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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수난 예고와 두 제자의 청탁
막 10:32-45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33-45 / `우리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뒤 로마 사람들에게 넘겨져 34) 그들이 나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으로 때려 마침내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5)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마20:20-28]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 곁에 와서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주님, 저희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36)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이 말하였다. `저희는 주께서 영광받으실 때 주님 다음의 자리에 앉게 되기를 원합니다. 한 명은 주님의 오른편에 한 명은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3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너희가 내가 마셔야 할 쓴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39) 그들이 `물론이지요. 저희는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침례를 받게 될 것이다. 40) 그러나 너희를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할 권한은 내게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다.' 41)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내자 42)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의 왕이나 지위가 높은 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큰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44) 그리고 너희 중에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수난 예고(32-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세 번씩이나 예고하셨습니다(막 8:31; 9:30-31; 10:32-34). 이는 앞으로 전개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관하여 제자들이 낙심하거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당시 종교지도자요 성서학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에 의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통하여 유대 땅에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미 5:2), 실제로 왔지만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눅 23:33).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종교적인 많은 지식은 갖고 있었지만, 눈이 어두워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경지식이 있고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하고 있을지라도 영안이 어두워 구원의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주님을 십자가에 두 번, 세 번 못 박게 되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이 이방인인 로마 정권자들에 의해 모욕과 폭행을 당한 후(눅 23:11; 요 19:1-3)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부활을 통해 최후 승리로 끝날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으뜸이 되려면(35-45)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통해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정치적인 야심을 갖고 어머니를 통해서나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기를 요구합니다(마 20:20). 왜냐하면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리라”(마 19:28)는 말씀과, 메시야가 오시면 곧 지상에 왕국을 세우고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는 유대인의 일반적 개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행 1:6).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니며 하늘나라에 관하여 보고 배웠음에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라고 그들의 영적 무지함을 지적하시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열 명의 다른 제자들이 두 형제에 대하여 분 내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으뜸이 되기 위해서는 섬김의 사람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적용: 제자들의 영적 무지함은 하나님 나라를 세속적인 권세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들이 높은 자리를 얻기 원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갖고 있는 영적 무지함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섬기는 일터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군림하려고 했을 때는 타락하고 세속화 되었습니다. 교회가 섬김의 자리에 있을 때 고통도 받고 핍박도 받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도 섬김의 삶을 살 때 비로소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늘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면 거기에는 파멸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설 교 >
제자의 길 황제의 길
이종철 목사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매우 고독하게 사셨습니다. 열두 제자가 있었고 그 주변에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정작 십자가에는 예수님 한 분만 달렸을 뿐입니다. 그만큼 예수의 운동은 예수님 혼자만의 운동이었고 어떤 조직이나 대대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당국도 그것을 알았기에 예수님 한 분만 제거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의 운동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 되어 유대의 좁은 땅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비장하기만 합니다. 예루살렘 길이 당신에게는 죽음의 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이제는 그 심각성을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32절에서는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제자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세 번째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예고하십니다. 십자가 예고들 중 가장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3, 34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죽음의 그림자가 더 진하게 밀려오고 있음을 예수님은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곤고함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해와 위로를 받고 싶어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순전함과 전적인 신뢰로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했건만, 그들은 어린아이가 되긴 했지만 부모의 마음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과 욕망만을 취하는 그런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예고가 끝나자마자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청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그 영광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는 왕과 같이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계속 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들 생각에는 당연히 정권을 잡고 군림하는 그런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답답한 듯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36) 그런데 이들은 그 의미도 모른 채 “할 수 있습니다.”하고 장담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잔과 세례를 언급하신 이유는 단지 죽을 각오로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 죽을 수 있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미했던 잔은 관제와 같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 하고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세례 또한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앞서서 그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정작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님 좌우편에 있었던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들이었습니다.
두 제자의 이런 모습이 예수님은 얼마나 한심스러웠겠습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측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가장 먼저 제자로 불렀던 이들입니다. 변화산 상에도 이들과 베드로만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고 가장 곁에 있던 이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다른 제자들은 분노합니다. 41절입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열 제자가 분히 여긴 것은 이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선수를 쳐서 자기들보다 앞서려는 데 대한 분노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9장에서 누가 크냐며 다툰 전력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철부지 같은 제자들을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몇 번째 실패하고 있습니까? 호통이라도 쳐야 당연할 것 같은데 주님은 끝까지 참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내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열두 제자 모두가 예수님처럼 순교와 섬김의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청탁했던 야고보와 요한 또한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야고보는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순교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입니다.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1-2) 요한은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지기도 하고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철부지 같았는데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시자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뒤를 잇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마음만 급해 잡아 뽑다가는 말라 죽고 맙니다. ‘조장(助長)하다’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어떤 마음 급한 중국 송나라 때의 농부가 보리가 빨리 자라지 않는 것 같으니까 보리를 살며시 뽑아놓았습니다. 한결 빨리 자란 것 같아 기뻐하며 농부는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가보니 보리는 뿌리가 들려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자연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철부지 같고 더딘 것 같지만 때가 되면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집권자들
제자들이 고질적으로 실패했던 이유는 그들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길과 예수님의 길이 다름을 반복해서 교훈하십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실상 이것은 세상의 길이고 제자들이 꿈꾸었던 길입니다. 사람들은 높은 데 올라가기를 좋아합니다. 높은 데 올라가야 영광을 받고 권세를 휘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인 의미로는 그래야 자신이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는 강한 힘이 약한 힘을 누르는 힘의 권세로 점철되었습니다.
70년대 유행했던 팝송 중에 사이먼과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 번역하면 “콘도르 새는 날아가고”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I'd rather be a sparrow than a snail / Yes I would If I could / I surely would / I'd rather be a hammer than a nail / Yes I would If I could / I surely would”(달팽이 보다는 참새가 되고 싶어요 / 맞아요!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어요 /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요 / 못이 되느니 망치가 되고 싶어요 / 맞아요!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어요 /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요”
원래 이 노래는 스페인에 멸망했던 잉카제국의 후손들이 다시 독립 전쟁을 벌이다 실패했던 영웅을 추모하며 부른 전통노래에서 그 가사를 빌려 왔다고 합니다. 원래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발에 짓밟히는 달팽이 보다는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참새가 되고 싶고
두들겨 맞는 못 보다는 망치가 되고 싶고
모두가 밟고 지나가는 길 보다는 인간의 발이 미치지 못하는 숲이 되고 싶고
죽어서 원혼이 되기보다는 한 순간이라도 더 땅을 밟고 서 있고 싶다”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사는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힘을 숭상하는 세상의 논리는 소수만을 자유케 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듭니다. 약자들의 한숨이 끊임없이 묻어나오게 만드는 것이 이 힘의 논리입니다. 물론 이 약자들 중 하나가 성공하여 또 다른 집권자가 되어 권세를 휘두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소수에게 향하던 권력을 다수에게 나누어준 인류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 사회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권력을 마구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정원이라는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부정선거를 꾀하고 또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서 검찰이라는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합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회나 교회나 조그마한 권력이 주어지면 가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세를 부리고 임의로 주관하려 합니다.
너희는 그렇지 아니하니
예수님은 이런 세상과 제자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43절과 44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섬기는 자가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대접받고 싶지 누가 피곤하게 섬기고 싶겠습니까? 영광을 받으며, 손가락 하나로 다른 사람을 부리고 싶지 누가 그 지시대로 움직이고 제대로 쉬지 못하는 종이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망치가 되기보다는 못이 되고, 참새가 되기보다는 달팽이가 되고, 숲이 되기보다는 길이 되어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주인 노릇, 왕 노릇하려고 하다가 세상이 힘들게 되어 버렸습니다. 양육강식, 아비규환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힘의 논리, 황제의 논리를 깨뜨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영광과 높은 자리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섬기셨습니다. 성경은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말씀합니다(빌2:7). 인간의 몸을 입고도 권력의 자리에 계시지 않고 낮고 가난한 곳에 계셨으며 결국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셨기에 예수님 안에서는 모두가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섬김의 정치를 강요할 수 있는가? 세상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통해 최소한 권력을 겸손하게 만들고,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테크닉으로 사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기대는 다릅니다. 43절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철저히 섬김의 길, 종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본주의 인본주의를 나눕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름만 부른다고 하여 신본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권력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따르고 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어리석어 보이는 길을 갑니다. 인본주의는 세상처럼 권력을 의지하고 힘을 숭상하는 길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회는 권력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스리고 군림하고 영광을 받고 세상을 향하여 정죄하는 일을 즐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기독교는 섬기고 고난 받고 이름 없는 길을 갔습니다. 교황과 목회자들은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2015년 496주년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인간의 권력을 우상시하는 인본주의에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신본주의를 선언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모토 중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바로 그 선언입니다. 인간이 주인이 될 수 없고, 인간이 영광을 받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날의 교회는 다시 종교개혁을 당해야할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권력과 영광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그 자리에서 어떻게든 내려오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힘을 키우고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 전력하며, 그 자리에 올라서는 권세를 부립니다. 힘을 가지지 않으며 주눅 들어 있고, 힘을 가지고 있으며 행사하고 자랑하려 합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해코지를 하기도 합니다.
■ 한국교회사에는 이런 길과는 반대로 섬김의 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인물이 있습니다. 전라북도 김제에 가면 ‘ㄱ자 교회’로 알려진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백여 년이 넘어가는 오래된 교회이면서 초기 교회건축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교회 건물 못지않게 섬김과 하나 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성경적 교회로 유명합니다. 1908년에 금산교회는 장로를 피택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양반이자 지주인 조덕삼과 그 집 마굿간에서 일하던 머슴 이자익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당시 정서상 양반이 장로가 되면 문제가 없지만 머슴이 장로가 되면 교회에 큰 분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실제 서울의 승동교회에서는 백정 출신 박성춘이 먼저 장로가 되자 양반들이 갈라져 나와 따로 안동교회를 세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연동교회는 갖바치 출신 고찬익이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들이 교회를 떠나 묘동 교회를 세웠습니다. 금산교회도 우려했던 대로 공동의회 투표 결과 주인인 조덕삼이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조덕삼 영수에게로 향하였습니다. 그때 조덕삼 여수는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많은 교인들에 의해 장로로 피택되었으니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의 분위기로서는 매우 놀라운 태도였습니다. 조덕삼 영수는 집에서는 주인 노릇을 했지만 교회에서는 머슴인 장로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나중에는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 신학을 공부하도록 했고, 후에 금산교회의 2대목사로 청빙하였습니다. 조덕삼 영수 또한 나중에 장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는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섬김과 낮아짐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신분 사회의 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그렇다면 섬김의 길은 자기 비하의 길인가? 아닙니다.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의 길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님 한 분의 희생으로 수많은 인류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섬김의 삶을 살면 그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큰 나무 밑에는 작은 것들이 살 수 없습니다. 햇빛과 양분을 다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나무가 베어지고 쓰러지면 많은 작은 것들이 살 수 있습니다.
섬김은 어머니의 길입니다. 어머니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자녀들이 자랍니다. 어머니는 영광을 취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자녀들이 성장하고 번듯한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기뻐할 뿐입니다. 기쁨은 자신이 높아지는데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섬김의 길은 즐거운 길입니다. 어느 분이 쓰신 글에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강물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그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결국 바다에 이르고, 세상에 바다만큼 거대하고 위력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섬김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이 자연의 흐름은 하나님이 세상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그런 흐름입니다. 강이 막혀 있으면 썩고 그것이 인류사의 비극입니다. 강물이 바다를 향해 즐겁게 가듯 그 길에 생명이 있음을 믿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고 그의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될 바입니다.
