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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한 권으로 보는 세계사
한국사도 잘 모르면서 세계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사가 세계사고, 세계사가 한국사라고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구촌’이란 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사는 세상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한 권으로 보는 세계사」라는 이 책은 박은봉이라는 여자 선생님이 엮었는데, 그녀는 세계사를 전공한 학자도, 작가도 아니다. 그저 사학과를 나온 뒤에 여성단체와 노동상담소 등에서 번역과 글쓰기를 하는 평범한 여자다. 그래서 책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자신이 공부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1) 인류의 기원
책 표지에 ‘인류의 출현에서 소련의 붕괴까지’라고 했는데, ‘인류의 출현’이라는 데에 나름대로 필(feel-느낌, 결, 마음)이 꽂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은 인류의 기원,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하는 의문과 궁금한 점이 아주 많다. 이 책에서는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5,6백만 년 전이고, 둘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했다. 인간은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중세까지 기독교의 주장이라면 몰라도,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둘 다 진화했다는 것인데, 인간은 진화했으나 원숭이는 왜 진화하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5, 6백만 년 전이라고 하는 인류의 출현 시기도 책마다 다르다. 7백만 년 전, 혹은 9백만 년 전으로 올려잡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200만 년 전부터 인간은 도구를 사용했다고 한다. 1925년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에서 인간이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화석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키와 몸무게도 작았지만, 뇌용량이 현생인류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돌을 깨뜨려 간단한 연모를 만들어 썼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현생인류의 조상일까? 아니다. 그들은 빙하기인 급변한 환경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생인류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인류가 불을 사용한 것은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굳이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빌리지 않더라도 최고의 신 제우스 몰래 불을 인간에게 선물하고 대신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인들은 그 신에 제사를 지냈고, 제사 때는 제단에서 횃불을 들고 축제도 열었다고 한다. 인간도 처음에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불을 몹시 무서워했다. 화산폭발이나 번개로 인해 불타는 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 죽은 짐승의 고기가 훌륭한 식량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불로 음식을 익혀 먹는 게 유용하다는 것과 추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에서 점차 불을 경외했다.
5, 60만 년 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진화한 인간이 나타났는데, 인도네시아 자바섬과 중국의 북경에서 발견된 인류 조상 화석이 그것이다. 이들의 두뇌 용적은 1천㏄ 정도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2배가 되었다. 자바에서 발견된 것을 피테칸트로푸스 에릭투스, 북경에서 발견된 것은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 불렀고, 직립했다 하여 ‘호모 에릭투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20만 년 전에는 이들보다 진화한 인간의 화석이 유럽에서 발견되었는데, 독일 네안데르탈 지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네안데르탈인으로 명명된 이들은 두뇌 용량이 1.200㏄정도로 현생인류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현생인류의 조상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가 같은 시기에 살고, 결혼했다는 증거는 없다. 둘 다 한곳에 정착해 살기는 했지만, 네안테르탈인은 서로 교류할 줄을 몰랐다고 총균쇠의 저자 제럴드 다이야몬드가 말했다.
드디어 4만 년 전(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7만 년 전이라고 했다)에 현생인류가 출현했다. 스페인 알타미르 동굴에 벽화를 그린 주인공들이 그들인데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유럽의 크로마뇽인, 아프리카 그리말디인, 중국의 상동인(上同人)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라스코 동굴벽화의 소, 말, 돼지, 사슴, 맘모스 등을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을 써서 그리기도 했으며, 이들 현생인류가 나타난 뒤 기원전 3천 년 전까지를 이른바 석기시대라고 부르는데, 석기시대는 도구 제작 방법과 도구의 모양에 따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뉘고, 구석기시대는 대략 1만 년 전까지로 자연 그대로 혹은 타제석기를 사용했고, 이후 신석기시대는 돌을 갈거나 쪼개 정교하게 만든 마제석기를 사용했다.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상동인 모두 구석기시대의 주인공들이다.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오면서, 그러니까 대략 9천 년에서 7천 년 전부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떠돌지 않고 한곳에 정착해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간사회는 불평등이 시작되었다. 그전의 원시사회는 가난했지만, 평등한 사회였다. 먹을 것이 부족했기에 똑같이 나눠 먹었다. 농업혁명으로 식량이 풍부해지자 먹고 남는 것을 저장하게 되고, 잉여농산물은 더이상 공동의 것이 아니었다. 사유의 시초로 평등이 깨졌다. 공동으로 소유했던 여자도 이제 개인 혹은 힘센 남자의 소유가 되었다. 주인이 된 남자는 소유물을 남이 아닌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이에 자신의 아들이라는 확인이 필요했고, 상대 여성은 다른 남성과 관계를 금지되었다. 여성은 정조를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는 도덕관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대략 200만 년이라고 한다면, 그중 199만 3천 년은 평등한 원시사회로 비록 배고픈 평등이었지만, 이때는 모두 공평했다. 인간의 불평등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 문명과 전쟁의 시작
인간을 불평등의 존재로 만든 농업혁명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식물의 씨앗에서 싹이 터고 자라고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을 본 인간은 먹을 수 있는 씨를 심어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돌도끼, 돌삽으로 땅을 파 야생 밀과 보리 등을 심었다. 울타리를 치고 들소와 야생말․맷돼지․사슴 등을 기르다 식량이 모자라면 잡아먹기도 했고, 농사짓는 데 이용하기도, 무엇을 운반하는 데 쓰기도 했다. 이렇게 농경과 목축을 처음 시작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그리스어로 두강 사이라는 뜻이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 이른바 초승달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다. 농경의 시작은 이집트 나일강, 중국의 황하강, 인도의 인더스강 등에서 시작되었는데, 4대 문명 발상지라고 하는 곳에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문명이 시작되고 발달하면서 시작된 것은 전쟁이었다. 이언 모리스 교수는 『전쟁의 역설』이라는 책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고대에는 20% 넘던 인류의 사망률이 1% 아래로 낮춘 것이 전쟁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다. 문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전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아는 위대한 인물들 모두 전쟁영웅이었는지 모른다. 카이사르, 나폴레옹, 이순신까지.
