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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봉황새7 ♡ 원문보기 글쓴이: 송재휴
단평2리-던평2교-원부저수지-두둠이산-오사고개-완장봉-국수봉-오갑산(이진봉)-옥녀봉-밀고개- 버스정류장(성산쌀집 정류장)
산행지 : 오갑산 610m 충북 음성군 감곡면, 충주시 앙성면, 경기도 여주군 점동
누구랑: 나 홀로
일시 : 2015년 2월28일(토요일)
소요시간 : 7시50분(휴식 및 간식20분 표함)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배낭 하나 짊어지고 산으로 떠난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꾼다.
개미 바퀴 도는 무미 전조한 생활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꽃피는 봄에도, 폭염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단풍이 찬란하게 물드는 가을에도 흰 세상을 눈 덮은 겨울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산속에 파묻힌다.
오갑산은 음성군(감곡면), 여주군(점동면),
충주시(앙성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어서
둘레 어디에서도 오를 수 있는 산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용하는 산행의 기점은
오갑마을(감곡면 문촌리 웃오갑), 어우실(점동면 관한리), 동막마을 (앙성면 모점리), 돌마래미(감곡면
상우리) 네 곳이다.
곳곳에 전설이 많이 전해내려 온다.
조선 인조 때 미인으로 소문난 한씨 부인이 감곡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 피신가다 오갑고개에서 오랑캐의 대장 파오차[巴五甲]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때 파초선을 든 낯선 처녀가 나타나 몸에서 강렬한 빛을 비추었다. 그 빛에 파오차의 칼이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게 되었고
한씨 부인은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갑고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충북 충주 양성면에 자리한 오갑산(609m)은 산으로서 구색을 두루 갖춘 여러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다.
바위가 거의 없는 흙산이면서 이상하리만큼 우뚝하다.
기름진 흙산이라서 숲이 울창하고 닭발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간 산줄기도 많다. 비탈도 산자락은 순하지만 머리 부분은 매우 가팔라서 고스락에 오를 때는 매우 힘이 들고 산행의 맛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흙산인 데도 오랜 세월과 많은 비바람에 어떻게 그 우뚝함을 지키고 의연히 서있을 수 있는지 신기하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 ...
오갑산은 2개도(경기,충북), 3개군(음성,여주,충주)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명산으로 삼국시대 에는 오압산(梧壓山)이라 불리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이었던 오갑산은 한수지역의 거대한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양국의 크고 작은 싸움이 잦았던 곳으로 오갑산 정상에 진을 치고 군대를 주둔하면서부터 오갑산이라 불려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 진을 쳤으나 왜군과의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그 이후 오갑산 정상을 이진봉이라 하고 이진봉 북방 8부능선의 펑퍼짐한 갈대밭을 진터라고 부르고 있다.
오갑산 앞의 삼태봉은 통신수단이었던 봉화터가 지리하고 있는데 맑은 날에는 사방 백리길이 훤히 보인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여주행버스를 승차하여 여주종합터미널 안에 장호리행37번 버스가 있어 승차하기 위해 물어보니 40분에 출발하오나
도로 건너에서 타라고 한다.
도로 버스승차장에서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장호리행 버스를 타고
덕평2리정류소 내려 09시에 도착하여
던평1교를 지나
성신2리를 지나고
오갑사 이정표를 지나
뇌곡2리 지나서
원부저수지를 지나고 낚시터사무실을 지나고
오갑산등산로 안내도 있는
오우실 옆길로 들어서니
개념도를 들여다 보고 찾아던 등로는
어우실 펜션 좌측의 소롯길을 조금 오르자 숲을 향해 길을 열어준다.
던평2리에 내려 도로를 1시간 걸어 등산입구 도착하여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엔 수북하게 솔잎을 깔아 있어 밟히는 촉감이 부드럽다.
처음 얼마 동안은
솔 향기 그윽한 오솔길의 능선은 끝도 없이 길게 나를 맞아준다.
쪽빛 염색한 천을 허공에 품어놓고
그 나부끼는 천 사이로 걸어가는 기분이다.
쪽빛 천이 하늘을 채우듯
허전한 마음을 채운다.
고사목
나무는 살아 온 날만큼의 죽은 조직을 지녔다.