앞서 가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0:32-34 / 유영철 목사
본문에 예수님께서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비롯한 추종자들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대열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앞서가시고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향해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정과 자세, 마음가짐은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동행하는 자들의 앞에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앞장서신 예수님! 길을 인도하는 자는 항상 앞서갑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길 안내자로 앞장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신 주님은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란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앞장섰습니다. 뒤따르는 자들과는 사명과 목적을 이해하는 측면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주저하거나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앞장서신 예수님은 확신과 담대함이 있으셨고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길에 앞장서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구원계획에 자신을 순종시키고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목표였습니다. 사명과 목표가 분명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음이 두렵지 않게 했습니다. 평안과 담대함이 예수님을 앞장서게 했습니다. 앞장서는 것이 리더의 참된 지도력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앞장서야 하는 신분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없습니까? 주님처럼 앞장서서 헌신, 충성해야 하는 위치인데 그렇게 못한 경우는 없습니까? 가정, 교회, 사회, 직장에서 “앞장서는 것”을 이익을 얻고 대접받고 높임을 받는 자리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도 세상도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려움이 있고, 위험 있고, 슬픔 당한 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앞장서야 진정한 리더입니다. 함께 동행 하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보십시오! 같은 방향을 향해 결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놀랍고 두려운 일일 뿐입니다. 헌신과 충성,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습니다. 확신과 사명이 없으니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는 무엇보다 십자가 고난의 결과가 중요했습니다. 십자가가 많은 백성들에게 어떤 은총이 주어지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고 해방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피 흘리심으로 회복되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셨습니다.
주님이 앞장서신 것은 십자가의 결과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33-34절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당하실 일에 대한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 올라가십니다. 여기서 “올라가다”라는 말이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바뀐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희랍어 문법으로는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로 바뀝니다. 좀 어려운 내용이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있는 제자들을 자신과 동일한 목적과 사명을 가진 자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함께 길을 가고 있는 그들을 주님처럼 스스로 마음이 내켜서 행동하는 능동적인 사람들로 여기셨습니다. “아나바이노멘”(올라가다)이란 단어가 여러 곳에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위해 산에 오르실 때(마5:1),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실 때(마 14:32), 예수님께서 풍랑 이는 바다에서 고난당하는 제자들 곁으로 가셔서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 오르실 때(마 14:32), 오늘 본문처럼 수난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아나바이노멘”라는 능동적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거나, 기도하시거나, 위로하시거나, 구원하시거나 스스로 마음이 내켜서 능동적으로 하신 일이지 억지로 하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행위들, 즉 연약한 인생들을 사랑하고 돌보시고 하나님과 영적관계를 맺는 것은 사명에 불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들이었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이룩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인해 비록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로마인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앞장서실 일이며 능동적으로 행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안일을 찾고, 자기를 지키려면 갈릴리에 있는 것이 낫지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갈릴리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적사건을 통해 삶이 회복되고 치유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은 수난이 기다리고 있고 십자가에 죽는 처참한 일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중요성 그것을 바라본 주님은 앞장서서 걸어가셨고 능동적으로 고난의 자리에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사명으로 일깨우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지금 앞장서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따라가지만 제자들처럼 놀라움과 두려움이 앞서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예수님과 함께 능동적으로 주님의 일에 사명을 받는 자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가르치시고, 기도하시고,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능동적이셨던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계획된 죽음인 것을 알고도 이것을 이룩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되 제자들과 무리를 보다 앞장섰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큰 사명들이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내 삶의 현실에서 내 신앙의 현장에서 주님을 따라가고 동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명들을 보다 잘 감당하셔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가 넘치는 그런 신앙공동체, 가정,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섬기러 왔노라
이필재 목사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께서 당선 후 국민과의 첫 약속을 “나는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약속대로 한다면 역사에 길이 빛나는 지도자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언제나 정치 지도자들이 비판 받아온 부분이 국민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출세, 권력만 생각해서 처신을 하기 때문에 국민의 원망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당이 지금 세 개라고 생각됩니다. 16개 정도의 정당이 있지만 유명무실한 당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표적 정당의 최고 지도자들이 1년 전만 해도 같은 당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국민들의 소원은 같이 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이리저리 갈라져 각각의 당 지도자가 되니까 국민들의 마음이 이리저리 다 갈라져 버린 겁니다. 이것은 국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섬김에는 희생이 따라와야 됩니다. 욕심은 절대로 섬김이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이 2008년 1년 동안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야 되는 연초에 오늘 말씀으로 우리가 영적 무장을 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느 사회나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공동체 사회라고 부릅니다. 어떤 공동체가 훌륭한 일을 하면서 잘 발전해 간다는 것은 그 공동체를 운영해 가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결정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가 공동체를 비롯해서 아주 작은 그룹에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구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끌어갈 사람을 열두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기본적으로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제일 처음 구성하시고 운영하신 그 제도를 본받아서 거의 똑같은 성격으로 교회가 운영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 구성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선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적 제자 선택입니다. 그들이 바로 열두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교회를 운영해야 하는 방법과 해야 할 일을 가르치셨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봉사적 제자 선택입니다. 열두 제자가 있었지만 그들만 가지고는 교회가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12사도가 그 사도적 직무를 다하는데 필요한 협조적 사역자들을 두심으로, 이 두 가지의 조화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가장 큰 도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 이하에 읽어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바로 이 사람들이 사도적 제자들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이 부분은 봉사적 성격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두 성격의 제자들의 조화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훌륭하게 이끌어감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교회는 거의 이같은 제도를 따릅니다. 사도직 제자 성격으로는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영적 계시의 소명을 받은 자로 정규적 훈련을 마치고 말씀 전함과 성례전을 집례하고 교인들의 모든 문제를 위해서 일을 하는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만 가지고는 교회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사도직 제자들에게 협력하는 평신도 제자의 집사라는 제도가 초대교회에서부터 생겨서 지금도 똑같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조금씩 헌법에 차이가 있지만 모든 교회들은 교회 운영을 위해 대표 대의원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 기관의 제도와 똑같은 철학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온 국민이 한꺼번에 모여서 나라 일을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즉 대표를 뽑아서 나라의 운영을 맡김으로서 훌륭한 나라 건설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본적 신앙 철학을 설교하심으로 우리 교회 일꾼된 자들은 이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운영해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받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러분이나 저나 똑같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신앙 철학을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일은 기회가 왔을 때 사양하지 말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의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나는 이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해 나갈 것을 하나님과 국민 앞에서 약속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것이 우리 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을 우리 생애에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때가 있고 거두시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항상 건강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조사했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현미경으로 봐야 보이는 점 하나가 내 몸에 생겼다고 심각하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생각됩니까?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간단한가?’ 그런 어려움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에게 지금 건강이 주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진리입니다. 이 기회를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물질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게 있는데 내일은 누구 손에 넘어갈지 알 수 없습니다.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이 은퇴를 합니까? 때가 지났다는 말입니다. 여기 지금 은퇴하신 선배 목사님들이 여러분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인데도 주시는 때가 있는가 하면 이젠 그만 하라고 거두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헛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내가 돈 많이 벌면 하나님의 일 많이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돈도 안 생기거니와 생겨도 안합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재정이 부족했습니다. 수백억짜리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이민자들이 어렵게 사니 쩔쩔 대며 저는 너무 급해서 이런 기도도 해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인들 돈 많은 집을 영적으로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쩔쩔 매는 소리도 하고 교인들에게 호소도 하며 교회 건축을 했는데, 그때 제가 제일 많이 들은 소리가 또 이겁니다. 휴가를 떠나면서 “목사님! 내가 이번에 라스베이거스로 휴가를 갑니다. 가서 대박나면 다 건축헌금을 드리겠습니다.” 이 소리를 제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단 한 사람도 가지고 온 사람이 없습니다. 건강, 재물, 은사 모두 거둬갑니다.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찍어 불에 던져 사르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셨을 때 해야 합니다. 예수 믿은 지가 몇 십 년인데 십일조 드리는 것을 아직 결정을 못합니다. 어느 교회나 십일조는 교회의 25퍼센트 정도 밖에 안 됩니다. 75퍼센트는 안하는 실정입니다. 기회를 주셨을 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지나가니까요. 건강도 없어지고 재물도 없어지고 은사도 없어집니다. 하려고 할 때는 늦습니다.
두 번째로, 봉사는 교회에 유익을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자도 교회 직분자들이요, 교회를 망치는 사람도 직분자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맡기신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해서 하신 일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훌륭하게 해나가라고 하십니다. 바울 신학에서 “교회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기업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직분자들이 잘못하면 주님의 몸은 깨어지고 상처 나고 주님의 기업은 망하게 됩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실 때 분명한 소유권을 정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러므로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누가 헌금을 해서 누가 건축을 했든지 아무 상관이 없이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는 집권자들의 잘못된 인식이 교회에 문제를 가져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주님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깜깜한 암흑기 시대에 예언자의 소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광야에 나타난 예언자의 소리가 들려왔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그 소리가 나는 요단강으로 몰려가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바라보기를 “아! 이는 분명히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메시아의 출현이다!” 그렇게 요한을 바라봤습니다. 요한이 “아닙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하늘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요?” “메시야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가 메시야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몰려갔던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다 몰려갔는데 누구까지 갔느냐? 평소 요한의 제자들까지 예수님께로 다 몰려가고 광야의 요한은 외로이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한에게 가서 말을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마저 다 예수께로 갔나이다. 이 광야에 당신은 외롭고 쓸쓸이 혼자 남았나이다.” 그때 요한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쇠하고 교회는 흥해야 합니다. 그게 교회 직분자입니다. 대통령이 될 사람도 “나는 쇠하고 나라는 흥해야 한다.” 이런 철학이어야 합니다. 나라와 교회는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입장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도 혼란하고 교회도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내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심각한 기도를 겟세마네에서 드렸습니다.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입니다. 인간적 측면에서 예수를 바라보면 그는 실패자요, 싸움에서 졌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요. 그런데 그 실패가 기독교의 참 진리가 되는 패러독스 진리! 여러분, 예수는 지면서 믿는 것입니다. 손해 보면서 사는 교인, 쫓겨나는 신자! 괜찮습니다. 참 기독교의 진리는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12사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 지금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우리 두 형제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초등학생이라도 다 기억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 나라의 왕이 되시는데 두 번째의 권력과 세 번째의 권력을 우리 형제들에게 주옵소서.”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이런 요청을 할 수 있었는가? 공로가 있습니다.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의 공동체를 위해서 돈을 제일 많이 썼습니다. 또, 예수님과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이종 사촌간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마음은 요한을 제일 사랑하시는 것이 표출 되었습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안가! 우리 두 형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야! 지금 다른 제자들 앞에서 결정해 놔야 돼! 예수님, 그렇게 선언해 주세요.” “무엇을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네가 거기에 매력이 있어서 그것을 원하기 위해서 나에게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이냐?” 그래서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너희들이 나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일하라고 3년 동안이나 이렇게 교육을 시켰는데 오늘 와서 정 반대의 결론을 나에게 가지고 왔느냐? 내가 가는 길은 네가 생각하는 길의 정 반대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고 내 목숨까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그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냐?” 우리 교회 직분자들은 섬기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만약 갈보리교회 교회 교인이 만 명이라고 한다면 저는 만 명 모두를 섬겨야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교회에서 간증 집회를 잘 안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서 안 세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현역 장군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한번 기회를 주시면 간증하겠습니다.” 그래서 수요예배를 한번 해보시라고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국의 수만 명 모이는 교회의 집사님이시더라고요.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제가 나가는 교회 목사님께서 어느 날 광고를 하셨습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들은 교회에 와서는 섬기십시오. 사장이라든가 장군이라든가 권력의 자리에 있다든지 어쨌든 사회에 나가면 누군가는 나를 많이 섬겨주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니까 교회에 와서는 정 반대로 섬기십시오. 자발적으로 하십시오. 쓰레기 치우고 교인들을 위해 깨끗이 청소하고 주차장 관리하십시오. 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광고를 하셨기 때문에 저도 사회에 나가서는 부하들이 천명이 넘는 장군이기 때문에 열심히 섬기고 저희 교회는 부총리까지 나와서 청소를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봉사’라는 단어의 성경의 원문 해석은 ‘노 젓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는데 그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잘못 될 때 예수님은 뭐라고 선언하셨습니까? “차라리 너는 세상에 나지 아니하였다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직분은 거룩하고 소중한 의미가 있는데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행할 때는 “하지 마라. 네가 함으로 오히려 교회가 더 고난스러워진다. 너는 항상 그런 생각밖에 못하냐? 차라리 직분자가 되지 아니하였다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걸어온 역사입니다. 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희생이 따라와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일은 매우 즐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섬기는 자를 더 귀하게 보십니다. 왜 국민 지도자가 되느냐? 국민을 섬기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식들을 섬기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요즘의 아이들이 얼마나 매스컴이 발달해서 참 영리하고 어른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안했다가는 아이들에게 부모님들이 금방 책잡힙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과 길을 가다가 배고파서 호떡을 5개 샀다고 합니다. 아들을 2개 주고 자기가 3개를 먹었답니다. 말이나 하지를 말지 아들에게 “배부르지?” 아들이 속으로 대답했답니다. ‘2개 먹고 배부르면 3개 먹은 놈은 배 터지겠다.’
