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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e ; Esperanto
■ opening date ; March 14th, 2015
■ e-mail ; esperanto.ms@hanmail.net
06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카멜은 오전 내내 시름시름 앓았다. 까칠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전혀 동정해 줄 것 같지 않던 파울로는 두 번째 요리를 만들어 와서 그녀를 설득하고 있던 중이었다. 양고기 꼬치구이와 호밀 빵. 토마토소스 토핑이 듬뿍 뿌려진 팬케이크. 게다가 메인 요리 전에 먹을 수 있도록 수프대신 간단한 볶음 요리를 가지고 왔다.
카멜의 뱃속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다. 꼬박 하루를 잠만 자고 일어난 뒤에 알렌을 만났고, 그로부터 전해들은 기괴한 얘기들에 충격받아 밤새 울기만 했으니 기력이 떨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허기져서 움푹 꺼진 뱃가죽이 처량해보였지만 맛있는 음식이 유혹한들 고래 심줄보다 질긴 자존심은 포크와 나이프를 허락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뒤였다.
몇 시간 전, 알렌은 고고하게 깃을 세운 셔츠 위에 카디건을 걸친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곧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베라 루이가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그리고 원한다면 베라 루이를 만나고 가도 좋다고 했다. 그를 만남으로서 자신에게 닥친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게 일깨워주려는 듯 했지만 카멜은 오히려 그런 알렌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난 이미 충분히 상처 받았어!’
카멜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객실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밀 빵을 구웠습니다. 따뜻할 때 드시는 게 좋습니다.”
이번엔 빵에 약을 넣은 건가요! 카멜은 그렇게 따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죠? 알렌은 아직도 루이씨와 얘기 중인가요?”
“치즈를 곁들인 채소볶음은 빈속을 달래기에 적당할 것 같아서 수프대신 준비했습니다. 이번 식단도 부담스러우십니까?”
카멜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집사님. 제가 부담스럽다고 한 건 식단이 아니라 절 신경 쓰고 있는 집사님이에요. 절 좀 내버려두세요.”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급 홍차를 준비했다며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찻잔을 올려놓았다. 파울로는 카멜의 날카로운 시선을 교묘히 피했다.
“고집 피우셔도 득 될 것 없습니다. 전 주인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니까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안 먹어요. 안 먹으니까 그만 두세요!”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뭐라도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카멜이 꿈틀거리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직 카멜 양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계신 주인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사 하는 마음에 드린 말씀입니다. 더불어 제 수고가 부담스러우시다면 조금이라도 맛보시는 게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고집만 피우신다면 아마 루이공작님과의 대화가 끝난 후에도 아가씨를 돌려보내지 않으실 겁니다. 또한…….”
“…….”
“저 역시도 계속해서 음식을 만들어 올 것입니다. 저택 안에 있는 재료를 몽땅 써버리는 한이 있어도 말이죠.”
하얀 캔트지 위에 유화로 그림을 그려 놓은 듯 파울로의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늘어졌다.
“다음 메뉴는 비프입니다. 어떻게 구워드릴까요?”
아연 질색한 카멜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호밀 빵을 집어 들었고 쓴 입맛을 다셔가며 무너진 자존심에 대한 패배를 경험했다. 그녀의 우악스런 행동에 잠시 놀랐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 파울로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났다.
카멜이 겨우 식사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던 11시 경,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렌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어젯밤보다 한층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한손으로 커프스(셔츠의 손목부위)버튼을 잠그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그만 돌아가자.”
그의 헝클어진 금빛 머리칼 사이로 생기 없는 잿빛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그레이엄 대공을 만나고 온 베라 루이에게 뜻하지 않은 말을 들었던지라 마음이 불편한 상태였다. 주머니에 찔러 두었던 스카프 타이를 꺼냈다. 평소 같으면 파울로가 시중을 들었겠지만 서두르는 것을 보아하니 카멜이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급히 나왔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카멜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제게 주세요.”
“아니, 괜찮아.”
힘없는 목소리에 알렌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주세요.”
