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천왕에 오르니, 또 왜 천왕, 천왕 하는 줄 알겠더라. 여느 때처럼 표지석 주변에 길게 줄지어 선 것은 똑같았다. 그런데 햇살이 부챗살처럼 번져오는데 바람 한 점 없으니 일출만 보고 후닥닥 내려가던 다른 산행과 많이 달랐다. 어떤 30대가 다리가 많이 불편해 보이며 직장 후배인 것 같은 20대를 데리고 멀리 다도해가 굽어 보이는 바위 밑에서 두팔 벌려 만세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해서 무람하게 세 선배에게 차례로 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20분 넘게 여유로운 일출 후를 즐기고 바지런히 장터목 산장에 앉으니 오전 9시가 조금 못 됐다. 아침 메뉴는 토스트였다. 반대, 라기보다는 뭐 그런 걸? 하는 표정이 많았다. 장터목에서 아침 먹고 세석에서 점심 먹을 것이니 가볍게 먹자는 취지였다. 전날 동네 유명한 빵집에 들렀더니 손님 많아 빵 굽기도 바쁘다며 식빵을 통째로 가져가란다. 집사람은 얼렸다가 가져가 썰으라고 하는데 그러면 또 거칠고 팍팍해 먹기 적당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빵이 좀 식자 내가 썰었다. 웬걸 얄팍하게 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두툼하게 썰었더니 다섯 조각인가가 됐다. 사과 껍질째와 오이를 채 썰고 햄과 소시지를 기호에 맞게 얹어 먹었다.
다들 굶어죽지 않으려고 먹는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세석까지는 2시간이라 중간 촛대봉 바위에 앉아 제법 시간을 보냈는데도 12시를 상당히 남기고도 세석에 이르렀다. 부대찌개를 끓이며 햇반을 사려 했는데 공단 직원님이 출타 중이라고 했다. 남은 누룽지를 넣어 간단히 요기했다.
코펠이 많이 더러운 듯해 수량 풍부하기로 유명한 취사장에 가서 조금 씻고 물뜨고 하니 제법 시간이 됐다. 출발 전부터 벽소령이 공사 중이라 연하천에 숙소를 정한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세석에서 밤을 보내면 이틀째와 사흘째가 비슷할텐데 연하천에 정하는 바람에 이틀째는 빠듯하고 사흘째는 널널해졌다는 푸념이었다. 그런데 다들 느꼈겠지만 이렇게 하길 잘했다. 그야말로 반야봉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신의 한 수, 너무 센가? 절묘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난 늘 지리 종주에 나설 때, 특히 주능선 가운데 유독 좋아하는 곳이 있다. 영신봉이다. 거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포인트가 있다. 영신봉 내려가는 돌계단 바로 옆, 누구나 그냥 지나치기 쉬운 두 바위 사이에 사람 한 몸 누일 끄트머리가 뷰포인트다. 성격 급한 그린 형님이 앞서 그냥 지나치신 게 안타까웠다. 내 사진 찍어줄 수 없어 잠깐 기다렸더니 어느 분이 와 그분에게 좀처럼 맡기지 않는 사진을 부탁했다. 잘 나왔다. 다시 한번 이곳이 얼마나 좋은지 절감하고 다시 길을 청했다.
오후 1시 30분쯤 출발했는데 3시 30분쯤 벽소령에서 음정 임로를 통해 오른 아톰 형과 조우했다. 형은 음정에서 소주를 팔지 않아 마침 지나던 택시를 타고 마천 나와 택시를 세워놓고 소주를 사고 다시 음정으로 올라왔던 터라고 했다. 그렇게 귀중한 삼겹살과 소주 12팩을 그린 형님과 셋이서 나눠 지고 다시 두 시간쯤 걸었다. 연하천 산장에 도착하니 역시 5시 30분이 다 돼서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땀에 젖은 옷 갈아입을 새 없이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난 추워질 것 같아 취사장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는데 아톰 형이 바깥이 춥지 않은데 거기서 먹자는 것이었다. 이게 많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6시 조금 안돼 피러 회장과 산바람 형이 나타났다. 사실 피러 회장의 배낭 들어주러 마중 나갔어야 했나 싶어 초조하던 차였는데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 천만다행이었다. 두 분은 혹시 일몰 후에 들어올까 싶어 쉬지도 못하고 내처 걸었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다.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목표대로 움직이고 있어서 좋았다.
이곳 역시 술 갖고 시비하지 않았다. 아예 그럴 엄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암 그래야지. 의외로 내 코펠 프라이팬 성능이 시원찮은지 고기가 잘 익질 않는다. 배고프기도 하고 부실한 아침과 점심 때문이기도 해서인지 모두들 입맛만 다시며 조바심을 쳤다. 고기가 익지 않을수록 애꿎은 소주만 비워지는 것도 역시나였다.
피러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다. 피곤하기만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배려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대장의 준비성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였다. 이곳은 태양광 발전을 하기 때문에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주지 않았다. 해서 물을 끓여 햇반을 데워 먹었는데 나중에 한참 지난 뒤 먹어본 아톰 형이 그랬다. "이건 밥이 아니라 생쌀을 살짝 열을 가한 건데요" 아뿔싸. 후배들이 민망해 할까봐 참고 드신 거구나. 형이 잠자리에 든 지 한참 뒤에야 알았다.