우리 갈보리교회에는 21명의 사도직 성격의 제자인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집사님, 권사님들은 수백 명이 되십니다. 여기에 대한 조화를 잘 이룰 때 하나님은 그 공동체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 사도직이나 봉사직도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물러나야 됩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교만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 공동체나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물러가고 다른 목사님이 오시면 이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잘될 것이다.’ 어떤 목사도 나보다 훌륭하게 목회할 것으로 저는 믿고 그렇게 마음을 늘 정리합니다.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고 물러날 때는 조용히 가는 것이 우리 직분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만이 흥하고 영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 선생을 보세요. 그렇게 훌륭한 일을 그렇게 크게 하면서도 항상 고백하는 말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요, 사도 중에는 지극히 작은 자, 꼴찌요” 이렇게 생각하지 아니하는 한 교회도 어지러워집니다.
저보다 일 년 후배 목사 한명이 어떻게 목회를 잘하는지 교인들에게 굉장한 존경을 받습니다. 교인들이 어떤 때는 주님보다 목사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기침만 해도 “아멘, 아멘”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여보쇼! 어떻게 목회를 했기에 교인들이 그렇게 목사를 좋아하는 겁니까? 교인들은 입만 벌렸다 하면 목사님 자랑을 하고 목사님 아니면 죽을 것 같이 하니, 어떻게 목회를 한 거요? 무슨 비결이 있을 거니 한번 말해 보시오.” “아니, 선배님은 나보다 더 존경받으면서 괜히 그러세요?” “아니야! 당신 틀림없이 뭐가 있어! 한번 이야기해봐!” 그랬더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배님! 나는 중학교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를 못 갔습니다. 그런데 사회 취직도 안 되니 어떡합니까? 교회 사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청소년 시절은 10년 동안 교회 사찰 일을 하면서 교회가 주는 작은 월급을 가지고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찰 일을 10년 동안 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오면 무엇을 원하는지, 교인들의 소원이 뭔지, 필요가 뭔지….” 사실 교회 사찰하기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다 사장이니까요. 어떻게 된 거냐고 막 따지고 야단치고 그러니까 참 힘듭니다. 웬만큼 믿음 좋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듭니다. “나는 10년 동안 그렇게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겨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서 교인들의 성격을 다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명을 주셔서 이렇게 목사가 되었는데 지금 목회 방법은 하나입니다. 나는 이 교회의 사찰이라고 생각하고 합니다.” 사람이 초심을 지킨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초심을 지키면 훌륭하게 됩니다. 내가 믿음이 가장 좋았을 때! 저는 초심이 있습니다. 개척교회 할 때 교인 한 사람만 들어와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새벽기도에 아무도 안 나와도 새벽기도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전기방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난방시설 하나도 안 되어 있는데 나 혼자 나와서 새벽기도 하려니 너무나 춥고 교인이 좀 있으면 신이 나겠는데 혼자서 하니 그래서 전기방석을 깔아놓고 혼자 기도하다가 잠드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나오면 그대로 자는데 바깥에서 뚜벅뚜벅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러면 번개같이 일어나서 잠 안자는 척 하느라고 “주여!” 그랬습니다. 이것이 저의 목회 초심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지 말자! 그때 나를 잊어버리지 말자!’ 여러분, 가장 가난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돈 좀 벌면 주님 앞에 충성하겠다.’ 그래서 저는 그 후배 목사에게 “당신 그 초심 잊어버리지 마라! 사찰로 교회를 섬길 때 그 마음을 당신이 그대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기에 내가 너희를 3년 동안 훈련시킨 것의 정 반대 요청을 나에게 하고 있다.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기 위해서? 그러면 3년 동안의 봉사는 그 목적을 위해서 나를 따랐느냐?” 이렇게 되었지요? 내가 왜 집사가 되었는데? 내가 그 나이에 권사가 되어서 지금 뭐하려고 하는 건데? 여러분, 초심을 지키면서 우리 일 년 동안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위해서 훌륭한 봉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이 말씀의 조명을 저희들이 잘 깨닫고 아버지가 주신 일 년이라고 하는 이 행복한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기뻐하실 수 있는 헌신적 봉사를 하면서 저희들이 일 년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섬기는 리더십
김태환 목사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 말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일어났던 에피소드입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간청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이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이 앉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까지 와서 예수님께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0:20)
뒤늦게 나머지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the ten other disciples heard what James and John had asked, they were indignant.” 사전에 보니까 indignant라는 말은 “feeling, characterized by, or expressing strong displeasure at something considered unjust, offensive, insult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너희 두 사람이 뭔데 예수님께 그런 요청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일이라고, 우리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강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서로 말다툼이 일어났다고 나와 있습니다 (22:24).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나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본문 42-45절)
오늘날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말 중의 하나가 리더십 (leadership)이라는 말입니다. 굳이 우리 말로 하면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도 많이 쓰는 말이어서 그냥 “리더십”이라고 씁니다. 전통적인 리더십은 리더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입니다. 리더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감히 리더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이 이런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키가 작잖아요? 어느 글에 보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상대방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도록 늘 검은 안경을 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두려움을 가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대기업의 총수들이 이런 전통적인 리더십을 가졌습니다. 장사하는데 탁월한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기업을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다행이 그런 리더십이 통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업을 크게 성장 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 스티브 잡스 (Steve Jobs, 1955-2011) 같은 사람도 전통적인 리더십을 가진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 말 듣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합니다. 아이로닉하게도 잡스가 죽고 나서 애플 제품들은 특유한 잡스의 분위기를 잃어가면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리더십의 기초는 리더의 탁월한 식견과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즘에 많이 나오는 리더십에 대한 얘기 가운데 “서번트 리더십 (servant leadership)”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국의 그린리프 (Robert K. Greenleaf, 1904-1990)라는 경영학자에 의해 1970년대 초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린리프라는 사람이 헤르만 헤세(H. Hesse, 1877-1962)가 쓴 “동방 순례 (Journey to the East, 1932)”라는 책에 나오는 레오 (Leo)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번트 리더십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오는 순례자들의 허드레 일이나 식사 준비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지친 순례자들을 위해 밤에는 악기를 연주합니다. 레오는 순례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순례자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돌보아 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레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피곤에 지친 순례자들 사이에 사소한 일로 싸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레오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가 순례자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서번트 리더십에 대하여 조금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서번트 리더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서번트 리더는 단순히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보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2. 서번트 리더는 구성원들의 의견을 듣고 잘 조율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번트 리더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다가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연주자 개인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면서도 연주자들 간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인 것처럼, 서번트 리더는 구성원들을 자기의 파트너로 알고 그들 개인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면서도 공동체가 나가고자 하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합니다.
3. 서번트 리더는 항상 구성원들을 먼저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그들의 의견을 묻고, 도와 줄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생활에까지 관심을 갖습니다. 서번트 리더는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데 있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오늘 임명예배를 맞이해서 이렇게 리더십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회사나 기업에서도 서번트 리더십을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한국의 어느 정치가는 북한 정권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이 살아야 지도부도 살고, 국가도 산다는 것을 북한은 명심하시기 바란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위대한 리더십은 바로 서번트 리더십이며, 서번트 리더십은 철저한 자기희생에서 비롯된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 정치인이 어떻게 서번트 리더십을 알았을까요? 그만큼 이 서번트 리더십에 대하여 사회 각 계층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회에서는 서번트 리더십을 그린리프가 처음으로 말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성경에 서번트 리더십이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통치하려고 하지만,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베드로전서 5:2-3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 감동적인 말씀 아닙니까? 누구나 다 리더가 되려고 하는데.... 그것이 성공이라고 믿고 있는데, 예수님은 참 리더는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십시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성경에는 이미 서번트 리더십에 대한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성경적인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서는 서번트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없습니다. 일반사회에서 오히려 서번트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말씀 두 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❶ 누가복음 12:42에 있는 말씀입니다. : “누가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 종에게 다른 종들을 맡기면, 제때에 양식을 나누어 줄 일꾼이 누구겠느냐?” “A faithful, sensible servant is one to whom the master can give the responsibility of managing his other household servants and feeding them.” 직역하면 “주인이 집안의 다른 종들을 돌보고 먹이는 책임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신실하고 눈치 있는 종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주님은 신실하지 않는 종에게는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센스가 없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말고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여러분에게 책임을 주어졌다는 것은 여러분이 신실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❷ 베드로전서 4:10-11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또한 각자에게 특별한 다른 선물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착한 종처럼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남을 도우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Do it with all the strength and energy that God supplies.”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일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임명 받는 여러분, 또 임명 받으시는 분들만 아니라 모든 교우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서번트로 섬겨 보시지요. 자기가 리더가 되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한번 그 그룹을 섬기는 서번트로서 일해 보세요. 제가 이 교회를 섬기면서 경험한 것을 보면 한번 회장했던 사람들이 다음 번에는 질겁을 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burn out” 되었다고 하잖아요? 내 안에 있는 에너지가 다 타 버려서 남은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이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자기가 그 직책을 맡으면서 공급 받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내 놓으려고 하니까 힘이 소진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더들은 끊임없이 힘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힘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리더들은 더 열심이 기도해야 하고, 더 열심히 성경공부 해야 하고, 더 열심히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burn out” 되지 않고 계속해서 섬길 힘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서번트로서 섬겨야 하겠다”는 생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번트 리더십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배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린리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great leader is seen as servant first.” 훌륭한 리더는 첫 눈에 보기에도 서번트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We are talking about the servant as leader, not the leader as servant.” “우리는 리더로서의 서번트를 말하는 것이지 서번트로서의 리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시나요? 잘 안 되시는 분들은 누가복음 22:27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예수님은 리더였지만 제자들을 섬겼던 진정한 서번트 리더십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린리프는 서번트 리더십에 10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Listening (듣기)” “Empathy (감정이입)” “Healing (치유)” 그린리프는 치유는 “to make whole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꿈과 비전을 나눔으로써 개인 개인들의 자아가 온전하게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Awareness (인식)” 그린리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Without awareness, we miss leadership opportunities (인식이 없이는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를 잃게 된다).” “Persuasion (설득)” 설득은 그룹의 consensus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Conceptualization (개념화)” “Foresight (미래에 대한 예측)” “Stewardship (청지기직)” “Commitment to the growth of people (성장에 대한 약속)” “Building community (공동체 형성하기)” 이렇게 10가지입니다.