전쟁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은 그것을 직접 경험했거나, 객관적으로 보고 기록을 남겼기 때문인데,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르도토스의 〈페르시아 전쟁사〉와 당시 전쟁을 경험한 투카디테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등이 전쟁의 실상을 생생히 전한다.
기원전 550년 지금의 이란 고원에서 페르시아가 일어났다. 페르시아의 최전성기는 세 번째 왕 다리우스 1세 때였다. 그는 사분오열된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고, 인더스강에서 이집트,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지중해 해상권을 두고 그리스와 일대격전을 벌였는데, 이것을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한다. 싸움의 빌미는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일으킨 반란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의 압제에 반발한 이들 도시들이 아테네를 원조하자, 다리우스 1세가 이를 구실삼아 그리스 원정에 나선 것이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해륙양면으로 그리스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돌아갔다.
2년 뒤 이번에는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로 향했다. 아테네 북쪽 26마일 지점인 마라톤 평원에 페르시아군이 상륙하자 아테네는 항복하자는 쪽과 싸우자는 쪽으로 갈라져서 우왕좌왕했다. 이때 웅변가 테미스클레스가 나서서 외쳤다. “아테네를 자유의 도시로 지키든지, 항복해서 시민들 모두 노예가 되든지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 여러분은 노예가 되길 원하는가!”분기탱천한 시민들이 전장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때 밀티아데스 사령관은 적을 골짜기로 유인해 협공하는 전술로 페르시아군 6,000명을 죽였다. 아테네군 전사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전투 결과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린 병사는 결국 기진맥진해 죽었고, 이것이 마라톤 경주의 효시였다.
10년 뒤인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왕은 3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테르모필레 방어의 총지휘관이었던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끈 7천 명의 병사는 페르시아군과 끝까지 싸웠으나,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스파르타로 인해 시간을 번 아테네군은 살라미스의 좁은 수로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해 대파시켰다. 이 해전은 이순신의 명랑해전처럼 상황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였다. 결국 이듬해 폴리스 연합군이 승리했고, 아테네는 황금시대를 맞아 200여 개에 달하는 폴리스들로 델로스 동맹을 조직했다. 아테네는 이들이 낸 세금으로 대함대를 만들었고, 맹주가 되어 절대적인 지도권을 행사했다.
폴리스들이 아테네의 지배권 아래에 들면서 아테네는 제국이 되었는데, 이 무렵 통치자 페리클레스는 공물을 기반으로 아테네를 크게 번창시켰다. 대부분의 아네테 유적은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따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조직했는데, 왕을 비롯한 전원이 목숨을 바친 스파르타로서는 아테네의 독주가 괘씸했다. 이때 폴리스들은 각각 아테네 아니면 스파르타 편이 되었는데, 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의 명장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해군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아테네를 삼켰다. 27년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3) 진시황 중국 통일
둘레 1,410m, 높이 47m나 되는 이 거대한 구조물은 중국 섬서성 임동지방에 있는 진시황의 무덤이다. 무덤 둘레는 이중의 성벽이 처져있고, 1974년 무덤에서 동쪽으로 1㎞쯤 떨어진 곳에서 동서 210m, 남북 60m에 달하는 또다른 무덤도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는 7천 개의 등신대 병사와 병마상이 있었다. 아마도 시황제의 묘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진시황제는 500여 년 동안 제후들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군주다. 성은 영(瀛), 이름은 정(政), 그의 출생에는 비화가 전해지는데,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진(秦)나라 왕자 자초를 장사꾼인 여불위가 사재를 털어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고 총애하던 애첩을 그에게 주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후에 아이가 자초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시황제라는 것이다.
시황제는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는 이른바 군현제를 실시하였으며, 화폐와 문자, 도량형은 물론 수레바퀴의 폭까지 통일시켰다. 기원전 221년의 일이다. 만리장성의 축조와 분서갱유도 그의 치적이라면 치적인데, 제자백가의 사상 가운데 법가만을 인용하고 다른 사상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가사상 창시자는 상앙으로 한비자와 이사가 그 뒤를 이었다. 시황제는 이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제자백가의 저술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생매장한 이른바 분서갱유를 단행했고, 장장 2천 4백㎞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의 정책은 일반 백성들에게 몸시 가혹한 정책이었으며, 그가 순행길에 갑자기 죽자 농민 반란이 폭발했다. 구 귀족과 신흥세력도 이에 가세했다. 결국 기원전 206년 초나라 귀족의 후예 항우에게 멸망 당했는데, 통일국가를 세운 뒤 불과 15년 만이었다. 그 후 5년간은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항우와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유방이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민심을 얻은 항우가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다.
(4) 비단길(silk road)
진시황제에 이어 유방이 한漢나라를 일으켜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북방의 흉노가 진나라가 망한 틈을 타 인근지역을 통합하고는 한을 위협했다. 한 고조는 대대적인 훙노 토벌에 나섰으나 오히려 패하고 목숨까지 잃을뻔했다. 금은보화와 공주를 시집보내 회유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2세기 감숙성 일대와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은 흉노는 서방과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기원전 159년 즉위한 무제는 역대 굴욕을 씻기 위해, 흉노에 쫓겨 서쪽으로 간 월지(月氏)국과 손을 잡고자 기원전 139년 장건(張騫)을 월지국에 보냈다. 그러나 국경을 벗어나자마자 흉노에 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장건은 월지국 여인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 10년 뒤에 장건이 탈출해 월지국에 도착했다. 월지는 지금의 우즈벡 공화국 부근으로 그들은 한나라와 손잡고 흉노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나라가 그만한 힘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장건은 중국으로 돌아오던 중에 다시 붙잡혀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기원전 126년 한나라를 떠난 지 13년 만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장건의 서역 체험 이야기는 한 무제를 들뜨게 했다. “월지를 찾다가 대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 포도주 맛도 기가 막혔지만, 말이 뛰어납니다. 피땀을 흘린다는 이 말은 하루 천리를 달립니다. 병사들은 말을 탄 채로 활을 쏘는데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그 유명한 한혈마(汗血馬) 이야기다. 기원전 123년 무제는 말을 얻을 욕심으로 장전을 다시 보내 흉노를 치고 대완에 이르는 길을 열게 하였다. 현재의 키르키스탄으로 장건은 기원전 112년 좋은 말 수십 필을 이끌고 돌아오면서 부하들을 파키스탄, 인도, 이란에 보내 그 나라의 사정을 살펴오게 했다. 무제는 흉노를 토벌한 뒤 이광리(李廣利)를 보내 대완을 정복했다. 결국 동서로 갈라진 흉노는 동은 한에 항복했고, 서흉노는 외몽골로 물러갔다.