썩은 줄기와 파릇한 잎이 한 몸인 나무.
‘생과 사’ 가 공존하는 삶이다.
나무는 생존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투쟁’ 하지만 죽은 이후의 ‘삶’ 에서는 숲 생명이 사라 갈 터전이 된다
벌써 산 정상에 선다.
해발 159m의 두둠이산이다.
그야말로 두리둥실 두둠한 봉오리가 어엿한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뭘까?
두둠이산은 거의 없는 흙산이다.
오갑산의 연봉들은
마치 물결 잇듯 출렁이며
사방으로 뻗어있고,
산봉우리들은 겹겹이 속아 구름송이처럼 보인다
밤골고개 이정표
산길에는
나무들이 옷을 벗고 어지러이 서 있다
비우고 버려서 헐벗은 나뭇가지
추위에 떨고 있는데
움켜쥐고 싶은 것 풀어놓지 못해
욕망의 두꺼운 옷 겹겹이 껴입고
걸어가는 슬픔 육신이여
이정표 : 밤고개700m, 노루목1310m
이정표 주위 산길에는 하얀 낙엽들이 무수히 깔려 있다.
마음, 그곳에서만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원천인 것이다.
마음이여
떨어진 낙엽을 담아라.
눈물을 담고,
슬픔을 담아서
아픔을 지닌 관용 사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는 하얀 캔버스가 되어라.
오갑산의 산길은
나의 발자국 따라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산의 적막을 흔들고 있다
바람소리와 산소리와 새의 지저귐 속에서
가난이 주는 좌절과 절망과 슬픔을 탄식하며
내가 살아갈 미래에 대한 설계를 얼마나 꿋꿋하게 하였던가.
혼자 울며 헤매던 산길에,
낙엽을 밟으며 걸었을 때,
아무에게도 말 못한 사연과
그 불행한 사실과 죽고 싶다는
허무를 혼자 달래고
혼자이기는 의지를
그 낙엽이 쌓이는 산길에서 터득하였을까
오시고개
오사고개를 넘어 능선 하나를 더 넘자
처음 맞이한 헬기장이 참 널찍해서 좋다.
나중에 한 짐 그득 지고 올라와 한밤을 묵어도 좋을 만큼.
제1헬기장
낙엽 깔린 산마루 접은 의자에 앉아 간식을 하면서
무소유의 자유를 만끽해 본다.
재산이 없으나 도둑 들 걱정 없고
권세 없으니
시기하는 이도
아부하는 사람도 없어서 좋다.
오라는 곳이 없으니
옷 갈아입지 않아도 되고
따르는 여자 없으니
치장하지 않아도 된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온다.
쉽고 싶을 때 쉬고 하고 싶을 때 한다.
햇살과 바람소리 물소리
산새의 울음소리가 친구가 되어주니
외롭지 않다.
버리고 비움으로 충만해지는 마음
무엇보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의 눈 앞에
우주법계의 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의 섬광이
눈부시다.
등산을 모르고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산이 거기에 있는 한 언제까지 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산은
내 마음의 육체를 건강하게 치료 해준 의사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아름드리 송림이 나의 걸음을 멈추게도 하고
주위를 살피는 게으른 걸음이라 그건 오히려 또 다른 기쁨이다.
진터를 올라 치자 말자.
완전 예술 같은 소나무 분재다.
오늘 산행 중 제일 아름다운 소나무를 만났다.
자연이 빗은 예술품의 미모에 홀라당 반한 나는 한참을 머문다.
저 노목은 다람쥐들이 드나들어도 끄덕 없고,
소슬바람에는 신비스러운 음악 소리를 내고,
해가 쬐이는 뙤약볕에서는 서늘한 그늘을 덮어줄 수도 있지만
사람은 늙어서도 왜 그러한 신비력을 가질 수 있게 태어나지 못하였을까
제2헬기장은 완장봉이다. 이진봉은 1,400km이다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상념에 젖어본다.
무심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질의 풍요 속에 정신을 위협받은
우리 삶에게 겸손과 성심 함을 가르쳐 주고
호연지기를 길러준다는
등산 본연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라는 깨우침을 주는 것만 같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여인네가
창호지 저쪽에서 옷 벗은 모습이 이럴까.
