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를 꿈에 본 후
팔십 넘어서 그런지 요즘은 오래 소식 없던 친구가 꿈에 나오면, 혹시 타계했나 하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어젯밤 꿈에 길웅이를 본 후 그런 생각을 했다.
길웅이는 내가 내외경제신문사 퇴직하여 백수가 되자, 자기가 경영하던 '제2산업' 부사장으로 날 초대했다. 제2산업은 당시 대우실업과 나란히 봉제업계에서 이름 떨치던 원림산업 제2공장을 인수하고 퇴직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둘은 30여 명 직원을 거느리고 무역회사 봉제 일감 얻어와 날자 맞춰 납품하느라 매일 통행금지까지 일했다.
길웅이는 박정희를 독재자로 보았고, 나는 5천 년 만에 처음 등장한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보았기에 간혹 정치 이야기 나오면 몇 시간이고 핏대 올리고 싸우곤 했다. 그는 서울대 다닐 때 노수광 김장천 서한샘 등과 친했다. 길웅이는 재학시절 농촌 계몽활동에 관심이 많았고, 후배기인 유시민도 똑똑하고 아는 거 많기로는 선배들 비슷했다. 그 유시민이 어째서 간첩 같고 멍청한 문재인을 언론에 나와서 싸고돌았는지 모르겠다.
아마 김영삼 김대중이 때문일 것이다. 당시 兩金은 대통령 해 먹으려는 정권욕 때문에 무조건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욕 했다. 그 영향으로 젊은이들이 한결같이 박정희를 욕하고, 그 대가로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들은 이 나라에 민주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5천년래 경제개발을 못하게 방해한 훼방꾼이다. 그들을 보라. 자식들이 엄청난 치부를 감행했지만, 박정희는 장기집권 했지만 얼마나 청렴했던가. 비록 장기집권과 야당 탄압은 문제가 있지만, 兩金의 부정부패와 썩은 정치와 비교할 것인가.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야당 탄압이 오히려 이 나라 정치가 썩지 않도록 막아준 소금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대학 시절에 도올 김용옥이를 구타한 적 있다. 그건 박정희에 대한 해석차이에서 비롯된 일이다. 당시 고대생 90%는 박정희 반대파, 나는 박정희 옹호파였다. 나는 박정희 반대하는 용옥이에게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인간의 욕구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 욕구,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 취득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져서 생리적 하위 욕구가 가장 강하다. 먹고살기 어려운 우리나라는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생리적 욕구를 충족키 위한 경제 살리기가 중요하다. 민주화는 경제 개발을 이룬 후 먹고살게 되면 저절로 이뤄진다. 의식이 족해야 예를 안다고 예부터 말해왔다. 그게 내 주장이다.
그런데 애초에 토론 후 다수결에 따라 철학과가 데모하느냐 안 하느냐 결정하기로 합의했는데, 토론에서 진 용옥이가 행동을 돌변했던 것이다. 내가 도서관 간 틈에 <김선배는 중앙정보부 끄나풀 냄새가 난다. 어디서 그런 이론 배운 것이냐>. 급우들을 꼬드겨 나만 빼고 철학과 데모를 감행했다. 그래서 박사가 셋 있는 집에서 곱게 자란 용옥이는 난생처음으로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나한테 무참한 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여하튼 그 시대는 수업받기 싫던 자들이 데모에 앞장섰다. 당시 고대 데모꾼 김계동은 나중에 국회의원 되었고, 성공회 신학대학에 문재인이 사상가로 치켜세운 신영복을 교수로 끌어들인 이재정은 좌파 정권 시절 부총리까지 챙겼다. 유시민의 누나 유시춘은 내가 제대 복학했을 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국문과 여학생이다. 졸업 후 시민단체에 들아가 차관급 자리 차지했다. 좌우간 우리나라는 좌파 전성시대였다. 모두 반정부 운동으로 한몫 챙겼다. 감방 다녀온 것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하고, 사상가처럼 행세했다. 김대중은 경부고속도로 놓지 말라고 공사장 길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나라 발전 반대한 자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지만, 그건 철학도 사상도 아니다. 고속 성장의 그늘 음지에 핀 독버섯이다. 이게 좌파가 성장한 온상이다.
