보길도 동쪽 끝까지 걸어가면, 제주로 귀양 가던 우암 송시열이 잠시 쉬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새겼다는 ‘송시열 글씐바위’ 앞에 다다른다. 말년에 떠나는 귀양길의 설움이 묻어나는 시도, 그 시가 새겨진 바위 앞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퍽 인상적이다.
예송리 정반대편에 위치한 보옥리 보족산 아래에도 아름다운 갯돌밭이 있다. 갯돌이 마치 공룡 알처럼 거대해 ‘공룡알 갯돌밭’이라고 부른다. 보옥리 가는 길에는 해질녘 온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낙조를 감상하기에 좋은 망끝전망대가 있다.
1 세연정
고산이 조성한 윤선도 원림의 중심 건물이다. 고산은 여기서 ‘어부사시사’ ‘오우가’등의 작품을 남겼다. 현재 건물은 1992년 12월 복원한 것이다.
2 예송리해수욕장
예송리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40호)에 둘러싸인 깻돌해변.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안성맞춤이며, 겨울철에는 완도팔경 중 하나인 만큼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3 중리해수욕장
백사장 길이 1km, 너비 130m의 해변이다. ‘보길도해수욕장’이라고도 부른다. 바다로 200m쯤 들어가도 키가 넘지 않을 만큼 수심이 얕다.
4 통리해수욕장
백사장 길이가 700m, 평균 수심이 1.5m쯤 되는 해변이다. 백사장 뒤에는 울창한 곰솔숲과 야영장이 있다. 썰물 때는 앞바다에 자리한 목섬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다.
5 동천석실
고산이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칭송했던 곳으로 낙서재 건너편 산중턱에 있다. 커다란 바위들에 둘러싸인 손바닥만한 터에 한 칸짜리 작은 정자 두 채가 있다.
6 곡수당
고산이 기거했던 낙서재 아래의 ‘낭음계’라는 작은 시냇가에 자리한 건물이다. 무민당이 마주하며, 두 건물 옆에는 넓고 네모진 연못이 있다. 근래에 복원했다.
7 망끝전망대
보옥리와 정자리 사이 해안도로변에 있다. 보길도 서쪽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 감상 포인트다. 쾌청한 날에는 제주 추자도가 지척에 보인다.
8 송시열 글씐바위
보길도 동쪽 끝 해안절벽에 있다. 제주 유배길에 오른 송시열이 ‘여든 살의 늙은 몸이 거친 만 리 길을 가노라’로 시작하는 한시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9 공룡알해변
보길도 서남쪽 보옥리 바닷가에 위치한 몽돌해변. 크고 둥글둥글한 갯돌이 마치 공룡 알처럼 거대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여/행/정/보
맛집 : 청별선착장에 보길도의아침(해물된장찌개, 061-553-6722), 보리떡다섯개와물고기두마리(비빔밥·닭볶음탕, 061-552-9770), 바위섬횟집(전복죽, 061-555-5613), 청명회관(전복회, 061-552-8506), 쉼터가든(가오리탕, 061-553-6419), 현경참전복고기나라(전복갈비찜, 061-552-6866), 세연정횟집모텔(생선회, 061-553-6782) 등의 식당이 있다.
숙박 : 부용동정원 인근에 백록당민박(061-553-6321), 청기와민박(061-553-6303), 어부사시사민박(061-553-5019)이 있다. 중리해수욕장에서는 해그림펜션(061-553-6254), 솔밭펜션(061-552-2990) 등이 비교적 괜찮은 숙박업소다. 예송리에는 황토한옥펜션(061-553-6370), 선아네민박(061-553-6417), 별장민박(061-553-2747), 파도소리민박(061-553-6418)이 있다.
교/통/정/보
여객선 ●완도↔노화도 보길도 청별선착장으로 직접 가는 배는 없다. 완도(화흥포항)에서는 노화도의 동천항 가는 카페리호를 타야 한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소안농협(061-553-8188)의 청해진카페리1·3·5호가 일일 12회 왕복 운항한다. 동천항까지 35분 소요. 동천항과 보길도 청별선착장 사이는 배 시간에 맞춰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해남↔노화도 해남 땅끝선착장과 노화도의 산양항 사이에도 해광운수(061-533-4269)의 뉴장보고호와 해광훼리2호, 노화농협(땅끝매표소 061-535-4268)의 노화카훼리1·2호가 일일 14회 왕복 운항하며, 노화카훼리1·2호의 경우 섬주민 외 외지 관광객은 하계 피서철에만 이용 가능하다. 30분 소요. 보길도로 가는 셔틀버스는 없다.
●섬 내 교통 보길버스(061-553-7077) 2대가 보길도 해안도로 전역을 일일 5회 운행한다. 그리고 보길택시(061-553-8876) 소속의 영업용과 개인택시(061-553-6353, 6262) 등 택시 총 7대가 있다.
보길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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