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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 읽기
잣나무와 나 / 오규원
뜰 앞의 잣나무로 한 무리의 새가
날아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래도 잣나무는 잣나무로 서 있고
잣나무 앞에서 나는 피가 붉다
발가락이 간지럽다
뒷짐 진 손에 단추가 들어 있다
내 앞에서 눈이 눈이 온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몸이 따뜻하다
잣나무 앞에서 나는 입이 있다
식빵과 소리 / 오규원
식빵을 얇게 썰어
살짝 굽는다
한 조각 위에
버터를 바르고
한 조각을 덧쓰워
종이 냅킨으로 감싸 쥔 뒤
아, 하고
입가득 넣고 깨문다
바싹!
오후
그리고
4시
봄과 밤 / 오규원
어젯밤 어둠이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더 만들어
매달아놓았네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하나 붙여놓았네
4월과 아침 / 오규원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봄과 나비 / 오규원
나비 한 마리 급하게 내래와
뜰의 돌 하나를 껴안았습니다
베고니아와 제라늄 / 오규원
햇살 환한 베란다의
창턱에는
베고니아와
아이비 제라늄
그리고
캡이 찌그러진
브래지어
산과 길 / 오규원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여자와 굴삭기 / 오규원
밭에서 일하는 여자의
치마 밑까지 파며
굴삭기 소리 천천히 강을 건너온다
새와 그림자 / 오규원
딱새 한 마리가 잡목림의
산뽕나무에 앉아
가지를 두 발로 내리누르고 있다
딱새의 그림자도
산뽕나무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가까운 줄기에 바짝 붙어 있다
나무와 허공 / 오규원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겨울 a / 오규원
콩새가 산수유나무 밑을 뒤지고
오목눈이들이 무리 지어 언덕에서 풀씨를 뒤질 때
식탁 위의 감자튀김(올리브유에 튀긴)
내가 뒤지는
겨울 b / 오규원
배추김치를 텃밭 한구석에 묻고
파김치를 그 옆에 묻고
언덕에서는 잡목림 밑에
발자국을 묻고 있는 지빠귀
고요 /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여름 / 오규원
강변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집배원이
소변을 보고 있다
물줄기가 들찔레를 흔들면서 떨어진다
근처에 있던 뱀이 슬그머니
몸을 감춘다
강은 물이 많이 불었다
오규원(吳圭原) / 1941년 ~ 2007년 (경남 밀양 출생)
관습적 이해에 반기를 드는 날 이미지의 시
1965~1968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1965년)가 초회 추천되고, ‘몇 개의 현상’(1968년)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1971 시집 [분명한 사건](한림출판사)
1973 시집 [순례](민음사)
1975 시선집 [사랑의 기교](민음사)
1976 시론집 [현실과 극기](문학과지성사)
1978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문학과지성사)
1981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문학과지성사)
1982 현대문학상 수상
1983 시론집 [언어와 삶](문학과지성사)
1985 시선집 [희망 만들며 살기](지식산업사)
1987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문학과지성사), 문학선 [길 밖의 세상](나남)
1989 연암문학상 수상. 수상 작품집 [하늘 아래의 생](문학과비평사)
1990 창작 이론서 [현대시작법](문학과지성사)
1991 시집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1995 이산문학상 수상,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민음사),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문학과지성사)
1996 산문집 [가슴이 붉은 딱새](문학동네)
1997 시집 [순례](문학동네) 재간행,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비룡소) 재간행
1998 시선집 [한 잎의 여자](문학과지성사)
1999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문학과지성사)
2002 시전집 [오규원 시전집] 1·2권(문학과지성사), 단행본 [오규원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이광호 엮음)
2003 제3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2005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문학과지성사),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문학과지성사)
https://m.blog.naver.com/link1157/223621160282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동쪽 벽에다 호로병을 걸어둔 지 언제더냐?"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상床다리이다."
"그게 바로 그 뜻입니까?"
"그것이라면 빼가지고 가거라."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앞이빨에 털이 났다"
위에 선문선답은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까닭을 묻는 스님들에게 조주가 한 대답들이다...