우리교회 4가지 비전 중의 하나가 “우리 조국과 세계를 섬길 인재를 배출한다” 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재는 세상적인 개념에서 볼 때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재는 훌륭한 크리스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이 리더십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오늘 임명 받으시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서번트 리더십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하고 한번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잘 감당해 보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훌륭한 크리스천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내가 직분은 맡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순히 과거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하지 말고, 창의적인 발상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 혼자 일하려고 하지 말고 함께 일한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리더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누가 보더라도 여러분을 먼저 서번트로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헤르만 헤세의 책에 나오는 레오처럼,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없을 때는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그런 서번트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향한 인생의 유턴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은 종교개혁운동 49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운동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교회가 회개하고 갱신해야 하 반박문 95개 조항을 내건 데서 촉발되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회개란 하나님의 뜻을 향해 유턴(U Turn) 하는 것이다. 뭐든 제 멋대로 하려고만 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에게는 ‘유턴’이 언제나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제 멋대로 살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할 뿐입니다. 풍성한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대로 살던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유턴’ 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그 인생을 방황하면서 그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변화와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1. 출세지향적으로 살지 말고 천국지향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이종사촌지간 (요19:25) 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야심만만한 형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게 되었을 때 평소에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그들의 소원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때 예수께서 그 당돌한 형제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야심과 패기로 가득 차 있던 야고보와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청원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영광’은 주의 나라에서의 영광입니다. 야고보형제는 주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며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고, 그들의 청원을 거절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셨을까요? 그들은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천국지향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출세지향적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그 좌우편의 최고 요직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주님의 뜻대로 출세지향적인 삶에서 천국지향적인 삶으로 ‘유턴’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천국 시민으로서의 행복을 누리게 된 줄 믿습니다.
■ 정준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멕시코 하나교회에서 13년째 이민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친구의 전도로 고2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한 그는 항공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항공대학에 다니던 2학년 어느 날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 보였습니다. 그는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참되고 귀하게 살아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항공대를 그만두고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긴 했지만 신앙의 배경이 좋은 학우들이 부러웠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갈등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1:15의 말씀으로 그 갈등을 극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아멘! 항공대를 자퇴한 정 목사님, 그는 이미 출세지향적인 삶을 접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감신대를 자원한 그는 천국지향적인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물론 목사의 길, 그것도 이민목회의 길은 참으로 험난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유학 시절 약 3년간 이민목회 경험을 한 후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민목회 10년 이상한 사람 무조건 존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인생의 유턴을 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양을 먹이고 돌보는 기쁨이 있고 보람도 있습니다. 정준화 목사님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몇 번이나제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제게 너무 너무 좋게 해주십니다. 저는 너무 너무 행복한 목사입니다.”
로마서 12:1-2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멘!
종교개혁은 예배개혁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개혁은 예배자의 개혁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는 예배자인 여러분과 제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며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출세지향적인 야고보와 요한이 천국지향적인 삶으로 유턴한 것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소위 세상에서 출세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천국의 행복, 곧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롬14:17)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말고 주님중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10:38) 하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잔’과 ‘세례’는 예수님이 직접 당하게 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눅12:50). 예수님은 물론 그 고난의 잔과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아멘!
제자들은 사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과 받으셔야 할 세례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있게 “할 수 있나이다” (We can)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고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ㄱ들은 다만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을실’ 것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10제자들이 두 제자의 이야기를 듣고 분개 했습니다. 왜 그들이 분개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미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토론한(막9:34) 적이 있을 정도로 주님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누가 크냐? 누가 으뜸이냐? 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주님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다만 고난의 잔을 마실 뿐이며, 낮고 천한 자리에서 종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럼 사람은 다만 남보다 크고 으뜸이되어 영광의 잔을 마시고자 할 뿐이며 섬김을 받고자 할 뿐입니다.
법무인 ‘소명’ 대표인 전재중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서울대학교 법대에 다닐 때에 그는 하나님 밖에 몰랐습니다. 기독교 단체 IVF에서 말씀으로 단단히 훈련을 받으며 버스에서도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목사가 어울린다는 말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가 아닌 법조인이 되었습니다. 군법무관을 거쳐 1989년부터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몹시 부대꼈습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음주 문화나 윤리적으로 기독교와 상지되는 일들이 제법 일어났습니다. 벅찬 보람보다는, 하나님께 소명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는 자책감이 더 컸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일본에서 유학 중에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 법조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를 몇몇 법률가들과 고민하면서 CLF(Christian Lawyers Fellowship)을 창립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독 법률가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법무법인 ‘소명’을 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상당수의 법조인이 소명을 발견하고 이 길을 왔다기 보다, 그냥 공부를 잘해서 온 것이며,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할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 온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게 된다는 자성과 함께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서 저희를 섬기셨듯이, 이제 저희도 이 법률직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자기 신화를 만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눈앞의 이익이나 승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맨 앞에선 전재중 변호사에게 이사야 43:19-20의 말씀으로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43:19-20의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아멘!
종교개혁은 정의 실현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 실현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신앙의 응답으로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주님 중심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곧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사43:21) 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중심적인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중심적인 삶으로 유턴한 것처럼 자신의 성공 신화를 만들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교회 개척을 앞두고 장로님이신 아버지께 교회를 개척하겠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 자신부터 개척하라” 는 충고였습니다.
종교개혁, 여기저기서 교단의 개혁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 기독교가 개혁되고, 교단도 개혁되고, 교회도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시작은 바로 여러분과 저, 각자 자기 자신부터 개척되고 개혁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이미 ‘자랑스런 전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영광스런 변혁’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곧 우리 각자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출세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천국지향적이고 주님중심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향해 유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됩시다!
이상규 목사
2002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과 축복이 우리 성도님들과 가정에 그리고 모든 하시는 일 위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2002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교회의 표어를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라고 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라면 그 사랑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잘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일본 교토에 가면 유명한 택시회사가 있습니다. 일명 MK택시입니다. 얼마 전에 MK택시회사 사장님이 전주 모대학에 와서 특강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일본의 MK택시는 독특한 경영으로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MK는 일반택시보다 요금이 10% 저렴하지만 서비스 면에서는 최상입니다. 교토 시민들은 이 회사를 교토의 자랑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MK는 대졸 운전자들을 채용해 학사 운전자로 양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60년 택시 10대로 출발한 MK택시는 현재 34개의 주유소와 수백 대의 택시를 소유한 최고의 운수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이 회사의 주인인 유봉식·태식 형제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성경에서 경영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는 말씀과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들 형제는 운전자를 가족처럼 섬겼으며, 운전자들간 화목을 강조합니다. 그 결과 운전자들은 손님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하게 됐고, 최고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유명한 택시 회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소문이 퍼지고 또한 우리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 본문 45절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길이요, 주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섬김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1.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섬기는 삶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이라는 것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결코 섬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섬김은 일이 아닙니다. 대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가도 없는데 어떻게 섬김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은혜를 체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벨기에 태생의 선교사 다미엔은 나환자들을 위해 살다 결국 자신도 나병에 걸려 죽은 위대한 성직자입니다. 1873년 그가 나환자 수용소인 몰로카이섬으로 가게 됐을 때 그곳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습니다. 매일 수십 명이 죽어나갔고 환자들은 자포자기에 빠져 살고 있었다. 다미엔은 그런 상황에서 10년을 전도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어느 날 그의 손에 상처가 생겨 나병이 전염되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나환자들에게 전도할 자격을 갖게 됐습니다.』
다미엔이 어떻게 그 힘든 나환자들을 섬기며 전도하는 선교사가 되었을 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김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섬김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강권하기 때문에 섬김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닮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2.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요청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주의 영광 중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열 제자는 마음속으로 분개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덧붙여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개척한 빌립보교회는 서로가 다툼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과 온유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겸손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죽기까지 겸손해 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친히 발을 씻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하늘의 왕이 겸손한 종이 되신 것입니다.
요 13:12-17 /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섬김이라는 것은 diakoneo(디아코네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diakonos(디아코노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디아코노스라는 말은 '종, 일군- a servant, 사역자-minister'라는 의미입니다. 종이 되려면 겸손해지지 않고 어떻게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섬김을 실천하려면 종의 심정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3.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섬김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섬김의 극치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 아우슈비츠의 포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탈출한 한 명의 포로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수용소장 프리츠는 막사의 포로들을 전부 집합시켰습니다. "너희가 탈출을 방관했으니 대신 너희들 중 열 명을 뽑아 처형한다." "너, 너, 그리고 너!" 그는 사형에 처할 포로들을 마구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적당한 사람은 새하얗게 질린 채 열에서 나왔습니다.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서 거친 숨소리만이 한숨인 양 들려왔습니다. 아홉 명이 끌려 나오고 마지막 한 명이 지목되자 그 사람은 수용소장의 군홧발 밑에 엎드려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제발 소장님, 제겐 아내도 있고 자식도 여러 명 있습니다. 살려 주세요." 그러자 경비병들이 달려와 그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대열 뒤쪽의 한 포로가 경비병들을 헤집고 나와 쓰러져 피 흘리는 사람을 감싸 안고는 대신 자신의 몸으로 경비병들의 구둣발을 막았습니다. 그 광경이 너무 황당해서 소장이 물었습니다. "어, 웬 미친놈이냐?" 그러자 그 이상한 포로는 소장을 올려다보며 부탁했습니다. "저 사형수 대신 내가 죽겠소." "뭐라고? 그럼 네가 이 녀석 대신 죽겠단 말이냐? 친척이라도 된단 말이냐?" "친척은 아니오만, 우리 모두는 다 같은 형제요. 이 사람은 처자가 있으나 내게는 처자가 없소, 그러니 내가 대신 죽는 게 낫지 않소?" 그 이상한 포로는 막시밀리안 콜베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의 뜻에 따라 그는 다른 아홉 명의 포로와 함께 죽음의 지하실에 내던져졌습니다. 옆의 지하 감방에서는 이미 20여 명의 불행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한번 철문이 닫히면 모두 굶어 사망할 때까지 영원히 열리지 않는 처형용 콘크리트 방이었습니다. 밥은 물론, 물도 햇빛도 이불도 없었습니다. 지옥의 축소판인 이 '이사 감방'은 사형수들의 아우성으로 떠나갈 듯했습니다. 다만 죽음만이 서서히 그들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었을 뿐,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사형수들은 아우성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금 까지도 울부짖고 외치는 소리뿐이던 그 옆 감방도 자그마한 소리로 그 노래에 화답했습니다. 이 감방 저 감방이 기도와 노래로 화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막시밀리안 콜베라는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감방에 들어와서 감방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같은 감방에 갇힌 아홉 명도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감옥은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니 그토록 원망과 저주를 퍼부었던 사형수들의 마음이 녹아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5:2)
섬김은 사랑을 실천하는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물질을 주며, 몸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하며 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노령화 속도가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빨라 오는 2022년이면 유엔이 규정한 ‘노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재정경제부가 2002년 10월 27일 번역 출간한 ‘OECD 한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나라는 지난해 노인층 비율(총인구 대비 65세 이상 인구)이 7%로 유엔이 규정한 ‘노령화 사회’에 진입한 데 이어 2022년에는 노인층 비율 14% 이상인 ‘노령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이에 따라 노령화사회에서 노령사회로 이행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22년으로 주요 OECD 국가 중 가장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의 경우 노인층 비율이 7%에서 14%로 증가한 기간은 지난 1864년에서 1979년까지로 무려 115년에 달했고, 스웨덴은 1887년에서 1972년으로 85년, 이탈리아는1927년에서 1988년까지 61년이 걸렸습니다. 미국은 1942년에서 2013년까지 71년, 캐나다는 1945년에서 2010년으로 6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이 밖에 스위스가 52년, 영국·폴란드 각각 47년, 포르투갈·그리스 각각 41년, 독일 40년, 핀란드 36년, 일본 24년의 순이었습니다.
