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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음
막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 10:46-52 / [여리고의 맹인;마20:29-34,눅18:35-43] 예수와 제자들이 여리고에 들렀다가 뒤따르는 군중과 함께 마을을 떠날 때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지나가시는 이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48) `조용하시오' 하고 야단쳤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49) 예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시며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그 맹인에게 가서 `당신은 운이 좋소. 이리로 오시오. 그분이 당신을 부르시고 있소' 하고 일러주자 50) 맹인은 그의 낡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다. 51) 예수께서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맹인이 `선생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52)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그러자 맹인은 그 자리에서 보게 되어 예수를 따라 나섰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에서 출발하여 베레아 사역을 마치시고 마지막 사역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여리고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바디매오(46-47) 여리고는 요단 강 서쪽으로 약 1.2km 지점에 위치한 곳이며, 예루살렘에서는 동북쪽으로 약 8km정도에 위치한 성입니다. 일반적으로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이방인이 거주하는 사마리아가 아닌 베레아 지역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 여리고를 경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경유하기 원하셨지만 그들이 거부함으로 베레아를 지나 여리고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눅 9:51-56). 이곳에서 날마다 구걸을 하며 살고 있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메시야’라는 칭호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바디매오(48-49)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원의 메시야로 깨닫지 못하여 세속적인 권세를 추구했지만(마 20:20),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비록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소리로 부르짖음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디매오처럼 비록 육신의 연약함이 있다할지라도 영안이 열린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종교지도자들이나 제자들처럼 메시야를 곁에 두고도 발견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성숙도와 열매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구원받은 바디매오(50-52) 바디매오의 믿음은 강건했고 실천적이었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름에 겉옷까지 벗어던지고 달려왔던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는“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흔히 이와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5:9, 30; 6:38; 9:21). 이때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않고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며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행 3:2). 이런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오늘날 영안이 어두운 사람들도 바디매오와 같은 신앙을 보인다면 신령한 눈이 열려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적용: 바디매오처럼 우리의 기도는 간절함이 얼마나 있습니까? 또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응답된 기도제목들 중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꼭 훼방꾼이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 일을 멈추고 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그렇게까지 나가야 예수 믿는 거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헌금을 해도 핍박이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하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예수님 앞에 제대로 나갈 때에는 핍박과 방해가 늘 있습니다. 맹인이 눈뜨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험담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우리에게 이런 방해가 꼭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믿는다는 사람의 잘못 된 신앙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까지 망치게 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 설 교 >
거지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음
막10:46-52 / 이종철 목사
누가 소경인가?
성경에서 여러 기적들 중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맹인이 눈을 뜨는 기적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두 번이나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벳새다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예수님이 오늘은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던 눈이 보이게 된다는 것은 매우 극적인 기적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기적 외에도 눈을 뜬다는 것은 어떤 깨달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두 개의 소경 개안 이야기는 특히 그러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말 소경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우리가 소경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이야기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소경인가”(요9:39-40) 주님은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고 외면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소경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가 소경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육적인 눈이 어두웠을 뿐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광의 자리만 탐내고 십자가의 진리를 알지 못하던 제자들이 소경입니다. 교리에 얽매여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던 바리새인들이 소경입니다. 욕망에 매어 참된 길을 찾지 않고 자기 인생을 탕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경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넓은 길임을 알지 못하고 안심하고 있는 그들이 소경입니다. 생활의 족쇄에 차여 더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소경입니다.
앞을 못 보는 맹인 세 명이 자원봉사자와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쾌청했고 정상에 오르니 발아래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때 맹인 한 명이 “아 정말 좋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다른 맹인이 이 말을 받으며 “그래 정말 좋구나.” 했습니다. 나머지 맹인도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자원봉사자로 동행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보이는 것도 없으면서’라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 속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그 맹인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게 반이라 쳐도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에는 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 흐르는 소리, 새소리, 나무 냄새, 이런 건 눈 뜬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느끼거든요.”
