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 스님 하면 또 만주 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수월 스님이 그 사납기로 소문난 만주 개 무리를 만난 곳은 회막동 두만강 부근, 중국명 하전자(下甸子)에서 수분하(綏芬河)로 가는 길목에 있는 왕청(汪淸)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잠이 없던 수월 스님은 밤낮없이 길을 걸었다. 그 때 만주 땅에는 마적이며 비적 떼들이 많았다고 한다. 마적들은 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수백 명씩 떼 지어 다니면서 일정한 지역을 점령하여 주민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곤 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불침을 놓기가 일쑤였고 이불이든 살림도구든 보이는 대로 빼앗아갔다.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갔다고 한다. 이 같은 마적이나 비적들의 세력은 흉년이 들면 더욱 성행했는데, 그것은 먹고 살길이 없는 농민들이 그들의 집단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무리들로부터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밤이 되면 몸집이 크고 용맹스러운 만주 개를 마당과 거리 곳곳에 풀어놓았다.
이 개는 만주에만 있는 별난 개였는데, 지금은 종자가 끊어졌는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개들은 마을사람들은 절대로 물지 않지만 밤에 마을로 숨어들어오는 낯선 사람이 있으면 떼로 덤벼들어 여지없이 물어 죽이곤 했다고 한다. 어찌나 날쌔고 용맹스러운지 한번 물면 결코 놓아주지를 않아서 이들을 물리치려면 총으로 쏘아 죽이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야밤에 떼로 몰려드는 개들을 정확하게 맞추어 잡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총을 가진 마적떼도 더러 만주개의 표적이 돼 물려 죽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때 왕청 일대는 마적떼와 비적떼들이 자주 나타나던 곳이었다. 그런데다가 호랑이가 나타나 가끔 사람을 해치는 경우까지 있어서 사람들은 어지간히 바쁜 일이 아니면 밤길은 아예 나서지도 않았다.
그래서 밤에 어느 마을을 들러 지나가는 나그네는 미리 그 마을 촌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 집집마다 개들을 풀어놓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특별히 잘 아는 사이가 아니면 이런 부탁을 거절당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풍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월 스님은 밤낮없이 길을 걸을 뿐이었다. 낮에는 무리를 이룬 조선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밤에는 조선 사람들이 말려도 한사코 홀로 걸었다. 삶과 죽음을 던져버린 지 오래인 수월 스님에게는 두려움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개척 당시, 간도 땅에 자리 잡고 있던 마을들은 대개 수십 리씩 떨어져 있었다. 마적, 호랑이, 비적, 만주 개의 위험에 대한 대비는 그 무렵 간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여행 상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간도에서 몇 해를 지낸 수월 스님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으리라. 때는 가을, 차고 맑은 간도의 달빛이 거침없이 걸어가는 수월 스님의 발 뿌리를 환히 밝혀주고 있었다. 수월 스님은 아무도 기다리는 이 없는 북녘의 겨울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이런 수월 스님의 발걸음이 왕청(汪淸)의 어느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거리에 나와 마을을 지키고 있던 만주 개 한 마리가 허공을 향해 길게 울부짖자 집집마다 묶여있던 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짖어 대기 시작했다. 마을은 금세 피비린내 나는 살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긴장에 휩싸인 마을 사람들은 개의 목을 동여 맨 쇠사슬을 풀었고, 거품을 가득 문 개들은 같은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마적들이 마을을 습격한 것이 아닐까하는 불길한 예감 속에서 숨을 죽인 채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낯선 침입자가 들어선 곳은 동구 입구 밖에서 멀지 않은 곳인지, 개들의 울음소리는 동구 밖에서 멈추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적들과 개들이 대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동구 밖은 조용하기만 했다. 총 소리도, 비명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손에 칼이나 몽둥이 따위를 거머쥐고 조심스럽게 한 사람씩 문 밖으로 나갔다. 마을은 서리를 안고 내리는 달빛만 교교할 뿐 어떤 이상한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금세 무리를 이루어 개들이 뛰어나간 동구 밖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은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고 넋을 잃고 말았다. 동구 밖 수수밭이 있는 큰 길 가에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한 조선 노인네가 가느다란 지팡이에 작은 몸을 기대고 서 있고, 그 앞에는 미친 듯 달려간 수십 마리의 개들이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인네는 별다른 표정 없이 가만히 개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월 스님이 움직이니 개들이 길을 터주고 조용히 배웅이나 하듯이 스님의 뒷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날 밤 뒤에도 만주 개들은 수월 스님을 만나면 한결같이 이런 태도로 수월 스님을 반기고 배웅하곤 했다고 한다.
수월 스님이 마지막 삶을 살다 간 화엄사 부근에서 어린 시절에 수월 스님을 눈으로 직접 본 노인들의 말을 빌리면, 수월 스님을 반기고 따르던 짐승은 비단 만주 개들뿐만 아니었다고 한다. 수월 스님이 손을 내밀면 날아가던 까치도 앞을 다투어 내려앉았고, 수월 스님이 산에 들어가면, 꿩, 노루, 토끼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맹수 가운데서도 가장 사나운 호랑이까지도 자주 스님 곁에 찾아와 마음껏 머물다 갔다고 한다. 왜, 그러한 짐승들까지 수월 스님을 반기고 좋아했던 것일까?
