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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역사, 영웅과 열사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백제(百濟)가 건국 초기 중원대륙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바로 북위(北魏)와의 전쟁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북위와 다섯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먼저 488년에 있었던 제1차 위제결전(魏濟決戰)을 살펴보기로 하자. (창피한 현실이지만 중국 25史 동이전의 내용을 제대로 연구하거나 해석하는 국내 학자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백제(百濟)의 존속기간은 678년 동안(B.C 18년 ~ AD660)이고 북위(北魏)의 존속기간은 149년(AD 386 ~ 534)이며, 남제(南齊)는 24년 동안(AD 479 ~ 502) 종묘사직을 유지했다. 참고로 남제는 국회 국사청문회 때 고 임승국 교수님의 증언대로 백제 제24대 제왕인 동성호왕(東城浩王, 재위 479∼501) 한 분의 재위기간과 같은 초미니 소국(小國)이다. 남제는 24년 동안 국왕이 일곱 번 바뀌며 호북성 “형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나라였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대로 당시 국력을 추정해 보면, 百濟 > 北魏 > 南齊 의 역학관계를 알수 있다. 운영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반영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백제 백제는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 등 중원대륙의 옥토(玉土, 논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의 대부분)를 점유하고 있으면서 태행산맥의 동쪽을 모조리 차지한 대륙의 강자로 존재하였다, (2) 북위 북위는 산서성(山西省) 북쪽 대동시 유역에서부터 낙양을 연하는 선을 오가며 호시탐탐 동쪽의 옥토인 “화북평원”을 차지하고자 태행산맥을 넘어 끊임없이 침략을 결행하는 등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제와의 10년 전쟁에 패배하여 국력을 소진 멸망하고 만다. (3) 남제 남제는 힘의 역학 관계에 의하여 잠시 북위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나 결국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제를 군국(君國)으로 모시면서 겨우 나라의 생명을 유지하는 약소국이었다. 중국 정사인 남제서(南齊書)에 백제관련 기록이 많은 이유가 이해 가능하다. 바로 상국의 힘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삭제된 남제서 백제전 15줄의 기록을 일본인들은 “백년째” 찾고 있다고 한다. 국내의 강단사학계는 있는 기록도 부정하는 현실이지만 도대체 이 삭제된 15줄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 “중국인이 두려워하는 대륙 백제의 영광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488년의 魏濟 전쟁 기록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136 제기(齊紀) 2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6(永明六)년 (488년)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東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 “동성왕 10년(488년) 위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쳤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위서(魏書) 권7하 고조기(高祖紀) 太和十二年, 簫賾將軍陳顯達等寇過, 甲寅詔豫州刺史元斤, 率衆禦之 “태화 12년(488년) 소색(남제의 世祖를 낮추어 부름)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 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太和十三年春正月, 簫賾遣衆寇邊. 淮陽太守王僧儁擊走之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부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 중국 본토에서는 예부터 여러 종족이 침입하여 얽히고 설킨 역사활동을 벌여왔다. 중군(衆軍)은 중국 사서에서 외국인 부대를 말한다. 여기 남제와 북위의 전쟁기록에 나오는 중군은 중국 내부에 진출한 백제의 식민지 군대를 일컫는다. (주석; 최진) 최진 선생님의 글을 계속 설명해 보면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사서에 나오는 전쟁은 대륙에서 있었던 전쟁임을 다음 내용을 보면 알수가 있다. 동성대왕(東城大王)은 488년 북위와의 전쟁 이후 전투 성과를 치하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인사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고하게 되는데 그 지역이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일대이다. 