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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 사실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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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9.05. 04:21
- 사실은
“형제 여러분,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속이는 것만 반성하는데
어쩌면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기보다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이것을 먼저 그리고 더욱더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속입니까?
자기를 잘못 생각하는 것과 더 나아가 자기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많아서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요.
자기가 그리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요,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를 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믿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자신감(自信感)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자신감이라는 것을 요즘 말을 빌려서 평하면 근자감,
곧 근거 없는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어떤 때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게 하고,
자기가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지혜롭다고 믿게 하고,
심지어 불행한 줄을 모르고 행복하다고 믿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더 심각한 자기 속임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거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곧 묘하게 얘기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사실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우리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고 내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는 코린토 공동체가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고 갈라졌는데
사실 바오로 자기도 그리고 아폴로나 케파도 다 하느님 도구일 뿐이고,
자기들은 코린토 공동체를 하느님 공동체가 되도록 파견된 도구들이니
자기들은 코린도 신자들 여러분의 것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도 얘기하는데
모든 것이 여러분 것이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 것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더 엄중한 사실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나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 있으니
나라는 인생이 허무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내가 소유한 것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고,
내 생명도 지금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또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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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 밖에도 못 하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 동기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서 기도 시간에 제일 나중에 성당 문을 나오는 친구였습니다. 아무튼 모든 점에 있어서 다른 이의 모범이 되는 친구였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여름 방학 끝나고 개학 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니, 방학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신학교 생활하면서 우울증으로 힘들었다면서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우울증을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겪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친구 정신력이 강해 보였는데 아닌가 보네.”
정신 질환은 나약한 사람이 앓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의지를 세우면 얼마든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의지를 세우려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할 정도로 흔하기도 하고 또 치료받아야 할 병으로 여깁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 이 병에 걸릴까요? 2020년 OECD 국가별 우울증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전체 1위를 차지했습니다. 2.5명 당 1명 꼴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 역시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을 당신 제자로 뽑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인 시몬을 뽑습니다. 그런데 어부로서 그렇게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애써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지 목수인 예수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 기술이나 능력을 초월한 어떤 힘에 사로잡혀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이 자기 죄악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많다고 해서 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많은 부족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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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과거로 돌아가서 시작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해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는 있다(클라이브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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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객체가 될 때에 오게 됩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들게 됩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뿐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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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리고 떠나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이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임지에서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 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짐 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 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 관사를 내놓으셨다 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 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로움을 만나길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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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선배들은 ‘판단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사제도 거룩함을 지향하며 성덕(聖德)을 쌓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지덕(知德)을 쌓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체덕(體德)을 쌓아야 합니다. 라틴어로 이 3가지 덕은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3S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판단력(判斷力)’입니다. 판단력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다시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예전에 냉장고 광고 문구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성탄 선물로 ‘목도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총구역장님과 백화점엘 갔습니다. 저는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대충 사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총구역장님은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좀 더 좋은 목도리를 찾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백화점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구역장과 반장들에게 드릴 성탄 선물을 골랐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조금씩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것 같으니 그냥 물가에서 지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가 더 내리면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교사들은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두 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냥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비가 많이 내리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동하면 물을 구하기 어렵고, 짐을 다시 정리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옮겼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왜 이동했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왜 이동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고, 다행히 모두 저의 이야기를 따라 주었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자리를 이동한 것에 대해서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고, 다음 날, 답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사제가 되면서 ‘판단력’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생각합니다. 저의 결정과 저의 판단이 최종 결정과 판단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제 뒤에 수정하거나, 번복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비교적 판단하기 쉽습니다. 차 축성, 가게 축성, 봉성체에 대한 부탁은 시간을 정해서 약속을 잡으면 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찾아와서 홍보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성당 안에서 홍보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성당 밖에서 명함을 돌리는 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가정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문자가 왔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1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고, 형제님을 위한 기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교우들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 사는 부모님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서 온 부모님은 브루클린 교우들의 영상 인사를 스마트폰에 담아 왔습니다. 덕분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이나, 성전 이전과 같은 문제는 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공동체의 의견이 나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판단의 기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갈릴래아의 어부들도 판단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 곳으로 치라고 하셨고, 어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어부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판단 기준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9월은 순교자의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신앙의 눈으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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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배우 마동석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바로 ‘범죄도시’입니다. 일 편부터 지금까지 나온 모든 편을 봤습니다.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범죄도시 4’에서 배우 마동석은 이런 말을 되풀이합니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
이 대사는 영화 곳곳에 들어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두 척의 배 중 베드로의 배에 오르십니다. 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는지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유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후반으로 전개되면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평생 그곳에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했습니다. 어부도 아닌 주님께서 물고기에 관해 잘 알 리가 없다고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합니다.