OECD는 “현재까지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멕시코와 터키를 제외하고는 노령화가 가장 덜 진행된 국가지만 향후 50년 동안 급격한 인구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우리 교회도 70이 넘어 은퇴하신 직분자들이 47명에 달합니다. 아직 정년이 안되어 직분을 감당하는 분이 62명과 비교해보면 거의 비슷한 숫자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가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점차 노령화되는 우리 교인들, 이웃 주민들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래서 금년부터는 우리 교인은 물론이요, 우리 지역에 홀로 계시며 거동이 불편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노인들을 봉사하는 일을 실천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앞으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 가눙데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공동체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공동체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2002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2002년을 어떻게 설계하시렵니까?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십자가의 길을 추구하라
대구신창교회 / 윤삼중 목사
우리는 항상 영광의 길인가? 십자가의 길인가? 두갈래 길에서 고민하며, 갈등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100% 쉽고 평안한 길, 성공의 길, 출세의 길을 추구하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힘들고 어렵지만 남들이 싫어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추구할 때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천국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 자신도 고난의 길을 원하는가? 영광의 길을 원하는가? 묻는다면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영광의 길, 형통한 길을 원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광의 길, 성공의 길을 걸어가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일 것입니다. 나의 욕망은 끊임없이 성공과 출세의 길, 영광의 길을 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이나 생각을 끊임없이 십자가의 못박아 죽이려고 몸부림칩니다. 나를 날마다 죽이지 아니하면 돗버섯처럼 영광의 길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 십자가의 길이 힘들고 어렵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실상은 큰 유익을 얻으며, 승리하는 길입니다. 고난의 길을 추구할 때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결국에는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영광의 길, 성공의 길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과 귀신을 추방하고, 바람과 바다의 풍랑까지 잔잔하게 하시는 능력을 보고 이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확신하였고, 우리 민족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다윗처럼 영광의 왕이 되실 것을 믿고 제자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큰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을 예고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함께 올라가자고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앞장 세우고, 신바람이 났고, 이제는 고생 끝이라는 큰 희망을 품고 힘차게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제자들 사이에는 서서히 예수님이 왕이 된다면 누가 우의정, 좌의정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초미의 관심이 되었습니다. 제자들 마음속에는 누가 힘 있는 자리에 앉을 것인가? 누가 권력의 핵심을 차지 할 것인가? 경쟁의식이 살아나며, 서로 눈치작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상대방을 견제하며, 시기와 질투심으로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그 이유와 목적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유대인의 왕이 되거나 로마제국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3-34절에 보면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 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인가? 우리의 꿈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는 것이며, 이 일이 예수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막겠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각과 의도에 크게 어긋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려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막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제자도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당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이었습니다.
애굽에서 430동안 노예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후에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까? 아니면 홍해바다를 건너 광야의 길로 갔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길로, 고통과 연단이 있는 광야 학교에 입학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 사는 법을 철저히 배우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광의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고 좁고 협착한 고난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길을 걸어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53:4-5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링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며, 징계를 받으며, 칼로 찔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말이 없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넓고 평안한 길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좁은 길, 고난의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셨으니 우리는 즐기고, 영광을 누리면 된다는 식의 신앙생활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값싼 은혜로 흘러갈 수 밖에 없으며, 나중에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없고 오직 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이 되어집니다.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회퍼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그저 “천국행 티겟”를 공짜로 제공받은 “값싼 은혜”에 만족하며, 십자가의 길, 제자의 길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찌르게 만듭니다.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의 자손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내가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편리한 신”으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깊이 잠기기보다는 마치 여흥을 즐기듯이 즐기려고 하고 그것이 잘 안되면 지루하다는 식으로 시계를 보고 몸을 비틀고 하품을 합니다.
왜 이렇게 값싼 은혜로, 영광의 신앙으로 변질되었습니까? 이것은 십자가의 신앙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를 헌신짝처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그리스도인의 색깔이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만일 진정한 십자가를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살 수 없습니다. 거룩함이 구멍난 상태로 더 이상 살지 않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세상 방식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다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짝퉁 십자가를 들고 예수님을 뵐 수는 없습니다. A 토저가 평생 추구한 진짜 십자가, 당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 그 원초적 메시지를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장식용 십자가가 아닌 진짜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편안한 길, 성공의 길을 거부하고 험한 십자가의 길, 낮은 자의 길, 작은 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2. 예수님이 걸어가는 길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이며, 성공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어떻게 유혹하며, 시험하였습니까? 사단의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은 모두 예수님을 보고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고 말을 시작하는데 실제 뜻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나도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이 돌이 떡덩이가 되도록 능력을 행하여 보시오” 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물질적 행복을 더 추구하라고 유혹합니다. 사단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먹으라고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 사람들보다 부자로 잘되고, 성공해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빵을 하나님보다 더 절대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아도 그냥 물질적 축복만 받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돈만 많으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그 후에도 어떤 유혹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까? 마귀는 광야에서 시험을 한 다음에 잠시 예수님을 떠났지만 그 뒤에도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다음, 그 뒤에도 계속 빵을 얻어먹기 군중들이 몰려 왔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계속 기적으로 떡을 만들어 주세요” 군중들의 말은 마귀의 메시지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요 6:2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빵 대신에 예수님은 말씀이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2)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2천년 동안 사도들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의 말씀을 교회에 전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목사의 입을 통해 십자가 복음을 전하십니다. 복음 속에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과 피를 담아서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사단이 당기는 물질적 행복주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사단은 그 후에도 사람들을 통해, 과시적 행복주의, 영웅주의로 예수님을 계속 유혹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사단의 영향을 받아 반복합니다.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소서”(마13:38-41) 예수님은 꾸짖으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한 마디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단의 말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27:40) 조롱합니다. 마27:43절에 보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사단의 입이 되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합니다. 사단도, 그 당시 민중들도, 부패한 성직자들도, 십자가를 통한 인류구원을 방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고쳐주기 위하여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2-43절에 보면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꿈꾸며,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높은 한자리를 얻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서 하는 말이 “주여 전혀 이 일이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정면으로 막아섰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4) 조금 전에는 하나님의 입이 되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사단의 입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움직이던 악한 사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모든 제자들에게 “너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16:24)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길을 걸어가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사단의 길과는 정 반대의 길입니다. 이 세상 나라와 영광을 얻기 위해, 행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단의 길과는 정반대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주셨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들도 자신의 야망과 영웅주의적 과시욕에 빠지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추구하게 됩니다.(고후11:4, 갈1:7) 사단은 우리 시대에도 행복주의와 영웅주의로 세상 나라를 계속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쉽고 편안한 길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영광의 길, 성공의 길을 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덩치만 컸지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교세와 학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교회는 물질만능에 빠져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설교하면 교인들이 싫어한다고 기피하고 있습니다. 기복신앙, 물질만능, 믿음만능, 출세성공 등 세상의 누룩이 교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철저한 삶을 강조하면 오히려 잘못됐거나 이단으로 몰리는 현실입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십자가의 길, 작은 자의 길, 섬김의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은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며, 자신의 몸까지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무리들은 왜 환영하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습니까? 그 당시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 살리신 예수님이 이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강력한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왕국을 세우실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을 행하실 정도 되면 강한 군사력을 일으켜 로마를 무찌르고 나라의 경제가 회복되어 잘 살게 되고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되어서 그 옛날 다윗이 왕이었을 때의 찬란한 시절이 오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나라를 잘되게 하고 자기들의 배를 채워줄 메시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힘없이 나중에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 심문을 당하고 채찍을 맞으실 때 군중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의 일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다디고 있지만 그 뭔가를 바라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호산나! 외쳤던 사람들처럼 교회 안에 군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냥 소리를 지르며, 떠드는 구경꾼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왜 입성하였는지를 잘 모릅니다.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고 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위하고 좇아다니는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뭔가의 기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잘 먹고 잘 살고 만족함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힘든 일을 감수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다 순교의 제물이 되어 나의 인생을 완전하게 하나님께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십자가의 길이 무엇입니까? 45절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이며, 자기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까지 내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으시고 철저히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자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12:23-2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여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한 알의 밀알처럼 십자가에 죽을 때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직접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알, 죽는 밀알로 왔음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 결국에는 그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살려낼 것이라는 뜻이 그 말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뒤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원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25절에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십자가의 길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그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기 목숨, 자기 인생만을 사랑하여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하는 인생은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 그냥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좀 더 편안한 것을 찾습니다. 좀 더 즐거운 것, 좀 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 좀 더 쇼킹한 것들을 찾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예수를 믿는다고 누가 특별히 핍박하지 않고 그저 편안하니까? 우리 기독교가 달콤한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축복받고 앞날이 형통하게 열려서 잘먹고 잘사는 욕심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험이요 도전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늘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갑니다. 뜨거운 물 속에 개구리가 풍덩 빠지면 개구리는 죽지 않습니다. 즉각 튀어 나온답니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 속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미지근한 물에 만족을 느끼다가 조금씩 가열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곳에 안주하다고 죽는답니다. 마귀의 전략이 그런 것입니다. 조금씩 여러분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물을 뜨겁게 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미지근한 세상을 탐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에 빌붙어있지 말고 과감하게 결단하고 죄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큰 집에서 큰 자동차 굴리면서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하며, 편안함에서 깨어나 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개혁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십자가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에 굴복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고 십자가의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사람들
마가복음 10:35-45 / 김형준 목사
다음에 소개하는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맞춰보기를 바랍니다. 그는 금속가공 혹은 땜질, 놋쇠질 이라고 불리 우는 유업을 아버지로부터 이어 받았습니다.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58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그의 글을 통한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회심할 때까지 악담, 욕지거리, 거짓말 등 온갖 죄악과 악행을 저지르며 자신의 삶을 비관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5살 때 어머니와 13살 된 동생이 한 달 안에 세상을 떠났고, 이 슬픔이 가시기 전인 어머니가 죽고난후 한 달 만에 아버지의 재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이 사람이 속한 공동체는 공격을 받아서 무차별 살육되는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21살 때 결혼해서 10년이 되었을 때 아내가 죽었고, 그 아내가 죽었을 때에는 4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중 첫 아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60평생 중 12여년 이상을 신앙을 위해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기회가 있었지만 평생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설교의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그리하면 이다음에 하늘 아버지의 얼굴을 평강가운데 뵐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집필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이 세계에서 성경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천로역정을 쓴 바로 존 번연이라는 사람입니다. 절망적이요 비관적이였던 자기인생가운데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고난과 고통의 연속 속에서도 믿음 안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뿐만아니라 많은 시간이 흘러간 지금도 그의 생애와 그의 책 천로역정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책으로 놀라운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존 번연으로 하여금 절망에서 소망의 삶으로 극적인 변화의 삶을 살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극심한 고통과 절망적인 삶속에서도 인내하며 살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며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일깨우는 그의 삶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여러분! 여러분 삶에 변화를 원하십니까? 이대로 내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가슴에 가득 합니까? 때로는 고난과 이유 없는 고통가운데서도 절망 하지 않고 소망을 노래하며 살아갈 힘을 얻고 싶습니까? 나아가서 나의 삶의 승리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의 한계를 이기도록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내 인생이 존 번연처럼 변화될 뿐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끼며 후회하지 않을 그 삶의 원리를 소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존 번연이 붙들었던 그 소망을 나의 소망으로 삼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제자인 야고보를 주목하십시오. 진정한 변화의 사람 야고보를 만나보십시오. 세상의 욕망을 영적인 것으로 승화시킨 야고보의 열정에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야고보로 하여금 그의 삶을 지탱하며 붙들어준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오. 자기를 바꿀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 분석해보십시오.