남제서(南齊書)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 “건위(建威)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長史)인 고달(高達)을 용양(龍驤)장군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司馬)인 양무(楊茂)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선위(宣威)장군 겸 참군(參軍)인 회매(會邁)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즉, 기존의 건위장군 겸 장사였던 광양태수 “고달”을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보내고, 기존의 건위장군 겸 사마였던 조선태수 “양무”는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보내고, 선위장군 겸 참군이었던 “광무”는 “청하태수”로 신규임명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기존에 본 홈페이지에 설명하였던 내용을 토대로 “임명지”를 지도에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방태수 = 하북성 석문지방 “석문 접 대방”이 기억날 것이다. (본문 대방설명 참고) 하북성 “석문”이 지금은 “석가장”으로 변경되어 있으나 고지명이 “석문(우적도)”으로 대방은 석문과 접하여 있었다. 바로 태행산맥에 붙어 있다. 최진 선생님은 발해만 연안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는 부분이지만, 한반도로 절대 가져올수 없는 지명이다. (2) 청하태수 (청하는 하북성에 지금도 남아 있으니 중국 군사지도를 참고바람.) 대륙 내부 깊숙한 곳에 있었다. (3) 광릉태수 광릉는 양자강 하구 강소성 “양주시”를 말한다. (4) 광양태수 북경대학 고금지명대조표에는 하북성 북경 "방산" 동북이라 하고 있다. 최진 선생님은 광양이 하북성 북경동북쪽 “상곡” 지방 즉 탁록 유역이라 주장한다. (지도표시) 이 지도를 보면 북위는 태행산맥을 넘지 못하였다. 하북성, 산동성은 해발 1미터 미만 평지 옥토이고 산서성은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태행산맥은 성을 쌓을수도 없는 해발 2500미터 이상 고산지대이다. 이 태행산맥을 중심에 두고 북위가 동쪽의 땅을 한없이 그리워 하였으나 백제 동성호왕에게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였다는 사연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중국 군사지도를 보충하여 올려본다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은 본래 백제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1) 언제 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2) 북위가 강성시 백제 땅을 침략하였지만 백제에 패배하였으며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백제는 강성했다. (3) 당나라 군사가 반도 백제를 멸하기 위해 중국 땅을 떠날 때 대륙 백제인을 멸했다는 기록이 없다. (4) 동성대왕은 산동성에 있었고 거기서 죽었다. (5) 박창범 서울대학 천문학과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왔다. (6) 만약 반도의 백제가 본토라면 본토의 20배나 되는 크기의 땅을 백제가 진출하여 수백년간을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7) 인구의 역사로 보아도 백제의 수도는 산동성 유역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8) 백제의 8대 성씨가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다. 무엇이 상식이고 합리적인가? 현대 과학물질 문명하에 인터넷 세대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실증이다 20년전에 산동성에 치우천자(蚩尤天子)의 무덤이 있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음을 오재성 선생님이 세상에 알렸을때 반응이 어떠하였는가 ? 전부 “미친사람”이라 하였다. 20년 후는 어떠한가 ?산동성에서 치우천자의 무덤이 발굴되어 복원되고 있으며 20년 동안 국내 학자들이 치우는 중국의 악신이라 치부하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치우를 악신에서 자기들의 3대 시조화 하였다. 정사의 기록을 지워버리려 해서는 안된다. 바로 우리 선조들의 일기장이다. 그 속에서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백제는 분명히 중원대륙에 있었다! 잠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대륙의 강자로 이미 거기에 존재한 것이다. 2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산동성에 백제 유물이 발굴되면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은 모조리 OO의 형을 당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도가 백제의 진출지일 가능성은 왜 고려하지 않는가 ? 아래 지도를 다시 보면서 자세히 살펴보자. 어디가 본토인가 ? (지도 1) 488년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후 동성왕이 전공에 따라 신규 또는 이동시킨 태수의 위치 (지도 2) 지도설명 488년 북위는 산서성 평성(대동시)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다. 백제의 도읍인 산동성을 치기 위해서는 (1) 상간하를 따라 탁록쪽으로 우회하여 북경으로 오는 길과 (2) 태원으로 내려와 석문(석가장, 대방유역)쪽으로 경유하여 남하하는 방법이 있고 (3) 아니면 진평2군(고평/진성)이 있는 낙양 쪽에서 황하를 따라 산동성 유역으로 내려오는 3가지 방법이 있다. 그래서 백제(百濟) 동성대왕(東城大王)은 (1) 광양태수, (2) 대방태수, (3) 청하태수를 두어 방어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 ! 동성왕이 “래주”에 도읍을 정하였다면 왜 그랬을까? 