저는 이것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베드로가 가진 말씀에 대한 순명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물고기를 거두어들인 후 베드로의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주님으로 즉,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아봤습니다. 그 신성함에 자신과 같은 추한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겸손한 모습이 두 번째입니다.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이유, 순명과 겸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베드로의 덕목인 주님을 향한 순명과 겸손이 우리 신앙의 길에도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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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성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관통합니다.
힘이 아닙니다.
지속성입니다.
- 오비디우스-
오비디우스는 로마 시대의 시인입니다.
그는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관통하는 것을 보고 위의 시를 지었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관통할 수 있는 건 강해서가 아닙니다. 지속해서 같은 곳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지속성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지속성을 ‘성실’이라고 표현합니다.
혹은 꾸준함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성실한 사람은 그 앞에 바위 같은 난관이 나타나도 언젠가 그 고난을 통과합니다. 그는 지속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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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여정
“우연(偶然)은 없다, 모두가 은총(恩寵)이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모두가 성소의 여정 중에, 섭리 은총중에 살아갑니다.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이런 깨달음입니다. 성소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성소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결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죄입니다. 다음 옛 현자의 말씀이 성소의 여정에 도움이 됩니다.
“바르지 않은 길에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헤매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다.”<다산>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
삶이 바쁘고 힘들 때, 멈춤 줄 아는 것도 참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 상징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의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과정중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은총이 선행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의 배에 오르실 때 이미 예수님은 시몬을 점찍어 뒀음이 분명히 감지됩니다. 우리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서 가시는 주님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잡아 끌어 올릴 깊은 데입니다. 시몬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써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밤새 노력했지만 허무와 무의미만 가득 길어 올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공허의 텅빈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런지요! 코헬렛 고백처럼 평생을 살아도 헛되고 헛된 삶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시편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주님이 빠진 삶은 헛된 삶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단잠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시몬은 겸손하고 지혜롭게도 순종을 택했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됩니다. 놀라운 은총, 충만한 행복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즉각적인 고백이 평생 묵상할 내용으로 참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주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로 얼룩진 내면을 본 시몬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성인들의 공통적 반응이 죄인이라는 자각입니다. 아브라함(창18,27), 욥(42,6), 이사야(이6,5)의 체험도 이와 흡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죄로 얼룩진 참나의 얼굴을 보고 즉각적인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마음에 참나의 얼굴을 회복합니다. 시몬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고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뒤따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성소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부르심과 응답은 단번에 끝난 듯 하지만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계속됐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도 바오로는 가톨릭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전서 말씀은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음이며 참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기를 텅비운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한다는 체험적 고백에 공감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의 허황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대우(大愚)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역설적인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만난 깨달음의 절정을 나눠줍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대우이자 대지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목표하는 영적 최고봉의 경지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성소의 여정중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삶,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
하느님으로 가득한 참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소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대지(大智)의 역설적 참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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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뭍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뭍으로>
그날 새벽 뭍에다 배를 대고
빈 그물을 씻고 있었지
초췌한 모습 허탈한 마음으로
밤새 나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은
쌀쌀맞기 그지없던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내 곧
다시 맞닥뜨려야만 하는
삶의 터전이요
고통의 현장인
호수를 등지고서 말이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해야만 했기에
그저 내 손가락들을
작은 물고기 삼아
그물코에 넣었다 뺐다
뜻 없는 짓을 반복하던
그날 새벽녘
낯선 그분이 다가와
배에 오르시어 말씀하셨지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줄 수 있겠소
뭍에서 호수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평소 같았으면 그랬겠지
나에게 모든 것이었던