그렇습니다. 인간이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욕망에 집착하다보니 정작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리 질러 가로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여리고를 들렸습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끝 사해 주변에 있는 도시입니다. 해저 250m로 낮기에 연중 뜨겁고 종려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유력한 사람들의 별장도 있고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이 많이 몰려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들리니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와 무리들이 뒤엉켜 지나가고 있는데 그 한길 가에 앉았던 바디매오도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바디매오는 예수라는 분의 소식에 대해서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많은 소경들을 고쳤고, 최근에는 벳새다에 있는 소경이 눈을 떴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자신에게도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 기대도 하고 한편 체념도 했는데 설마 하던 그 일이 자기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사람도 많기도 하고 가까이 갈 수 없었던 바디매오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중세 교회나 가톨릭 미사에서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많이 불렸고 불리고 있는 성가가 바로 이 ‘키리에 엘레이손’입니다. 이 뜻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바흐의 ≪B단조 미사곡≫ 중 장중한 ‘키리에 엘레이손’도 유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현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의 존엄과 주권을 인정했던 중세나 고대인들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란 겸손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 인생이 힘들어도 신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개미 같은 존재가 신에게 드릴 수 있는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뿐입니다.
바디매오의 이런 소리는 주변 무리들의 꾸짖음에 의해서 사라질 위기를 맞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48)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항상 장애물이 있습니다. 장애물은 돌파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이런 꾸짖음에 위축되지 않고 더욱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8) 위기의 때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움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위기의 때에 하는 일은 소리 지르는 것뿐입니다. 반응이 없으면 더 큰소리로 웁니다. 그러면 엄마든 누구든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경우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은 체념한 사람들이며 그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시끄럽다고 야단치지 마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옆 사람이 아무리 소리를 쳐도 듣지 않고 외면하거나 그 소리를 억누르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안한 사회입니다. 최근 계속해서 우리 사회는 갑을 관계 문제로, 비정규직 문제로, 낮은 임금과 혹독한 근로환경 문제로, 불법과 반민주적인 문제로 소리들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하는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입니다. 큰 소리가 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이 소리에 잘 반응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정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병이 쌓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 부르짖는 소리를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그 소리를 묵살하면 교회가 썩고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소리를 외면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49)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매우 비장한 순간입니다. 많은 무리들에 쌓여 그 소리를 외면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에 머무르십니다. 바디매오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막힐수록 더 소리를 높이십시오.
히스기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최후의 통고를 듣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벽을 향하여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3) 이에 대해서 성경은 무어라 말씀합니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왕하20:5) 그 결과 그는 15년을 더 살게 되었습니다. 부르짖으십시오. 소리 내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고통은 힘들지만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곧 메시야로 말입니다. 이 고백은 바로 이어지는 11장 예루살렘 입성에서 무리들이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던 찬양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해방할 자로 오십니다. 그 메시야의 사역 중에는 자기처럼 눈을 못 보던 자가 눈을 뜨게 되는 기적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고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이 메시야 하나님을 붙들었고 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통은 힘들지만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생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함께 깊어져 갑니다. 육적인 고통과 아픔은 영적인 각성을 위한 도구가 될 때가 있습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8천여 개의 찬송가 시를 작사하였고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23개가 실려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492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446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등이 있습니다. 204장 3절은 참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그런데 크로스비는 맹인입니다.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놀라운 기쁨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이 가려지고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이었습니다. 크로스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장님 만들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험한 세상 보지 않게 하시고, 찬란한 하나님 나라보며 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억매여 영적인 소경이 되어 가고 있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고백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이 허락하시자 바디매오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며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이 겉옷은 아마 자리를 펴고 앉았던 그 옷이거나 구걸할 때 사용하던 옷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니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자기의 소원을 아룁니다.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고쳐주시는데 벳새다 소경의 경우와는 달리 단번에 말씀 한 마디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고 합니다.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만든 것은 바디매오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능력입니까? 둘 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바디매오의 믿음에 비례해서 나오는 능력입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중에 ≪그래비티≫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지구에서 수백km 떨어진 상공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재난 영화입니다. 이곳은 중력이나 마찰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완벽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일어납니다. 내가 앞으로 민만큼 같은 힘이 뒤 쪽으로 작용합니다.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 우주정거장에 접근하기 위해서 소화기를 이용합니다. 소화기를 뿜으면 정확히 그 반대방향으로 반작용이 생기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우리 주변에 중력이 작용하고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마치 작용 반작용의 힘과 같습니다. 믿음이 작용이라면 예수님의 능력은 그에 정확히 비례하는 반작용입니다. 이것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도 커집니다. 이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귀찮을 정도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믿음도 은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는 믿어지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능력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조바심 때문에 섣부른 행동을 먼저 취하거나 믿지 못해서 절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믿어지는 은사가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믿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길에서 좇다