장건은 세계의 지붕으로 일컫는 파미르고원 북쪽 천산북로를 거쳐 중앙아시아에 들어갔다가 천산남로를 통해 돌아왔던 것인데, 천산산맥 중앙인 파미르고원은 한여름에도 흰 눈이 덮인 곳으로, 장건은 이 길을 네 번이나 여행했다. 그가 개척한 이 길은 중요한 동서 교역로로 비단 거울 칠기 약재 향신료 복숭아 살구 닭 제지 등이 서역으로 팔리고, 거기서 다시 유럽과 지중해로 전해졌으며, 서역의 석유 오이 호박 호두 수박 마늘 참깨 견직물과 모직물 등이 중국으로 건너왔고, 불교와 조르아스트교, 이슬람교 등 종교와 역법, 점성술이 이 길을 통해 소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서역에서 들어온 문물에 호자를 붙여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격구 축구 그네 윷놀이 줄타기 탈춤 등에 영향을 끼쳤다. 봉산탈춤 인물들이 서역 사람을 닮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5)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원로원의 승인 없이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순식간에 로마에 입성했다.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이미 이집트로 도망쳤고, 쿠데타는 대성공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로 진격했다. 이집트는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폼페이우스는 거기서 자객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때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누나인 클레오파트라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여왕으로 봉했다. 곧바로 영리하고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이 무르익었고, 아들이 태어났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권력을 손에 쥐었고 원로원은 그를 종신 총통으로 임명했다. 다시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 속에 그도 나약한 공화정보다 강력한 제정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 이래 유지되온 공화정 전통을 무너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으로 들어가던 카이사르는 40여 명의 공화당파에 둘러싸였다. 그들은 일제히 단검을 휘둘렀고, 칼을 맞은 카이사르는 비틀거렸다. 이때 뒤에서 누군가가 일격을 가했다. 카이사르가 친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 너 마저!”비통한 외침을 남기고 카이사르는 쓰러졌다. 카이사르의 죽음에도 공화정은 지킬 수 없었다. 이미 로마 공화정은 긴장감을 잃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자,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친구이던 안토니우스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미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바 있으므로,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렸고, 불행한 연인이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결의 길을 택했다. 이때부터 로마는 공화정이 막을 내렸고, 아우그스투스 황제를 시작으로 제정이 시작되었다.
(6) 무하마트의 이슬람교
서기 610년 ‘나는 알라의 예언자다. 전지전능한 알라신은 유일하다. 알라를 믿으면 낙원이, 믿지 않으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설교로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시작한 이슬람은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우상숭배 반대, 만민평등을 외쳤기 때문에 기존질서를 위협한다며 귀족들에 의해 위험인물로 지목되었고, 도망 다니다가 불과 8년 사이에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입성하여, 메카의 지배자로 인정받고 아라비아반도 전체를 신의 이름으로 통일했다. 그가 예수나 석가와 다른 점은 직접 칼을 들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흔히 이슬람의 선교방식을 ‘코란이냐? 칼이냐?’고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정복지 주민과 포로들에게 개종을 권유하기도 하지만, 공물을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얼마든지 허락했다. 마호메트는 아라비아를 통일하고 시리아 원정길에 올랐다가 632년(금관가야가 망하던 해)에 죽었다. 그의 나이 62세 때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칼리프들은 시리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해 지중해 남쪽 연안을 장악했고, 유럽의 게르만까지 위협했다. 이슬람 사상은 기독교, 유대교, 조르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마호메트가 젊은 시절 장사꾼으로서 근동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종교·풍습·문화를 익힌 때문이었다. 그는 사막지대에 흩어져 살던 아랍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지도자임이 분명하다.
(7) 측천무후(則天武后)
역사상 여성으로서 통치자가 된 예는 적지 않다. 신라에는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있었고, 이집트의 크레오파트라,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 등, 이들은 여걸들이다. 이들 모두는 왕가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치자의 교육을 받았으나, 측천무후만은 달르다. 상인의 딸로 궁녀가 된 뒤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는데, 성은 무(武), 이름은 조(照), 산서성 문수현에서 태어났다. 형과 동생,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된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정관의 치’시대를 열며, 정치를 펼쳤으나 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649년 병석에 눕고 말았다. 아버지 병문안을 간 태자 치(治)는 그곳에서 시중들던 궁녀 미랑(무)을 한번 보고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태종이 죽고 치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이다.
고종은 지병인 간질병으로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자 궁녀에서 황후가 된 무후에게 정무를 맡겼고, 660년부터는 아예 그녀에게 위임해 버렸다. 이 해에 무후는 소정방을 백제로 보내 백제를 멸하고, 668년에는 고구려마저 무너뜨렸다. 수양제와 당태종의 숙원이던 한반도를 정복한 것이다. 675년 태자 홍이 죽었다. 사람들은 무후가 독살했다고 쑥덕거렸다. 둘째 현이 태자가 되었지만, 얼마 뒤에 모반 혐의를 쓰고 쫓겨나 자살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셋째 아들 현이 황제가 되니 제4대 중종이다. 중종은 1년 만에 쫓겨났다. 황후와 시어머니인 무후간 다툼으로 중종이 내쫓긴 것이었다.
