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0일 (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말씀 묵상 (1코린 8,31ㄴ-39) (이근상 신부)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고린15,16-20)
되살아나리라 것. 큰 약속이다. 그러나 이때 되살아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식의 되살아남이 아니라고 바오로는 고백한다. 그건 과거의 우리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새로움. 썩어 없어질 몸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새로움을 입는 것(52-53절)인데, 그것이 무엇일지 가늠할 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말. 하긴 우리가 아는게 없긴 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곁에 있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인데, 부활하신 그 분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러니 죽은 이들의 되살아남을 믿는 것, 곧 우리의 부활을 믿는 것은 앎의 영역이 아니라 모름의 영역. 믿음과 희망이라 하지만 그림을 그려놓고 그러려니 믿거나 뭔가 이루어졌으면 싶은 것들을 나열해 놓고 그걸 희망하는게 아니다. 아득하지만 믿고 희망하는 것. 아주 아득하게 놓는 것.
그러니 우리의 무지 곧 우리의 희망, 믿음은 이 삶에 아부하지 않는다. 죽음 뒤를 이승의 어떤 연장이 될 것이라 여기며 분칠을 하며 안달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끝이어도 된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가벼운게 어디있으랴. 뭘 해야 할 것도, 뭘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아득하지만 그 분이 계신 그곳을 희망하는 이는 담담하다. 그가 살아있으며 그건 아주 크게 아주 높고 아주 깊게 살아있임을 믿는 이는 모든 것이 다 좋다. 두려울게 없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2Zt21wE5PamqqvyiNzDY8iieAuZabDGbaaf9wD6S1RtPZEfBs6fyNtEVhiFs5ey3S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