남을 심판하기를 좋아했던 그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남을 비판하기를 즐겨했던 그가 격려자가 되었습니다. 남을 지배하기를 사모했던 그가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변하기전 그의 삶에서 어부로서 그가 잡은 것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낚는 어부로서 그가 잡은 모든 사람들은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죽이는 자가 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삶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야고보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19-20에 보면 야고보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아버지 세배대와 품꾼들 그리고 배와 자기가 하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야고보가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버릴 수 있는 것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린 것입니다. 삶의 도구인 배를 버렸습니다. 자기의 직장과 하는 일을 버렸습니다. 자기의 지시를 받고 자기를 도와주던 품꾼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믿음을 두 개의 동사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바로 버리는 것과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개인의 변화나 공동체의 변화 그리고 역사와 민족의 변화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버리는 역사가 선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 1이하를 보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버리는것 입니다. 그리고 4절 말씀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운명이 바뀌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을 십자가에서 버릴 때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릴 때 역사가 바뀌어 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까? 고향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잔뼈가 굵은 삶의 터전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근거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근본적인 목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네 친척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지금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과 환경, 나에게 지금도 영향을 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즉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아비는 나에게 소중합니다. 바꿀 수 없습니다. 그만큼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관과 미래를 위해서 그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주인을 위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나 공동체는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었을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룻은 자기의 친척 본토 땅과 그곳에서 보장된 자기 미래를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를 때에 그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따를 때에 하나님의 역사무대에 오르는 뿌리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에 진정한 변화가 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16:24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운명을 바꾸며 삶의 결과를 바꾸기를 원한다면 버리라 라는 명령으로 우리를 권면합니다.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버리십시오.
승진이 너무 늦어 불만이 많던 어느 중학교 선생님이 어느 날 교장선생님에게 이렇게 따졌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몇 년이나 있었는지 아세요. 무려 25년입니다.’ 이때 교장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25년이 아닐세! 자네는 1년 동안만 있었네. 그것을 무려 25번이나 반복한 것뿐 일세.’ 버릴 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새로운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버리셨습니까?
버리고 나면 많은 자유가 주어집니다. 보여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선택하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불편하거나, 나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나에게 불필요한 것이어서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의 영광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스라엘백성들과 고난을 택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위해서 고난의 상처를 버리고 용서를 택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따르기위해 자기의 연약함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겨졌던 것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따랐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여리고성 앞에서 자기들의 판단과 상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때에 그 견고한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에 새로운 역사는 일어납니다. 새로운 시작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이루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결단입니다. 과거의 상처도, 내가 즐거워하던 것도, 내가 옳다고 믿던 것도, 내가 사랑하던 것도, 나를 누루고 있던 근심과 걱정도, 내가 이루려고 하던 꿈도 다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택하십시오. 거기에서 진정 내가 얻고 누릴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변화를 위한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야고보의 삶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까?
2.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했습니다.
야고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누가복음 9:51-56에 잘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가 가까운 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날씨는 덥고, 몸은 지쳤습니다. 가야할 길은 멀었습니다. 그래서 지름길인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가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마을의 사람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너무 분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땅을 버리지 않고 수가성의 한 여인까지도 귀하게 여기셔서 귀중한 복음을 증거 하시고 사랑하시는데 그 예수님께서 피곤하셔서 그 땅으로 지나가려고 하는데 거절하였습니다. 그때에 분노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분노하여서 다음과 같은 것을 요청합니다. 54절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저들을 싹 쓸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성경의 저자들은 바로 우레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문제해결방식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존재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분노로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입니다. 거절당하는 상처를 견디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인정해주어야 하고 사랑해주어야 하고 받아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않을 때 분노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방식에는 긍정적인 방법과 부정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방법은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월등하고 잘 해서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방법은 저 사람의 약점과 부족한 면을 헐뜯어서 끌어내려서 자기가 그 위치에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쓰는 방법이 바로 부정적인 방법입니다.
바로 야고보는 이런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죽이기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 야고보의 삶의 자세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즉 자기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때에 자기 두 아들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리 잡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세배데의 아내는 경제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돕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가지고 있었고 또 요한복음 18:15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때에 ‘ 시몬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뜰에 들어가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다른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중 하나며 대제사장과 잘 아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으로나 사업적으로 꽤 영향력이 있던 집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보다 높은 자리, 편한 자리, 존경받는 자리, 지배하는 자리,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의 방법을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기위해서 드러내놓고 요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막10:3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 44절에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45절에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은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야고보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분노로 일을 하며, 돈으로 풀어가는 자기방식을 포기합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료도 공동체도 생각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바리새파가 풀어가는 방식인 전통신앙의 고수와 강화나 사두개파 사람들이 행했던 정치와의 결탁이나 에세네파의 제도부정과 현실도피 그리고 열심당의 체제 전복 등의 방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주님의 방법과 비전을 자기 꿈으로 받아들이고 삶속에서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분노와 강포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로 그 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 요한은 끝까지 살아남아 진정 예수의 어머니를 섬기고 복음을 섬기며 섬김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자라나는 세대를 섬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돈벌이의 대상으로, 청년들은 정치의 희생 제물로, 청소년들은 시행착오의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진정 이들을 섬기는 정책이나 배려가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습니다. 돈이 되고 유익이 되면 무엇이든지 하는 이 땅의 논리 앞에 교회는 침묵하면서 진정 이들을 섬기고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열어가야 할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이세상이 되나 저세상이 되나 마찬가지라는 의식이 깔려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이 거짓 앞에 진리를 내어준 아픈 역사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침해받는 교권을 더 확고하게 해야 하는 주장도, 정치와 타협해서 교회의 위상을 정립해야 하는 것도, 아예 정치를 떠나서 침묵하고 정치와 종교가 완전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도, 그리고 이 체제를 붕괴하고 새로운 정치와 경제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중요한 방법이며 효율적인 방법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섬김과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내 생활 속에 이것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주님의 방법을 내가 순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에 무겁게 다가오는 찔림이 있었습니다. 제가 밤늦게 들어가거나 지쳐서 들어가면 다른 것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텔레비전 채널 돌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에게는 쉼이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내 자녀를 위하는 배려나 섬김의 모습일까 하는 자책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형식적이라 할지라도 가족들과 함께 대화하고, 책을 보며 집안일을 돕는 모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전부터 해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효율적인 것이라고 해서 따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보다도 익숙해진 나의 방식과 세상의 방식보다 주님의 방법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고난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물질과 시간과 젊음을 희생하지 않으면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새롭게 살아나갈 때 진정한 변화를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의 변화로부터 이웃과 역사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주님의 방법인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주님이 씻기셨던 제자들의 발을 씻는 삶의 방식의 변화 없이는 내가 진정 사모하는 삶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이 무기력해보입니다. 섬김이 나약한 자들이 취하는 삶의 자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 속에서 우리는 변화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변화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변화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방법, 이 세상에서 말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방법인 섬김을 순종함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3. 야고보의 놀라운 삶은 어디에서부터 왔습니까?
바로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1-2에 보면 야고보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헤아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헤롯대왕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는 자기의 인기와 정치적 입지를 굳게 하기위해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교회를 박해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한 사람을 시범케이스로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주목된 사람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 결심한 바를 이루기위해서 배와 그물 그리고 일군,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것을 이루기위해서 진정 섬기는 삶을 살기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진정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렇게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자기변화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소망이었습니다.
이 소망은 야고보를 바꾸었습니다. 이 땅에서 높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 더 귀하고 가치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 땅이 될 때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은혜가 넘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확고한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이 땅에 가치관을 두고, 의미를 두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 이번에 호주 유스코스타와 이민교회집회를 통해서 참 소망이 무엇인가? 어디에 참된 희망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한 분을 한 분 만났습니다. 경기고등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머리가 좋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에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매너나 사업 감각도 뛰어나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가 무당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이루지 못한 한도 많았습니다. 이민 와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우울증으로 집을 나갔습니다. 두 아들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들하나는 그렇게 명석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한 아들은 청소년인데 자기의 분노 때문에 칼을 들고 와서 죽이겠다는 일로 경찰이 무려 7번이나 출동했습니다. 50중반을 바라보는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눈물과 한숨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부는 이루었는지 몰라도 정작 이 집사님의 삶에는 탄식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는 한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하나님 안에서 만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확신이 그 집사님의 삶속에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리잡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즘 저도 이 나라를 보면서, 젊은이들을 보면서, 기성세대를 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의 말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 결국 이 민족은 이대로 갈수밖에 없는가요? 진리가 무엇인지는 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깨닫게 되나요? 우리 삶에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한 번사는 인생 속에 왜 이 땅에 고난과 전쟁과 아픔만이 가득 할까요? 인간은 서로 싸우며, 원망하며, 미워하며, 갈등 속에 살아야 하나요? 우리 마음은 왜 이리 격렬한 전쟁터로 날마다 남아있습니까? 탄식의 절규가 나옵니다.
이 땅에 진정한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통령이 바뀌는데 있을까요? 한반도가 통일되는데 있습니까? 각 자가 꿈꾸는 그 이념과 신념이 이루어지는데 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이 한반도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습니다. 한국인의 철학 속에 깊게 잠재된 불교도, 조선왕조 500년을 이어온 유교도 열강의 패권다툼 앞에 이 한반도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일본의 합방이 시작되고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절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나라의 이 소망은 이 땅에 절망한 젊은이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포기한 희망의 노래가 이 땅에 다시 울려 퍼지게 만들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주신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이 소망이 3.1운동이 되고, 이 소망이 기독교학교가 되어 미래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고, 이 소망이 우리민족의 패배적인 사고와 절망을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이 땅에 다시 소망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하나님나라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의와 희락과 화평의 나라말입니다
이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바로 야고보로 하여금 어두운 이스라엘의 역사 앞에 새로운 삶을 써가는 회복의 역사요 치유의 역사요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 오랜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가 체포 되었을 때 그를 기소한 최고담당관이 야고보의 용기와 그 자제력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 분명한 믿음에 감동되어 자신도 세례받기를 간청하여 교회의 일원으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다가 결국은 야고보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굳건히 붙들고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위해 나의 삶에 물질과 시간과 힘을 사용한다면 내가 구태여 남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삶을 일으켜 세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한 사람 존 번연의 삶은 오고가는 역사 속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시간과 공간속에 새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눈물과 가꾸는 희생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야고보처럼 그 일군으로 쓰임 받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잃어버린 내 삶의 꿈을 찾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버리십시오. 내가 원하던 것, 내가 익숙한 것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따르십시오. 주님의 말씀과 방법을 나의 삶속에 사용하십시오. 나아가서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갈망하십시오. 이 소망은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놀라운 능력이 됩니다.
찬양사역자인 고형원형제가 ‘나는 꿈꿀 수없는 세상이 싫어요’라는 절규를 남기고 자살한 한 고등학생과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위해 지었던 ‘보리라’ 라는 찬양을 우리가 함께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우리는 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최창훈 목사
본문에서는 제자 중 라이벌이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서로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는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이 갈등을 넘어서서 서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권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 섬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1. 우리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섬김의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섬김의 절정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서 내어 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범을 보이심으로 섬김의 교훈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제자들의 주인과 스승이시기 때문에 친히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심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무릎을 꿇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요13:14-15절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지체된 우리는 마땅히 교회 공동체의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과 본질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리더십”을 실험한 후,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가장 건강한 리더십을 가르쳐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라는 그리스도인이 1977년에 출판한 “종의 리더십”이라는 책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가 1996년 “섬기는 지도자 되기”라는 제목으로 재판되어 나온 후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오늘날 전 세계 100대 기업의 약 절반은 사원들의 훈련과정에 “종의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런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셨고, 직접 행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 최초의 완벽한 “섬기는 리더”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명하시고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2.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42절과 43절에서 예수님은 보편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세속적 리더십” 혹은 “권력지향적 리더십”과 주님의 새로운 “섬김의 리더십”을 차별화 하셨습니다.