임류각(臨流閣)이라는 호화로운 궁궐까지 있었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왜 “래주”에 도읍을 하였을까 ? 고 임승국 전 명지대학 교수도 이미 산동성에 동성왕의 묘가 있다고 주장한바 있다 아래 지형도를 보며 설명해 본다 (그림 3) 산동성 지형도 좌측에는 청하태수가 방어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하북성, 산동성 즉 화북평원을 통틀어 유일한 산지가 있는 곳이 바로 산동성 유역이다. 아래쪽에는 성양태수를 두어 방어하고 있으며 동쪽은 또한 산지가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북은 발해만이 있어 방어에 유리함은 물론이다. 도읍지를 둘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은 오직 이곳 뿐이니 동성왕이 이곳에 거처하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할 것이다. “산동성 일대는 바로 백제의 주 강역이었다” 과연 이 말이 과장된 것일까 ? (지도 4) 박창범 교수의 백제일식 기록 분석 백제의 경우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온다. 고대의 경우 제왕들은 천문학자를 가까이 두고 별자리 이동 등에 관심을 두었는데 최적관측지의 위치는 바로 고대의 그 나라의 위치일 가능성이 높다. (지도 5) 사서에서 백제(百濟)의 인구가 76만호(萬戶)라고 하였는데 근세조선 초기 百濟땅으로 주장하고 있는 충청, 경기, 전라도는 총합 56,003호(戶)에 불과한데 반하여 백제지명이 있는 중화국 산동성(山東省)에서 근세조선 초기와 비슷한 시기인 1491년 인구가 77만호(萬戶)로 백제와 비슷하니 어느 곳에 백제의 수도가 있었겠는가? 중국 25사와 우리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8대 성씨도 대륙에 있다.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이 8대 대성이 한반도에는 없다는 말이다.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더욱 문제인 것은 남제서 백제전 앞부분 15줄을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고 기록하고 정사의 기록을 삭제하여 버렸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부분에 “강시단야” 라며 북위의 패전을 기록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앞줄 삭제된 15줄에는 어떠한 내용이 들었을까? 중국인의 자존심을 깡그리 깔아(?) 뭉갤 정도로 백제에 당한 치욕의 역사가 들었던 것은 아닌지 중국의 정사기록 원칙을 본다면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혼자 생각) 그러면 유독 남제서에 백제의 기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살펴보았듯이 백제를 군국(君國)으로 모셨으며 강국 백제에 의지하며 나라를 유지한 소국이었기에 군국 백제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긴것은 아닐까? 어쨌던 일본인들은 이 사라진 남제서의 15줄을 100년째 찾고 있다고 한다. 조상의 역사를 알고 싶은 것이라고 본다. 현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고 있다. 반드시 찾아지리라 본다. 발견되면 당연히 우리역사의 비밀(www.coo2.net)에 모조리 공개할 것이다. 그 날이 하루빨리 올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림 6) 남제서 삭제 부분 15줄 [북경대학 교재상 대륙백제 관련 지명] 이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현재 북경대학에서 교육하는 “고금지명대조표”상의 백제 지명과 중국 군사지도상의 대륙백제 지명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추측과 상상이 아닌 (1) 철저한 고지도 고증과 (2) 현재 중국인들의 지명인식 (3) 현재 중국군사지도 이 세가지를 비교함으로써 과거의 그시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그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는 것이다. 보다 더 정확한 지명고증이 있다면 당연히 수용함은 물론이다. 백제는 대륙에도 있었다. (고금지명대조표상 대륙백제 지명) (평성, 청하, 광릉, 광양) (지도상 표시) 자, 이제 490년에 있었던 북위와 백제 간의 두번째 전쟁을 알아보자. 488년 백제, 남제 연합군과의 접전에서 패배한 위나라는 489년 정월부터의 연합군 공격에 크게 위협을 느껴 그해 8월 고조(高祖)의 특사 형산(邢産)과 후영소(候靈紹)를 남제의 세조(世祖)에게 보내서 화호(和好)를 청하고, 남제의 세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남제의 건국시조 소도성 이래 백제와 맺어 왔던 동맹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490년 4월과 11월 북위와 남제는 서로 사신을 파견, 다시 한번 화평관계를 확인한다. (위서魏書 권7상 제기帝紀 7 ) 북위가 남제에 대하여 화호를 청한 것은 하북성 지구의 백제군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것이다. 이제 백제와 남제 간의 동맹관계가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북위의 고조(高祖)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지구의 백제 군사들을 공격해 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김상기(金庠基) 박사는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 백산학보 제3집에서 490년의 위(魏)의 침공은 백제의 대륙 내 요서(遼西)지역에 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490년(庚午年)의 전쟁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去庚午年, 獫狁(북위 지칭)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屍丹野. 