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904.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등 )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04 03:28
-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의견이 같은 사람하고만 친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는 원수지간인.
그래서 원수 사랑은 꿈도 못 꾸고,
내 편과 네 편으로 파당을 만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는 주님은 좋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과 나누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은 싫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시는 주님은 더 싫은.
그렇다면 영적인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어른은 이 반대이겠지!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전에 갑곶성지에 있을 때의 겨울이 생각납니다. 갑곶성지는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숙소의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꼼꼼하게 살펴보니 문틈으로 또 창문 틈을 통해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풍지를 붙이고 비어있는 틈들을 모두 막았습니다. 그런데도 추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을 쓰자 집이 따뜻해지고 아늑해졌습니다. 무엇일까요?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난방비 걱정에 얼지 않을 정도로만 온도를 낮춰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그토록 추웠던 것입니다. 보일러 온도 높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들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른 시일 안에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관계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랑이 없다면 근본적인 회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뿐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보일러 온도를 높이는 것과 동일해 보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실천을 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계 회복을 위해, 또 각종 문제를 풀 수 있는 직접적 방법은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질병을 앓는 이들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 위해서는 시몬의 집에 가서 장모에게 직접 가까이 가셨습니다. 또 다른 질병을 앓는 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왜 이렇게 불편하게 행동하셨을까요? 그냥 말씀만으로도 편하게 고쳐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해”라고 말한다고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말에 따른 행동이 있을 때, 그 사랑에 비로소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장모와 병자들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사랑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 안에서 당신의 따뜻한 사랑을 계속 주고 계십니다. 나의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온도를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불만을 줄이고 만족의 삶, 기쁨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불만은 생활에 독을 섞어 놓는다. 참고 견디는 것은 생활에 시적인 정취와 엄숙한 아름다움을 준다(아미엘).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신 다음, “시몬의 집”(루카 4,38)에 가시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앞 장면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때와 뒤 장면에서 소리치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와 같이, 마치 마귀에게 하듯이 열을 “꾸짖으시어” 몰아내십니다.
<둘째 부분>은 “해질 무렵에”(루카 4,40), 곧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몰려든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실 때는 “손을 얹으시고”(루카 4,40), 마귀를 쫓아내실 때는 “꾸짖으셨다”(루카 4,41)고 전하고 있습니다. 곧 병자들에게는 측은히 여기시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루카 4,41)이라고 소리 지르는 마귀들은 꾸짖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막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4,41)
우리는 여기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믿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도 마귀는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으니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은 할지라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알기에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는 것에 앞서, 믿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진정 믿을 때라야 진정 알게 됩니다. 곧 그 아는 바를 믿고, 그 믿는 바를 실천할 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날이 새자”(루카 4,42), 곧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이웃 고을들로 찾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고, 당신이 파견되어 오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임을 밝히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사명을 바로 우리의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1고린 9,16)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주님!
제가 태어난 이유,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이 주어지고 베풀어진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오늘, 제 뼈 속에 새긴 당신 뜻이 제 심장에서 솟아오르게 하시고
