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어'(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첫댓글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아멘
아멘 신부님 푸른잎새 님 고맙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
아 멘 !
감사합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
Amen.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모자람’과 ‘충만함’
아멘!
오늘도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