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의 기본적인 의미는 결재권을 가진 사람이나 단체가 안건을 허락하여 승인한다는 뜻이다.
언어는 의식의 반영이지만 거꾸로 의식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걸 ‘빅브러더’는 잘 알고 있다.
언어는 퇴행하기도 한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중세 영어 ‘queynte’가 거리낌없이 등장하는 걸 보면 당시의 성 관념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의 지은이 필립 구든은
“방귀(fart)와 소변(piss)처럼 표준 영어와 금기어 사이의 중간 지대에 있는 단어에 대해 현대인은 선조에 비해 더 내숭을 떠는 경향이 있다”
고 말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재가’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의 임명을 ‘재가’했다는 보도도 나온다. 자기가 ‘내정’해 놓고 자기가 ‘재가’하는 꼴이다.
청와대 발표를 언론이 그대로 받아쓴 탓이다.
재가는 ‘왕이 직접 어새를 찍고 결재하여 허가하던 일’을 뜻한다.
군사독재가 종식된 뒤로는 거의 쓰지 않던 말이다.
민주주의의 퇴행과 함께 언어도 퇴행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사라졌던 ‘각하’라는 호칭을 연거푸 세 번이나 외쳤던 사람의 총리 임명을 ‘재가’한 걸 보면, 박 대통령의 생각을 짐작할 만하다.
레이코프 식으로 말하면, 왕조시대 혹은 독재시대에 대한 ‘과다인지’의 사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