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놈펜) --- 사망한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캄보디아 상왕의 유해가 수요일(10.17) 오후 자신의 고국에 도착하여, 수많은 추모객들의 영접을 받았다.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왕궁에 이르는 프놈펜 시내 도로의 연도변에는 추모 인파로 이어졌다.
시하누크 전임 국왕은 월요일(10.15) 자신이 지난 1월부터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국 베이징의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시하누크 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 과정을 통해 자신의 조국을 이끌었던 지도자로는 동남아이사에서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총리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고, 지난 2004년 퇴위할 때까지 두 차례나 국왕에 등극한 바 있다.
지난 수십년간 시하누크 공의 확고한 친구였던 중국 정부는 그의 유해가 귀국하는 길을 위해 ['에어 차이나' 사의] 보잉 747 여객기를 제공했다. 이 비행기에는 그의 부인인 노로돔 모니니엇 시하누크(Norodom Monineath Sihanouk) 왕대비를 비롯하여, 시신 송환을 위해 월요일에 급거 중국으로 떠났던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과 훈센(Hun Sen) 총리 등 정부 요인들과 [중국의 최고위급 외무관료인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도 탑승했다.
시하누크 공의 관은 성대한 행렬을 이뤄 공항에서 왕궁으로 옮겨졌다. 그의 시신은 왕궁에서 세 달 동안 안치될 예정이다. 불교식으로 화장되기 전까지, 일반 추모객들도 그의 시신 앞에서 조문을 할 수 있다. 그의 운구행렬에는 승려들과 군인들이 함께 했고, 그의 상여는 거대한 황금색 불사조 모양으로 치장되었다.
군중들은 아침부터 총 8 km에 이르는 연도변을 따라 모여들었다. 그 중 많은 이들은 불교전통에 따라 흰색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당국은 인파의 규모를 20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프놈펜 시청의 롱 데몬(Long Demon) 대변인은 캄보디아 국내 언론인 <다음엄삘뉴스>(DAP-News)와의 회견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대규모 추모객들까지 포함하면 인파의 규모가 총 12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운구행렬이 통과할 때는 군중들 사이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특히 노년층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시하누크 공의 영구차를 향해 전통적인 예법에 따라 합장을 하며 절을 했다. 일부는 꽃을 뿌리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왕궁 앞에도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그 중 일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많은 이들이 왕궁 정면에 걸린 시하누크 상왕의 대형 초상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초상화는 촛불로 장엄되었고, 추모객들은 분향과 헌화를 하거나,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왕궁 앞에서 만난 키 소칸(Khy Sokhan, 73세) 씨는 휠체어를 타고 나왔는데,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고 국왕 폐하의 시신을 보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분의 서거는 단 한번 뿐이고, 두번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보다 감정적으로 격앙된듯 보였고, 젊은이들도 슬픔에 차 보였다. 캄보디아 동부지방인 껌뽕 짬(Kampong Cham) 도에서 가족과 함께 올라왔다는 젊은 여성 까이 사왓(Kay Savath, 20세) 씨는 자신의 복합적인 감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프놈펜에 와서 할아버지 국왕의 관을 내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하지만 그분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면 슬퍼진다."
(동영상)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촬영한 보도 화면.
(동영상) 제1야당인 삼랑시당(SRP)과 제2야당인 인권당(HRP)이 통합하여 새로 출범시킨 '캄보디아 구국당'(CNRP)도 당 차원의 추도행사를 가졌고, 이 자리에는 해외에 망명 중인 삼 랑시 총재도 화상중계를 통해 함께 했다.
이러한 슬픔에는 휴일의 느낌도 가미되었다. 왕궁 앞에서 향과 초를 팔고 있는 몸 칵(Mom Khak, 23세) 씨는 시하누크 상왕의 죽음이 자신에게는 좋은 기회가 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인파가 몰리면서 자신의 장사도 더 잘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60달러 정도를 번 셈인데, 이것은 평일에 비하면 10배 정도의 매출이라고 한다. 그는 갓 돌 지난 자신의 딸을 살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상왕 전하의 서거가 슬프다. 하지만 그분의 사망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 기쁘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저녁에 시하누크 공에게 기원하면서 장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말했다.
시하누크 공은 캄보디아에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반세기 동안의 역사에서 캄보디아가 항로를 찾도록 도왔던 인물이다. 또한 존경받는 독립 영웅이었고, 무자비한 군주이자 총리이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협력자였고, 기묘한 플레이보이이자 열성적인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1941년 처음으로 국왕에 등극했던 그는 1953년에 스스로 양위를 한 후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후 국가수반이 되면서 냉전시대에 자신의 조국이 중립주의 노선을 걷도록 하려 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결국 이웃국가인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들어갔고, 이후 1970년대에 그의 실각과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의 학정도 경험했다. 크메르루주 정권기에는 170만명 정도의 캄보디아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크메르루주와 손을 잡으면서, 그의 정치적 이력은 얼룩졌다. 하지만 크메르루주는 정권을 잡은 후 그에게 권력을 나눠주지 않았고, 그의 자녀 5명도 크메르루주 정권 치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크메르루주는 축출되었고, 시하누크는 1993년에야 왕위를 되찾았다. 그는 이후 조국에 대한 양심으로서 그 명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베트남을 등에 업고] 크메르루주를 축출했던 훈센은 거칠면서도 용의주도한 정치인이었다. 훈센은 시하누크의 영향력을 감소시켰고, 실망한 시하누크는 8년 전에 스스로 퇴위해버렸다. 이후 시하누크는 중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하누크가 중국에서 조용한 은퇴생황을 하자, 한때 매우 다이나믹한 지도자였던 그는 현재의 집권자 훈센보다 더욱 더 역사 속의 인물로 변해갔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그의 죽음에는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