주님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합니다고 올바른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동일한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36절에 세배대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청탁하러 왔을 때 했던 질문입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 두 제자는 영광의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8)고 탄식하셨습니다. 우리 간구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그 결과가 나에게 좋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나의 욕망인지, 영원한 것인지 확신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바디매오처럼 우리 눈을 열어주십시오 하고 간구했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무지와 욕망 가운데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 앞에 명상하며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그때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I want nothing but Christ 주님, 나는 주님 외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또한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무리인가요?
바디매오는 그런 점에서 제자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눈이 닫혔다가 이제는 볼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보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가라”(52)고 하였지만 자기 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2절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여기서 말하는 길은 한자로 도(道)와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길 도(道)자를 써서 도라고 하였습니다. 따르다는 단어 또한 제자의 따름을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더욱이 그는 겉옷이라는 그의 유일한 소유물로 버리고 예수에게 나아왔습니다.
바디매오는 육신의 눈만 뜨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적인 눈도 뜨여서 진리의 길을 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길 위에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누구를 좇고 있습니까? 길은 우리 인생에 대한 은유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딘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좁지만 생명의 길입니까, 아니면 넓어보여도 사망의 길입니까? 영원한 나라로 향하는 길입니까, 아니면 종착역입니까? 주님은 나를 따르는 길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욕망이 아니라 예수를 좇을 때 참 생명을 얻습니다.
주여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46-52 / 성흥모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라는 동리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구걸하는 한 맹인을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라는 말이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아버지 디메오는 여리고에서 퍽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시각장애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장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시각장애자는 죄인이었습니다.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평생을 살아간 이 사람이 맹인의 아픔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맹인의 아픔과 고통을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맹인이 되어 보아야 맹인의 아픔을 알고, 우리 집안에 맹인이 있어야 맹인의 삶을 보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 무엇을 한다는 것이 두렵고, 정상인의 도움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남산을 가보면 순환도로에서 산책하시는 맹인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도 남산에 나오실 수 있는 맹인이라면, 맹인으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잘 적응하면서 사시는 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중도 실명한 사람을 생각해보면 앞을 향하여 한 걸음 내어놓는 것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에 맹인으로 훌륭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고 강영우박사님, 모든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이 되신 분입니다. 찬송가 작사로 유명한 파니 크로스비 여사, 일생 무려 8000곡의 찬송시를 작사하셨습니다.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는 정말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맹인인데, 맹인의 고난을 극복하고 세계 정상의 가수로 우뚝 서 있는 분입니다. 12살 때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완전히 잃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음악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실의를 딛고 일어나서 피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악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야간에 재즈바에 나가서 피아노를 치면서 레슨비를 벌고, 32세의 늦은 나이에 성악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여자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을 만나 함께 듀엣을 부르게 됩니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신동으로 불리며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의 여주인공, 올림픽 주제가 등을 부르면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고 함께 듀엣을 부르자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노래가 “time to say goodbye"라는 노래입니다. 가서 들어보세요, 얼마나 환상적인 노래인지, 그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안드레아 보첼리가 좋아서 그의 노래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가 성공한 비결을 말합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배우기를 멈추지 마라 어제까지 배운 사람은 어제에 사는 것이고, 오늘 배우고 있는 사람은 오늘을 사는 것이며, 내일을 살고 싶다면 내일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배우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삼중고의 장애인 헬렌켈라 여사,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헬렌켈러 여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헬렌켈러여사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 위인입니다. 헬렌켈러는 미국에서 1880년 6월 27일에 태어나서 1968년 6월 1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88세를 사셨습니다. 그는 대학을 공부하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신 분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헬렌켈러를 깨우쳐준 설리반 여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은 ‘애클랜틱 먼스리’ 라는 잡지에 발표되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첫째 날은 제일 먼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들로 산으로 산책을 나가 아름다운 나무와 예쁜 꽃들과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캄캄한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걸 지켜보고, 박물관에도 가고, 저녁에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 마지막 날에는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낮에는 오페라와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도시 한복판으로 나가서 반짝이는 불빛과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 그러고는 삼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나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다시 캄캄한 어둠 속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얼마나 감동적인지 진한 아픔이 묻어나오는 글입니다.