산은 내 앞에서 햇살에 모든 것을 벗었다.
산에 다니며
산과의 교감을 통해 처음으로 느껴보는 오르가슴이다.
터져 나오는 외마디 “와!”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카메라를 커 낸다.
완장봉과 만남을 찍고 싶다.
나의 완장봉을 프레임에 담고 싶다.
제3헬기장
2개의 헬기장을 지나니 마지막 제3헬기장이다
이어서 오갑산에 도달했다.
국수봉인데 오갑산 정상석이 있다.
뒷면에
추진 : 충추시 양성면
기관단체 협의회
후원 : 진달래공원
1999. 11.6
.
큰 산 높은 산 등을 찾아도
산에 대한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산행할 때마다 아무리 큰 산 높은 봉우리 깊고
긴 계곡을 지난 산이라 할지라도
당일에 오르는 당일 산행을 하다 보니
그 이상 편하고 즐겁고 부담 없는 산행이었다.
그래서 직장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같은 직장에 동료들과
그룹을 만들어 단체 산행을 여러 차례 시행했다.
아울러 주말에는 무박 산행
그리고 연휴나 휴가 때에는
아내와 함께 산에서 며칠 동안
야영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처음 헬기장 만큼 넓다란
제3헬기장을 지나자 마자 594m의 국수봉을 만난다.
오늘이 주말인데 참 이상하다.
이 좋은 산를 찾는 이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혼잡슬럼에서 해방된 숲 의 고요함을 깨우는 건
가끔씩 들려오는 청아한 산새들의 지저김
그리고 나뭇가지를 흔들다 사라지는 바람소리 뿐.
혼자 사행을 가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니 별별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친다.
인간이 태어나 결국 한 줌의 흙 속에 묻힌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유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꿈같은 국수봉과 만남은
내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잊어지지 않으리라.
정말 웅대한 이산 자락에 가슴을 묻고
일상생활 속에 쌓였든 모든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자연인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소나무는 모든 나무의 어른이라
백목지장(白木之長)라는 말이 있듯이 예로부터
소나무는 나무 중에 제일 놓은 자리를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면 거기서부터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노송들이 멋진 광경을 연출하고,
거기에 뜨엄뜨엄 고사목이 서 있어 더욱 신비를 더해준다.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자란 관목에서 인지,
생이 다하여서도 굳견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고사목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유한한 인간의 수명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수백 년 된 고목 앞에 서면 존경심이 절로 든다.
오래된 숲과 고목을 신성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베이거나 불타지 않는 한 영원히 생명을 누릴 것 같은 나무,
얼추 정상이 다 왔음을 알려주는 진터.
.
누군가 다녀간 흔적을 남겼는데 깔끔한 뒤처리가 아쉽다.
모양새가 좋지 않음이 분명하다.
쓸어내고 흙을 퍼다 덮어 흔적을 없음에도 꺼림직한 마음은 끝내 남았었는데.
산을 넘었더니
또 오갑산이 있네.
저 산을 넘고도
또 산이 있으려니
하고 넘어야지
어차피 산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산행은 끝나고 말 터인데
다가서는 산을 즐거움으로 맞고
오르고 넘을 일이네.
산행을 시작한 후 4시간 만에 오갑산 정상에 닿았다.
그대로 아직은 건강하게 살아온 나를 발견 했으며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산 정상 부근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두루 널리 퍼져있었다.
세찬 바람 속에 모질게 자란 키 작은 나무의 강한 생명의 엿볼 수 있었다. .
뒷면에
“오갑산은 옛날에 헐벗고 메마르며
오동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다 하여 오갑산으로 불려 왔으며
여주군 점동면과 중원군 그리고 음성군과 경계가 되며
임진봉과 무제영봉으로 둘러 쌓여있다
인진봉은 높이가 같은 두 개의 頂峰(여주군 음성군)으로
특이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적을 막는 초소로 사용됐다 하여
이진봉으로 명명되었으며
50년 전만 해도 골짜기에는 마구나 철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옛날부터 위대하신 산신이 계신 곳으로
이 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 하여
영산이다 1999. 2. 21 삼신석재의 후원으로 청안산악회에서 세우다”
여주 전동면의 산악회에서
정상을 되돌아 나와 삼형제 바위로 내려선다.