690년 측천무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 나이 67살, 나라 이름을 주(周)로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스스로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칭했다. 넷째 아들 단(旦)을 황태자로 삼고는 성을 무씨로 고쳤다. 그러나 주나라는 15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무후가 병들어 눕자 재상 장간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쫓겨났던 중종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당왕조를 재건 했다. 그해 겨울 측천무후가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705년의 일이다. 그러나 중종의 비 위씨가 제2 측천무후를 꿈꾸며 만두에 독을 넣어 중종을 살해한 것이다. 황후 위씨의 야심은 며칠 가지 못했다. 단의 셋째 아들 이융기(李隆基)가 712년 숙모 위씨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현종은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위 ‘개원의 치’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으나, 양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사를 게을리하다 안녹산 등 반란으로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말았다.
(8) 독일·프랑스·이탈리아는 한 나라
카를로스 대제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제국의 땅을 네 명의 아들에게 분할 해 통치하게 했다. 루트비히 1세가 영토와 함께 서로마황제의 제관을 물려 받았으나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능했고, 형제들과 골육상쟁을 벌이다가 죽었다. 왕국은 다시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은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 일대, 차남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를, 막내는 서프랑크를 각각 물려받았다. 그런데 장남 로타르가 일찍 죽음으로 그가 통치하던 지역이 남은 두 형제에게 분할되었는데, 북동부는 동프랑크로, 서북부는 서프랑크로 나누어졌다. 870년에 있은 이 메르센 조약이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경계의 기원이 되었다.
영토분할 문제로 분쟁이 잦아지자 이민족의 침입도 잇따랐는데, 북쪽은 노르만족 즉 바이킹이, 동쪽은 마자르족이, 남쪽은 이슬람 세력이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차별 약탈과 살상을 저질렀다. 중세사회의 독특한 질서인 봉건제도는 바로 이 혼란의 시대에 생겼다. 주종제도와 장원제도가 결합한 이 중세 특유의 봉건제도는 정치·경제·군사·사회적 지배 질서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이 토지를 하사하면 신하는 충성과 복종을 명세하고, 주군은 신하를 보호하고 부양할 책임을 지고, 신하는 주군을 위해 군사력을 제공할 의무를 짐으로써 상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제도였다. 주종관계는 연쇄적으로 이어져 거대한 피라미드를 이루었는데, 맨 위에 국왕 혹은 황제가 있고 그 밑에 봉신으로 공작이, 그 밑에 다시 후작과 백작이 있는 식이었다. 맨 밑바닥에는 농민이 있었는데 이들은 무거운 짐 모두를 져야 했다. 교회 역시 또 하나의 영주로서 농민들 위에 군림했다. 중세 농민은 반은 노예고 반은 농민이란 뜻으로 농노라고 부른다. 각종 세금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초야권이란 것도 있었는데 신부가 결혼하면 첫날밤을 신랑이 아닌 영주와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9) 도시와 자유
고대 그리스가 도시국가들에서, 로마도 도시의 성립으로 시작되었지만 유럽의 유서 깊고 실질적인 도시들은 10세기부터 발달되었다. 함부르크·아우구스부르크·룩셈부르크 등 ‘부르크’는 독일어로 성곽이란 뜻으로 이들 도시는 두터운 성곽에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는 쓰레기와 상하수도 문제가 심각한 가운데도 인구가 증가하면서 발달해 새롭게 형성되었는데 상인들이 임시로 거주하며 장사하는 곳이었다. 로마시대 이래 내려오던 고대도시의 외곽지역에 위치하고,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 장사가 잘 되는 곳에 이들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들 상인들을 ‘부르주아’라 불렀는데, 오늘날 자본가를 뜻하는 바로 그 말이다.
도시가 제일 먼저 활발히 발달한 지역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으로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이들 도시는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시장세·거래세·통과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할 수 있고, 땅값이 올랐기 때문에 시장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도시가 커지면서 상인과 함께 수공업자들이 도시 주민의 핵심이 되었다. 그들은 영주의 지배로 부터 벗어나 영업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그들은 영주의 농노가 아니었다. 도시민들은 점차 돈으로 혹은 무력으로 자취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행정기관과 재판소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질서를 유지했으며, 군대도 길렀다.
여기서 ‘도시는 자유를 낳는다.’는 말이 생겼다. 도시는 이제 시민의 고향이자 국가이고 삶의 공동체였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관념보다 도시의 시민이란 관념이 훨씬 강했다. 이런 배타적인 생각은 타 도시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다. 당국은 자기 도시 사람을 보호하고,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의 상업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대내적으로 시민 공동의 복지를 위해 경제통제도 가했다. 이 같은 통제의 한 형태가 길드다. 철저히 주종관계에서 움직였던 중세봉건 사회에서 도시는 분명히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농노나 영주와는 다른 새로운 경제원리에 의해 살아가는 시민들은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로서, 이들로부터 근대사회로 가는 눈이 싹트기 시작 했던 것이다.