가장 값진 감각 중에 볼 수 있는 시각이라는 것,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헬렌켈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명언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도 가득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은 무시당하고, 금기시한 적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맹인이라고 하면 정말 무시당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죄인이었습니다.
여리고의 길목에는 가난한 거지들이 나와서 구걸하여 먹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올라가는 이들은 마음이 선하고, 긍휼을 베풀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었기에 긍휼을 베풀고, 동정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선을 베풀지 않은 사람보다는 하나님 앞에 조금은 떳떳한 것도 같고,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동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거지들이 나와서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디메오의 사건을 눈여겨보면 예수를 믿을 때에는 이 사람처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1.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병자도 다 고쳐주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지로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희망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거나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혹시 여리고 길목을 지나가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길을 지나가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여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들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전합니다. 갈릴리에서 12살 먹은 여자 아이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나인성에서는 죽어 장사지내려는 청년을 살려주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소외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형제로 생각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믿음이 생겨납니다.
목사도 성경을 보고, 녹음된 성경말씀도 잘 듣고, 다른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말씀도 잘 듣고, 잘 들어야 믿음이 생겨납니다.
요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었는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죽을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왕권적인 메시아를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고대하던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바디메오는 지금 나사렛 예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 자기의 소망이요 구세주에게, 그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른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도 이 시간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나의 주님이라고 믿음으로 영접하면서 고백하여야 합니다. 삶의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고 구원하는 신앙은 이성에 있지 않습니다. 제도나 어떤 직분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온전한 고백,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나의 빛, 나의 선하신 목자,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가 사는 것도 주님 때문이요, 내가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것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바른 고백과 함께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2. 열정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디메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금방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무라고 꾸짖고 나옵니다. “너는 눈 먼대로 살아라, 그것이 너의 운명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잠잠하라” 고 합니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세요. 잠잠하라는 말이 말이나 됩니까? 바디메오는 더욱 소리 질러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잠잠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끈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주 젊잖게 믿으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낙담을 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용하라, 잠잠하라는 말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끈기 있는 기도와 끈기 있는 믿음만이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준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강청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강청해야만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주기 싫은데, 하도 달라고 하니, 할 수 없어서 빼앗기는 심정으로 들어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기도의 비결은 지속성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삼삼12:23에서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전에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기도를 접고 쉬고 있습니까? 응답이 더디다고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해보았자,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기도에 대하여 의심하십니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아버지가 되시기에 나 같은 것과 대화하실 수 있는 시간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운행하시느라고 너무 바쁘시기에 사소한 나의 문제 같은 것은 관심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불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들어줄 때까지 졸라대고 붙들고 늘어져야 들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려고 하는데, 우리가 빼앗아가듯이 가져가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하물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보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복을 움켜쥐고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복을 달라고 졸라대고, 하나님은 주지 않으려고 다시 감추시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7:9-11에 보면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눅18: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오래 참지 않고, 시간 오래 끌지 않고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속히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오래 끌고, 들어주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피하였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간구를 신속하게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애원하는 기도, 안타깝게 부르짖는 기도에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였지만,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의 병을 고쳤다고 하지 않고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간절함만 있고, 확신이 없었다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정과 함께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다 해결하여 주십니다. 확신하셔야 합니다. 확신하지 않고, 허공을 울리는 기도 드리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3.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메오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오려는 사람은 주님이 모른다고 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십니다.