지금껏 오르락 내리락 완만했던 등로와 달리
삼형제 바위로 향한 내림길이 아주 거칠고 가파르다.
삼형제바위에서 바라본 옥녀봉으로 가는 산줄기가 장관이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산에 오르는 개인의 마음에 따라
항상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을 느끼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순한 계절마다 시간마다,
날씨에 따라 산은 온갖 변화를 보이고
때로는 어머니의 품은 부드러움으로
때로는 혹독한 모습으로 인간들을 꾸짖는다.
굳이 바위랄까 까진 없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돌덩이 3개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삼형제 바위에서 또 한차례
잠시 가파른 내림 길을 내려서자 오늘 산행 중 최고의 조망처를 만난다.
그러나 많이 아쉽다.
옥녀봉
옥녀봉은 하나의 축복이다.
한반도의 산 어느 하나 그렇지 아니한 것은 없지만,
옥녀봉은 어디가 모르게 정이 가고 마음이 편하다.
몸을 화려하게 드러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몸을 감추지도 않은 수수하고
듬직한 모습으로 넉넉한 가슴을 열어 온 생명들을 맞이하고 있다
산아래 마을이 둘러싸고 있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네 생활방식은
산천이라는 큰 생명의 토양에 뿌리내린 식물성의 그것이다.
산의 것들이 삶터를 이루고,
산전(山田)을 일궈 생명을 길러 먹으며,
산에서 흘러내리는 생수를 마셨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 그 때를 산에 묻었고,
생이 다한 육신 또한 산에 묻었다.
우리에게 산천은 현세적 삶이 비롯하고
생성되며 완결되는 전제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산천을 갖은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영원성이라는 의미 아닐까?
생의 유한성일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덧없지만
산천은 의구하였으니
사람들은 덧없는 생을 늘 푸른 산천에 접맥하려 하였다.
여기에 자연에 대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개선문을 지나
-밀고개-
이정표 : 종점까지는 1930m남았다.
그렇게 내려선 밀고개.
시멘트 도로를 넘겨 야트막한 야산의 숲 속을 향해 이정목은 종점이라 가리킨다.
종점~?
그럼 당연히 종점까지 걸어야지~
내림길이 힘 된 곳.
개금골 삼거리에 이른다.
힘들면 바로 이곳에서 개금동으로 내리면 된다.
바로 보이는 봉오리를 치고 오른다.
그렇게 올라선 옥녀봉에서 방향을 꺾어 개금골 삼거리를 넘겨
밀고개에 이를 때까지 솔숲 오솔길은
처음 산행을 시작했던 등로처럼 유순하고 아름다워
나는 힘든 줄 모르고 걸을 수 있었다.
이후 등로는 과수원 옆길로
때론 잘 가꿔진 무덤 사잇길로 이어지며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지다 원부 저수지로 나는 내려 간다 .
그리고 호화스런 묘를 지난다.
내가 타고 온 봉우리는 사유지이므로 경고문이 있다.
성산쌀집 시내버스 정류소에 도착하여 오늘의 산행을 마감한다.
그렇게 걸은 거리가 23키로...
걸어온 능선을 바라보니 까마득한 거리다.
그래도 워낙 능선이 유순하며 곱고 아름답다 보니 힘든 줄 모르고 걸었다.
메아리도 오지 않는 산 아래 앉아
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 봅니다.
먼 산이 물소리에 잠길 때까지
입속말로 불러붑니다.
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
슬픈 귀만 자꾸만 자라납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귀 기울이면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귓속말로 귓속말로 들려옵니다.
내 눈이 어둠보다 밝아집니다.
-박정만- ‘내 귀가 산보다’전문-
나는 산을 찾는 일과 시를 가까이 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정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 한 편 쓴 적이 없어도
이미 시인이라고 믿는다.
또한 시인은 가슴 속에 늘 산을 품고 산다고 믿는다.
첫댓글 산행동호회방에는 산행공지만 올리는 곳이므로 이글을 산행이야기방으로 옮깁니다
산행 기행문 잘 보았습니다. 건강하시어 좋은곳 혼자 다니시는 모습
글로 볼수있어서..... 대단하시네요
자연을 사랑하시고 즐기시는 산꾼이십니다.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안산즐산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