由是嶊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즉,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 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 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강시단야僵屍丹野)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꺽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외교문서에 나타난 동성대왕의 候王들의 임명] 동성대왕(東城大王) 17년 (495년) 대왕은 남제에 외교문서를 보내 490년 경오년(庚午年) 백제와 북위 간 전쟁의 전말을 알리면서 (그 사이 남제 측에서 왕위가 세 번이나 교체되었으므로 과거의 사실을 외교적으로 재확인한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 전쟁의 유공자들인 사법명(沙法名)을 정로(征虜)장군 매라왕(邁羅王)으로 봉하고, 찬수류(贊首流)를 안국(安國)장군 벽중왕(辟中王)으로 봉하고, 해례곤(解禮昆)을 무위(武威)장군 불중후(弗中候)로 봉하고,목간나(木干那)를 이전에 군공(軍功)이 있고, 또한 높고 큰 배[방(舫) : 누선]를 쳐 빼앗으니 광위(廣威)장군 면중후(面中候)로 봉했음을 통보한다. 동성대왕이 왕(王)을 작위로서 하사했다는 것은 그가 황제(皇帝)라는 의미의 대왕(大王)으로서 행세했음을 의미한다. 사씨, 찬씨, 해씨, 목씨(沙氏, 贊氏, 解氏, 木氏)는 모두 백제의 8대 성씨에 속한다. 동성대왕(東城大王)은 또한 통보하기를 양(龍驤)장군 모유(慕遺)를 낙랑태수 겸 장사(長史)로 임명하고, 무(建武)장군 왕무(王茂)를 성양(城陽)태수 겸 사마(司馬)로 임명하고, 무(振武)장군 장새(張塞)를 조선태수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조선태수, 낙랑태수의 조선, 낙랑도 요서(遼西)의 조선성(朝鮮城), 낙랑성(樂浪城)을 가리킨다고 본다. 랑성은 영주서남(營州西南)쪽에 있어 진(晉)의 건흥초(建興初)에 낙랑유민(樂浪流民)들을 모은 곳으로 후위(後魏)초에 폐지되었다가 정광말(正光末)에 다시 설치하였다. (史方輿紀要 卷 18) 조선은 북평군(北平郡)에 속해 있는 한 현(縣)이다. 한(漢), 진(晉)대에 낙랑에 속해 있다가, 한때 이를 없엤다가 연화(延和)원년에 조선 람들이 살게되어 다시 설치한 것이다. (위서 권106상 지리지상 북평군) 성양군(城陽郡)은 진(晉)대에 설치된 것으로 오늘의 산동반도 성양시(城陽市)이다. (史方輿紀要 卷 36) 이제까지의 지명 고찰을 종합하면, 백제가 통치한 대방, 광릉, 청하, 낙랑, 성양, 조선(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 朝鮮) 등지는 모두 황해 연안의 중국 동부 연안지역이다. 이제 494년 제3차 위제결전(魏濟決戰)을 살펴보기로 하자. 최진 선생님의 자료를 보면 93년 북위는 수도를 대동시(평성)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494년 북위의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제를 공격한다. 론 백제를 치기위해 남제를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견해는 남제를 친후 백제를 우회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래 지도를 먼저 살펴보기 바란다. 북위는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정남장군 설진도, 대장군 유창, 서주자사 원연, 평남장군 유조의 부대를 4방면으로 나누어 (1) 양양襄陽, (2) 의양義陽, (3) 종리終離,(한자 정정 원문에는 鍾離로 되어 있음) (4)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한다. (1) 북위시절의 서주는 어디인가 ? 4명의 북위 장군 중 서주자사가 “서주를 관할하는 북위의 지역지도자”라는 의미라면 북위시절의 “서주”는 어디인가? 물론 지명이 아닐수도 있다. 이 지역은 북경대 고금지명대조표에는 하남성 상고 동북이라 하고 있다 위치를 보자. 493년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북위의 세력권이 약간 동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북동쪽으로 가면 바로 백제의 청하태수가 있는 지역이다. 이 시기에 진(晉) 때부터 백제가 점유하였던 요서지역의 고평, 진성(진평2군)을 북위에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서주가 지금은 안휘성에 있다. 혼란을 일으키면 안된다. 지금의 서주 유역은 백제 동성왕 시절 백제의 강역이었다. (2) 북위가 공격한 4개 방향은 어디인가 ? 이 자료는 현재 중국지도와 북경대 고금지명대조표 및 고대지명지도를 참고하여 종합한 것이다. 주의 할 것은 북경대학 자료와 현재 중국지도를 못믿겠다는 네티즌은 이 Thread를 읽어 볼 필요가 없다. ① 양양(襄陽) : 호북성 양양 ② 의양(義陽) : 하남성 신양시 ③ 종리(終離) : 안휘성 방부 ④ 남정(南鄭) : 섬서성 남정 지도를 보자. ① 양양(襄陽) : 호북성 양양 ② 의양(義陽) : 하남성 신양시 ④ 남정(南鄭) : 섬서성 남정 ③ 종리(鍾離) : 안휘성 방부 개전 2개월만에 북위 고조가 직접 참전하여 전쟁을 독려한 곳이다. |
(참고지도)
이 지도를 보고 네티즌 여러분은 무슨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오재성 선생님의 “지도로 보는 우리역사”가 너무나 정확함에 또 한번 놀라고 있다. 북위는 백제, 남제 연합군에 또 패배하고 말았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十有二月辛丑朔,遣行征南將軍薛眞度督四將出襄陽 大將軍劉昶出義陽,徐州刺史元衍出鐘離,平南將軍劉藻出南鄭。(위서 원문)