그가 못이긴 척 스카프 타이를 건네주었다. 셔츠 깃을 세우고 타이를 매기 시작하는 카멜을 보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두 번 다시 말을 섞지 않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터라 그녀의 호의적인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물론 그녀는 아직도 전날 밤의 충격에서 온전히 벗어난 게 아니었다. 지극정성으로 자신을 보살피던 양부모마저 필요에 의해 의무적으로 자신을 양육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했다. 카멜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아버지……, 아니 그 분들의 장례식을 치룬 다음 날부터 자주 악몽을 꿨어요.”
카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 분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나를 그저……. 먹이…… 라고만 생각했던 걸까요? 단 한 번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알렌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멜은 더욱 울컥했다. 무언의 침묵은 긍정이라는 것을 아니까.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마저 타이를 맸다. 제법 그럴듯한 모양으로 타이가 완성됐다. 눈물을 삼키던 카멜이 갑자기 알렌의 가슴 위로 손을 가져갔다. 알렌은 거부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의 왼쪽 가슴 위를 지그시 누르던 카멜이 말했다.
“차가워요.”
잿빛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카멜의 손을 낚아채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잘 들어, 판초.”
그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귓등을 타고 고막으로 흘러들어갔다.
“브릴을 나가는 순간부터 넌 시시때때로 목숨을 위협받게 될 거다. 그게 뱀파이어든, 파수꾼이든 간에 난 용서하지 않고 그들의 목을 벨 거야. 넌 딱 한 가지만 명심하고 있으면 돼.”
알렌이 슬쩍 몸을 떼어내고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이름. 만약 내가 없는 틈에 위험에 빠졌다면 지체하지 말고 내 이름을 말 해.”
“당신의 이름…….”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경비가 따라 붙을 거야. 내 수하들이 곁에 있는 한 함부로 개가 짖는 일은 없을 거다. 널 위협하는 자는 지위를 막론하고 네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겠어.”
소름끼치는 중저음 때문에 카멜은 그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를 원망하고 추궁하는 건 언제든 괜찮아. 다만 네가 멀쩡히 살아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걸 잊지 마. 알아들었겠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공포가 또 다시 그녀를 엄습해왔다. 알렌은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불안에 휩싸인 것을 보았다.
“대답해, 판초.”
카멜은 대답대신 질끈 눈을 감고 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만족한 대답이었는지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였다.
집에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카멜은 활짝 열린 식당 문 사이로 거드름을 피우고 앉아 있는 베라 루이를 보았다. 그가 손을 흔들었지만 못 본 척 지나쳤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마차에 오른 알렌의 목소리는 좀 지쳐있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위험에 노출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특별히 조심해야 될 것? 알렌은 속으로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 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예 브릴에 들어와서 사는 건 어때.”
“브릴에서 살라니요?”
“가까이 있어야 지키기 쉬우니까.”
“베라 루이씨의 부친이라던 그레이엄 대공으로부터요? 아니면 내 목숨을 노리는 정신 나간 인간들로부터 말인가요?”
카멜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묻자 알렌이 창밖에 던져두었던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아이로 베티가 죽었어.”
“아!”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카멜은 머리털이 곤두서고 몸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네가 호의를 베풀어준 헬렌 올가는 그레이엄 대공의 유희 상대와 도너 역할을 해오던 여자였어. 소모성의 가치가 떨어진 만큼 개를 풀어 죽이라고 했던 모양이야. 완벽하게 끝을 내려고 그 여자의 뒤를 쫓다가 같이 있던 의사선생을 처리한 거지.”
현재 헬렌 올가가 행방불명된 상태라는 것과 그레이엄 대공을 만나고 온 베라 루이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의 애완견이 판도라의 냄새를 맡았어.’라고 했던 말을 전했다. 무섭도록 세게 움켜 쥔 주먹이 무릎 위에서 부르르 떨렸다. 카멜은 이제 알렌의 보호가 아니면 목숨을 부지할 만한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한쪽에선 뱀파이어가, 다른 한 쪽에선 파수꾼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아버지 같았던 아이로 베티마저 뱀파이어에게 살해당했음에도 카멜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매 순간마다 이 연약한 몸뚱이가 나락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방법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참혹했다.
문득 카멜은 다른 세상에 오게 된 것 같았다.