먼저 4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서 “주관하고”는 말을 표준 새번역 개정판에서는 “마구 내리 누르고”라고 번역하였고, “권세를 부린다”는 말은 “세도를 부린다”는 말로 번역하였고,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리더십의 전형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배하고, 내리 누르고, 자신을 높이는 리더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리더십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 우리 한국사회의 “유교적 리더십”이 바로 이런 계급지향적 혹은 권력지향적 문화를 만들어온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 모임이 어떤 성격의 모임이든 간에 “누가 높은 사람인가?”를 결정해야 그 다음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나이를 따지고, 입사한 연한을 따지고, 학교 선후배 가리는 배후에도 윗사람과 아래 사람을 구별하려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초대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내는 선교편지에서, 한국사람들은 살고 있는 방에도 계급이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상석과 하석, 윗목과 아랫목, 심지어 우리는 인체도 차별하여, 발가락을 천시하여 변변치 못한 사람을 가리켜 발가락도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손도 오른손은 좋은 손이고, 왼손은 안 좋은 손으로 차별을 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언어구조에서도 상대방의 높이에 따라 자신을 칭하는 호칭은 무수하게 변신합니다(소인, 불초소생, 등).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가 누구이든 자신을 칭하는 호칭이 하나이셨습니다.
“인자가....” 이 명칭은 계급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의 역할, 사명을 상징하는 호칭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잘 나타내고 있는 호칭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자리가 중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역할과 사명이 중요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상들을 자랑을 할 때도, 그가 한일은 말하지 않고 그의 벼슬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무슨 참판이셨고, 무슨 정승이셨고, 무슨 장관이셨고 라고 말할 뿐이지, 그때 그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기여를 했는지, 어떤 섬김의 삶을 살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행복한 교회로 변화되려면 어서 속히 “섬김의 리더십”으로 우리 성도들의 리더십에 대한 체질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세상과 다른 리더십을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 43-44절에서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3. 고난 후에야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섬기기를 싫어합니까?
섬김은 우리에게 고난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산모가 애를 낳으면서 소리지르는 비명은 절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비록 산모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그야말로 곁에서 듣기가 민망할 정도로 고통 하는 모습이지만 그 마음에는 새 생명을 품에 안을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을 안고 비명을 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난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잠시의 고난을 견딜 수 있다면 성경은 섬기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① 몸의 영광(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같은 새 몸으로 갈아입게 됨), ② 신분의 영광(겉모습이 같아진다는 것보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지고 계신 신분과 거룩을 함께 나누는데서 예수님과 같아짐), ③ 사역의 영광(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면서 그 광체 아래 살면서 주님과 함께 다스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섬김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보편적인 실망이 있다면 그것은 섬김의 보상이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력의 대가가 빨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절하고 원망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이런 약속된 영광을 분명하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4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보상은 “내가(예수님이) 임의로 주기보다는 스스로의 섬김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묵묵히 고난을 견디고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37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우리에게 영광의 자리를 보장해 달라”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먼저 마실 잔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마신 고난의 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고난의 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현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도 먼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후에 예수님은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과 하나가 되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마다 먼저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섬김이란 땀흘림이요, 희생이요, 헌신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섬겨야 할 이유는 고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몸의 영광, 신분의 영광, 사역의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섬김도 고난도 끝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섬김은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차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섬기다가 주님 곁으로 가야할까요?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섬김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주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얻기 위해 어떻게 드려지는 섬김의 삶이기를 소망하십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 있는 삶을 살아가 가기 위해 전도의 삶과 나눔의 삶과 섬김의 삶,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적인 가치관
김홍도 목사
붉은색 안경을 쓰고 보면 모든 것이 붉게 보이고, 푸른색 안경 쓰고 보면 모든 것이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육신적인 관점에서 보느냐, 영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그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심령의 눈으로 보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
미국에 한 부자가 죽기 전에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내가 죽거든 황금관 속에 내 시신을 넣어서 묻어달라”고 하더랍니다. 그 소원대로 해주긴 했는데 과연 가치 있게 산 사람일까요? 반면에 술집과 도박장을 해서 큰 부자가 된 한 사람이 젠킨스 목사님을 찾아와 자기의 불행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를 예수님 믿게 하고 기도해주면서 성경을 읽으라고 지시해주었더니 다음날 전화가 왔는데 “오늘 아침 목사님이 지시하신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빛이 제 영혼에 가득히 비쳐왔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에게 제 마음을 바치고 그 분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며칠 후 그집 앞을 지나다 보니까 비싼 고급 가구를 실어 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고급 가구를 실어 내가느냐?”라고 물으니까 “나는 술을 팔아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저주스럽습니다. 나는 술을 팔아 번 돈으로 산 물건을 몽땅 팔아 없애버리고 나와 내 아들에게 내릴 저주를 걷어치우려고 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치의 표준을 돈을 얼마나 소유했느냐, 얼마나 높은 벼슬을 가졌느냐 등에 두고 판단하지만 영적인 가치 판단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 무엇을 했느냐 보다 무엇이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일을,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느냐에만 관심을 가지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먼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 변화된 사람이 먼저 되면 좋은 열매, 좋은 행실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즉 doing이 먼저가 아니라 being이 먼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7)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It is not important what you do, but what you are). 또 어느 목사님은 “네 인격이 너무 크게 말하기 때문에 네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귀에 들리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What you are speaks so loud that I can not hear what you say).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먼저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속사람 즉 영혼이 거듭나지 않았는데 무슨 사회 개혁이 있으며,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까?
18세기에 폭삭 썩어 문드러진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구원한 요한 웨슬리는 사회개혁이나 혁명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환심을 사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심판과 지옥 설교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를 구원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2. 얼마나 소유했느냐보다 어떻게 썼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벌고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에 관심을 두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바로 썼느냐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번 돈을 count하시지 않고 쓴 돈만 count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땅 위에는 많은 재물을 쌓아두었지만 하늘에 보화를 쌓아둔 것이 없어서 이 다음에 빈손 들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사람이 죽을 때 움켜쥐고 가져가는 사람은 그가 사는 동안에 가치 있게 버리고 준 사람이다”(When a man clutches in his hands that he has given away during his life time)라고 했습니다. 생전에 수백 억 수천 억의 돈을 벌었어도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만 위해서 써버린 사람은, 또 음주, 도박, 음란 등 육신의 쾌락만 위해 탕진한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은 받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바치지 못하고 써둔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상급이나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어떤 현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소유하는 데만 흥미를 가지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 데는 흥미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되어야 할 사람이 먼저 되고 나면 가져야 할 것을 소유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유에만 집착해 있는 부자 청년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0:21)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청년은 세상 것을 포기할 용기가 없어서 엄청난 축복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 것을 포기하고 바르게 사용할 때 자기 존재(being)를 변화시키고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생활에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큰소리치며 섬김을 받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 줄로 알고 있지만 성경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생활이 더 가치가 있고 정말로 높아지는 비결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인데도 종의 몸을 입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들의 주와 선생이지만 너희들의 발을 씻어주지 않느냐 너희도 이렇게 남을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높은 자리에서 남을 부리고 많은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는 것이 성공인 줄로 알지만 주님은 남을 섬기는 것이 더 가치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생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께 특청을 드렸는데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절)라고 했을 때 “십자가의 쓴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2-44절) 즉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캘빈은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참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항상 높아져도 낮은 자같이, 부자가 되어도 가난한 자의 마음을 가지고, 많은 지식과 학위를 가져도 그렇지 못한 자같이, 칭찬 들을 만한 일을 했어도 그렇지 못한 자같이 여기며 항상 자기를 낮추는 생활, 섬기는 생활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생활이 보다 가치 있는 생활이며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생활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 육신보다 영혼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식물의 뿌리와 같고 계란의 노른자와 같습니다. 육신은 잠깐 동안 존재하다가 흙으로 변하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혼이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영원히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느냐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과 형벌의 세월을 보내느냐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이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다시 태어나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지옥 불못에 들어가는 것),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육신 한번만 죽었다가 부활하여 영원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육신보다 영혼이 억천만 배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3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때로 영혼이 구원받고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 일시적인 육신의 고통을 가할 때가 있고 물질생활에 실패를 허락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많은 물질을 희생해서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영혼 구원보다 더 큰 일이 없고 영혼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전에 미국 플로리다의 나울린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회에는 신앙이 아주 돈독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주 헌신적이고 교회학교 총무 일도 잘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그 청년의 사업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업이 자꾸 번영해서 십일조가 한 주일에도 수천 불씩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너무 바빠서 교회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도시에 지점을 내게 되었고 이 지점, 저 지점 돌아다니느라고 주일 예배를 자꾸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십일조는 꼭 보내곤 했는데 나중에는 형식적으로 헌금을 조금씩만 드리고 십일조도 안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찾아가서 “존, 자네는 예배에 계속 불참했어. 자네는 하나님의 일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고 온전한 십일조도 안 드리고 있네”라고 충고하자 “목사님, 다른 사람은 한 주일에 100불도 못하는데 그만큼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상점들 때문에 교회에 출석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자 목사님이 “존, 함께 기도하세” 하고 두 사람은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께서 존에게 지나친 번영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너무 많은 사업을 주셨습니다. 존은 지나치게 성공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존은 주님께 너무 많은 십일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그의 영혼이 먼저 잘 되기 위해서 그의 상점 몇 개는 불태워 주옵소서. 그리고 상점 몇 개는 실패하여 문을 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존으로 하여금 그렇게도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며 일하던 옛날의 그 사람으로 되돌아오도록 그의 사업의 얼마를 거두어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존은 떨기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이곳에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죄를 완전히 고백했고 목사님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과 같이 충성하는 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목사님도 존의 영혼을 육신의 사업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 은사
이병일 목사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날에 예수님의 좌우에 앉기를 희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이 반발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방인들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고관들은 그들에게 권세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 사이에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면 너희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하여, 그리고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몸값으로 자기의 목숨을 주기 위하여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섬기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섬김으로 번역된 말이 바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이 디아코니아는 “섬김, 봉사, 구제, 선교”라는 뜻이고, 역시 사도적 교회의 중요한 기능으로 여겨졌습니다. 디아코니아는 본래 초대교회에서 애찬을 나눌 때 음식을 날라다 주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구제로서의 디아코니아는 유대인 전통에 나타나는 ‘짜디크’를 말합니다. 짜디크는 본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자 유대인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물질적으로 돕는 일을 짜디크라 불렀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 행위입니다. 이 짜디크가 초대교회에서 디아코니아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추구하며 자리다툼을 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통치자들과는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헬라인들 섬김을 품위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배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섬김은 오직 그것이 자기 자신, 개인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희생이거나 혹은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이해되었을 뿐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비록 이것이 약간의 포기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자기희생적 섬김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지배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으로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목숨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주는 것은 대속이며, 이는 교회의 선포(케리그마)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선포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디아코니아는 단순히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행 6:1)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넓은 의미로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고전 16:15; 계 2:19; 엡 4:11-12),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하고(롬 11:13; 고후 4:1; 딤후 4:5; 골 4:17), 심지어 모금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롬 15:31; 고후 8:1; 행 11:29-30). 디아코니아를 현대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선교’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공동체 내적인 일을 넘어서 외부에서도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모든 것을 디아코니아라고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선교하는 것, 이 모두가 디아코니아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섬기는 사람은 디아코니아를 행하는 사람이며, 번역하면 ‘집사’(deacon)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집사직을 받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역사에서 소중한 순간으로 간직하고, 처음 받은 집사임명장을 소중히 간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사직을 받았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것은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집사직을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면서 스스로의 자격을 낮추며 거절하거나, 교회의 직제에 편입되거나 형식적인 절차가 싫어서 거부하기도 합니다. 모두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은 다 보살이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집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집사라는 말이 교회 내의 직분이나 직책, 조금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교회라는 조직체계 중의 한 단계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지만, 원래의 의미는 그 행위에 강조점을 두어서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낮추어 봉사자이며 종이 된 예수님의 섬김의 절정인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가 그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섬기는 행동의 결과였습니다. 섬김이 목적이 될 때에는 자칫 의무적으로 이행하게 되는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섬김의 행동은 적당한 의무감도 있어야 하겠지만, 전적으로 자발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를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일할 때에 그 일이 절대적 명령에 의한 의무로 다가온다면, 쉽게 지치게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루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방문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고 마르다는 사람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시중드는 일이 너무 벅차서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시중드는 것을 도와주라’고 말해주기를 부탁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에 대하여 염려하며 어수선하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고, 그녀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일화를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특히 마르다와 마리아의 행동을 정형화하여 삶의 유형을 분류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마르다는 능동적-세상적이며 마리아는 관상적-수도원적이라고 한다거나, 마르다는 동적 성격이 강한 활동가이며 마리아는 정적 성격이 강한 명상가로 묘사한다거나, 마르다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율법주의이며 마리아는 믿음으로 의롭게 인정되는 칭의에 비유한다거나, 마르다는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실천하는 신앙 양태를 마리아는 겸손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신앙 양태를 대표한다고 분류합니다. 분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선행되고 우위에 있는 지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화는 사람의 성격 유형이나 삶의 전형, 남성과 여성, 교회의 기능을 구분하고 어떤 것이 더 중요하며 우위에 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태도에서 대조가 되는 것은 ‘많은 일’과 ‘한가지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마리아에 비하여 마르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 많은 일에 경황이 없어 마음을 빼앗긴 것이며, 맡겨진 너무 많은 일에 대하여 염려하며 어수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하고 있는 시중드는 일(디아코니아)에 대하여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디아코니아를 감당하기 위하여 염려하며 마음을 빼앗긴 마르다에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말라는 위로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너무 많은 일에 매달려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에 대하여 마르다의 선택이 좋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몫은 ‘올바른 관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일이 맡겨지는 것은 공동체에서 올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도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며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그리고 너무 많은 일을 맡김으로써 걱정하며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에게 필요한 것 한 가지씩, 좋은 몫을 감당하라. 그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올바른 관계가 될 것이다.” 라고 들립니다. 누가 공동체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좋은 몫을 감당할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마다 각자의 은사(카리스마)에 따라서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교회는 그 구성원 하나하나가 받은 은사대로 자기의 자리에서 행동할 때에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다양한 활동을 서로 인정해 주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야겠죠. 예수님의 디아코니아는 그의 고난과 죽음을 초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갔던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불의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위한 집사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같이 작은 사람이, 나같이 무능력한 사람이,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처럼 어린 사람이, 나같이 늙은 사람이, 나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되고 망설이게 됩니까?