길웅이 친구 노수광이는 한 때 부산 광복동에서 알아주던 친구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으로, 여고 선생 하다가 교장과 싸우고 나와서 광복동 학원 국어 강사가 되어, 인끼가 부산 바닥을 휩쓸었다. 돈이 생기자 연극 극본도 쓰고 투자도 하고, 시인이랍시고 문학하는 사람들 몰고 남포동 바닥이 좁다고 돌아다녔다. 그가 어느 날 박통 앞으로 편지 한 장을 썼다. '독일의 청년 나치스 당원,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보라.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이 모양인가? 데모 만능 시대로 왜 반정부 데모만 하는가. 나라가 썩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거 독일이나 일본처럼 애국 청년단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걸 문인과 어울리지도 않는 엄청난 덩치면서 문인인 척 함께 어울려 다닌 종대 이름으로 청와대 보냈다. 그런데 그게 비서실 눈에 든 것이다. 박통은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 왔을 때 종대를 불렀다. 박통은 편지 내용과 거구의 종대 모습에 호감 느꼈던 모양이다. '자네 지금 무슨 일 하나?' 묻자, '동사무소 근무하고 있습니다' 했다. '그럼 앞으로 무슨 일 하고 싶은가?' 묻자 대답이 걸작이다. '부산 시민 건강을 위해서 서면 위생계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아주 몫 좋은 장소를 콕 찍어 대답한 것이다. 박통은 항만 사령관을 지낸 사람이라 서면이 어떤 곳인지 잘 안다. 싱그레 웃으며 옆에 배석한 부산 시장더러, '어이 임자! 이 친구 이야기 들었지?' 하고 떠났고, 종대는 즉각 서면 위생계로 발령 났다. 거긴 책상 서랍에 돈봉투가 수북이 쌓이는 곳이다. 그 당시 종대는 방학이면 나를 부산으로 초대했고, 수광이가 공주사대 체육과 나온 여선생을 송정 해수욕장에 불러 내게 소개해주었다.
수광이는 그 후 부산 바닥이 좁다고 서울 올라와 대치동 학원가에 터를 잡고 일을 시작하던 중에 타계했다. 수광이 장례식장에서의 일이다. 서울대 동기들이 밤 깊어 문상객 모두 돌아가고 나만 남자, 나를 동기로 착각한 모양이다. 거침없이 반말을 하기에 나도 새벽까지 반말을 했다. 그리고 아침에 악수하고 헤어지면서 '야! 나는 수광이 부산 친구다. 너희 서울대 아니다' 하고 해명하고 온 적 있다. 누구나 대학 졸업한 지 20여 년 지나면 그런 일 생긴다.
대치동에는 수광이 친구 장천이가 있었다. 그도 부산 수광이 같은 놈이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국어 강사로 유명했다. 당시 고3 학생들은 대치동 장천이 국어 과목 수강 얻기 하늘 별 따기였다. 그만큼 인끼 높은 그에게 내가 초면에 수광이 친구라며 전화해서 경기여고 다니던 내 딸 국어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두말없이 내딸 수강 신청을 받아주었다. 그들 팀 오야봉은 인천 국회의원 서한샘 이다. 학원가에선 그들을 한샘그룹이라 불렀다. 좌우지간 모두 스타일이 양산박 호걸처럼 선이 굵고 의리가 있었다. 내가 모 그룹 비서실장에서 퇴직하자, 장천이가 전화했다. 자기들이 케이블 TV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만나서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들어보고 동의하면 술값 니가 내고 사장하고, 아니면 자기들이 술값 내겠단'는 제의였다. 나가서 이야길 들어보니, 재벌 회사 비서실장 했으니 경영 잘할 것 같고, 은행 협조도 잘 될 것 같다는 것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회사가 부도 직전이다. 어려운 회사 맡았다가 대출서류에 대표이사 개인입보 잘못 기재하면 두어개 있는 아파트 다 날린다. 그런 경우 몇 번 보았다. 그래 '술 값은 너네가 내라.나는 술만 먹고 그냥 갈련다'며 공짜 술만 퍼먹고 돌아왔다. 젊을 때는 너나 나나 전부 호걸이다. 그런데 술 잘 먹고 청산유수 입담 좋던 장천이는 요즘 어떻게 사는지. 날 자기 회사 부사장 자리 모신 길웅이는 왜 갑자기 어젯밤 꿈에 나타난 걸까. 잠도 오지 않아 한참을 생각을 굴렸다. 요즘은 케이블 TV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아, 그때 사장 수락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