(이 지도와 비교를 해보시길 기대합니다)
백제(百濟)가 건국 초기 중원대륙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바로 북위(北魏)와의 전쟁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북위와 다섯차례 전쟁을 벌였는데, 먼저 488년에 있었던 제1차 위제결전(魏濟決戰)을 살펴보기로 하자. (창피한 현실이지만 중국 25史 동이전의 내용을 제대로 연구하거나 해석하는 국내 학자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백제(百濟)의 존속기간은 678년 동안(B.C 18년 ~ AD660)이고 북위(北魏)의 존속기간은 149년(AD 386 ~ 534)이며, 남제(南齊)는 24년 동안(AD 479 ~ 502) 종묘사직을 유지했다. 참고로 남제는 국회 국사청문회 때 고 임승국 교수님의 증언대로 백제 제24대 제왕인 동성호왕(東城浩王, 재위 479∼501) 한 분의 재위기간과 같은 초미니 소국(小國)이다. 남제는 24년 동안 국왕이 일곱 번 바뀌며 호북성 “형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나라였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대로 당시 국력을 추정해 보면, 百濟 > 北魏 > 南齊 의 역학관계를 알수 있다. 운영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반영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백제 백제는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 등 중원대륙의 옥토(玉土, 논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의 대부분)를 점유하고 있으면서 태행산맥의 동쪽을 모조리 차지한 대륙의 강자로 존재하였다, (2) 북위 북위는 산서성(山西省) 북쪽 대동시 유역에서부터 낙양을 연하는 선을 오가며 호시탐탐 동쪽의 옥토인 “화북평원”을 차지하고자 태행산맥을 넘어 끊임없이 침략을 결행하는 등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제와의 10년 전쟁에 패배하여 국력을 소진 멸망하고 만다. (3) 남제 남제는 힘의 역학 관계에 의하여 잠시 북위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나 결국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제를 군국(君國)으로 모시면서 겨우 나라의 생명을 유지하는 약소국이었다. 중국 정사인 남제서(南齊書)에 백제관련 기록이 많은 이유가 이해 가능하다. 바로 상국의 힘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삭제된 남제서 백제전 15줄의 기록을 일본인들은 “백년째” 찾고 있다고 한다. 국내의 강단사학계는 있는 기록도 부정하는 현실이지만 도대체 이 삭제된 15줄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 “중국인이 두려워하는 대륙 백제의 영광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488년의 魏濟 전쟁 기록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136 제기(齊紀) 2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6(永明六)년 (488년)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東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 “동성왕 10년(488년) 위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쳤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위서(魏書) 권7하 고조기(高祖紀) 太和十二年, 簫賾將軍陳顯達等寇過, 甲寅詔豫州刺史元斤, 率衆禦之 “태화 12년(488년) 소색(남제의 世祖를 낮추어 부름)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 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 太和十三年春正月, 簫賾遣衆寇邊. 淮陽太守王僧儁擊走之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부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 중국 본토에서는 예부터 여러 종족이 침입하여 얽히고 설킨 역사활동을 벌여왔다. 중군(衆軍)은 중국 사서에서 외국인 부대를 말한다. 여기 남제와 북위의 전쟁기록에 나오는 중군은 중국 내부에 진출한 백제의 식민지 군대를 일컫는다. (주석; 최진) 최진 선생님의 글을 계속 설명해 보면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사서에 나오는 전쟁은 대륙에서 있었던 전쟁임을 다음 내용을 보면 알수가 있다. 동성대왕(東城大王)은 488년 북위와의 전쟁 이후 전투 성과를 치하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인사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고하게 되는데 그 지역이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일대이다. 