요 6:37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잠잠하라고 하던 사람들이 바디메오에게 말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맹인 바디메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다시는 거지 옷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결단합니다. 더러운 냄새나는 옷, 거지같이 보이려고 남루한 옷,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엡4:22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 같아 보입니다. 주님은 그가 오자마자 그의 눈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맹인의 확고한 의지와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눈만 고쳐주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맹인의 영혼까지도 구원하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맹인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선생님이란 말은 “랍오니”라고 하여 “나의 선생님이여”라는 말입니다. 랍비라는 말보다 더 강한 존칭이며, 간절한 애정과 존경심이 담긴 말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기 위하여 소원을 물으셨고, 맹인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간절한 소원을 말했습니다. 맹인은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원하였습니다. 시력을 회복시켜달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돈이나 좋은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맹인의 눈이 떠졌습니다.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라갔습니다.
“따르니라”는 말은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그의 가치관이 새로워졌습니다. 그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주님을 위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에 그도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너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나를 따르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눈을 뜨고 사물을 인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게 되었고,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충성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살려주신 주님을 떠나서 자기의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정말 내가 주님 앞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아니,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여 이것을 원합니다. ”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지금까지 다 보고 있었으나, “주님 영안을 열어주옵소서”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정말 깊이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지 말하라고 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 하나님의 그 넓고 큰 세계, 영광스러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알찬 핵심, 이것 때문에 믿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습니다. 간절한 소원과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생애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는 믿음
조용기 목사
<서 론>
“변화와 기적을 가져오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도시입니다. 여호수아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저항한 성이 여리고성인데 그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여호수아가 저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는 저주받은 곳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저주받은 곳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주하여 가라사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이 저주받은 땅에 누가 우리를 도와주러 오겠느냐? 저주받은 여리고에 찾아간 주님은 이 저주받은 지구에 있는 우리들을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리고 성문 좋은 길목에 디매오 아들 거지 바디매오가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좋은 자리에 동냥을 하려면 상당히 빽이 있어야 되고 지연줄이 있어야 됩니다. 이러므로 디메오는 자기 아들을 위해서 힘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가 좋은 자리에 동냥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특별한 정부에서 내려준 옷을 입었습니다. 그 옷을 입어야 그 자리에 앉아서 동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그곳에 앉아 있으면서 많은 사람이 여리고성에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 늘 듣는 이야기가 제일 토픽이 예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분이 나타나셔서 온 유대 땅에 다니면서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하고 문둥이도 장님도 절름발이도 다 고치신다. 그 말을 들을 때 귀를 아주 귀울였습니다. 한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의 가슴속에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서 이 장님의 신세를 면하고 싶다.” 그 간절한 마음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본론>
1. 믿음은 들음에서 남
성경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고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모든 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자꾸 들었으므로 치료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 꽉 들어왔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보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했는데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바디매오의 마음속에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 생기는 것이지 우연히 생기지 않습니다.
기도의 사람,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죠지 뮬러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성경을 통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생 동안에 성경을 200번이나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약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까?”라고 묻자 죠지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항상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5만 번 기도의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의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므로 얻은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일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일독성경을 나눠 드리지 않습니까? 그것도 매일 못 읽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내일로 미루고 모레로 미루다가 그 다음 읽는 것을 집어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읽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어집니다. 교통이 없어지면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을 반드시 매일같이 읽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어야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천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간직될 때 비로소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풍파가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정체성을 확실히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기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으면 언제고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성에 올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주야로 만나기를 원하고 예수님을 만나면 운명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루는 동냥을 하는데 사람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지나가요. 그래서 한 사람 붙잡고 물었습니다. “여보, 무슨 행사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지나갑니까?” “이 사람아 바로 지금 앞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갔단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지나갔다.” 그 말을 듣자 바디매오의 귀가 번쩍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에 보면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라는 것입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하여 고함을 쳤습니다.