당신이 주신 사명이 제 삶에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뜻을 증거 하는 일, 그 일을 하도록 제가 파견된 까닭입니다. 아멘.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해야 하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습니다.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을 착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지 않기에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때야말로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때가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칭찬을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습니다”(루카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동차에는 많은 기능이 있습니다. 비가 오면 유리창을 닦아주는 와이퍼가 있고, 유리창의 먼지를 벗겨주는 워셔액 분사기가 있습니다. 냉난방을 조절하는 에어컨도 있고, 시트의 온도를 조절하는 열선도 있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있고, 속도를 조절하는 쿠르즈 컨트롤도 있습니다. 방향을 유지하는 자율 주행 장치도 있고, 차량의 상태를 알려주는 계기판도 있습니다. 차선을 변경하는 깜빡이가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대부분 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깜빡이는 운전자는 물론 주위에 있는 차를 위한 기능입니다. 옆 차선의 차가 나의 차선으로 오겠다고 신호하면 나는 속도를 줄여서 올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내가 옆 차선으로 가고 싶을 때 신호하면 뒤에 오는 차도 속도를 줄여서 배려해 줍니다. 비상등도 있습니다. 양쪽 깜빡이가 모두 켜지는 상황입니다. 앞의 차가 비상등을 켜고 있으면 속도를 줄이고, 뒤에 오는 차를 위해서 똑같이 비상등을 켭니다. 그렇게 하면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뒤에 차가 있든 없던 상관없이 방향을 바꾸려면 깜빡이를 켜는 습관을 익히면 좋습니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면 위험하기도 하고, 짜증이 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깜빡이는 중요합니다. 깜빡이가 필요한데 지켜지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저는 국회에서 그런 모습을 종종 봅니다. 증인을 불러놓고 질문하면서 증인의 답변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증인이 답변하는데 큰 소리로 윽박지르기도 하고, 야단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원이 질의 하는데, 상대 당의 의원이 끼어들기도 합니다. 차가 엉켜서 교통의 흐름이 엉망이 되는 것처럼 국회의 운영이 난장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급회의 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회의 할 때도 가끔 깜빡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목소리가 큰 분들이 있습니다.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의 중에 가끔 안타까운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예전에 해 보았는데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힘만 들고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분위기가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진행자는 방향을 정해 주면 좋습니다. 먼저 충분히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면 좋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방향을 정해주고 있습니다. 코린토인들 사이에 차가 엉켜서 오도 갈 수 없는 것처럼 분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방향 설정은 없습니다. 이런 방향을 망각하면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곤 합니다. 성직자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등대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파수꾼은 악의 세력이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말씀의 등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천상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수도자의 침묵과 기도에서 믿음의 향기, 희망의 향기, 사랑의 향기가 나와야 합니다. 교우들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교우들은 말과 행동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키우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늘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사람들 곁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악한 영을 쫓아 주셨습니다. 육신의 병도 마음의 병도 모두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는 마을, 혹은 아파트 단지에 이런 분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을 만나면 무조건 병이 났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치유됩니다. 그분은 그런 우리에게 큰 재물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보아온 권위를 휘두르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습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이런 분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떠나시려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라면 무조건 잡습니다. 세상에 이런 분은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 가서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분을 만나겠습니까? 무조건 잡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분이 우리와 함께 산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겠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잡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가야 합니다. 나는 이 일을 하려고 하늘에서 파견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주님을 그들 안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 계신 곳에 그들이 가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계신 곳에 주님은 계십니다. 그러나 그 전에 주님 계신 곳에 우리가 가야 합니다. 주님 계신 곳은 선함이고 기도이고 나눔입니다.
-----
블루베리 요거트
블루베리가 냉동실에 있습니다.
꽁꽁 얼어서
얼음조각처럼 단단합니다.
요거트를 한 공기 뜨고
요거트 안으로 블루베리를 수북이 다이빙시킵니다.
견과류도 조금 올려봅니다.
꽁꽁 얼어있던 블루베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색을 요거트에 나눠줍니다.
차디찬 몸과 마음을 녹이며 요거트와 그 아름다운 색을 나눕니다.
가끔 이렇게 저는 아침을 먹습니다.
꽁꽁 얼어있는 우리 마음도 녹아내리며
주변을 아름답게 바꾸기를 바랍니다.
요거트라는 똑같은 하루에 내 마음 던져보세요.
주변이 점점 예쁘게 변할 거예요.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삶
“하느님 나라의 비전, 치유, 분별의 지혜”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 보신다.”(시편33,12-13)
세월 흘러 세속화 되어 갈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새벽 유투브 동영상 뉴스를 얼핏 보니 3대 사찰 중 하나인 가야산의 해인사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들었다 하며 대부분 사찰이 그렇다 합니다. 종교가 본연의 사명을 잃고 속화되어갈 때의 자업자득이겠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적 현상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하느님 중심의 삶”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팔십억 명의 손가락질은 피할 수 있어도, 내면에 있는 부끄러움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다산>
그 누구도 가장 가까이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어디로 가도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열 눈이 보고 열 손이 가리키니 무섭구나.”<대학>
열 눈이, 열 손이 상징하는바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입니다. 새벽 수도원 숙소의 문을 열면 전개되는 풍경은 늘 새로워 흡사 하느님을 뵙는 듯 저절로 나오는, 며칠전 인용했던 고백시입니다.