(10) 카노사의 굴욕
고려의 서희 장군이 거란과 담판을 벌리고(993년), 강감찬 장군이 귀주(龜州)에서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칠 그 무렵(1019년), 유럽은 우리보다 더한 신분사회였다. 24개 계급으로, 첫 번째가 하느님, 두 번째가 교황, 그 다음은 수도원장, 이하 사제와 카톨릭 관계자들이 차지했고, 황제는 일곱 번째, 국왕은 여덟 번째, 영주는 열 번째, 맨 끝은 유대인들이었다. 교회가 황제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막강한 권위를 행사하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1077년 성직자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타락으로 교황 및 성직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을 때, 새로 즉위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 성직 매매를 일체 금지하고, 그때까지 국왕과 제후가 갖고 있던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이 갖겠다고 선포했다. 성직자를 세속의 왕이 임명했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교황과 황제의 결전이 불가피하였는데, 1076년 하인리히 4세는 제국 국회를 소집, 교황을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카톨릭에서 추방한다는 뜻으로 파문하자, 하인리히를 지지하던 독일의 제후와 성직자들도 교황과 같이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하인리히는 당황했다. 교황에 맞설 지지기반을 잃자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고, 꽁꽁 언 라인강을 건너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 간신히 교황은 만나려고, 추운 겨울날 얇은 옷에 맨발로 눈 속에 서서 꼬박 3일 밤낮을 눈물로 용서를 빈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고서야 교황을 접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파문은 취소되었으나, 성직 임명권은 교황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이를 눈치챈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0년 하인리리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하고 새 황제를 승인했지만, 하인리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독일 성직자들과 제후들을 소집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오렸다. 그리고 1082년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해 버렸다.
결국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끝났지만,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난 뒤였다. 성직 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 하에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회의에서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날로 높고 막강해져 하느님 다음의 지위에 있게 되었는데, 교황권이 절정에 달한 것은 인노켄티우스 3세 때다. 이때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라는 말 그대로 교황권 앞에서 황제는 빛을 잃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11) 십자군 전쟁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종교전쟁의 뿌리 ‘십자군 전쟁’은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육, 만행이 판을 친 전쟁으로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그런 전쟁은 없었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인 공통의 성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 기독교인에게는 예수가 죽어서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게는 마호메트가 머문 곳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금지시켰다. 투르크 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비잔틴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기회라고 보고 1095년 11월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역설하고는 제후들을 부추겼다. 교황의 웅변에 감격한 기독교 신자들은 ‘하느님이 이를 원하신다.’며 1096년 군대를 창설했으며, 프랑스에서는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가 마라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모두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내고 성안으로 진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하였다. 성안에 머물며 고립되자 나중에는 사라센인들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남하를 계속해 1099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6일 동안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무차별 살해했다. 십자군에 종군한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는,
“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돌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고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 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고 했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빼앗기자 교황은 연달아 십자군을 파견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회로 성지탈환이라는 본래 목적을 달성한 것은 1차 원정 때 뿐, 나머지는 탈선행위를 자행했으며 심지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라틴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1212년 제5차 십자군, 이른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과 결탁한 선주의 농간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가 사라센인에게 노예로 팔았다. 700명에 달하는 이 소년들을 사라센인들은 다치지 않게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더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영주와 기사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국왕과 상인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둘이 손잡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2) 몽골제국(1206∼1227)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절대적인 힘’이라는 몽골어의칸이 나타났다. 칭기즈칸이 그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 아버지 에스게이로 부족장이었으나, 어머니 호메룬은 에스게이가 다른 부족에게서 약탈해온 여자였다. 테무진이 9살 때 아버지가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하자 테무진은 네 동생과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보잘 것 없는 부족인데다 아버지 명성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17세 때 불테와 결혼했다. 그런 어느 날 원한을 품고 있던 매르키트 부족이 공격해 왔다. 테무진은 재빨리 어머니를 피신시키고, 도망쳤다. 그러나 아내가 포로로 잡혀갔다. 이는 20여 년 전 에스게이가 신혼의 아내를 빼앗아 아내로 삼은 데 대한 복수였다.
테무진은 아버지 친구인 케레이트 부족 완칸과 동맹을 맺고 메르키트를 기습했다. 테무진은 알타이 산맥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만 부족과 일대 결전을 벌여 부족장 다얀칸을 사로잡고 고비사막 주변 초원을 수중에 넣었다. 이로써 몽골 일대를 통칭하는 부족이 되었다. 1206년 테무진은 몽골을 통일하고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흩어져 서로 싸우던 부족들은 칭기즈칸 밑에 모여 하나가 되었다. 정벌의 첫 번째 목표는 금나라였다. 1211년 초원과 사막을 건너서 황하 이북을 수중에 넣고, 1213년 금나라 수도 북경에 이르렀다. 금을 정벌한 칭기즈칸은 멈추지 않고 중앙아시아로 뻗어갔다. 1219년 총 60만 대군이 동원된 사마르칸트 정벌로 호라즘의 왕 무하마드는 가스피의 섬에 피신해 있다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많은 땅들을 다스리던 내가 무덤 정할 땅도 없이 죽는구나!”왕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제 칭기즈칸은 페르시아, 가프카스산맥 너머의 남러시아, 크림반도와 볼가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불과 20년 만에 유럽 동부지역까지 손에 넣었다. 알렉산더 등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유라시아 대륙에 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그렇게 된 데는 날랜 기병과 날렵한 옷차림으로, 유럽의 갑옷 병정은 몽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화약 제조기술과 투석기는 성벽을 공격하는 신무기였다. 칭기즈칸은 7년에 걸친 원정의 피로를 풀기 위해 휴양하다가 1227년 66세 때 사망했다. 그가 점령한 대제국은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 등 네 명의 아들이 상속했다. 칸 자리를 두고 한동안 친족간 암투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막내 툴루이의 셋째 아들인 쿠빌라이가 칸이 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1271년 쿠빌라이는 수도를 카라코럼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나라 이름을 원元으로 고쳤다. 이로써 중국 대륙은 이민족이 세운 최초의 통일왕조가 되었다
(13) 중세유럽을 휩쓴 흑사병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이 아시아나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1346년 크림반도 남부 연안에서 생겨 무역항로를 따라 흑해, 지중해를 거쳐 이탈리아에 상륙했다고 한다. 1347년 이탈리아를 강타하고 같은 해 말에는 마르세유와 아비뇽에 이르러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349년에는 영국, 1350년에는 북부유럽의 아이슬란드와 러시아까지 이르렀고, 얼마 뒤에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도 퍼졌다. 흑사병은 폐에 페스트라는 병균이 침입하는 것으로 감염되면 고열이 치솟고 피를 토하며 흐흡곤란을 일으키고 정신을 잃는다. 대개 24시간 이내 사망하는데, 사망 직전 환자의 피부가 흑색 또는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 불리었다.