너무나도 익숙한 호수였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어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너무나도 낯선 호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그분의 까닭 모를 부탁을
흔쾌히는 아니지만
난 들어 주었어
뭍에서 호수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던 길
먹고 살기 위해서
좋으나 싫으나
어쩔 수 없이 가야했던 길
그때 내키지는 않았지만
낯선 그분과의 첫 만남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멀리도 아니고 그저 조금만
청하는 낯선 그분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주는 것이
사람으로서 예의였으니까
뭍에서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잠시 머물러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마치신
조금은 익숙해진 그분은
또 다른 부탁을 하셨지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뭍으로 돌아갈까
깊은 데로 나아갈까
이분이 뜻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처음부터 깊은 데로
나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뭍에서 호수로
이번에는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다음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러면 다음에는 그 무엇일까
뭍으로 돌아가는 것도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도
이제 나에게 달려 있는데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순간 스치는
수많은 물음들을 가슴에 담고
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었던 거야
조금씩 그분에게 끌렸는지도 모르지
이미 시작했으니 되돌리기 싫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가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깊은 데로 나아갔고
아무튼 그물을 내렸어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리고
지난 밤 처절한 패배의 현장에서
난 다시 일어났어
아니 난 다시 일으켜졌어
일어났기에 기뻤지만
일으켜졌기에 두려웠어
이제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잘 모를
나를 일으키신 그분 앞에서
이제 그만 여기까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박 속에
내가 떠날 용기가 나질 않아
나에게서 떠나시라고 읊조리던
참담한 패배를 딛고
두려운 승리를 품었던
그날 새벽녘
첫 만남의 낯섦을 녹이고
서서히 어느덧 날 사로잡은 그분은
마지막으로 청하셨어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사람을 낚으시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분이 내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을 맡기시려고
조금씩 당신을 내어주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가지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드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람을 낚으시오
옆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던지시오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시오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시간 동안
그분이 내게 건넨 애틋한 청을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곰곰이 되새기면서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그날 새벽 나는 다시 뭍에 올랐어
여느 때처럼 호수로 나갈 채비를 하려
잠시 오른 것이 아니야
다시는 호수에 나가지 않으리라
이제 뭍에 뼈를 묻으리라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아직은 설은 다짐으로
아직은 뿌연 바람으로
그날 그렇게 뭍에 올랐어
그리고 난 지금도 뭍에 있어
그래서 난 지금도 뭍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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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설교의 그물로 사람을 낚으시는 예수님
주님께서는 시몬과 그 일행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물을 던졌고,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현상을 보고, 그들은 자기네 수고가 보상을 받을 것이며 복음의 그물을 열심히 던지면 합당한 결실을 거두리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그물에는 이교의 많은 무리도 걸려들 것이었지요. 그런데 베드로와 그 일행이 자기들 힘만으로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십시오. 그들은 너무나도 놀라 할 말을 잃고, 함께 고기 잡던 다른 배의 동료들에게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거룩한 사도들을 도왔듯이 지금도 많은 사람,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의 의미를 연구하는 이들이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들 말고도 또 있지요. 진리의 교의에 정통한 지도자들, 교사들, 사목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렇게 그물은 지금도 던져지고 있으며,그리스도께서 그 그물을 채우시고, 성경이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말하자면 세속의 험한 풍파와 소용돌이에 시달리는 자들을 회개로 부르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의 핵 속에서 “하느님은 푸룻푸룻하고, 꽃을 피운다. 모든 기쁨과 존경 속에서 하느님은 자신 안에 존재한다. 거기에는 값진 기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 다스린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 기쁨을 충분히 말할 수 없었다.” 신적인 기쁨은 신성만큼이나 형언할 수 없다. “하느님 안에는 진노라든가 슬픔과 같은 것이 없다. 사랑과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이와 유사한 투로 말한다. 하느님은 “오로지 우리 지신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 우리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다시없는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그분이 이렇게 되면 될수록, 그분의 기쁨과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23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영혼 승화의 비결
그러고는 공포와 감동에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뜨거운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
“아아, 예수님.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지옥불에서 구하소서."
또 다른 때 히야친타는 무척이나 감동된 양 두 친구를 부르며 말했다.
“루치아, 프란치스코, 나와 함께 기도해 줘 . 영혼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많이많이 기도해야겠어.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진다.... 왜 성모님은 죄인들에게 지옥을 보여 주시지 않을까? 지옥을 보여 주시면 저 사람들은 아예 죄를 짓지 않을 텐데. 그리고 지옥에 떨어지지도 않을 텐데 말이야! "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고바 다 이리아에 구름처럼 모여든 어느 날
그녀는 루치아에게 속삭였다.
“그분께 이 사람들 모두에게 지옥을 보여 주시도록 청해 보면 안 되니? 틀림없이 모두 회개할 거야"
또 어느 때는 정신 없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크게 소리쳤다.
“많은 사람이 지옥에 떨어진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아......"
“무서워 말어, 얘. 넌 천국에 가지 않니! "
“그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난 이 모든 사람을 천국에 가게 하고 싶단 말이야!"
영원과 지옥에 대한 생각은 히야친타로 하여금 이승의 온갖 것으로부터 마음을 떼게 하였고 그녀에게 영웅적인 희생을 실천하게 하였다. 그녀는 두 사람과 의논한 끝에 앞으로는 춤을 추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우렘의 감옥에서 춤춘 것은 불행한 죄수를 위로해 주려고 한 것에 불과하였다.
지옥 환시를 본 며칠 후 성 요한 축일에 사람들은 불을 쪼이며 둘러서서 춤을 추었다. 다른 친구가 히야친타를 데리러 왔을 때 그녀는 루치아에게 말했다.