“문열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
물론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이 가리키는 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모시고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삶의 중심에, 치유의 중심에 하느님이,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 자체가 힐링이자 치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힐링의 집이라 부릅니다. 주님을 만나는 미사보다 더 좋은 힐링의 치유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치유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을 보여줍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중요한 사실은 치유된 시몬의 장모는 즉시 주님의 일행을 섬기는 시중드는 일에 몰입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이웃을 섬기라 있는 치유의 건강임을 배웁니다. 이어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니 예수님은 명실공히 치유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 주시니 마귀들도 소리 치며 도망갑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왕성한 치유 활동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예수님 삶 중심에 늘 자리하고 있던 ‘외딴곳’입니다. 제 외딴곳은 성전에 붙어있는 집무실입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예수님의 외딴곳은 아버지와의 만남인 기도터이자 쉼터요, 삶의 중심이자 전체를 멀리 깊이 내다보는 초월적 거점입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은 삶의 중심과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자신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에 집착하는 군중들을 홀연히 떠나 전도 여행에 복음 선포의 순례길에 오른 주님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모두의 근원적 갈망이, 목마름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만이 참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되어 살 수 있고,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코린토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질책이 참 적절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분별의 지혜는 바로 주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됨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편인가 아폴로 편인가 편가르기 하는 육적이며 속된 신자들을 향한 현자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아폴로와 나 바오로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이처럼 상호보완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질서의 교회공동체요, 주님 중심의 삶에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참 좋은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치유와 분별의 지혜 은총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길을 걷습니다
사람으로 시작하여
사람으로 끝나는
길을 걷습니다
사람으로 끝나고
사람으로 시작하는
길을 걷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멀어져
잇기 위해 생긴 길인지
길이 있어 오히려
사람 사이가 벌어진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길을 걷습니다
길을 걸으니
사람을 만나는 것인지
사람을 만나러
길을 걷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길을 걷습니다
걸음을 내딛게 하는
사람을 떠나서
길을 걷습니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길을 걷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두 오롯이 하나였다면
있지도 않았을 테니
없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
길을 걷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갈림이 사라져
길마저 없어지기를
애타게 바라며
길을 걷습니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이어진 길을 지우려
길을 걷습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루카 4,42)
외딴곳으로 가시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외딴곳은 창조주께서 자주 머무르시는 곳입니다. 말씀께서 전에 구름에 감싸여 나타나셨던 곳에 몸을 입고 나타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광야와 외딴곳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이사 35,1 참조)고 이사야가 예언했거니와, 율법을 위하여 예언되었던 그곳은 복음을 위해서도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창조계를 보고 미철 듯이 기뼈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기쁨과 황홀을 충분히 찾아낸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느님 자신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 안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의 깊숙한 내면에는 하느님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준다.
하느님은 평등을 기뼈하십니다. 하느님은 평등 속에서 자신을 통해 자신의 본성과 자신의 존재를 퍼부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기쁨입니다. 한 마리 말에게 평평하고 고른 풀밭 위를 달리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말은 풀밭 주위를 뛰면서 자기의 모든 힘을 아낌없이 발산하려 할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힘을 아낌없이 발산하는 것이 말의 본성일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의 기쁨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평등을 발견하시고는 기뻐하시고 만족하십니다. 하느님이 자신과 똑같은 형상 속에다 신적인 본성과 존재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상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234)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7절: 대 탁발수도회
프란치스코와 그의 수도회:
그의 이념은 전대미문의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는 속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 스페인을 널리 돌아다녔다(1214/1215). 그는 카타리파와 무어인들을 개종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무력과 권력으로가 아니라 완전히 작은 형제(fratres minores)로서 - 그는 자기자신과 동료들이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였다 - 사랑과 겸손과 기쁨으로였다. 그는 모로쿄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1215년에 아씨시로 돌아왔다.