남제서(南齊書)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 “건위(建威)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長史)인 고달(高達)을 용양(龍驤)장군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司馬)인 양무(楊茂)를 건위장군 “광릉(廣陵)태수”로, 선위(宣威)장군 겸 참군(參軍)인 회매(會邁)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즉, 기존의 건위장군 겸 장사였던 광양태수 “고달”을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보내고, 기존의 건위장군 겸 사마였던 조선태수 “양무”는 “건위장군 광릉태수”로 보내고, 선위장군 겸 참군이었던 “광무”는 “청하태수”로 신규임명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기존에 본 홈페이지에 설명하였던 내용을 토대로 “임명지”를 지도에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방태수 = 하북성 석문지방 “석문 접 대방”이 기억날 것이다. (본문 대방설명 참고) 하북성 “석문”이 지금은 “석가장”으로 변경되어 있으나 고지명이 “석문(우적도)”으로 대방은 석문과 접하여 있었다. 바로 태행산맥에 붙어 있다. 최진 선생님은 발해만 연안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는 부분이지만, 한반도로 절대 가져올수 없는 지명이다. (2) 청하태수 (청하는 하북성에 지금도 남아 있으니 중국 군사지도를 참고바람.) 대륙 내부 깊숙한 곳에 있었다. (3) 광릉태수 광릉는 양자강 하구 강소성 “양주시”를 말한다. (4) 광양태수 북경대학 고금지명대조표에는 하북성 북경 "방산" 동북이라 하고 있다. 최진 선생님은 광양이 하북성 북경동북쪽 “상곡” 지방 즉 탁록 유역이라 주장한다. (지도표시) 이 지도를 보면 북위는 태행산맥을 넘지 못하였다. 하북성, 산동성은 해발 1미터 미만 평지 옥토이고 산서성은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태행산맥은 성을 쌓을수도 없는 해발 2500미터 이상 고산지대이다. 이 태행산맥을 중심에 두고 북위가 동쪽의 땅을 한없이 그리워 하였으나 백제 동성호왕에게 한번도 이겨보지 못하였다는 사연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중국 군사지도를 보충하여 올려본다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강소성(江蘇省)은 본래 백제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1) 언제 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2) 북위가 강성시 백제 땅을 침략하였지만 백제에 패배하였으며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백제는 강성했다. (3) 당나라 군사가 반도 백제를 멸하기 위해 중국 땅을 떠날 때 대륙 백제인을 멸했다는 기록이 없다. (4) 동성대왕은 산동성에 있었고 거기서 죽었다. (5) 박창범 서울대학 천문학과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왔다. (6) 만약 반도의 백제가 본토라면 본토의 20배나 되는 크기의 땅을 백제가 진출하여 수백년간을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7) 인구의 역사로 보아도 백제의 수도는 산동성 유역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8) 백제의 8대 성씨가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다. 무엇이 상식이고 합리적인가? 현대 과학물질 문명하에 인터넷 세대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실증이다 20년전에 산동성에 치우천자(蚩尤天子)의 무덤이 있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음을 오재성 선생님이 세상에 알렸을때 반응이 어떠하였는가 ? 전부 “미친사람”이라 하였다. 20년 후는 어떠한가 ?산동성에서 치우천자의 무덤이 발굴되어 복원되고 있으며 20년 동안 국내 학자들이 치우는 중국의 악신이라 치부하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치우를 악신에서 자기들의 3대 시조화 하였다. 정사의 기록을 지워버리려 해서는 안된다. 바로 우리 선조들의 일기장이다. 그 속에서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백제는 분명히 중원대륙에 있었다! 잠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대륙의 강자로 이미 거기에 존재한 것이다. 2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산동성에 백제 유물이 발굴되면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은 모조리 OO의 형을 당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도가 백제의 진출지일 가능성은 왜 고려하지 않는가 ? 아래 지도를 다시 보면서 자세히 살펴보자. 어디가 본토인가 ? (지도 1) 488년 북위의 침략을 물리친 후 동성왕이 전공에 따라 신규 또는 이동시킨 태수의 위치 (지도 2) 지도설명 488년 북위는 산서성 평성(대동시)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다. 백제의 도읍인 산동성을 치기 위해서는 (1) 상간하를 따라 탁록쪽으로 우회하여 북경으로 오는 길과 (2) 태원으로 내려와 석문(석가장, 대방유역)쪽으로 경유하여 남하하는 방법이 있고 (3) 아니면 진평2군(고평/진성)이 있는 낙양 쪽에서 황하를 따라 산동성 유역으로 내려오는 3가지 방법이 있다. 그래서 백제(百濟) 동성대왕(東城大王)은 (1) 광양태수, (2) 대방태수, (3) 청하태수를 두어 방어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 ! 동성왕이 “래주”에 도읍을 정하였다면 왜 그랬을까? 임류각(臨流閣)이라는 호화로운 궁궐까지 있었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왜 “래주”에 도읍을 하였을까 ? 고 임승국 전 명지대학 교수도 이미 산동성에 동성왕의 묘가 있다고 주장한바 있다 아래 지형도를 보며 설명해 본다 (그림 3) 산동성 지형도 좌측에는 청하태수가 방어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하북성, 산동성 즉 화북평원을 통틀어 유일한 산지가 있는 곳이 바로 산동성 유역이다. 