“난 그곳에 가지 않을 거야 "
“왜?"
‘예수님께 희생을 바치기 위해 이제부터 춤추지 않겠어."(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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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 (5,4)
요즘 우리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그 유래는 이렇습니다. 오디세이아에 보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의 친구인 멘토르 Mentor에게 맡깁니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 여 년 동안 멘토르는 텔레마코스의 아버지처럼 그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입니다.
멘토와 멘티와의 관계와 달리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다른 여타의 스승들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무게 중심은 제자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여타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비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선택이나 제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낳은 결과이며 이를 오늘 복음은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때,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오자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배를 저어나가라고 하신 다음, 배에 앉은 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참 평온하고 온화한 풍경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다음,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 (5,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미처 하지 않은 순간 예수님께서 무작정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치라’고 말씀하시니 무슨 상황이며 이 무슨 경우인가요? 밤새도록 동료들과 그물을 던졌지만 공교롭게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아침인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또다시 던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이를 어찌해야 한다말인가! 이 고장에서 태어났고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이 바다와 그물질하기 좋은 시간과 장소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로 피곤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낙심한 상태인 자신에게 웬 그물질! 그러기에 베드로의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5)라는 표현 속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경륜, 경험과 지식이 곧 자산이라고 할 만큼 베드로 역시도 자기 커리어career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대단했으리라 봅니다. 더욱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이상 하리만큼 그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허탈감, 실망감으로 베드로의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대변하는 말 “애썼지만”(5,5)이라는 표현은 ‘나는 수고를 무척 많이 하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쳤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욕봤다는 표현은 수고했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표현과 같은 어감입니다. 결국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아니면 사도직 활동 가운데서 겪는 피로감, 허탈감, 자포자기의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일 것입니다. 애써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나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자신에 대한 실망의 순간에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새로운 길로 초대하십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지금 바다에 다시 나가 그물질을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짓이니 저는 그만 집으로 가렵니다, 고 거부하고 돌아섰다면, 그는 평생 그 바다에서 어부로 끝날 인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삶을 바꿀 기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나 봅니다. 이게 뭐지. 나의 판단으로 이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과 생명을 느끼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피로감이나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5)라고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아집이나 자존심, 경험과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선택과 결단을 향해 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실망과 허탈 그리고 인생의 피곤함으로 힘들 때 베드로처럼 “스승님, 당신이 말씀하시니 제가 그물을 치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당신의 은총을 믿고서...” 마침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 곧 밤새도록 똑같은 바다에서 그물을 던졌던 그들에게 자신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니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 올라타시고 배를 저어나가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5,8)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베드로의 말과 행위는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승복이며 의탁이라고 봅니다. 이는 곧 사람들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죄 많음을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인간의 살아온 삶이 얼룩져 보이고 비뚤어져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전 죄 많은 죄인입니다, 는 고백은 베드로가 상대적으로 타인보다 자신의 죄가 더 많다, 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베드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많이 느끼고 깨달았다는 표현인 게지요. 하느님 자비의 거울 앞에 적나라하게 서 있는 베드로는 그러기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절감하면서 예수님의 대자대비하심을 체험했고, 그래서 그는 자기 동료들과 함께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라는 스승의 말씀에 힘입어 그분께 귀의하고 의탁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5,11) 것입니다.
이처럼 첫 제자들로부터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체험하였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온전히 회개하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똑같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자비에 사로잡히지 못하면 우리는 온전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투신할 수 없기에,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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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첫 만남에서 세 번이나 순명한 베드로 /
박윤식 [big-llight] 240904 21:00 ㅣNo.175684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는 어부인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며 고기를 잡으러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는 몸과 마음이 다 녹초가 되어 실망과 허탈에 빠져 있었으리라. 고기잡이로 온갖 잔뼈가 굵은 그에게 예수님께서 운명처럼 다가오셨다. 이 처음일 수 있는 만남에서, 그는 연속된 세 번의 순명을 예수님께 바쳤다.
첫 번째는 그분께서 선상(船上) 설교를 위해 배를 저어 조금 나가 달라는 부탁에 대한 순명이었다. 예수님은 그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달라하셨다.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허전한 그였지만, 군중을 설교하시고자 뭍에서 조금 떨어지게 배를 저어 달라는 그분의 부탁에, 밤새 지친 베드로는 그 어느 조건도 없이 단순히 따랐다. 그야말로 순명하였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그에게,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셨다. 경험상 고기 잡기가 감히 어려운 그 시각에 고기를 잡으라는 분부이다. 베드로는 ‘스승님, 밤새워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만 말씀대로 고기를 잡으라 하시니, 나가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순명했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다.