그의 수도회의 약진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출현은 도처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깊은 민중운동을 일으켰다. 젊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는 교황과 주교들의 신뢰와 함께 단순한 주민들의 신뢰도 얻었다. 그에게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1219년 이집트로 향하는 십자군을 따라갔을 때, 그는 다미에타에서 전투하고 있는 사람들을 뚫고 술탄에게 가서, 그에게 구세주의 사랑을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그는 십자군의 사명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무기로 정복하는 대신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는 1221년 자신의 수도회에 완전히 그의 정신과 복음에서 나온 회칙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 회칙은 이미 유럽의 절반 이상에 퍼져 있는 형제회의 거대한 조직적인 사명에 합당해 보이지 않았으므로,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된 우꼴리노 추기경과의 공동작업에서 수정되어 1223년에 인가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완전히 그의 이상대로 생활하기 위하여 지도직에서 물러났다.(232)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39)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달리 저는 병원과 한의원을 자주 찾고 있습니다. 순환기 내과야 예전부터 자주 찾던 과이지만 이젠 정형외과와 통증학과, 이비인후과, 치과, 안과 심지어 소화기 내과까지 치료와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마치 제가 종합병원이 된 듯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시몬의 장모가 앓았던 열병이란 어떤 병이었을까 의문이 들어 의학 사전을 찾아보니, 열병이란 몸에서 열이 높이 오르면서 앓는 질병으로 심하면 두통과 식욕부진이 동반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헬렌 켈레’는 두 살 때 열병을 앓아 눈과 귀가 먹고 말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 살다 보면 신체적인 원인에서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이유에서든 열병으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는 자기 집에 손님이 왔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열병 때문에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왜 그녀가 열병을 앓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또한 베드로의 동료들이 베드로의 장모의 아픈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장모의 치유를 예수님께 부탁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식사를 해줄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의 치료를 부탁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열병을 앓고 있던 그 여인은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어떤 존재도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베드로의 장모는 사랑받고 사랑해야 할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아무튼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다하지 못하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하는 사람을 도울 수 없을 만큼 앓아누워 있는 그녀에게 주님께서는 “가까이 가시어”(4,39) 그녀의 아픔을 함께하시며 그 열병에서 벗어나도록 일으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일은 단지 베드로의 장모에게만이 아니라 지금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열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 예수님 자비심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의 시선을 사로잡은 단어는 바로, 열병을 앓고 있던 베드로의 장모가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들었다, 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 는 의미는 예수님의 손이 부인에게 봉사했던 것처럼 부인의 손도 봉사하는 손이 되었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답니다. 시중들다, 는 말은 희랍어로 자주 듣는 표현인 Diaconia, 라틴어로는 Servire이며, 영어로는 Service라는 단어입니다. 이 동사의 본래의 의미는 ‘노예가 되다. 종노릇하다. 종살이하다.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흔히 손님은 왕이다, 는 표현에는 가장 근본적인 섬김의 자세로 모시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진정한 봉사자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고객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경우는 이런 참된 봉사자의 진정한 자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봉사한다는 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봉사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봉사하려고 하지 않고 봉사를 받으려고만 하는 데에서 미움이 생기고, 상처받고, 불목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치유해 주시고, 낫게 된 그 부인이 시중을 들었다는 사실은 그 치료 보다 그 치료의 과정과 결과에서 드러난 섬김과 봉사가 갖는 삶의 중요성을 주님께서 일깨워 주셨음을 깨닫게 될 때, 새로운 시선으로 이 복음이 우리의 삶으로 다가오리라 봅니다. 참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인생에서 이처럼 참된 섬김 받고, 섬기는 몸짓에서 잃어버렸던 인간 본연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모습을 되찾아주신 것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의 핵심은 섬김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마르10, 45) 인간이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봉사하는 인간, 섬기는 사람이듯이, 교회의 가장 거룩하고 은혜로운 모습은 봉사하는 교회, 섬기는 교회입니다. 섬김은 겸손과 같은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본질적인 실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섬김을 받으려는 삶에서 섬기는 삶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은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는 바로 우리 자신의 옛 모습이고, 열병에서 낫고 일어나서 타인에게 섬기고 봉사하는 부인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깊은 섬김이며, 섬김을 받은 우리가 섬김을 통해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39)는 복음의 말씀처럼 저희 또한 즉각 우리 각자가 놓인 삶의 자리에서 섬기는 삶을 살게 하여주시고, 섬기는 참 봉사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내세움보다 조용한 봉사로 기쁨을 /
박윤식 [big-llight] 2024-09-03 ㅣNo.175652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다. 멀쩡한 사위가 가정을 떠나 그분만 따라다니니 장모 입장에서는 열병에 걸릴 만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병을 고치시고 당신을 시중들게 하셨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고쳐 주셨다. 당신은 모든 병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거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시려고 세상에 파견되셨다.