아래쪽에는 성양태수를 두어 방어하고 있으며 동쪽은 또한 산지가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북은 발해만이 있어 방어에 유리함은 물론이다. 도읍지를 둘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은 오직 이곳 뿐이니 동성왕이 이곳에 거처하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할 것이다. “산동성 일대는 바로 백제의 주 강역이었다” 과연 이 말이 과장된 것일까 ? (지도 4) 박창범 교수의 백제일식 기록 분석 백제의 경우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온다. 고대의 경우 제왕들은 천문학자를 가까이 두고 별자리 이동 등에 관심을 두었는데 최적관측지의 위치는 바로 고대의 그 나라의 위치일 가능성이 높다. (지도 5) 사서에서 백제(百濟)의 인구가 76만호(萬戶)라고 하였는데 근세조선 초기 百濟땅으로 주장하고 있는 충청, 경기, 전라도는 총합 56,003호(戶)에 불과한데 반하여 백제지명이 있는 중화국 산동성(山東省)에서 근세조선 초기와 비슷한 시기인 1491년 인구가 77만호(萬戶)로 백제와 비슷하니 어느 곳에 백제의 수도가 있었겠는가? 중국 25사와 우리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의 8대 성씨도 대륙에 있다.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이 8대 대성이 한반도에는 없다는 말이다.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더욱 문제인 것은 남제서 백제전 앞부분 15줄을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고 기록하고 정사의 기록을 삭제하여 버렸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부분에 “강시단야” 라며 북위의 패전을 기록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앞줄 삭제된 15줄에는 어떠한 내용이 들었을까? 중국인의 자존심을 깡그리 깔아(?) 뭉갤 정도로 백제에 당한 치욕의 역사가 들었던 것은 아닌지 중국의 정사기록 원칙을 본다면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혼자 생각) 그러면 유독 남제서에 백제의 기록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살펴보았듯이 백제를 군국(君國)으로 모셨으며 강국 백제에 의지하며 나라를 유지한 소국이었기에 군국 백제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긴것은 아닐까? 어쨌던 일본인들은 이 사라진 남제서의 15줄을 100년째 찾고 있다고 한다. 조상의 역사를 알고 싶은 것이라고 본다. 현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고 있다. 반드시 찾아지리라 본다. 발견되면 당연히 우리역사의 비밀(www.coo2.net)에 모조리 공개할 것이다. 그 날이 하루빨리 올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림 6) 남제서 삭제 부분 15줄 [북경대학 교재상 대륙백제 관련 지명] 이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현재 북경대학에서 교육하는 “고금지명대조표”상의 백제 지명과 중국 군사지도상의 대륙백제 지명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추측과 상상이 아닌 (1) 철저한 고지도 고증과 (2) 현재 중국인들의 지명인식 (3) 현재 중국군사지도 이 세가지를 비교함으로써 과거의 그시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그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는 것이다. 보다 더 정확한 지명고증이 있다면 당연히 수용함은 물론이다. 백제는 대륙에도 있었다. (고금지명대조표상 대륙백제 지명) (평성, 청하, 광릉, 광양) (지도상 표시) 자, 이제 490년에 있었던 북위와 백제 간의 두번째 전쟁을 알아보자. 488년 백제, 남제 연합군과의 접전에서 패배한 위나라는 489년 정월부터의 연합군 공격에 크게 위협을 느껴 그해 8월 고조(高祖)의 특사 형산(邢産)과 후영소(候靈紹)를 남제의 세조(世祖)에게 보내서 화호(和好)를 청하고, 남제의 세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남제의 건국시조 소도성 이래 백제와 맺어 왔던 동맹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490년 4월과 11월 북위와 남제는 서로 사신을 파견, 다시 한번 화평관계를 확인한다. (위서魏書 권7상 제기帝紀 7 ) 북위가 남제에 대하여 화호를 청한 것은 하북성 지구의 백제군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것이다. 이제 백제와 남제 간의 동맹관계가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북위의 고조(高祖)는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지구의 백제 군사들을 공격해 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김상기(金庠基) 박사는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 백산학보 제3집에서 490년의 위(魏)의 침공은 백제의 대륙 내 요서(遼西)지역에 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490년(庚午年)의 전쟁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去庚午年, 獫狁(북위 지칭)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屍丹野. 