치료법을 몰랐던 당시는 시체와 환자가 쓰던 물건을 불태우는 것만이 유일한 예방책이었다. 환자가 발생한 집은 문을 닫아걸고 못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다. 때문에 산 채로 불에 타 죽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공포에 싸여 하나둘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고 달래줄 의무가 있는 사제와 수도원장들도 대열에 끼였다. 사람들은 미신에 사로 잡혔고, 파리대학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이변의 결과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누군가가 물에 독을 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범인으로 지목된 유대인들은 생매장당하거나 불 속에 던져졌다. 자신을 학대하거나 학살하는 사이비 집단도 횡행했다.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1348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인구 1/3이 줄어들었다. 흑사병 이전으로 회복된 것은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다.
(14)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재생’또는 ‘부흥’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다.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번역하는데, 단순히 문예만이 아닌 인간의식상의 개혁운동을 말한다. 이것이 꽃피게 된 데는 상업의 발달로 막대한 부가 축적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서무역의 중개지인 밀라노·피렌체·베네치아는 동방의 풍부한 물자와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피렌체의 경우 일찍이 모직물이 발달함으로써 봉건귀족을 몰아내고 자치를 달성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메디치가의 번영 위에 피어났다. 부를 토대로 막대한 권력을 메디치가는 행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사고하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봉건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마음껏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상인 세력과 맞아 떨어졌다. 대부호들은 아낌없이 후원했다. 미켈란젤로는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성베드로 성당에서 99살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고 한 그는 사물의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것을 표현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돈키호테〉와 〈햄릿〉을 쓴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라틴어 일색인 당시에 모국어로 작품을 써서 국어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군주는 인간인 동시에 야수로, 사자인 동시에 이리로 행동하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에 상반될 때는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하며 지킬 수도 없다. 정직은 언제나 불리하다. 반면 자비롭고 청렴하며 인도적이고 신앙이 돈독한 것처럼 보이면 유익하다. 덕망으로 위장하는 것만큼 유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종교란 통치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에게 도의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지한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서다.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종교를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의무다.”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한 말이다. 이런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내분이 그치지 않았던 이탈리아 정치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정치에서도 냉혹히 살펴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5) 한글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해 반포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우리말을 우리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의 한자를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했다. 한자는 본질적으로 우리말과는 다른 외국 문자이므로 우리말을 표기하기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삼국시대까지 우리말이 북방어와 남방어로 나뉜 것을 고려와 조선의 건국되면서 중심을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설총의 이두나 향가를 표기한 향찰은 우리말을 한자로 보다 온전히 나타내려는 몸부림이었다. 한글 창제를 극비리에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양반유생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집현전 부제학이던 최만리는 반대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를 이룬 마당에 새로이 언문을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부끄럽고, 둘째, 우리말이 중국의 방언으로 인정되는데 방언으로 하여 따로이 글자를 만든 예가 없습니다. 몽골·서하·여진·일본·서장 등이 제 스스로의 글자를 갖고 있으나, 이들은 오랑캐니 어찌 오랑캐와 같아지겠습니까? 셋째, 이두는 한자에 어조사만을 더하는 것으로 한문 보급의 방편이 되기도 하나, 새 글자를 만들면 한문을 배우는 이가 없어져 힘들여 성리학을 배울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넷째, 언문으로 글을 쓰면 옥사(獄事)가 공평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 형옥(刑獄)의 공평은 옥이(獄吏)에 달린 것입니다.
한글은 양반유생이나, 관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모르고 살던 일반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통치술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글은 언문이라 낮춰 부르고, 여자들이 쓰는 글이라 하여 몹시 천대받았다. 한글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은 19세기 말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입을 받으며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였다.
(16) 1452, 1492, 1592년
1492년은 인류 최고의 천재라 일컫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태어난 해다. 그는 예술가이며 과학자, 사상가이다. 또 그는 인체에 혈액이 순환하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다. 인체 구조의 신비감에 감탄하며 그가 말했다. “지저분한 습관과 편협한 판단을 지닌 저속한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처럼 지극히 완벽하고 치밀한 해부학적 구조를 가질 가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먹고 배설하는 자루일 뿐이다. 영양물의 통로에 불과한 것이다.”〈최후의 만찬〉〈모나리자〉등 그가 남긴 걸작품들은 과학적 연구결과를 예술적으로 승화한 것들이다. 1519년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다. 이해 8월 3일 후원자였던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의 환송을 받으며,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를 비롯한 3척의 배를 이끌고 에스파냐 남부 팔로스항을 떠났다. 인도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고, 69일 만에 드디어 육지에 닿았다. 그는 기쁨에 못 이겨 그곳을 살바도르(성스런 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인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메리카 대륙의 한 섬이었다. 그곳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한 것은 콜럼버스의 착각 때문이었다. 다음 해 콜럼버스는 다시 인도로 떠났다. 이번에는 17척의 배와 1,500명의 선원과 함께였다. 이때부터 정복사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했다.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미지의 새 땅임을 밝혀내면서 붙여진 것이다.
1592년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다. 음력 4월 13일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다. 운흥신, 정발, 송상현 등이 부산포에서, 동래성에서 맞서보았지만 적수가 되지 못했다.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을 피폐하다 못해 넝마가 되었다. 그러나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끈 수군의 한산도대첩, 명랑해전 등에서 승리해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3대첩과 일본이 말하는 3대첩이 다르고, 결코 물러갈 생각이 없음을 증명하는 남해안의 왜성마저 일본측의 기록과 우리의 실측이 다르고, 우리는 이순신을 민족의 성웅으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역사까지 돌아 봐야할 것들이 너무 많은 그해는 결코 그립지 않다.