세 번째는 조건 없이 예수님을 따른 순명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배를 두고 모든 걸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시몬의 동업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따랐다. 고기잡이 기적 같은 것을 보고는 그는 정말 기적같이 따라갔다. 이렇게 베드로는 연속된 세 번의 순명을 예수님께 바쳤다. ‘배를 물가에 조금 떨어지게 하여라.’라는 말에 배를 저었고, ‘깊은 곳에 가 고기를 잡아라.’라는 분부에 그물을 던졌고, ‘이제부터 사람을 모을 것이다.’에 서슴없이 따랐다. 베드로는 이 세 번의 부름에 운명적으로 응했다. 한마디 대꾸도 없이, 완벽하게 세 번이나 순명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와 동료들에게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했다. 부르심을 받은 것은 엄청난 은총이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고 일렀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그릇의 크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오늘도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부른 것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게 하고자 우리를 부르신다. 이웃을 더 많이 용서해 주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 부름은, 부모 형제까지 버리라는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킬 것들이다. 우리 신앙인이 기본을 저버리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시각 우리 발길 닫는 곳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믿음의 삶을 더 보람 있게 만들어 주고자 우리를 다정하게 부르신다. 우리는 그 부름에 기쁘게 따라나서야 한다. 기꺼이 그분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두려움 버리고 그분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그분 부름에 운명적으로 따라야 한다. 베드로가 순명한 그 믿음의 마음에는 차마 미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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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선택하셨음이 오늘 복음의 여러 부분에서 눈에 띕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계시고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면, 이 어부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을 터인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두 척 가운데 시몬의 배에 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는 시몬이었고, 다른 배의 동료들은 아마도 고기를 잡지 않고 있었기에 그물을 올릴 때 시몬을 도와주고 시몬이 잡은 고기를 두 배에 나누어 싣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몬의 동료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나서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이는 시몬이었습니다.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베드로는 놀라고 두려워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지 않고 베드로를 당신 곁에 있도록 부르십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두려워하지 마라”(5,10). 어쩌면 이 말씀이 열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인간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를 부르시는 분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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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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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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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담한 실패 체험의 배경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습니다!
출가 이전 뱃사람이었을때 시몬의 외침은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시몬의 체험과 외침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반복해온 체험이요 외침이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해보겠다며, 한번 보란 듯이 대박 내 보겠다며 밤잠을 줄이고 건강까지 해쳐가며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결과는? 참담하고 초라한 꽝이었습니다.
비참함과 자괴감에 당당하던 어깨는 축 처지고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위축됩니다.
살아가면서 수시로 참담한 실패의 새벽을 맞이하는 시몬과 우리입니다.
참담한 경험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로지 인간의 힘, 인간의 경험, 인간의 능력만 믿은 결과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난다긴다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안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끝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더 이상 한걸음도 물러날 곳 없어 보이는 벼랑 끝에서 하느님이 시작하십니다.
돌아보니 참담한 실패 체험에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리하셔야 할 곳에 교만하고 이기적인 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실패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주님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릴때, 내 이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들어높이고,
주님의 뜻을 찾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할때, 결과는? 언제나 대성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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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회당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생각이나, 고집, 고정관념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두 버렸을 때, 기적을 체험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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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을 부르시되 말로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먼저 은총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고기가 엄청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누구나 갖는 공통된 감정입니다.
저도 신학교로 불러주시면 그에 합당한 은총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정말 성모님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첫 번째 느낌은 같았습니다.
저는 성당 마당에 무릎을 꿇었고 한참을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사람이 주님과 어느 정도 가까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 사람이 이 감정을 가졌었는지를 살핍니다.
그러한 감정을 가졌었다면 사람을 덜 판단합니다.
하느님 앞에 한 발짝 갈 때마다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한 번 배반한 유다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잘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는 누구보다 죄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완전했던 사도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았을 때 그조차도 그분 앞에서 설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요한 1,17)
영화 ‘벤허’(1959)에서 유다 벤허는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유대인 귀족입니다.
그는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구였던 메살라가 로마의 장군으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오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메살라는 벤허에게 유대인 저항자들을 배반하라고 요구하지만, 벤허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메살라는 벤허를 반역자로 몰아 그의 가족을 감옥에 가두고, 벤허를 노예로 처벌합니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 로마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고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곳으로 끌려갈 때 나자렛을 지나치게 되었고 자신에게 물을 주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벤허는 여전히 강한 의지로 버티며 복수의 마음을 품습니다.
한 전투에서 벤허는 로마의 군사 지도자 퀸투스 아리우스를 구해 그의 신임을 얻게 되고, 결국 해방되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벤허는 로마에서 퀸투스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명예를 회복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메살라에게 복수할 생각뿐입니다.