그러나 강남향린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은 이미 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의 디아코니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작은 몸짓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이 또다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여러분들의 작은 참여가 강남향린의 모습을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은사를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 자기가 받은 은사를 따라 행동하는 여러분은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습니다
김형준 목사
슈테판 밀러라는 독일인이 이상한 사진을 한 장 발견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종목에서 두 사람의 동양인이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 자리에 서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메달리스트에게서 볼 수 있는 감격과 기쁨 대신 침통한 표정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슈테판 밀러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을 그 사진에서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슈테판 밀러는 사진의 두 사람을 추적하게 되었습니다.
1988년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성 때 백발이 성성한데도 세 살배기 아이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복하게 달리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1936년,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던 메달 리스트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88올림픽 이후 4년 뒤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몬 주익 언덕에서 일본과 독일선수를 따돌리고 한국의 황영조가 우승하였습니다. 황영조 선수는 시상대의 감격을 그대로 안고 관중석에 있던 한 노인에게 금메달을 드리며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관중석의 할아버지는 56년 전에 웃었어야 할 함박웃음을 그제야 가득 머금고 즐거워하셨습니다.
바로 이분이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손기정 선수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 옆에 섰던 분은 동메달을 딴 남승용 선수였습니다. 그들은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목표로 하는 금메달을 얻고도 왜 침통한 모습으로 섰어야만 했을까요? 개인에게 뿐 아니라 국가의 명예였는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용 선수에게는 금메달보다도 더 소중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국의 해방이라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우승의 기쁨은 56년 뒤, 그들의 후배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딴 후에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남다른 꿈이 그들로 하여금 가장 기뻐해야 할 때 가장 슬픈 장면을 연출하게 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본문 앞 문단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대신해서 사역을 계속할 제자들에게 아마도 해 주고 싶은 말씀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과 가까운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조용히 찾아옵니다. “예수님,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왕으로 오르실 때 저희 두 사람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세워주십시오!” 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구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질문하시며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❶ 진정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우리는 좀더 높아지고자, 좀더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철학자 니체는 사람들의 본능 속에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주도권을 잡느냐 아내가 주도권을 잡느냐를 두고 갈등이 있습니다. 정치 분야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서 조차 영향력 있는 자리, 존경받는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들만의 게임일까요?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이런 욕구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것만 구하지 말고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을 구하라.”하십니다. 잠시 잠깐 땅에서 누리는 존귀한 자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 보좌 좌우편에 앉아 영원히 누리게 될 그 자리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다른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❷ 진정 사모해야 할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며 주님이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즉 주님이 말씀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시피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처럼 파멸과 분열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제자들이 택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이 땅에서는 혹시 가능할지라도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과 좌편의 자리는 얻지 못합니다. 이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앞서 말한- 중에 오늘 특별히 집중적으로 생각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 좌우편에 오를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앞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주님 보좌의 좌우편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세우는 사람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45절 말씀을 보시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언뜻 보면 섬김에 대한 말씀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존재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본문의 전체 주제 구절일 뿐 아니라 마가복음 전체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끝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부활하여 승천케 하사, 모든 이름이 그 이름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드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각각 좌우편에 세워 달라고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왜 화가 났습니까?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어느 자리에 앉든지 분할 일이 없습니다. 누가 앉든 축복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화를 내고 논쟁과 말다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모두들 마음속에 권력에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의 욕망에 근거하여 사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고자 합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기도문 중에 ‘이번 크리스마스에는’이라는 기도문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부디 얼어 죽을 만큼 춥게 하소서.
그래서 너무 추워서 세상의 닭살 커플들이 밖에 절대 싸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소서.
추워도 옷 꾸역꾸역 껴입고 기어 나오는 커플들이 있을지 모르니.
지하철, 버스, 택시 싸그리 파업하게 하소서.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게 하소서.
그래도 서로 연락하려는 커플들이 있을지 모르니
휴대전화, 집 전화 다 불통되게 하소서.
그래서 안절부절 못하게 하소서.
자가용 커플들이 있으니
일주일 전부터 물가가 100배정도 뛰게 하소서.
그래서 600원하던 커피 한잔이 60만원하게 하소서.
돈 많은 커플들이 있으니
오후 7시를 기점으로 교회를 제외한 시내 모든 점포들이 정전되게 하소서.
그래서 카페, 술집, 나이트클럽, 음식점, 극장 다 깜깜하게 하소서.
그래도 싸돌아다니는 커플들이 있을지 모르니.
만나면 사소한 걸로도 머리 터질 만큼 싸우게 하소서.
그래서 집에 그냥 들어가게 하소서.
올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눈 내리지 마소서.
눈마저 내리면 내 눈엔 피눈물이 납니다.
올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낮에 자다가도 벌떡 깰 만큼 TV에 재미난 것만 하게 하소서.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했던 재방송은 하면 안 됩니다.
올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잠 많이 자게 하소서.
오후 일곱 시부터 스스로 잠들어 중간에 깨지 않고 다음날 아침까지 논스톱으로 잠들게 하소서.
차라리 잠들어 있고 싶은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 마음속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한, 다시 말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축복하지 못합니다. 물론 육체를 가진 우리는 남들이 잘 될 때 축복하지 못하고, 내가 못하는 것은 남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위한 사람들은 신앙생활과 생각, 행동에 있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위한 삶인가 하는 목표에만 초점이 있습니다.
미국 인디언 초기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던지, 어떤 고생을 하던지, 그리스도를 위해 영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겠다.’ 고 고백했습니다.
땅에서 얻는 높은 지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도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왕 욕심을 가지려면, 더 큰 욕심을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동기를 확인해 보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십시오! 하나님 보좌 좌우편의 자리는 바로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 보좌 좌우편에 앉아서 영광을 누릴 사람은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38절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질문하십니다. 주님을 따를 때에 받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느냐?
사실 야고보와 요한은 고난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것만 생각했지만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말씀을 좇는 결과로 따라오는 고난과 역경에 대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혹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가고자 몸부림치는 선한 자존심을 가진 삶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다고 후손들이 전합니다. 순교 직전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로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육신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집으로 가지 않고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일본고등계 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를 토하듯이 마지막 설교를 하셨습니다.
“나는 이 순간, 다섯 가지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두 번째, 장기간의 고난을 잘 견디게 하소서. 세 번째로, 나의 노모와 처자와 사랑하는 교우들을 주님 돌봐 주시옵소서.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주기철 목사님은 오래 살거나, 위대하게 사는 삶에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삶 속에 십자가 주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 변치 아니하도록, 죽음 앞에서도 변절치 않도록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를 믿기에 당하는 고난을 감당하며 끝내는 주의 영광 위해 살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결국 승리자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작은 장애에도 신앙적으로 타협합니다. 날씨가 안 좋으면 주일날 주님 앞에 나오는 시간을 쉽게 생각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도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조그마한 갈등과 다툼이 생기면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 없다!’고 합니다. 고난 앞에 너무나 무기력한 우리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말씀하십니다.
예수 믿으면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 교회 한 형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학교 공부만 하다가 직장생활을 해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어요. 세상이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도록 만들지를 않네요.” 형제의 갈등을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셔야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감당하는 자가 주님 나라의 영광스런 자리에 세워진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보좌 좌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섬기는 삶을 삽니다.
43절, 44절 말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 사람들은 남을 부리기 좋아합니다. 권세 갖기를,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곳에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 다른 사람을 통치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자리는, 오늘 내가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자리와 힘을 포기하고 되레 섬기는 모습에서 준비됩니다.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주님은 제자들과 식사 하시던 자리에서 친히 내려오셔서 세숫대야를 놓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바로 종이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종처럼 섬기며 살았던 예수님을 하나님은 얼마나 높이셨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처럼 너희들도 이렇게 하여야 하리라”
주님은 복음을 섬김이라는 그릇 속에 담기 원하셨습니다. 153전도 운동 때의 일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가 그 가정의 아이를 정성스레 돌보았고, 성도의 사랑에 감동된 두 분은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입구에서부터 “저리 가시오.” 저리가면 이리가라 몇 번 반복한 끝에 다시 돌아갔다 합니다.
섬김이 없는 곳에는 복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섬김은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오늘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을까?’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눈, 상대방의 영혼과 내면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야 됩니다. 그 후에 우리 손을 뻗어 행동으로 옮길 때 ‘섬김’이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권면하십니다. 정말 욕심 있는 사람이라면 영원히 누릴 하나님 나라에서 귀한 자리에 앉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귀한 자리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따라가는 데에 따라오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 얻을 것입니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슬픔이 1992년 황영조 선수가 획득한 금메달로 인해 기쁨과 환희로 변했듯이, 주님 재림하셔서 남이 알지 못했던 우리의 섬김과 고난을 갚아주실 소망을 품으십시오. 이 땅에서가 아니라, 진짜 위대한 야망인 하나님 나라에서 그 빛난 자리를 누리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