이렇게 아픈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이. 우리는 죄인이기에 주님 은총에 기댄다. 자신이 강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닌 오히려 약하기에 신앙생활을 하는 거다. 교회는 안다는 이, 똑똑하다는 이, 잘난 이들만의 것이 아니라, 못나고 부족하고 죄스러움을 고백하는 이가 모인 곳이다. 육체의 병만이 아닌 몸이 멀쩡해도 마음과 정신이 함께 황폐한 이가 쾌나 된다. 그들에게는 주님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분이 함께해 주셔야만 새로운 삶이 전개될 터이니.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나름 신비이다. 대부분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질병은 죄에서 비롯되었다나. 몸 어느 한 구석도 병에서 완전히 자유스러운 이는 결코 없다. 차이가 약간 있을 뿐 누구나 병을 안고 간다. 그러기에 어쩜 질병도 우리의 한 부분일 게다. 피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질병이 신비이면서도, 필수조건 가운데 ‘충족된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리라.
예수님은 건강만이 아닌 상처받은 마음까지도 회복시키셨다. 병으로 생긴 부정적인 시각을 바로잡으시기에. 사실 치유 받은 많은 이 중에 포기나 좌절을 체험한 이들도 쾌나 있었을 게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마음의 병이 생기는 이유를 속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했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이의 질병을 고쳐 주신다는 것은 그를 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가. 사실 어떤 종류의 ‘마음의 병’도 그분께서 개입하시면 못 고칠 게 정녕 없다.
이렇게 우리는 어려운 일당하게 되면 주님께 절박하게 매달린다. 하지만 막상 해결되면 그만 소홀해지곤 한다. 그렇지만 받은 게 있다면 주어야만 한다. 하느님 위해 또 다른 봉사를 해야만 할 게다. 그러기에 그 옛날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치유시키시고는 또다시 길을 떠나셨다. 머무르신다면 온갖 대우를 다 받으셨겠지만, 그런데도 새로이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나셨다.
우리도 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한 가지 일을 끝내고 이제 좀 쉬려 하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주님께서는 또 다른 일을 맡기지 않으셨을까? 피하고 싶지만 새로운 일을 늘 고맙게 여기면서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국 그게 스스로를 영적으로 더욱 튼튼해지는 길이기에. 사실 예수님께서도 어느 한 곳에만 머물지는 않으셨다. 특정한 이들에게 매이지도 않았다. 그들만의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으셨고, ‘그들만의 지도자’로 남으려고도 결코 하지도 않으셨다.
이렇게 홀연 떠나서 다른 이들에게 가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은 어쩜 매정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이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이의 보통의 자세일 게다. 곧 기쁜 소식의 전달이란 게, 나를 중심으로만 세워서는 아무에게도 보탬이 안 되리라.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려면 한 곳에만 남으려 해도 안 되고, 또 어디를 가든지 늘 끼리끼리만 다녀서도 안 된단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여러 신심 단체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모두에게 다 해당되리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 내세움이 아닌, 조용한 봉사로 기쁨과 보람을 찾자.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여러 문제를 알고 있었고 또 코린토 교회 신자들이 바오로 사도에게 물은 내용들도 있기 때문에, 코린토 1서와 2서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나오는 문제가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서간 뒷부분에서 성령의 은사나 전례에 대하여 말할 때도 공동체의 일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는, 코린토 신자들이 어떤 문제로 갈라졌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이들은 바오로를 추종하거나 아폴로를 추종하고 있으니, 그들 나름대로는 교회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저마다 분명한 소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와 아폴로는 하느님의 밭인 교회의 신자들을 돌보며 심고 물을 주는 일을 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무리도 어쩌면 교회라는 밭을 열심히 가꾸려고 하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일이 그들을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그들에게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쾌락에 몰두하여야 육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하느님이 아닌 인간에게 눈길이 머물러 있을 때, 인간의 업적만 생각하고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1코린 3,6)이심을 알아보지 못할 때, 쉽게 육적인 사람이 됩니다.