(17) 잉카, 마야문명
1531년 에스파냐의 피사로 장군은 186명의 병사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에 자리한 잉카제국을 침략했다. 그는 일격에 황제를 체포하고 감금했다. 그리고 우상숭배, 근친결혼, 일부다처 죄를 씌워 화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황제는 영혼까지 사라진다고 믿는 화형 대신에 기독교로 개종하겠다고 해 화형만은 면했다. 이보다 앞서 1521년에는 에스파냐의 코르테즈가 지금의 멕시코 아즈테크를 정복했다. 쉽게 정복한 데는 총과 기마술이 있었다.
중앙아메리카에는 마야문명, 남미에는 잉카문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들의 조상은 몽고족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베링해를 건너 6세기경에는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기도 하고, 달력을 농사에 활용했다. 이들 마야문명은 오리엔트에 비견할 정도로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톨테크 문명을 발달시켰다. 톨테크 문명은 마야문명과 융합되어 아즈테크 문명이 된 것으로 농사는 주로 옥수수를 재배했고, 염색기술도 발달했다. 아즈테크는 코르테즈에 의해 멸망될 때 인구가 500만 명에 달했다.
남미 잉카문명은 마추피추로 대변되는 페루 고원에서 발달하였는데, 피사로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문명은 유럽을 능가했다. 완벽한 관계시설로 고원지대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발달한 토목기술로 도로와 수로를 건설했다. 건축물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심지어 뇌수술도 해다고 한다. 그러나 문자는 발명되지 않았고, 실의 색과 매듭으로 뜻을 나타내는 퀴푸(매듭 글자)를 사용했다. 이주해온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나누어 갖고 광산개발에 나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원주민은 강제노역과 영양실조 전염병으로 죽어갔고, 에스파냐 국왕은 원주민을 카톨릭으로 개정시켰고, 원주민과 함께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아메리카 식민지에는 흑인 노예제가 성행했으며 이는 커다란 돈벌이가 되었다.
(18) 그래도 지구는 돈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고 지구 밖은 천길 낭떠러지라고 믿은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더구나 교회와 카톨릭 신앙이 천동설을 떠받치고 있었으니 이에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증명하지 못했다. 1543년 폴란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지구와 다른 별들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란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스런 것인지 말고 있었다. 평생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책은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1564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난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아버지가 의사 되기를 원했지만, 추가 무게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시간은 일정하다는 ‘진자동시성’을 발견한 후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멀리 있는 물체를 볼 수 있는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그것을 개발하기 했다. 그리하여 목성의 주위를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다는 것, 은하수는 무수한 별들의 모임이라는 것, 달에 있는 산맥과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해 냈다. 그의 나이 45세 때다. 그는 단박에 유명해졌지만 천동설을 고주하던 교황청은 그의 주장이 불합리하고 이교도적이라 했다. 1623년 그의 친구이던 바르테리니 추기경이 새 교황 우르반 8세로 선출되었다. 이에 갈릴레이는 한숨 돌리고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1632년 연구결과를 〈두 개의 주요한 우주 체계의 대화〉라는 책으로 펴냈는데, 이 책이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교황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이유였다.
이듬해 칼릴레이는 종교재판에 부쳐졌다. 재판관들은 이론을 철회하고, 오류를 고백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천동설이 옳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법정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얼마간 감옥생활과 가택연금 상태로 있다가 1642년 연금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정통으로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도전하고, 관성을 법칙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가 직접 체험하고 관찰한 여러 법칙들은 뉴턴에게 전해져 근대 물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19) 임진왜란 전후의 세계사 - 1
1580년 무렵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을 통합하고,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광활한 식민지를 경영하는 초강대국이었다. 국왕 펠리페 2세는 지중해에서 무역을 방해하는 오스만 트루크를 레판토 해전으로 영원히 몰아냈다. 강력한 해군은 「무적함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에스파냐와 영국의 대립은 해묵은 것이었다. 헨리 8세의 딸로 영국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 메리 여왕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해 카톨릭을 옹호하고 에스파냐에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그녀가 병으로 죽자, 엘리자베스는 카톨릭을 억압하고, 에스파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엘리자베스는 에스파냐 상선을 공격해 상품과 금은보화를 빼앗아 왕실에 바치는 영국 해적을 은근히 지원했다. 해적 선장 드레이크의 활약으로 영국 왕실은 금이 쌓였고, 에스파냐는 타격을 입었다. 펠리페 2세는 드레이크를 처벌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여왕은 오히려 드레이크를 기사로 임명했다. 또 네덜란드 문제에 있어서도, 네덜란드가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독립운동을 벌이는 중이는데 영국이 그것을 지원해줘 펠리페 2세의 분노를 샀다. 펠리페는 엘리자베스에게 결혼을 신청함으로써 영국을 손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히 거절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펠리페 2세는 카톨릭 교도들을 이용해 엘리자베스를 내쫓고 4촌인 메리 스튜어트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스튜어트를 화형시켜 버렸다. 1587년의 일이다. 화가 치민 펠리페 2세는 전쟁을 선포했다. 130척에 이르는 함대를 동원 영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결과는 영국의 승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의 좁은 해협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함대 2/3를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영국은 유럽의 새 별로 떠올랐다. 영국은 대규모 식민지를 개척했다.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는 여왕을 기려 이름 붙인 것으로 ‘처녀의 도시’라는 뜻이다.