하이드 파크를 지나 트라팔가 광장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평소와 다름없이 제각기 바쁘거나, 나른한 표정으로 걷거나, 벤치에 앉아 오후의 한 때를 즐기고 있었다. 템스 강 곳곳에 위치한 피어(선착장)에 수로로 이동할 수 있는 작은 배가 정착해 있었고 짝을 지어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역시 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냈었다. 그러나 이젠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일 뿐 지금의 아샤 카멜은 절대 평범할 수가 없었다.
‘저주인가, 아니면 지나가는 시련일 뿐인가.’ 자문했지만 대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이로 베티의 장례식에 참석해도 되는지는 알렌의 허락이 있어야했다. 다행이 그는 함께 가주겠다고 말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현관문을 열자 여전히 을씨년스런 기운이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지만 벽난로는 피워져 있었다. 알렌은 가만히 현관 앞에 서서 카멜의 초대를 기다렸다. 카멜은 약간의 뜸을 드리다가 문을 활짝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고마워.”
그가 마룻바닥으로 한 걸음 옮겼다. 마침 부엌문이 열리고 닐과 테드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브릴에 쳐들어갈 기세로 카멜을 걱정하고 있었다. 떡하니 거실에 돌아와 있는 카멜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던 두 사람은 그녀의 그림자처럼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망설이고 있을 그녀가 곤란하지 않도록 알렌이 입을 열었다.
“브로이드 공작입니다.”
닐은 훤칠한 키에 남자다우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알렌에게 매료되어 말까지 더듬으며 인사했지만 테드는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소파에 앉았다. 알렌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할 가족들을 위해서, 평소처럼 이웃이나 손님을 접대하듯 행동하기로 한 카멜이 손님용으로 마련해 두었던 고급 홍차를 준비했다. 그러는 동안 테드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집안을 관찰하고 있던 알렌에게 물었다.
“공작님은 누나와 어떤 관계이십니까?”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는 카멜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카멜의 몫입니다. 나는 그저 그녀 곁에 머무는 것뿐이죠.”
“오래전부터 누나와 친분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같이 살고 있는 내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언제, 어디서 만나셨죠?”
10년 전 여덟 살이었던 테드는 카멜이 이곳에 오게 된 게 알렌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시간과 장소는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다시 만났다는 것이 중요하죠.”
테드의 폭풍 같은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하던 알렌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부엌을 나오는 카멜에게 시선을 옮겼다. 날카롭고 온기 없던 눈동자가 그녀에게만은 한없이 따스해 보이자 테드는 왠지 모르게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소중히 그러쥐고 있던 것을 빼앗긴 것처럼 억울했다.
“집주변을 서성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테드가 잠시 말을 삼킨 뒤 다시 질문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말을 묻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말을 걸어도 대답 없이 철저히 무시하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멀리 떨어져서 우릴 지켜보고 있어요. 혹시 공작님이 보낸 자들입니까? 누나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났나요?”
“테드.”
카멜을 따라 나온 닐은 이상한 소리로 손님에게 불편을 드리지 말라고 테드를 나무랐다. 그러자 오히려 알렌은 카멜의 가족이라면 꼭 알아야 할 문제라며 친절한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했다.
“제게 있어서 카멜은 아주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없는 동안 그녀의 안위를 지킬 수 있도록 경비병을 세워둔 것이니 너무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우린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냈어요. 공작님이 나타나신 이후로 위험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틀린 겁니까?”
테드는 아주 똑똑했고, 또 공격적이었다. 닐과 카멜 역시 암울한 침묵을 지키며 알렌의 대답을 기다렸다. 알렌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카멜을 지킬 수 없다는 겁니다.”
압도적인 위압감으로 일관하는 알렌의 확고한 대답은 감히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오고갈 즈음 누군가가 현관을 두드렸다. 알렌을 제외한 모두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할 정도였다. 테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고선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알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 난 카멜이 현관으로 다가갔다. 방문객은 병원에서 심부름을 하는 남자아이였다.
“선생님의 부고소식입니다. 마님이 보내셨습니다.”