내 이름을 지우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임을 알아볼 때, 다른 모든 사람 안에서도 이를 알아볼 수 있을 때, “시기와 싸움”(3,3)이 사라지고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08:25)
==========================================================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시몬의 장모를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예수님께 다가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에서는
치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날이 새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밖으로 나가십니다.
병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또한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곁에 머물러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도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보다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곁에 머무시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또 다른 곳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또 다른 곳이란
당신을 거부하는 곳,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곳에 가는 것보다
열매를 더 잘 맺을 수 있는 곳에 머무시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들에게도 기쁨이 전해집니다.
그들도 기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 그 자격을
하느님께서 아예 빼앗지는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지 않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비록 당신이 죽고 난 다음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렇게 기쁨의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십니다.
그렇게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도 전해집니다.
기쁨이 우리에게도 다가옵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그것을 지금 당장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그 기쁨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각자도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소중하게 대하시는 사람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병고를 통해서도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병고가 찾아와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분들, 얼마나 고통이 크십니까?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때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크게 한번 아파봐서 아프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우선 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내가 약해졌다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열외가 잦아집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자주 위급상황에 빠지다 보니 자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병고를 하루하루 상해가는 내 몰골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합니다.
투병하느라 내가 계획했던 그 모든 것이 올스톱 됩니다.
가장 괴로운 일은 아무래도 세상과 인간으로부터의 점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런 환우들에게 있어 가장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치유일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들, 불치병 환자들에게 치유란 단어처럼 반가운 단어가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신경 쓰셨던 부분이 바로 치유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시급한 필요성에 우선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수제자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몬의 장모!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시몬의 장모 입장에서 예수님은 미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위 시몬을 빼앗아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딸을 생과부가 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위 시몬과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장모 입장에서 열불나게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특별한 작업을 하십니다.
열을 꾸짖으십니다.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즉시 열이 가셨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펄펄 끓는 열까지 호통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조금 전까지 꼴 보기조차 싫은 예수님이었는데 즉시 태도가 바뀝니다.
정성껏 예수님의 시중을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모의 열병뿐만 아니라 억울했던 마음까지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 열병 치유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정성껏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오랜 병고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환부를 가감 없이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오랜 병고를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아가면 좋겠습니다.
끔찍한 병고 한가운데에서 매일 부르짖고 견뎌내면서, 개인적으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병고를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고, 단단한 각오를 하고, 죽기 살기로 병고와 맞서 싸워 이겨내면서,
그 병고를 통해 하느님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더 이상 어찌할 바 없는 상황 앞에서는, 그런 힘겨운 상황 앞에서도 그런 끔찍한 현실조차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주님 자비와 섭리의 손길에 하루하루를 맡기는 것, 그것 역시 하느님을 증거하는 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복음에서 병의 치유는 하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이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성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다. 이러한 열병들을 주님을 가까이하면서 치유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청하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병이 완치되었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부인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부인의 행동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봉사하며,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미사 끝나고 갈 때의 기분은 어때야 할까?
며칠 전에 노숙자를 위한 성남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김하종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저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봉사할 기회가 없었기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봉사를 몇 번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준다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다 고마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제로서 봉사하면서 영광을 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이 봉사하는 분들이 오래되었다고 자기 자리에서 텃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숙달되지 못한 저는 약간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봉사가 금방 지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하종 신부는 어떻게 40년 가까이 그런 봉사를 이어가며 “나는 봉사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노숙자들이 싸워서 말리다가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노숙자에게 손을 물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여덟 번 그들의 신고로 경찰서에 가기도 하였습니다.
마음이 더 아프다고 합니다.
‘내가 몇 년 동안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저와 김하종 신부님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저는 봉사하는 목적을 제가 정한 것이었지만,
김하종 신부님은 사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로 그 사명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악령을 쫓아내시다가 새벽에는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파견’입니다.