벤허는 메살라가 참가하는 전차 경주에 나서고,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하며 메살라를 쓰러뜨립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배경으로 그려집니다.
벤허는 여러 차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며, 특히 골고타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며, 벤허는 자신의 복수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 앞에서 복수만을 생각해 온 자신이
그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분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와 여동생도 기적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되면서, 벤허는 진정한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압도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으로 여겨지는 두려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싫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내가 주님을 판단하고 주님 앞에 무언가 많이 드린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내가 주님 앞에 죄인이고 주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의무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 때마다 그때를 기억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 주신 주님 앞에서 무언가 주고 있다고 착각했을 때를 기억하려 노력합니다.
이 만남의 상품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존 뉴턴은 노예상을 하다 폭풍우 중에 하느님을 만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는 성가를 작곡합니다.
주님 앞에 서면 항상 우리는 죄인이고 그 덕분에 자신 외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고 이 때문에 더 큰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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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허무한 인생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인생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8-11).”
1)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1,40-41).”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42)”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어부들이 먼저 예수님을 따라갔고(찾아갔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이 된 일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정식으로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신 일 사이에는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몇 달 동안, 어부들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군중을 가르치신 것은,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마르 3,9), 즉 사람들을 좀 더 잘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1절-3절의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를 시간 순서에 따라 다시 정리해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 있었던 일이다.
군중이 그분께 몰려들자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셨다.
시몬은 그물 씻는 일을 중단하고 배를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갔다.
예수님께서는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배 두 척을 보신 일과 어부들이 그물 씻는 것을 보신 일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몰려들자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셨고, 어부들은 그물 씻는 일을 중단하고 군중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물 씻는 일을 하느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3)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데’와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주신 일’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 인생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된 자신의 경외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스승님’에서 ‘주님’으로 바뀐 것도 경외심을 나타냅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도 역시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4)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동안 너는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낚는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물 속’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 밖으로’ 사람을 끄집어내는 것은 구원과 생명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가장 먼저 낚아야 할 사람은,
즉 가장 먼저 구원사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일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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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당신과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대하는 두 가지 마음가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순명이고, 다른 하나는 경외심이지요.
먼저 ‘순명’의 차원을 바라봅니다. 평생 어부로 살아온,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일에 잔뼈가 굵은 그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기 위해 애썼음에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자기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다는 허탈함과 빈 손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미안함에 착잡한 심정으로 조업을 마무리하며 그물을 씻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예수라는 분이 그의 배에 올라타시더니 뭍에서 조금 저어나가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어차피 고기잡이도 끝난 마당에 나도 좋은 말씀이나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흔쾌히 원하시는대로 해드렸는데, 갑자기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며 이번엔 아까처럼 부탁이 아닌 ‘명령’을 하십니다. 어부로서 자존심이 상하고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께 자기가 지난 밤 내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지금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인간적인 마음 같아서는 이 쌩뚱 맞은 요구를 무시하고 집에 들어가 쉬고 싶지만, ‘그러나’ 그 말씀이 많은 이들이 ‘스승’으로 여기며 존경하는 예수님 당신이 하신 것이니 일단 따라 보겠노라며 순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게 되지요.
다음으로는 ‘경외심’의 차원을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에 큰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음에도 물고기 한 마리 잡히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그를 절망이라는 부정적 방향으로 이끌지 않고, 겸손이라는 긍정적 방향으로 이끌지요.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 자기 능력을 한 없이 초월하는 신적 존재에게 압도 당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느끼는 경외심이지요. 빵을 배불리 먹는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도 그분을 경외심이 아닌 ‘욕심’으로만 바라보아 그분을 이용해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달려들었는데, 베드로는 그런 사적인 욕심 없이 순수하게 경외심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그분의 신적 본성을 그리고 그런 그분에 비해 한 없이 작고 약하며 죄라는 허물로 가득한 자신의 비천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감히 예수님 앞에 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떠나달라고 청한 것이지요.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막중한 사명에 합당한 사람은 자기 잘난 멋에 살며 스스로가 의인이라 착각하는 교만한 이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지닌 어린 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크신 자비는 그런 이들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도의 길로 부르셨고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따르는 순명으로 응답합니다. 그리고 그 의탁과 순명을 통해 조금씩 사도의 모습으로 변해가지요. 지금 나는 주님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욕심입니까 아니면 경외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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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
호숫가에서 주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는 호수를 뒤로 하고 군중을 향하시니 자연 음향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시는 셈이지요.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시자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부로 이제까지의 삶을 살았던 시몬은 전날 헛 그물질을 한 것을 회상하며 말씀드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복음이 다 이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베드로는 주님의 권위에
압도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배에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 분의 권위에 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부도 아니신 분이 그물을 치라고 했을 때 시몬은 인간적으로는
의아한 제안이었지만 그 말씀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부의 경험으로 보아 그리고 전날 밤샘을 하며 그물을 쳤기 때문에
그렇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그 앞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그는 주님에 대해서 두려움마저 가졌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이신가?” 그가 뭍으로 들어오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배를 뭍으로 댈 수 있었습니다.
