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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
야고보서4:13-17
2025년 새해를 맞이하여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한 해의 첫 시작을 주님과 함께, 예배와 함께 시작하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2025년 한 해 동안에는 성도들과 가정과 교회와 우리나라에 즐겁고 복된 일만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기대하고 새해 덕담을 나누지만 사실 우리 마음속에는 기대와 설렘보다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나라의 정치적 불안과 지난주일 무안공항에서 일어난 사고 때문입니다.
181명의 탑승자 중 두 명의 승무원을 빼고는 모두가 사망한 참으로 안타까운 대형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를 보면서 오늘 성경말씀이 정말 생생하게 오버랩 되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번 비행기 참사로 희생된 분들이 무안공항에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여행을 잘 다녀왔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탄절 해외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맡겨준 일을 감당하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 중에서 자신들의 삶이 오늘로 끝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시찰에 있는 목사님 아버지가 6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녁에 차를 주차해놓고 아침에 나가보았더니 밤새 접촉사고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웃에 있는 분이 사고를 낸 것입니다.
사고를 낸 분과 함께 차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달려오던 차가 이들을 덮쳐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조문을 갔을 때 교회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생생합니다.
‘살아있지만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좋은 교회에 부임하여 기뻐하고 아들이 설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매주 올라왔던 장로님은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성경학자들 간에 흥미로운 토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선정하는 토론이었는데요,
예수님이 하신 중요한 말씀 중에서 20개를 선택하고 학자들의 토론을 거친 후에 투표를 통하여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80%의 학자들이 동의한 예수님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마가복음1장 14-15절이었다고 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 하신 말씀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하나님의 시간이 되어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될 터이니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인간의 시간은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다 기다렸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선언하실 때 인간의 모든 계획은 끝나게 됩니다.
문제는 ‘때가 찼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다. 내가 더 이상 기다려줄 시간이 없다’고 선언하실 때가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알지 못하고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 시간이다, 내 때다. 내 생명이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시간이 어디 있고 내 때가 어디 있고 내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2장)
부자가 농사를 짓고 소출이 풍성하자 곡간을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며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 부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면서 경고를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먹을 것을 많이 쌓아두었다고 그것을 다 먹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준비했다고 여러 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 열심히 운동했다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도 오늘 사고로 죽을 수 있고 많은 돈을 갖고 있어도 그 돈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인간의 모든 것은 다 정지됩니다.
계획했던 것도 정지되고 생각했던 것도 정지가 되고 준비했던 것도 다 취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정지되면 현재의 나의 모습으로 내 인생도 끝나게 되고 이 모습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현재의 나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끝날 때 만족하고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그때 주님이 부르셨다면 결코 괜찮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풍성한 소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는데 그것으로 끝납니다.
풍성한 소출로 이웃을 위해 보람되게 사용해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타주의자라는 말을 들을 기회가 사라진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정지의 시간입니다. 올 스톱이고 풀 스톱이 되는 것입니다.
사이가 나빴으면 나쁜 대로 끝나는 것이고 빚이 있으면 빚진 대로 끝나는 것이고,
말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찾아보아야 할 사람도 못 본 채, 마무리해야 할 일도 끝나지 못한 채 끝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며 살아가자고 했는데 그 헌신을 할 기회, 나중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지 못한 채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숙제를 다 해가지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아이처럼 그렇게 기쁨으로 하나님을 만나 뵐 자신감과 안심이 있습니까?
죽음의 의미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 뿐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뒤에 내가 알게 뭐야!’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한 평가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없는데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라고 하면 한 순간 이 세상의 삶은 올 스톱이 되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을 위하여 성경은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의 남은 세월을 계수하는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로 알려진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하면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말하는 지혜로운 마음은 우리 날을 계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삶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삶을 살피면서 계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남은 삶이 한 달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해야 할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은 세월이 마냥 계속된다고 생각하면서 되는대로 살아가는 지혜 없는 인생이 되어서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남은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우리의 인생이 올 스톱 될지 알지 못한다는 생각 속에서 우리 날 계수하는 지혜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삶의 목표와 의미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오늘본문 13, 14절에서는 큰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해 권면하는 야고보 장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려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이 세운 신흥도시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 도시, 내일은 저 도시로 가서 돈을 벌자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 장로는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한다’고 하면서 주의 뜻을 살피고 주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들이 사는 목적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이 목표를 향하여 살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돈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이나 목표는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님 앞에 심판받을 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세상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고 새로운 목표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삶을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야고보 장로는 실제로 행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뜻대로 살아가던 삶이 예수님 가치관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언제 주님이 부르시던 우리는 감사하면서 떳떳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루하루의 삶을 충성되고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재림의 준비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
나의 모든 스케줄에 올 스톱이 걸리고 주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때가 생각하지 못한 사이에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충성된 종이란 주님 앞에 거짓이 없던 삶을 살고 정성을 다 바치고 섬겼던 삶을 말합니다.
내 맘대로 내 멋대로 마구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노예로서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겼던 생애를 말합니다.
이 생활만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된 생활이 됩니다.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왕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는 그의 포악한 성품 때문에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고 싫어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의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보이는 거예요.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져서 앞부분 3이라는 숫자는 기억이 나는데,
그게 삼 일인지, 석 달인지, 삼 년인지 잘은 모르겠어요., 그 3 안에 무서운 심판이 있을 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루드비히는 ‘내가 3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3일 동안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 해줬어요.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을 하면서, 3일째 되던 날 높은 탑 위로 올라갔는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어요.
‘3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생각한 그는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나도, 죽지 않자 삼년이라는 확신을 갖고 3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삼일, 삼 개월, 삼 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졌던 것입니다.
공작이 독일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주어진 축복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덤으로 주신 생명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은혜로 주신 시간을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한 번만 기다려주신다는 이 중요한 기회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나 받은 것에 충성을 다하여 두 배를 남겼듯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일에 투자하여 열매를 맺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025.1.1. 송구영신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