2. 부르짖는 기도
절대절명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가복음 10장 47절)
보통으로 그냥 부른 것이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배가 오그라 들어갈 때까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함 고함을 쳤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많은 사람이 우리 부르짖음을 방해합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와서 “시끄럽다. 고함치지 말라. 너 같은 맹인은 예수님이 돌보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셨다.” 그렇게 훼방을 합니다. 우리도 오늘날 기도를 하면 꼭 마귀가 훼방하는 것입니다. 크게 고함쳐서 소리쳐 기도하면 욕을 하고 “하나님이 귀가 먹었는가 고함쳐야 듣게..” 그런 소리를 저는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한국에서 통성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우리 교회에서부터 먼저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일 때마다 통성기도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미쳤다. 하나님이 귀가 먹었느냐?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해도 하나님이 다 알아들을 것인데 왜 부르짖느냐? 무식하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주님을 찾느냐 그 뜻인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사람들의 방해와 마귀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마 10:48)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하면 할수록 더 크게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들의 그 목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예수님에게 들리도록 바디매오는 고함을 쳤습니다.
“부르짖으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카라’에서 나온 말입니다. 카라라는 말은 “큰 소리로 외치다” “절규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달리기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골인점이 눈앞에 보이면 속도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 오직 골인 점을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죽도록 뜁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800미터 선수였습니다. 800미터는 100미터 경주 하듯이 전력을 기울여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승점에 도달하게 되면 숨이 턱에 닺고 아예 넘어져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승점에 달할 때 그렇게 목숨을 걸고 뛰지 아니하면 꼴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응답받을 때가 올 때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바로 이와같이 간절히 몸부림치며 외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속에 조금도 힘을 남겨놓지 않고 전력을 기울여 부르짖는 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여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더 이상 물러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했으니까 기도 많이 했겠지 않습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성도들과 더불어도 기도하고 많은 사람들과도 기도하고 몇 사람과도 모여서도 기도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기도한 기도마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잠잠하게 기도하거나 조용하게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은 거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은 가져왔어도 응답을 받지 못했어요. 눈물을 흘리고 고함치며 밤새도록 외치고 몸부림치는 기도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저는 체험했습니다. 막무가내의 부르짖음에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9장 13절에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만나리라고 한 것입니다. 반 쯤 마음도 안돼요. 온 마음을 다해서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 우주 가운데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날 찾으라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로 8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하고 또 찾고 문을 두드리고 얼마나 전력을 다한 기도인 것입니까?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 저는 서대문에 있을 때 최자실 목사님하고 아현동, 현저동 가난한 곳에 심방을 다녔는데 한 번은 폐병에 걸려서 피를 많이 토하는 한 30대 중반의 자매님인데 만삭이 되어 있어요. 지금도 내 눈에 훤합니다. 판잣집에 삶의 형편이 비참한데 남편은 노동자고 그 부인은 만삭이 되어서 있는데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고 죽어가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해산하게 되니까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어서 저하고 최자실 목사님하고 그 집에 뛰어 갔습니다. 산모는 너무 못 먹어서 몸이 약하고 폐병까지 걸렸으니 혼자 숨 쉬기도 어려웠는데 아기를 낳아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옆에서 산모를 위하여 무릎을 꿇어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이 산모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그 산모를 도와서 아기를 받습니다.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원래 산파 국제면허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간호사였습니다. 수간호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기 낳는 것 한두번 받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보니까 우리 산모가 “더 이상 힘을 못 쓰겠어요.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최자실 목사님이 “예수 이름으로 힘을 써! 전신전력을 다해 힘을 써! 더 힘을 써! 힘을 줘!” 그 산모는 오히려 얼굴이 창백한데 우리 최자실 목사님은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서 두 주먹을 쥐고 고함을 치시면서 힘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이제는 죽겠습니다.”하고 절대절명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어린 아기가 응아~하고 나오더라구요. 나는 그 부인이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났어요. 