북한산 도선사 청담(靑潭, 1902~1971) 스님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주 개는 셰퍼드(Shepherd)보다 더 무섭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고, 키도 셰퍼드보다 더 큰데, 그 개한테 내가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수백 리 먼 길을 가게 돼서 길을 묻고 싶어도 개가 나올까봐 일부러 다른 곳으로 피해서 산을 넘어서 다니고 그랬습니다. 수월 스님께서 계시던 절 아랫마을에는 조선 사람들이 한 칠백 호쯤, 중국 사람들이 한 삼백 호쯤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말이 수월 노장님 모습이 참 기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옷도 다 떨어져서 빨간 것, 푸른 것, 흰 것들을 아무렇게나 모아 누덕누덕 기워 입고, 짚신도 상주들 신 모양으로 볼록하고 머리에 쓴 것도 이상스럽게 걸레인지 모자인지 모를 정도인 걸 보면 그야말로 죽은 개도 기겁을 해 짖게 생겼는데, 그렇게 사나운 개들이 그 노장님 보고는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월 스님 보고는 무서운 개들도 짖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탐⋅진⋅치의 삼독심이 뿌리째 딱 떨어지면 그와 같이 호랑이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토끼나 노루가 그 사람 앉아 있는 곳에 뛰어 들어오고 그러는데, 삼독심이 그렇게까지 없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 때 나는 나를 보고 자꾸 짖어대는 개를 보고 속으로 참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었습니다.
하루는 이런 광경을 본 청담 스님이 짐승들이 자기를 보고 도망가는 이유를 묻자, 수월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아직 살생심이 남아 있어 그러는 것일세.”
“스님, 어찌하여 살생심을 없앨 수 있습니까?”
“자비심을 기르게나.”
“어찌 하면 자비심을 기를 수 있습니까?”
“자네와 (짐승이)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장삼(스님 복장) 입고 수도하는 중이라면서 개가 짖도록 돼있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다 그 해물지심(害物之心)이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후 청담 스님은 누가 욕을 해도 미소를 짓는 자비ㆍ인욕(忍辱)공부를 하여 ‘인욕보살’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역임하면서도 늘 하심할 수 있었던 것은 수월 스님의 감화 때문이었다.
‘해물지심’이란 생명을 해치는 마음, 곧 살생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누구든 살생하는 마음이 깨끗이 떨어져 버리면, 목숨 있는 것들이 모두 품안으로 들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고 한다. 어찌 짐승뿐이겠는가?
▶수월 스님의 입적 장면
1928년 무진년 여름, 일흔넷이 되던 해 여름 결제를 며칠 앞두고 수월 스님은 나무하기를 마쳤다. 해제 다음날 점심 공양을 끝내고 대중들과 함께 찬 한 잔 마신 뒤 “나, 개울에 가서 몸 좀 씻을 텨”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 쯤 시간이 지난 뒤, 개울가로 빨래하러 간 스님이 부리나케 달려와 숨넘어가는 소리로 수월 스님이 개울가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고 말했다.
목욕을 마친 수월 스님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개울가 바위 위에 단정히 앉은 자세로 입적했다.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수월 스님은 자연스런 결가부좌, 곧게 쭉 편 허리와 가슴, 고추 세운 머리, 살짝 감은 듯한 눈, 야물게 다문 두 입술, 배꼽 아래 함께 포개져 있는 두 손, 닿을 듯 말듯 붙어 있는 두 엄지손가락, 누가 봐도 죽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흡사 더운 여름 날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개울물에 몸을 씻은 노스님이 잠시 바위 위에 앉아 삼매를 즐기는 그런 모습으로 수월은 육신의 옷을 벗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지닌 죽음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리고 불행한 마지막 모습과 비교해 보면, 수월 스님의 이런 당당한 죽음은 하늘과 땅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죽음이 가능한 지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역으로 수월 스님의 자리에서 보면, 사람들의 불행한 죽음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수월 스님은 잠시 인간의 옷을 입고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지내다가 허물 벗듯이 육신의 옷을 벗고 가볍게 길을 떠났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건만, 죽음의 모습만큼 차이가 나는 것도 없다.
수월 스님이 입적한 뒤 밤마다 호랑이들이 떼를 지어 울었고 빛기둥은 밤마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 사람들의 안타까운 삶의 모습, 건강하지 못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수월 스님의 삶과 죽음에서 한 줄기 광명, 결코 끊이지 않는 맑은 감로수 법문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출처] 수월 음관(水月音觀, 1855-1928) 스님 이야기, 작성자 아미산
첫댓글 수월스님은 자신의 수행에 전념을 하신분 같네요 그러나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 깨달음의 벽이 높다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로 중님들은 자신의 수행에 전념을 했을테고 따라가지 못하는 중님들은 수행에 좌절을 했을 것이요 만약에 석가모니부처님이그리 돌아가셨다면 불교는 그 당대에 사라졌을 것이요 그러니 그리 요란한 죽음을 불교인냥 내세우지 말지니 그럴수록 벽은 중생의 마음에서 발심이 사그라질뿐 좋아 할 일이 아니다
그런것도 일러줘야 알아 차릴 정도라면 불교는 지금껏 한 일이 없다 할 것이다
어제는 주인이 소를 몰고 밭을 갈더니만 오늘은 소가 주인을 몰고 밭을 가네요.
2 곱하기 2는 애초부터 4고
9 곱하기 9는 원래부터 81 이였으니
세상의 희야 님들이여 묻노라
누가 저 허공위에 똥막대기 하나를 보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