시무룩한 얼굴로 편지를 건네던 아이의 어깨를 살포시 두드린 카멜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애써 눈물을 삼키고 간신히 봉투를 뜯었다. 아이로 베티의 장례식이 내일 오전에 있을 거란 내용이었다. 닐이 앞치마 자락을 쥐고 나오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베티 부인이 보내셨어요. 선생님의 장례식이 내일이에요.”
잠시 현관 앞에 서서 눈물을 머금은 흐릿한 시선으로 맞은 편 병원을 응시했다.
카멜은 알렌을 데리고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의 눈처럼 날카롭게 집안 구조를 살피던 그는 카멜의 방 창문 밖으로 펼쳐진 거리와 건물 사이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절대 과하지 않았고 조용했으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침대 옆으로 몇 가지 향수를 넣어둔 수납장을 지나쳤다. 향수제조에 관련된 노트를 발견한 알렌이 조용히 웃었다.
“여전히 의미를 둘 거야?”
카멜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마음 같아선 꼼짝도 않고 침대에 누워서 게으름이나 피우고 싶어요.”
“말했다시피 넌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는 상실감에 빠진 카멜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베라 루이의 말대로 인간이란 정말 감수성이 예민한 동물이었다. 울고 웃는 순간이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알렌은 자비로 똘똘 뭉친 상냥한 표정으로 카멜의 이마에 키스 했다. 그리고는 브릴에서 사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며 조만간 대답을 듣고 싶다고 부추겼다.
집 주변을 에워싼 뱀파이어 경비병은 모두 다섯이었다. 그들의 삼엄한 경비는 혹한의 날씨보다 더 이질적이었다. 경비병을 진두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애슐리라는 여자라는 것 말곤 그들에 대해 그 이상의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경비병에게 철통같은 수비를 명령한 알렌은 가 볼 곳이 있다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저녁 대접을 하려던 닐이 아쉬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동안 테드는 여전히 불퉁한 얼굴을 한 채 뒤뜰에서 나오지 않았다.
“당분간 가게 운영도 쉬는 게 좋겠어.”
카멜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게는 더 이상 나가기 싫었다.
“얼마 전 다우닝 가 근처에 있는 예배당에서 시체가 발견됐다고 하던데. 알고 있어?”
“네. 신문에서 봤어요. 발렌시아 호른이라는 젊은 여성이었죠.”
“그곳에서 캐터코움이 발견됐어.”
“그게 뭔데요?”
밖으로 나온 알렌이 대기 중이었던 파울로에게 고개 짓하자 마차 문을 열었다.
“중세기 때 가톨릭교도가 외부의 박해를 피해 사용하던 지하 성당의 일종이야. 가끔은 땅 속에 굴을 파고 시체를 넣어둔 분묘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해. 루이에게서 정보를 좀 얻었는데, 헬렌 올가는 가끔 지하의 은밀한 장소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즐겼다더군.”
“컬렉션이요?”
“그레이엄 대공을 등에 업고 이중생활을 했던 거지. 꽤 출중한 외모였다고 하니 남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고, 그 짓을 즐기기엔 거기보다 확실한 곳도 없으니까.”
카멜은 멋쩍게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와서 그 여자를 만나는 게 무슨 소용인가요.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카멜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가스등의 주황색 불빛이 그녀의 청순한 얼굴을 아련하게 빛냈다.
“그 여자에게 뭔가 얻어내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라, 아이로 베티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함이야.”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알렌에겐 그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굳이 에반 카멜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일을 설명하기엔 또 다른 부연설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것이 당연했다. 호기심 많은 귀여운 여인이라면 반드시 그러고도 남겠지. 그의 입가가 슬쩍 늘어졌다가 금세 곧게 펴졌다.
“복수를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아름다운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든 네 마음대로 해.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저기…….”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란다, 판초.”
“자, 잠깐만요!”
코트자락을 움켜쥐자 그가 다시 돌아섰고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잡았는지 궁금해 하는 그에게 지금처럼 복잡한 심정을 설명하기엔 언변술이 너무 형편없다는 걸 깨달았다.