이 사물들은 통상적으로 관념적인 설명이 놓여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기 때문에 우리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는다.
https://naver.me/Fjj57kAC
오규원의 날이미지와 시
- 날이미지'시는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의미인 '현상'을 이미지로 하고 있는 세계이다
- 시를 쓰는 젊은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
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예술이란 중도라든지 타협이라든지 모범이라든지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극단에 있습니다는 점에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중도 없고 환호도 없고 독자도 없는 곳으
로 가십시오. 그곳에 자리잡으면 당신의 독자가 새로 창조될 것입니다.
"은유는 유사성에 의한 선택과 대치라는 우리들 사고의 한 축이며 환유는 인접성에 의한 결합과 접속이라는 한 축이다.. 대체적으로 환유를 축으로 하는 언어체계는 사실적이다."--- 15~17쪽
'현상적 사실이 이미지화되면 그것이 바로 '날이미지'"--- 46쪽
"한 시인이 세계를 투명하게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존재를 올바르게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세계란, '나'의 형식이며 본질이며 허상이며 실상이어서 '나'를 가장 잘 비추는 거울인 탓이다. 내가 '나'를 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85쪽
"'날이미지'시는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의미인 '현상'을 이미지로 하고 있는 세계이다.'날이미지시는 '환유'를 인식 코드로 가지며 인식 내용은 '사실적 현상'과 '사실적 환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작품의 수사 코드는 묘사 형태이며 이때 작품의 내용(이미지)형태는 '현상적 사실'과 '환상적 사실'로 나타난다."
-92~93쪽
"예술은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양식을 제거하면 할수록 본질을 구상화할 수 있는 '날이미지'로서의 현상을
만난다."---122쪽
https://m.blog.naver.com/shapespeare/223314926600
생각의 관념성(왜, 분석성, 통일성, 상징성 등)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적 사실을 기술하고자 하는 노력
날이미지와 시
저자 오규원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05.06.30.
솔직한 말: 나는 아직 오규원 씨의 시집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현대시작법>을 읽어봤을 뿐이다. 어쩌면 이 책의 유명세를 생각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현대시작법>은 확실히 여태 읽어본 시에 대한 이론서 중 가장 뛰어났으며, 너무 추상적이지도 않으면서 너무 실용적이지도 않은 한에서 좋은 시란 어떤 것인지,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다룬다. (기초교육 국어 시간에 시를 분석하는 내용에서 정말로 큰 감흥을 받을 학생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시를 읽어볼 생각보다는 아무래도 다른 시론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날이미지와 시>를 읽었다.
<날이미지와 시>는 제목에서 드러내듯 "날이미지"를 다루는 시론이다. 모든 이야기는 이 날이미지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얽혀 있고, 자신의 시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서 이끌려나오는 건 필연적이다.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은 관념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느낀 뭔가는, 결코 그것이 어떤 것을 상징하거나 어떤 도식에 의해 해석되기 때문에 받은 인상이 아닐 테다. 이것은 일종의 현상적 지식으로, 시는 여기에서 시인이 이해한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다. 환유,즉 은유인 의미의 유사성이 아니라 인접성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의미가 배제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해석이 들어간 것을 가능한 한 없애고, 현상에서 상징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남은 가장 분석적이지 않은 "날이미지"가 시에 담긴다.
이는 선불교의 불립문자와 함께 하는 발상인데, 어떤 사물이 어떤 것이라고 정하는 것은 많은 경우 실제로 전달되어야 하는 것을 분리시킨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얽혀 있는 것이라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기는 하는데, 이 글이 '무엇에 대한' 것이냐는 질문을 대답하는 순간 글은 그 무엇에 대한 문제제기와 무엇에 대한 대답으로 말끔히 추려진다. (당연한 공염불을 다시 외자면, 애초에 그 단순한 문답을 위해 글을 읽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시인이 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지식은 여러 관념들의 결합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어떤 시는 무언가를 바라본 순간 느낀 두 전혀 다른 사물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자 했겠지만, 최소한 저자의 시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려면 이미지는 날것이어야 한다.