由是嶊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즉,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 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 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강시단야僵屍丹野)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꺽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외교문서에 나타난 동성대왕의 候王들의 임명] 동성대왕(東城大王) 17년 (495년) 대왕은 남제에 외교문서를 보내 490년 경오년(庚午年) 백제와 북위 간 전쟁의 전말을 알리면서 (그 사이 남제 측에서 왕위가 세 번이나 교체되었으므로 과거의 사실을 외교적으로 재확인한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 전쟁의 유공자들인 사법명(沙法名)을 정로(征虜)장군 매라왕(邁羅王)으로 봉하고, 찬수류(贊首流)를 안국(安國)장군 벽중왕(辟中王)으로 봉하고, 해례곤(解禮昆)을 무위(武威)장군 불중후(弗中候)로 봉하고,목간나(木干那)를 이전에 군공(軍功)이 있고, 또한 높고 큰 배[방(舫) : 누선]를 쳐 빼앗으니 광위(廣威)장군 면중후(面中候)로 봉했음을 통보한다. 동성대왕이 왕(王)을 작위로서 하사했다는 것은 그가 황제(皇帝)라는 의미의 대왕(大王)으로서 행세했음을 의미한다. 사씨, 찬씨, 해씨, 목씨(沙氏, 贊氏, 解氏, 木氏)는 모두 백제의 8대 성씨에 속한다. 동성대왕(東城大王)은 또한 통보하기를 양(龍驤)장군 모유(慕遺)를 낙랑태수 겸 장사(長史)로 임명하고, 무(建武)장군 왕무(王茂)를 성양(城陽)태수 겸 사마(司馬)로 임명하고, 무(振武)장군 장새(張塞)를 조선태수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조선태수, 낙랑태수의 조선, 낙랑도 요서(遼西)의 조선성(朝鮮城), 낙랑성(樂浪城)을 가리킨다고 본다. 랑성은 영주서남(營州西南)쪽에 있어 진(晉)의 건흥초(建興初)에 낙랑유민(樂浪流民)들을 모은 곳으로 후위(後魏)초에 폐지되었다가 정광말(正光末)에 다시 설치하였다. (史方輿紀要 卷 18) 조선은 북평군(北平郡)에 속해 있는 한 현(縣)이다. 한(漢), 진(晉)대에 낙랑에 속해 있다가, 한때 이를 없엤다가 연화(延和)원년에 조선 람들이 살게되어 다시 설치한 것이다. (위서 권106상 지리지상 북평군) 성양군(城陽郡)은 진(晉)대에 설치된 것으로 오늘의 산동반도 성양시(城陽市)이다. (史方輿紀要 卷 36) 이제까지의 지명 고찰을 종합하면, 백제가 통치한 대방, 광릉, 청하, 낙랑, 성양, 조선(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 朝鮮) 등지는 모두 황해 연안의 중국 동부 연안지역이다. 이제 494년 제3차 위제결전(魏濟決戰)을 살펴보기로 하자. 최진 선생님의 자료를 보면 93년 북위는 수도를 대동시(평성)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494년 북위의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제를 공격한다. 론 백제를 치기위해 남제를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견해는 남제를 친후 백제를 우회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래 지도를 먼저 살펴보기 바란다. 북위는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정남장군 설진도, 대장군 유창, 서주자사 원연, 평남장군 유조의 부대를 4방면으로 나누어 (1) 양양襄陽, (2) 의양義陽, (3) 종리終離,(한자 정정 원문에는 鍾離로 되어 있음) (4)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한다. (1) 북위시절의 서주는 어디인가 ? 4명의 북위 장군 중 서주자사가 “서주를 관할하는 북위의 지역지도자”라는 의미라면 북위시절의 “서주”는 어디인가? 물론 지명이 아닐수도 있다. 이 지역은 북경대 고금지명대조표에는 하남성 상고 동북이라 하고 있다 위치를 보자. 493년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북위의 세력권이 약간 동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북동쪽으로 가면 바로 백제의 청하태수가 있는 지역이다. 이 시기에 진(晉) 때부터 백제가 점유하였던 요서지역의 고평, 진성(진평2군)을 북위에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서주가 지금은 안휘성에 있다. 혼란을 일으키면 안된다. 지금의 서주 유역은 백제 동성왕 시절 백제의 강역이었다. (2) 북위가 공격한 4개 방향은 어디인가 ? 이 자료는 현재 중국지도와 북경대 고금지명대조표 및 고대지명지도를 참고하여 종합한 것이다. 주의 할 것은 북경대학 자료와 현재 중국지도를 못믿겠다는 네티즌은 이 Thread를 읽어 볼 필요가 없다. ① 양양(襄陽) : 호북성 양양 ② 의양(義陽) : 하남성 신양시 ③ 종리(終離) : 안휘성 방부 ④ 남정(南鄭) : 섬서성 남정 지도를 보자. ① 양양(襄陽) : 호북성 양양 ② 의양(義陽) : 하남성 신양시 ④ 남정(南鄭) : 섬서성 남정 ③ 종리(鍾離) : 안휘성 방부 개전 2개월만에 북위 고조가 직접 참전하여 전쟁을 독려한 곳이다. (참고지도) 이 지도를 보고 네티즌 여러분은 무슨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오재성 선생님의 “지도로 보는 우리역사”가 너무나 정확함에 또 한번 놀라고 있다. 북위는 백제, 남제 연합군에 또 패배하고 말았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十有二月辛丑朔,遣行征南將軍薛眞度督四將出襄陽 大將軍劉昶出義陽,徐州刺史元衍出鐘離,平南將軍劉藻出南鄭。(위서 원문) (이 지도와 비교를 해보시길 기대합니다) |
해설; 송준희
출처; 우리 역사의 비밀(http://www.coo2.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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