잘못하며 배까지 그 무게에 가라앉거나 뒤 짚일 일이었습니다.
시몬은 몹시 당혹스러워 배가 뭍에 닿자마자 주님에게로 가서 무릎을 끓고 엎디어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우리에게도 ‘왜 시몬이 이런 행동을 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으러 가기 전에 예수님께 대한 시몬의 칭호는
‘스승: 에피스타이타’이었는데 고기를 잡은 후에는 ‘주님: 퀴리오스’로 바뀝니다.
단순하고 일반적인 ‘랍비’보다는 ‘스승’은 특별하고 더 존경스러운 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존경스러운 분을 넘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자신이 부당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하느님 앞에 선 구약의 인물을 연상케 해줍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전해들을 때 죽을 수도 있다고 고백하고
판관도 하느님을 직접 뵈면 죽음을 가져 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하느님 면전에서 자신은 한없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탈출 20,19; 판관 13,22; 욥 42,5-6)
이사야는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하느님 대전에서 그는 외칩니다.
“큰일 났고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부당함을 주님 앞에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뭍에다 배를 댄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
우리는 자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뼈져리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후자는 바로 하느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교만은 하느님의 은총을 흩어 버리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불러 모으며 그 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부족하니만 모든 것에서 떠나 주님과 교회를 위한 봉사의 삶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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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소유 없이 주님을 따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다. 육신적·정신적·영성적으로 삶을 유지하고 성장시켜 나가려면 재물과 일, 사람, 정보 등이 요청된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필요로 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려면 그런 것들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 역설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이다. 루카복음은 마르코 복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 먼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응답을 준비하도록 이끌어주신다. 그분은 더러운 영에 들린 이를 치유하시고,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며, 고기를 잡으러 나섰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주셨다(5,6).
먼저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몹시 놀라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라고 말씀하시며 사랑으로 그를 제자로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소유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존재’가 되도록 부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재산, 능력, 사회적 지위, 신체조건 등 각 사람이 지닌 조건을 보고 부르지 않으신다. 그분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사랑의 부르심 앞에 유일한 응답의 방법은 '나 자신으로부터의 떠남'과 사랑뿐이다.
베드로는 사랑의 부르심 앞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5,11). 마르코복음(1,16-20)과 마태오복음(4,18-22)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어부들이 그물과 아버지를 버린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것’을 버린다(12,33; 14,33 참조). 루카복음은 이렇듯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소유로부터의 철저히 벗어나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물질과 사람과 피조물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하느님 아닌 어떤 것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 사람이든 재물이든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는 마음’(appropriatio)을 갖게 되면 거기에 마음이 머물고 애착이 생겨 영(靈)의 눈을 가려버린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오늘 복음의 어부들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되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소유 없이’(sine proprio)의 상태를 항구하게 유지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 일이다. 외모, 학벌, 재산 등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자기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상호관계 안에서 하느님이 드러나도록 관계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야 한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소유하려 하지 말고, 지니고 있는 것에 애착을 두지 않으며, 끊임없이 기쁜 마음으로 되돌리는 것이 제자다운 태도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때에야 진정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부와 자유와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이제 ‘소유 없이’ 내 안에 주님 모실 빈그릇을 마련하고 사랑의 순례를 시작하자! 하루를 살아도 모든 것에서 떠나 모든 이의 모든 것인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아가는 지혜로운 이들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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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셨는지 보여 줍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충고하시자 베드로가 답합니다. 이는 거짓이나 변명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어젯밤에 밤새도록 빈 그물과 씨름을 한 터입니다. 새벽녘에 빈 배로 뭍에 돌아와서 그물을 씻는 지금 얼마나 피곤하고 허망하고 막막하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이로써 실패를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패를 아는 이는 자기 힘과 지혜의 무력함을 알기에 만물의 주인을 경외할 줄 압니다. 실패는 물론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하느님과 자신 사이의 질서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체험입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베드로는 어부로 잔뼈가 굵은 자신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순종합니다. 얼핏 보기에도 물일은 전혀 모르게 생기셨지만, 예수님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왠지 따라야 할 것 같은 힘을 직관적으로 느낀 듯하지요. 사실 이미 실패하고 피로와 실망에 젖어 어구까지 거둬들인 노동자에게 '다시 한 번'이라는 요구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따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이 잡힌 물고기를 보고 베드로는 질겁을 합니다. 인간적 잔꾀나 기술로는 예상조차 못했던 일이니까요.