과연 어디까지 이미지를 날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당연한 질문이 함께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든 판단은 당연하게도 분석적인 인지와 함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날이미지와 시>에서 든 예시를 하나 보자면, 나무가 (사람이 보기에) 멈춰진 것이 아니라 그저 멈춰 있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서 풍경의 표현에 있어 최대한 분석적이지 않은 것을 선사하고자 한다. 하지만 (내 부족한 문학적 감수성과 더불어) 이 날이미지는 사실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날이미지는 시인이 '왜' 이 이미지를 선사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인지적 선택이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보통 그 '왜'를 담당하는 것이 나무가 멈춰졌다, 같은 의인적인 인상이나 다른 시적 표현에 있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우리의 선호는 생각과 함께한다. (그런 양념이 불필요한 이미지도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다른 글에서 소개한 눈 내리는 풍경 속의 한 구덩이에서 막 아기를 낳은 어미 개가 함께 나온 피투성이 태반을 조용히 씹어먹고 있는 광경 같은.)
다만 읽으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해진 책이었는데, 이 매력적인 문학의 세상에서 일부분을 스스로의 부족함 탓에 놓치고 있는 게 많구나 싶었던 탓이다. 나는 자연보다는 인위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그 아름다움은 아마 여기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늘 함께했던 듯하다. <날이미지와 시>처럼 매력적으로 쓴 글에서 정작 알맹이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라 나중에 <두두>를 읽어보려고 한다. 두두물물의 시란 어떤 것일까.
https://naver.me/FhUZuM2L
오규원의 ‘날이미지시’에 나타난 여백의 리얼리티와 환유적 확장
오규원은 ‘물리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반응한 것으로서의 자연’을 시에 묘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묘사는 사실적 정황들과 심리적 음영이 함께 더해지면서 시적 의미를 축조한다. 이 때 축조되는 의미는 관념적인 형태의 해석적 의미가 아닌, 감각적 형태의 표상적 의미로서 은유와는 구별되는 환유적 언어 체계 속에서 드러난다. 시인은 이를 보다 극단적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사실적 묘사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사실’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시를 제시한다. ‘사실’의 한 극단에서 그 ‘사실’의 의미는 그때부터 다시 발생한다. 시에서의 사실은 그것이 비록 ‘즉물성’을 내세운다고 해도, ‘즉물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오규원의 산문과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관심을 기울인다. 오규원에게 사진은 다른 재현 체계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진은 인간의 부재 상태에서 자동으로 형성되는, 기계가 갖는 객관적인 결과물이다. 사진 속의 지시대상은 존재의 자국 그 자체로서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는’ 사실적인 세계이다. 오규원이 말한 ‘사실을 사실로 읽을 수 있는 시각’은 인간 의식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서이다. 사진가에 의해
1) 의도적으로 구성되지도 또한
2) 인과관계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3) 세부로부터 날아오는 우연성은 지극히 주관적인 주체의 의미를 불러온다.
이로써 기계적 재생의 결과인 현존의 세계는 관객에 의해 곧 무엇으로 채워질, 의미적으로 텅 빈 여백의 이미지가 된다. 사실적 세계를 담는 여백의 시는 의미를 방출하는 발신기호가 아닌, 응시자의 주관적 경험과 상상적 의식작용을 받아들이는 수신기호이다. 오규원이 말한 ‘환유’라는 개념은 시(사진)의 생성원리와 수용층위를 모두 관통한다. 시인이 사진적 구조에 기초한 날이미지시를 통해 주목한 것은 시에 반응하는 자(읽는 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신 현상학이었다. 오규원이 관념 배제를 위해 나아간 날이미지시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사실적인 것으로서의 즉물성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반응하는 독자의 정신적 현상으로서의 환유적 확장의 힘이다. 이러한 날이미지시는 작동하는 자와 바라보는 자의 관계 속에서 의미의 들고남으로 세계와 호흡하는 생성의 이미지가 된다. 굳어 있지 않은 ‘살아 있는[生] 언어’는 여백의 미학이 일으키는 환유의 힘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