기도는 파견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파견받으면 봉사와 사랑에 지치지 않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아무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하였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미사 끝나고 성당 밖으로 나갈 때의 기분은 이래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자 일어나, 가자!”라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아야 합니다.
미사 후에 ‘오늘은 무엇을 하도록 주님께서 파견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미사는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의 상징입니다.
모든 기도는 그렇게 끝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휴식이 됩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몸의 건강’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38-44).”
1) 여기서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만물’이라는 말에는 당연히 ‘병’도 포함됩니다.>
이 말은, 어떤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7-8).”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에도,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도,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실 때에도 ‘말씀만으로’ 하셨습니다.
그 일들은 모두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 41절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마귀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주님으로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 마귀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특히 마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뿐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아예 말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마귀들의 말은,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서 그것을 고백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마귀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고 그 말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이지, 하느님은 아니다.” 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이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예수님을 붙든 것은, 그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해 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붙든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라는 말씀의 ‘다른 고을에도’ 라는 말은, “이곳에서 한 것처럼 다른 고을에서도 해야 한다.” 라는 뜻이고, ‘이곳에서’(카파르나움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곧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복음 선포를 하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에게 ‘몸의 건강’만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온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몸의 건강’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일 뿐이고, 그것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치유’는 ‘영혼 구원’을 더 잘 받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병고에서 해방된 뒤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된 사람도 많지만, 병을 고친 뒤에
그냥 떠나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몸의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 그것으로 만족하고서 예수님을 떠나버린다면, 그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7-19)”
4) 44절의 ‘유다의 여러 회당’은, 북부 갈릴래아 지역과 구분되는 남부 유다 지역의 회당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의 회당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대부분의 전자 제품에는 ‘리셋’ 버튼이 있습니다.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 작동을 멈추거나, 오작동을 일으키거나 하는 문제가 생기면 그 버튼을 길게 꾹 눌러주지요. 그러면 그 전자 제품 내부가 그것을 처음 샀을 때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렇게 제품을 쓰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나 문제들을 해결하고 다시 온전한 상태로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리셋 버튼의 기능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우리 인생에도 그런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눈 앞에 닥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복잡하게 엉켜버린 오해와 갈등의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그것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긴 한지 몰라 막막하기만 할 때, 모든 상황을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으로 강제로 되돌리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땐 같은 실수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모든 걸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지요.
그러나 우리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운좋게 상황을 ‘리셋’할 수 있다고 한 들 또 다시 같은 문제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그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다른 것이 예기치 않게 골치를 썩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건 물리적 리셋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리셋입니다. 내 마음 상태를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셨을 때의 그 평화롭고 완전한 상태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을 보다 원만하고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혼의 리셋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요? ‘기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른 아침 외딴 곳을 찾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하루 종일 치유하시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리셋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감사를 듣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진 마음을, 열심히 노력하여 본 궤도에 오른 ‘내 일’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싶은 욕심을,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쉽고 편한 삶을 살고 싶은 안일함을 리셋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으로, 그분께서 당신을 파견하실 때 먹었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드는 군중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떠나야 할 ‘때’에 떠나실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뜻과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는 당신 사명에 끝까지 충실하게 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여 받아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나의 뜻과 바람, 욕심과 집착들까지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고 내 안에 그분 뜻을 온전히 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인 나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에, 내 욕심과 뜻만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내가 만든 게 아니기에 그 오작동은 스스로 고칠 수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바로잡아 주실 수 있지요. 그러니 매일 꾸준히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대화함으로써 그분께서 나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당신 은총으로 리셋하시도록, 나도 모르는 사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내 삶의 방향을 바로잡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여정을 끝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어 섬기고 투신하는 삶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의 두 번째 이적을 전해줍니다. 이 이적을 통해 사랑의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십니다. 사랑이신 분이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을 통해서 오고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실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품을 때 사랑이 드러나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자 사람들이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위해 그분께 고쳐주시라고 청합니다(4,38). 사랑은 그렇게 사랑이신 분을 ‘부르고’ 그분께 의탁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고 치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한없는 주님 사랑의 징검다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겸손하게 사랑의 도구로 삼아주심에 감사드리며, 더 열성적으로 자유와 해방, 기쁨과 정의를 퍼나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병자, 고통 받는 이들, 불의와 부당한 권력 앞에 짓눌려 억울한 이들, 소외되고 배척당하는 이들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복음적 소명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을 때, 사랑의 샘물이 고갈될 때 우리는 사랑의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마귀의 영을 남자에게서 쫓아내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고 고쳐주십니다.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누구든 다 치유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일치를 지향하고 어떤 차별도 없이 모두를 품습니다. 모두를 품는 그 사랑만이 치유와 해방과 변화를 가져옵니다.