베드로는 이 일이 자기 능력이 아니라 기적임을 직감합니다. 자기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솔직히 인정하기에, 이를 명하신 분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권능 앞에서 작고 초라하고 불결한, 자격 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여러 모로 출중하고 경건하고 충실해서, 흠이라고는 모를 사람 같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스러움과 약함을 자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라서 부르신 듯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만나기 이전에 어떤 죄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 지혜의 허무함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1코린 3,21)
제아무리 인간이 지혜롭다 한들, 하느님 지혜의 아주 극소한 부분을 어렴풋이 반영한 먼지 정도에 불과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무엇을 두고도 자랑을 해서는 안 되지요. 지능과 재산, 재능과 힘, 인맥과 관계성, 그 어느 것도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1.23)
설령 사람이 보유하고 거머쥔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믿는 모든 이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종래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이 질서 안에서 누구도 제 스스로 자격을 운운할 수 없고, 제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제 것인 양 으스대거나 우쭐거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복음과 서간의 여러 일화들을 통해 베드로의 약함을 많이 목도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반석이고 수장이 된 베드로를 통해,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희망까지 선사받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 속 베드로에게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자격을 봅니다. '이래서 베드로를 부르셨나보다.' 하는 짐작이 들 만큼 그렇습니다. 과연 그는 실패를 아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것도 제 것이라 자랑하지 않을 수 있지요.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질서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우리는 저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가장 깊을 곳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이끄셔서, 당신 현존을 보여 주시고 권능과 사랑으로 우리를 사로잡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나약하고 죄스럽고 불결함을 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실패를 아는지, 말씀에 겸허히 순종하는지, 죄인임을 무릎 꿇어 고백할 수 있는지 관심이 있으실 겁니다.
오늘은 베드로에게서 제자의 조건을 배우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도 변함 없이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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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신앙의 한계를 극복해 내는 삶
<2024.9.5>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3:1~12절)
❝신앙의 한계를 극복해 내는 삶❞
❚ 진정한 회개와 변화 없이 흉내만 내는 신앙은 인생에 닥친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합니다.
✔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을 무엇입니까?
➲ 진정한 중심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1~3절).
아합의 둘째 아들 여호람이 이스라엘을 열두 해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그의 부모처럼 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 우상을 철거하였기 때문입니다(1~2절).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동은 우상 숭배에 대하여 회개하고 종교적 개혁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조치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3절)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표면적 변화가 아닌, 진정한 중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일시적, 외적 변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몇 가지만 잠시 정리하면 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죄와 악을 끊어 내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매일 말씀과 기도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와 중심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돌이킴에 이르러 신앙의 한계를 극복해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직면한 상황을 아뢰고 순종해야 합니다(4~8절).
모압의 왕 메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철저하게 굴복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4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죽자 모압 왕 메사는 이스라엘을 배반하였습니다(5절). 여호람 왕은 이스라엘 군대 전체를 점검한 다음에(6절) 배반한 모압을 치기 위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함께 진격하여 모압을 치자고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사밧의 조언대로 에돔의 광야 길로 가게 됩니다(6~8절). 여호람은 모압과의 전쟁 여부를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았고, 정치, 군사적인 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쉽게 세상적인 방법에 의지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성령 안에 거하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를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최선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고, 궁극적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먼저 현재 직면한 상황을 아뢰고, 하나님께로부터 필요한 지혜와 능력을 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며 삶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가족,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먼저 하나님께 아뢰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므로 신앙의 한계를 극복해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상황에 얽매인 잘못을 회개해야 합니다(9~12절).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유다, 에돔 연합군은 에돔 광야 길을 통해 모압을 향해 갈 때, 예상하지 못한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행군 칠일 만에 군사와 함께 간 가축들이 마실 물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9절). 이 위기의 상황에서 여호람은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10절)라며 탄식합니다. 전쟁을 시작할 때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하나님에 의해 소집된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다 와 여호사밧은 지금 직면한 이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물어볼 만한 선지자를 찾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엘리사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11절).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12절)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왕과 에돔 왕을 데리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우리 스스로가 결정해서 행동을 해 놓고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참 이기적인 태도의 신앙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내뱉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며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처음부터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 불어닥친 여러 가지 문제 앞에서 그 상황에만 얽매여서 현재의 상황과 타인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므로 신앙의 한계를 극복해 나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변화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끊임없는 변화를 경험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함을 탓하며 도움을 구하여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삼하 3:1~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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