카멜은 자기 자신이 선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악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진정 행복하길 바라던 이웃이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면 한 번쯤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카멜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칼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뱀파이어를 찾아다니는 무모한 짓을 했다가는 복수를 하기도 전에 정신병자로 오해받아 병원 깊숙한 곳에 격리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직 베티 부인을 위로하고 아이로 베티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알렌은 그런 자신을 대신하여 복수의 칼을 잡아주겠다고 했다.
“판초?”
야무지게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륵 풀었다. 서둘러 거실로 들어가 외투를 집어 들고 나온 카멜이 말했다.
“저도 함께 갈래요.”
* * * *
예배당 주변은 아직도 경찰수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마치 방금 전에 살인이 일어난 것처럼 출입금지라고 적힌 팻말과 선명한 핏자국이 남은 현장은 지켜보기 힘들 정도였다. 카멜이 고개를 돌렸다. 웨스트민스터 의회의사당 동쪽 끝에 있는 빅벤에서 오후 6시를 가리키는 분침 끝이 보였고 사건 현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다우닝 가의 건물들이 그 아래로 그림자를 늘어트렸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뒤로 거리를 지나다니는 행인도 눈에 띄게 줄어 으스스할 정도로 한적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자 고요한 적막이 회오리처럼 다가와 몸을 둘러쌌다. 소름끼치는 한기에 잠시 몸을 부르르 떨고는 알렌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뚜벅. 뚜벅. 발자국 소리가 텅 빈 예배당 안에 울려 퍼졌다.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모양이에요.”
커다란 십자가와 기둥에 쌓인 매캐한 먼지 냄새가 불쾌했다. 알렌은 한쪽 다리가 부러져 기울어 있던 의자 옆에서 카멜을 멀찍이 떨어트리더니 작은 쪽문을 가리켰다. 파울로가 기다려다는 듯 그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취를 감춘 뒤 몇 분 후 다시 나타난 파울로는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와 사인을 주고받은 알렌이 카멜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쪽문으로 들어갔다. 키가 큰 그들을 비롯하여 카멜까지 고개를 숙여야 간신히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낮은 천장을 따라 긴 복도가 뻗어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잠시 후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파울로가 팔을 뻗어 두 손을 벽에 짚고 있는 힘껏 상체를 숙였다. 그러자 벽면이 통째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흡사 미닫이문처럼 벽이 밀려나면서 반대쪽에선 끈적거리는 바람이 불어와 악취를 풍겼다. 카멜은 반사적으로 알렌의 등에 몸을 기대어 입을 막았다. 덩치 큰 남자 한 명 정도는 거뜬하게 출입할 수 있을 만큼 벽이 열리자 파울로가 다시 앞장섰다.
“내기키 않으면 여기서 기다려도 돼.”
카멜은 힘껏 고개를 저었다. 어둠에 익숙해져서 전등이 없어도 물체를 식별할 수 있었지만 이런 곳에 혼자 남아 있는 건 죽어도 싫었다. 알렌이 다시 손을 내밀며 천천히 따라오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눅눅한 공기가 얼굴에 확 와 닿았다. 이끼로 둘러싸인 바위를 밟는 것처럼 바닥은 푹신했지만 악취는 더욱 심해져서 몇 번쯤 헛구역질이 나왔다. 얼마쯤 걷자 전방이 조금씩 환해졌다. 누군가가 등불을 켜 놓았는지 군데군데 등이 달려 있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동굴 형식의 통로를 걸어가는 동안 양 옆엔 철창으로 입구가 봉쇄된 방을 지나치기도 했다.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지옥에 떨어진 죄수의 절규처럼 들려왔다. 기괴한 신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쫓다가 약속을 한 것처럼 어느 한 지점에서 세 명이 동시에 우뚝 멈췄다.
“파울로.”
알렌의 부름이 끝나기도 전에 파울로는 굳게 닫힌 철창 앞으로 다가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자물쇠를 단 번에 끊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창살 두 개를 긴 타원형으로 구부려 놓았다. 파울로의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어쩜 저런 괴력이 나올까 놀라웠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점토로 만든 인형을 망가트리는 건 쉽다. 그만큼 인간이 만든 장애물 따위, 뱀파이어에겐 대수롭지 않게 부실 수 있는 점토인형 같은 것이었다.