심심한 열병을 앓던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시자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4,39) 병의 치유는 하느님 선의 표지요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랑의 선물에 대한 그녀의 응답은 사랑의 섬김이었습니다. 우리도 병자처럼 섬김 받음을 통해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우고, 치유 받은 그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4,40).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각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모든 이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우리 모두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의 사람이 되고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어, 다른 이들과 이 사회를 사랑과 정의의 땅으로 바꿔나가야겠습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해방을 가져오는 도구가 되도록 힘쓰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40904.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역하는 삶
<2024.9.4>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2:15~25절)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역하는 삶❞
❚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 어떤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까?
➲ 정확한 판단으로 사역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5~18절).
여리고에서부터 따라온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능력을 보고 엎드려 경배합니다(15절). 이는 엘리야의 지위를 엘리사가 상속했음을 선지자 무리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승천을 구체적으로 목격하지 못한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십 명을 보내어 엘리야의 시신을 사흘 동안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습니다(16~17절). 엘리사에게 돌아온 그들은 향하여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18절)..고 말했습니다.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에게는 상황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인간적인 정에 연연하기보다 현재의 사명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그가 떠나간 후에는 미련을 두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교회 지도자 역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인 정에 매여 사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통찰력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깊고 정확한 판단력으로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아가야 할지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 영적인 리더로서 성도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을 파악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통찰력을 갖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기쁨과 충신으로 감당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9~22절).
‘그 성읍’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가 배열된 위치로 보아 여리고인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은 물 때문에 엘리사를 ‘우리 주인’이라고 부르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빠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는 것입니다(19절).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이 용어는 대부분 구약에서 ‘유산하다, 어린아이를 잃다’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로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의미는 자녀들이 죽거나 유산 당한다는 의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유산합니다...’(새번역)... 엘리사는 물 근원에 소금을 던지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을 고칩니다(20~21절). 소금을 던지는 것은 거룩함과 회복을 위한 상징적 행위이고, 실제로 물을 고친 것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22절).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여호와가 구원하신다)에 의해 저주받았던 여리고(수 6:26)가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하나님이 구원하신다)에 의해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합 왕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을 건축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재앙이 발생했던 여리고 성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도록 치유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쁨과 충심으로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며 묵묵히 사명을 감당해 나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는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그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일에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23~25절).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가는데 그때 어린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놀려 댔습니다(23절). 엘리사는 엘리야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삭발을 했는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대머리인지는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엘리사에게 퍼부어진 조롱과 모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에 대한 거부를 나타냅니다. 그리하여 엘리사는 그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그러자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마흔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죽입니다(24절). 여로보암 시대에 벧엘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왕상 12:29~33). 그러므로 이들은 우상 숭배자들이거나, 신앙적으로 타락하여 엘리사를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갈렐 산으로 갔다가, 다시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25절).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계획을 대항하여 모독하는 것은 즉각적이며 확실한 심판을 만나게 됩니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창 13:4),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창 28:16~17), 사사 시대에 온 백성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던 장소였습니다(삿 20:26;21:2). 그러나 아합 시대에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면서 그곳에서 불신앙의 자녀들이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으면 저주의 땅이었던 여리고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하면 하나님의 집인 벧엘도 우상의 중심지로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징계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울러 편견에 의해서 또는 부정확한 정보를 듣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적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비판하거나 거친 말과 과격한 행동으로 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통해 불모와 죽음의 땅과 같은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헛된 세상의 소리에 마음이 흔들려 진리를 왜곡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영적 통찰력을 갖고 사역에 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면서 그분의 능력이 사역의 현장에 나타나기를 기도하며 충성스럽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를(삼하 2:15~2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