하여튼 산바람 형은 춥다고 연신 투덜대다 잠자리로 향했고 난 조금 더 배를 채웠다. 그런데 그린 형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 서둘러 드셔서 일까, 아니면 춥고 부실한 환경 탓일까 행동거지가 이상했다. 이런 날은 빨리 튀는 게 상책이다. 먼저 일어서니까 아톰 형이 다 정리할테니 빨리 들어가라고 한다. 옛날 젊을 적 아톰 형은 누구보다 먼저 취해서 온갖 사고를 치고 난 뒷수발을 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됐다. 세월이 흐르면 많은 게 달라진다.
21일 셋째 날 연하천~반야봉~노고단
새벽 3시쯤 일어났나 싶은데 이곳도 그렇게 일찍부터 설치는 인간들이 적었다. 아 산행 패턴이 많이 바뀌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시 30분쯤 커피를 끓여 마시고 본격적으로 움직여 5시 30분쯤 아침을 아톰 형이 강력 추천한 라면애밥으로 들었다. 처음에 안 먹겠다던 산바람 형이 맛있게 먹는 것이 이채로웠다. 다시 길을 되짚어 벽소령으로 가 음정 마을로 내려가는 산바람 형과 헤어질 시간이다. 난 서울서부터 우리랑 함께 진행하다 뱀사골로 하산해 달궁과 반선 내려가는 길이 아름다울텐데 라고 연신 입맛을 내다셨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귀가해 쉬다 월요일 꼭두새벽에 출근하겠다는 형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형과 헤어지기 전 촬영을 하고 산장 날머리 계단을 밟으니 전날보다 늦은 일출이 시작된다. 이틀째다. 랜턴 켜지 않고 산행을 시작하는 기분도 좋다. 하지만,
늘 노고단 쪽에서 진행하면 어려운지 모르고 걸었던 길이 상당히 힘들다. 모두가 입을 모았다. 아 이렇게 진행하면 상당히 힘들구나.
특히 화개재. 예전에 오솔길이 직접 세어 보고 삼백 몇개라 했던 계단이 정말 장난 아니다. 평소 오르막, 특히 계단 오르는데 힘들어 하지 않는 나도 상당히 가뿐 숨을 몰아 내쉬어야 했다. 두 번 정도 호흡을 가다듬어야 오를 수 있었다.
또 하나, 이번 종주에서 깨달은 것은 주능선이 굉장히 또아리를 자주 튼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이었다. 연하천 산장의 객실 이름으로도 등장한 명선봉은 그야말로 주능선을 일직선상으로 연결했을 때 한참 벗어난 각도에 놓여 있다. 그렇게 한 번 휘었던 루트를 또 한 번 되휜 것이 화개재였다. 그게 왜 이렇게 눈에 들어왔는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뒤라 그런 것이 더 눈에 분명히 들어온 것인가 싶긴 했다.
하여튼 화개재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햇살이 봄처럼 아늑했다. 마침 KBS 1FM을 틀었더니 김미숙 아줌마 목소리와 피아노 음악이 어우러진다. 아 좋다.
삼도봉에 이르니 웬 경상도 아줌마가 엄청 설쳐댄다. 바로 위 반야봉 오르는 곳에 짐을 놔두고 올랐다. 이게 패착이었다. 300m쯤 더 오르니 노고단 쪽으로 바로 향하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 짐을 놔뒀어야 했다. 벌써 배낭 3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아,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난 이곳을 한 번 와봤는데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그런데 누구도 이를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다행이다-나중에 착각이란 것을 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40분을 바지런히 올라야 했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길인데 그나마 데크 공사를 한다고 산을 많이 뒤집어놓았다. 뒤를 돌아보니 운해가 장난 아니다. 어디 큰 호수가 있는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지형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하여튼 반야봉 올랐더니 여기가 지리의 1275봉이구나, 라고 그린 형님이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천왕봉부터 앞의 명선봉, 멀리 광양 백운산, 광주 무등산 등이 길끗하게 조망됐다. 딱 한 번 반야봉 올랐는데 그때는 날이 좋지 않아 이렇지가 않았는데 정말 놀라운 장관을 선사했다. 천왕을 발 아래 두고 사진 찍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안온한 산그리메를 완상하는 호사도 부릴 수 있었다. 노고단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아예 행동식으로 요기하고 여길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첫댓글 반야봉의 풍광이 다시 떠오르는 듯하다. 따뜻하고 확 트였던 그날!!! 여유가 있어서 더욱 좋았던 날이었다. 햇반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어. 입 짧은 내가 잘못이지, 뭐. 수고했다. 짐 지고 뛰듯 걷느라고...
나도 예전에 반야봉을 딱 한 번 올랐는데, 풍광이 어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노고단-천왕봉 종주할 때 대부분 귀찮고 힘에 부쳐서 지나치고 마는 반야봉을 올랐다는 뿌듯함만 남아 있습니다.
반야봉에서 일몰을 보시면 더 황홀하답니다.고기 잘구워지는 팬도 조만간 알대장께 상납하지요.
반야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풍광이 다시 새록 새록하네요, 재밌는 산행기 잘 읽었네, 내년에 더 좋은 계획과 일정으로 함께 하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