철창은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구부러졌고 안으로 들어간 파울로가 잠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뭔가가 발에 차이는 둔탁한 소리와 꽥, 하고 혀를 깨무는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등불이 미치지 않던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파울로는 장갑을 끼고 있던 손에 무엇인가를 단단히 움켜쥐고 걸어 나왔다. 그것은 알몸인 채로 쇠고랑에 두 손이 결박된 남자였다. 카멜이 질끈 눈을 감고 또다시 알렌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컬렉션 치고는 꽤 추악한 취미로군. 몇이나 더 있지?”
“대략 다섯에서 여섯 명쯤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두 변이했나?”
“인간입니다. 말 그대로 단순한 놀이기구였나 봅니다.”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출입한 시간이 언젠지 확인해 봐.”
“지하 깊숙한 곳이고 빛이 통하지 않아서 시간 개념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저 곧 다시 오겠다고 한 말을 듣고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기다리시겠습니까?”
무척 빠른 속도로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카멜은 알렌의 팔 사이로 정신을 잃은 남자를 살펴보았다. 겉으로 봐선 아주 건강한 체구에 생김새도 반듯했다. 이곳저곳 타박상을 입은 것과 한동안 못 씻었는지 지독한 땀 냄새가 나는 것을 제외하곤 멀쩡했다. 비록 파울로의 손에 머리를 잡혀 기절한 상태였지만.
이런 사람들이 더 있을 거란 소리에 카멜은 숨을 죽이고 주변을 슥 훑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철창마다 하나, 혹은 둘씩 갇혀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구원을 바라는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변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변을 경계하느라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딴 곳을 보며 질문하는 그녀를 돌아보던 알렌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피를 제공하는 인간, 즉 도너는……. 아주 조금씩, 서서히 우리들의 독이 혈관을 타고 흘러 변이하게 돼. 흡혈을 하기도 하고, 인간성은 그대로 있지만 공격적이거나 또 다른 장애를 겪기도 하지.”
“그걸 알면서도 제공한단 말인가요? 그, 그럼 헬렌 올가가 우리 집에 있을 때도 뱀파이어였던 거예요?”
카멜의 목소리가 지하 내부에 퍼졌다가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왔다.
“문제는 자신 역시 갈증을 느끼게 된 후에야 뱀파이어가 됐다는 걸 인식한다는 거야. 이곳을 나갈 때까지 몰랐을 거야. 갈증을 느꼈다면 이 자들을 산채로 남겨두지 않았을 테니까. 추측해 보건대, 그레이엄 대공에게 버려진지 일주일 정도 됐다고 하니 오늘이나 내일쯤이면 완벽히 변이할 거다. 순혈의 독은 빠르고 강하게 중독되니까.”
정수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기도 전에 카멜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파울로, 우린 밖에서 기다리겠다.”
카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낀 알렌이 그녀의 팔을 부축하여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파울로는 철창 안에 기절한 남자를 던져놓고 구부려 트린 철창을 다시 원상복귀 시켰다. 헬렌 올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급습할 계획이었다. 먼지가 묻은 장갑을 털어내던 파울로가 말했다.
“혹시 전리품이 필요하십니까?”
우뚝. 카멜이 걸음을 멈췄다. 파랗게 질린 얼굴 근육이 제 멋대로 꿈틀거렸고 건조한 목구멍 사이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머릿속에선 토막 난 시신의 일부라던가 새빨간 피를 뒤집어 쓴 파울로의 모습이 그려졌다. 헬렌 올가가 이미 뱀파이어가 됐을망정 가죽처럼 부드럽고 종이처럼 약한 인간의 살갗이 맹수의 이빨 사이에서 유린당하는 상상은 참혹하다 못해 지각의 한계를 넘나드는 끔찍한 두려움과 맞먹었다. 정말 이런 식의 복수가 정당한 것인지 카멜은 혼란스러웠다.
“자네의 유머가 먹히지 않는 사람도 있어. 적당히 즐기고 나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카멜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괴수에게 쫓기는 걸음걸이로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갔다. 통로를 지나올 때 뒤따르던 알렌이 몇 번쯤 카멜을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치맛자락을 쥐고 정신없이 뛰어나와 마차에 몸을 밀어 넣었다. 뒤이어 마차에 오른 알렌이 문을 닫고 걸쇠를 걸어 문을 잠근 뒤 커튼을 쳐서 완벽한 밀실로 만들었다. 자꾸만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카멜에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까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한 거야.”