(20) 임진왜란 전후의 세계사 – 2
1620년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한 척의 배가 닻을 올렸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10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신대륙으로 떠났다. 승객 대부분은 퓨리턴, 즉 청교도였다. 청교도는 신교 중에서도 칼벵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엄격한 교리와 금욕, 절제를 강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엘리자베스를 뒤이은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지지하면서 신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의회 대부분을 차지하던 신교도, 특히 청교도들은 이에 반발했다. 청교도의 시조 칼벵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카톨릭을 버리고 신교로 개종한 인물로 카톨릭의 아성인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가 〈기독교 요강〉이란 책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고전이 되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인간들 가운데 하느님이 어떤 자를 구원하고 어떤 자를 그대로 둘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로 ‘구원의 대상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구원받으려면 자기 혁신을 갖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라고 역설하고 자기 혁신의 방법은 절제와 금욕이라고 한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근검절약하며 방종 타락하지 않는 생활이야말로 유일한 자기 혁신의 길이라고 한다. 자신의 직업은 신이 내린 소명이요, 천직으로 알라는 직업관 그리고 이윤추구를 정당한 것으로 보는 윤리의식은 한창 부상 중이던 신흥상공업자들에게 복음처럼 생각되었다. 자연히 신흥 상공업자와 신흥 지주들은 칼벵사상의 지지자가 되었다.
최초로 아베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해 겨울 이주자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길을 닦고 집을 지으며 함께 예배드릴 장소도 마련했다. 이들은 맹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인 남자가 참여하는 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신앙과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로 건너오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넘쳐났다. 메사추세츠가 개척되고, 1732년에는 뉴잉글랜드를 비롯한 13개 주가 동부 해안지역에 건설되었다. 102명의 메이플라워 호를 탔던 사람들을 후세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스(16세기 초 영국의 분리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이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선조들이다.
(21) 영국 왕을 처형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영국을 만든 여제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마땅한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자신과 영국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 이틀 전 후계자 문제를 깨끗이 매듭지었다.
“짐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 이는 짐의 사촌 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라고. 유언대로 스코틀랜드 왕인 사촌 제임스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한 나라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함께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다.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이 있고 신하에게는 책임지지 않으며, 법 지배를 받지 않고 국왕이 곧 법이다.”는 의미다. 의회는 즉각 반발했다. 제임스 1세는 국내 사정에 어두웠으므로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사태를 악화시켰다. 격분한 제임스 1세는 의회 의사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의원 7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재정난 해소를 위해 많은 세금이 부과되자 신흥 자본가들이 불만했다. 신흥 자본가 대부분은 청교도들이었다.
1625년 제임스가 죽고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 역시 의회를 무시하는 정책을 폈다. 그는 황태자 시절 에스파냐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왕이 되자 에스파냐와 일전을 계획하고 의회에 전쟁에 필요한 비용문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의회소집은 두 번이나 부결되었다. 그는 유명한 권리청원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이후 11년간 의회 없이 마음대로 영국을 다스렸다. 1639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진압비용을 얻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11만에 열린 의회는 왕을 신랄히 비난했고 왕은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반란군은 영국 북부에까지 진출해 신앙의 자유와 배상금을 요구했고, 찰스 1세는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왕을 비난하면서 왕의 측근들을 체포, 사형에 처하고 왕의 소집이 없더라도 3년마다 의회가 열리도록하는 회기법을 만들고 의회를 마음대로 해산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분노한 왕은 무력으로 의회를 누르려고 했다. 군대를 모아 대항했다. 이후 8년간 왕당파와 의회파는 대립했다. 처음엔 구귀족, 성직자, 독점 상인들의 지지를 받은 왕당파가 우세했다. 이무렵에 등장한 인물이 올리버 크롬웰이다. 그는 1645년 6월 네이즈 전투에서 왕당파를 격파하고 거점인 옥스퍼드를 점령하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 배상금을 받고 왕을 넘겨주었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 당했다. 영국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왕 대신 의회가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흔히 이 혁명을 청교도 혁명이라 부른다.
(22) 짐이 곧 국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한 말이다. 그는 1643년 6월 5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재상 마자랭이 섭정을 했으나, 왕이 18세가 되던해 그가 죽자 친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공사를 벌여 마르세유 궁전을 확장해 귀족과 성직자, 시종 등 5천여 명이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통치 기간 중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국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일반민중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농민들은 수확의 상당 부분은 영주에게 바쳐야 했고, 십일조로 교회에, 세금은 왕의 관리에게 바여야 했다. 유아 사망이 다반사여로 말의 죽음보다도 덜 중요하게 여겼다고 당시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평균수명은 25살 정도, 100명의 어린이 중 1/4은 1살 전에 1/4은 20살 전에 죽었다. 마을 주민 100명 가운데 10∼15명은 흑사병으로, 혹은 외국군대로, 흉작으로 죽어갔다. 이것이 태양왕 시대의 현실이었다.
(23) 러시아와 표트르(1672∼1725)
러시아인들은 13세기 이후 200년간 몽골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서자로 우여곡절 끝에 배다른 형과 동생을 몰아내고 왕이 된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부강케 하는 길은 몽골의 잔재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유럽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분을 숨기고 암스테르담의 조선소에 들어가 일을 하고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탄탄한 육군과 해군의 양성, 서유럽과 연결된 항구 개척 등이 그의 숙원이었다. 1700년 표트르 1세는 발트해로 진출했다. 그러나 발트해는 강대국 스웨덴의 활동무대였으므로, 러시아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했다. 11월 말 나르바 전투에서 4만 명의 러시아군은 찰스 12세가 이끄는 8천 명의 스웨덴 정예부대에 참패했다.
일단 후퇴한 표도르는 해군을 새로 창설하고 21만의 군대와 국가재정의 2/3를 군사비에 투입하고, 네바강 하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표트르의 도시라는 뜻 페테르스부르크가 그곳인데 나중에 레닌그라드로 불렸다. 새 도시가 완성되자 표트르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겼다. 이는 서구화 정책의 강력한 표현이었으며, 1721년 스웨덴과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승리했다. 표트르 1세는 ‘차르’라는 칭호를 받았고, ‘대제’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강대국이 되었다.
유명한 격투기 선수 ‘표도르’는 러시아 남성의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이름이다.
(24)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 이하 2권에 (2012.8.18.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