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꽃 핀 창살 옆에/ 김창숙
앵두꽃 핀 창살 옆에 서리처럼 비치는 달빛 문득 이 광노 감상을 일으키네 벽 하나 사이에 있는 친구 한 세상이 막힌 것 같으니 누구를 대하여 이 심회를 기울이리.
- 『김창숙 문존』(성균관대출판부,2001) ...............................................................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철두철미한 항일지사로 흔히 단재 신채호와 백범 김구, 그리고 심산 김창숙을 꼽는다. 백범이 평생 두려워했던 유일한 사람이 심산이었다. 그러나 심산은 단재나 백범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심산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된 어려운 몸을 이끌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형무소에는 안창호와 여운형도 수감되어 있었다. 독립운동에 매진해야할 인물들이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안타까이 여기던 차에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간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꼬장꼬장한 심산과는 달리 도산과 몽양은 고분고분 옥칙을 잘 지켜 모범수가 되었다며 곧 가출옥의 특전을 입어 출감할 것이란다. 며칠 후 두 사람의 출감 소식을 접했다. 그들의 출감을 착잡한 심경으로 지켜보면서 쓴 시가 이것이고, 시에는 ‘안창호와 여운형에게’란 부제가 붙어있다. 심산에겐 옥살이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계속되는 그들의 회유였다. 온갖 고초를 다 겪은 망가진 몸이었지만 그에겐 조국광복의 일념뿐, 단 한번 타협하지 않고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심산은 해방 후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을 창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한데 이어 1953년 종합대학교 승격 후 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 발췌개헌안 통과 때 ‘이승만 하야 권고문’을 발표하는 등 이승만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그 보복으로 1956년 학교에서 쫓겨나고 다른 모든 공직에서도 추방당한다. 이후에도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은 계속되었으며 1960년 4월 혁명 이후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로 추대되었고, ‘백범 김구선생 기념 사업회’초대회장,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 회장에도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516군사정변 이후 쇠약해진 몸으로 병석에 눕고 만다. 심산이 병원 침상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아주 특별한 손님’이 병문안을 왔다. 얼마 전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이 사회지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직접 문병을 온 것이다. 최고 권력자가 찾아왔으니 아무리 몸이 아프더라도 일어나는 시늉이라도 내야할 텐데, 심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창숙은 벽을 향해 몸을 홱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심산이 박정희를 냉대한 이유는 단 하나, 일본군 장교 출신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옳지 않은 것 앞에서는 추호의 타협도 없다는 꼿꼿한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그에게는 장군의 허리춤에 있던 권총보다도 민족과 양심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그가 바로 민족적 양심을 끝까지 지키면서 불의에 항거한 성주 출신 진보 유학자 심산 김창숙 선생이다. 1962년 84세로 타계할 당시, 한차례 ‘굴욕’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해왔던 박정희 대통령권한대행은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해 조문을 하였다. 그 이전에 독립유공자에 대한 훈장 수여 시 생존자로서는 유일하게 1등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바도 있다.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았던 '이 땅의 마지막 선비' 심산 선생은 박근혜정부에 대거 발탁된 성균관대 출신 인사들을 보며 과연 흐뭇해하기만 했을까. 비록 삼성에 의해 굴절되긴 했지만 성균관대가 남명 조식의 맥을 이은 심산 김창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기나 할까. 이 시대야말로 간절히 요구되는 실천하는 양심과 지성으로서의 ‘심산 사상’을 그들이 고이 받들어주길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심산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 앞에 ‘부러진 화살’이 되지 않기를 바랄뿐인데, 인촌 김성수는 알아도 심산 김창숙은 모르고, 배우 김창숙은 기억해도 마지막 참 선비 김창숙은 잊어버렸다. 고향인 성주에서조차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숭모하는 사업이 제대로 행해온 것 같지는 않다.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앞 선생의 동상에는 1957년 병상에서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가 유언처럼 새겨져 있다. “평화는 어느 때에/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나/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무나.” 오늘날 사드사태에 대해 고함치듯 선생의 우국충절과 통일조국을 염원한 <反歸去來辭>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남북을 가르는 黑風회오리/ 화평을 이룩할 기약은 없고/ 저기 저 사이비 군자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길에서 죽기로서니 무슨 한이랴” 권순진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
첫댓글 하마터면 잊고 살번 한 ~ 마지막 참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께 죄송한 마음을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
이번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배치) 반대집회에 외부세력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 당당하게 외쳐대는 성주농민회장의 함성과부릅뜬 두 눈의 쌍심지에 불붙는 함성에서 녹두장군을 떠올리며 ~ 말년에 빛고을 광주에 오셔서 광주대 총장을 역임하셨던 특히 시를 사랑하셔서 종로 5가 기독교회관 2층 정기 목요기도회에 함석헌 김대중 이문영 이영희 송건호 환완상 문익환 목사등 기라성같은 분들 앞에서 장장 90분동안을 강단에 죽창을 박아 놓은 듯 미동도 없이 조사하나 밭침하나 틀림없이
천정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우렁차게 통일시 민중시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낭송을 하신 장엄한 모습에서 기미년3.1독립선언문을 듣고있는 착각속에 사로잡혔던 기억을 되새기며 ~ 자주 민주 통일의 시대가 서서히 동터오는 서광이 비치지 않나 가슴이 뛰는 느깜을 가져보며 ~ 만약 ~ 광주에서 총리와 국방장관나리께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벌써 몇십명은 고정간첩이 되어 끌려가지 않았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