“욱……!”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그가 지친 카멜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겼다. 그의 자상한 태도에 카멜은 다시 꿈을 꾸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이 현실을 꿈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눈을 감자 세상은 온통 암흑천지로 바뀌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의 목에 매달려 흐느꼈다.
미열이 오른 탓에 알렌의 무릎을 베고 누운 카멜은 눈을 감고 그의 옷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얼마간 시간을 보냈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가 없으면 살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은 뱀파이어에게 목숨을 구걸하는군요.”
“아이러니하지.”
“도대체 어느 쪽이……, 진정 종속적인 존재일까요.”
“글쎄. 나도 아주 오랫동안 그게 궁금했어.”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나요?”
카멜의 머리카락 사이를 배회하던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조금씩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늘어트렸다.
“애써 답을 구하고 싶진 않아. 중요한 건, 너로 인해 내가 인간이 되고 싶단 갈망이 생겼다는 거다. 물론 죽어서도 이룰 수 없는 일이지만.”
차가운 알렌의 입술이 카멜의 숨을 막았다. 잠시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은 곧 다시 맞물렸고 열기로 잔뜩 건조했던 카멜의 입속엔 그의 타액이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황홀한 키스였다. 카멜은 문득 그가 죽어서도 이룰 수 없는 일이라면,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면 평생토록 그와 헤어지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까?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알렌의 손이 이제 막 봉긋하게 솟은 카멜의 가슴을 담으려고 할 때였다. 놀란 카멜이 번쩍 눈을 뜨자 부드럽게 웃어주던 알렌은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스윽 닦았다. 그녀가 바른 자세로 앉아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에야 커튼을 걷었다.
밖에는 여전히 점잖은 모습으로 일관한 파울로가 서 있었다. 피를 뒤집어쓰지도, 전리품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충분히 즐겼나, 잭 파울로.”
“예. 유희의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헬렌 올가는 뱀파이어가 되어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인가. 카멜은 미약하게나마 또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고 고개를 돌렸다.
“혹, 또 다른 문제는 없었나?”
좀 더 낮은 중저음이었다. 그러나 파울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에반 카멜에 대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낮게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알렌이 말을 이었다.
“화이트 홀로 가겠다. 오늘은 거기서 묵고 내일 오전에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카멜은 그의 잿빛 눈동자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상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곁에 없으면 불안하고 무서웠다. 10년 전 길가에 버려졌던 그 날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악마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갈취하려고 서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오직 알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파울로가 마차에 올라 고삐를 잡는 순간 지독한 안개 때문에 몇 미터 앞의 시야를 분간하기도 힘든 런던 뒷골목의 음산한 거리 위에 마차 바퀴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렌이 손을 뻗었다. 마주 앉아 있던 카멜은 수 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자신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에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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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구경들 다녀오셨나요? 막바지라서 완전 흐드러지던데. 전 그냥 지나가다 차에서 본 게 전부네요. 흑흑.
봄 기분 좀 내보려고 식탁 의자를 화이트 톤으로 새로 주문했는데 오늘 택배가 온대요.
아 두근두근해요. 흐흐흐흐. 작은 아이템들 몇 개만 바꿔줘도 집 분위기가 확 달라져서 그 재미가 참 쏠쏠해요.
한 주의 시작, 벌써부터 힘들고 지치지만 다들 힘내시고 즐거운 날 되시기를!
오늘도 판도라 정주행해 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몇년 전에 작가님 글 보고 너무 재미있었다가 사라져서 아쉬웠는데 돌아오셨군요!
연재 안 하시나요?ㅠㅠ
안녕하세요, 작가님.
잘 지내시나요? 이전에 작가님의 글을 참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오늘 문득 판도라가 떠올라서 다시 찾게 되었어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다시 읽어봐도 참 좋은 글이네요. :)
혹시 다른 곳에서도 연재나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꼭 출간본으로 보고싶은 작품이에요.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