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한하운)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오늘 복음에 나병 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득 문둥이 시인이라고 불리는 한하운 시인의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이 시는 나병이라는 장애를 가진 시인이
세상의 편견과 멸시를 받고 목 메인 절규를 한 시입니다.
병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보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팔매질이 시인을 더욱 힘들게 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그를 가엾이 여기시고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나병 환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병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지닐 때
사회적 약자들의 한은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나병 환자는 병이 사라진 ‘그 순간의 기억’을 평생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 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정신까지 바뀌게 했습니다.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자신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달라진 그는 ‘새로워진 운명’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 뒤 그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생 주님과의 만남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은 ‘기억하고 있어야’ 은총이 됩니다.
그때의 감격을 찾아낼수록 그만큼 그분의 힘을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적은 ‘한순간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나를 이끌어 가는 은총입니다.
끊임없이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축복의 샘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기도가 어찌 그 환자 한 사람만의 기도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라도 사랑의 말씀입니다.
첫댓글 기적은 ‘기억하고 있어야’ 은총이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