나중에 그 아기를 안고 교회 예배에 출석한 것을 보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어린 아기를 낳는 그러한 열심과 힘을 다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통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비가 와달라고 기도할 때 갈멜산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고함을 치니까 뱃가죽이 등에 붙지 않습니까? 점점점점 머리가 내려가서 머리가 두 다리 사이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 게하시를 보고 산위에 올라가서 무슨 변화가 있는지 바라보라. 없다고 하니까 세 번이나 그렇게 기도하고 올라가 보라고 하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짝이 떴습니다. 큰 비올 징조가 보인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부르짖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린 아기를 낳는 심정으로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가도록 배가 우그러지도록 고함을 치고 간절한 기도를 한 엘리야처럼 그렇게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순복음교회는 너무 시끄럽고 너무 고함을 치고 부르짖는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에 빠진 사람이 점잖은 소리로 “나 물에 빠졌소. 살려 주소. 누구 날 살릴 사람 없소?” 그러면 그 사람 틀림없이 죽습니다. 고함을 치면서 “사람 살려라. 누구 없소? 사람 살려라” 혹은 벼랑에 매달린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와서 날 좀 건져 주십시오” 하면은 벼랑에 달려서 죽습니다. “나 벼랑에 달려서 죽습니다. 사람 살려주소!” 있는 힘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속담에도 우는 애기에게 젖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잠잠한 아기에게 젖 안주거든. 그러므로 우리는 울부짖고 외치고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답답한 사람이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평안하면 기도응답을 안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것은 소경 바디매오가 마음에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주여, 나를 도우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몸부림치며 고함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주님이 가시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시면서 저를 내게로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함을 쳐도 상당한 시간 후에 예수님이 돌아보시고 저를 내게로 오라고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네가 내게 그냥 조용히 묵상하라. 조용히 말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르짖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짖기 위해서 철야기도가 있고 새벽기도가 있고 산에 가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그냥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하실 때까지 부르짖었는데 그가 예수님이 오란 말을 듣자 놀라운 행동을 했습니다.
3. 예수님이 바라보신 믿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그 행위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마가복음 10장 49절에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바디매오가 그 자리에서 자기가 동냥하던 그릇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냥가지 않습니다. 일어서더니만 겉옷을 벗어서 둘둘 말아서 내던져 버린 것입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님께 가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께 나가면 예수님이 변화를 갖다 주시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거지 옷을 입고 면허 얻은 특권의 옷을 입고 동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하는데 굉장한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잔치하는데 포도주가 없으니까 큰일 났지 않습니까?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부탁하매 어머니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잠시 후에 예수님이 종들을 불러가지고서 “항아리에 물로 채워라! 결례 통에 물이 6통 가득하니까 떠다 주어라!” 거기 잔치하던 사람이 먹었는데 이것은 더 좋은 포도주라. 그 포도주 마시는 사람보다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내니 이 왠일인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오기만 하면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예수님과 함께 앉았다가 일어났는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님과 안 만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기가 변화될 것을 알았습니다.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가면 내 신세는 바꿔진다. 내 눈은 뜨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권층 거지의 입은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다시는 거지 옷을 입지 않겠다는 그의 믿음의 단호한 표시인 것입니다. 그 거지 옷은 그가 가진 최고의 재산이요, 추울 때는 외투가 되고 비올 때는 망토가 되고 잘 때는 이불이 되고 그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재산이었는데 그것을 내어 던져 버리고 한평생 애착하던 옷을 벗어 버리고 주님께 뛰어 나간 것입니다. 주님께 뛰어나갈 때 우리도 벗어 버리고 나갈 것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4~16)
우리도 주님께 뛰어나갈 때는 우리가 벗어 버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죄악의 사람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사람 그대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 하시거든 예수님 앞에 통회 자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악의 옷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탐욕의 사람의 옷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탐욕을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병든 인격적인 더러움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더러운 것을 다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망, 불평, 탄식, 부정적인 삶을 벗어 버리고 세상과 마귀를 좇는 삶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예수님이 아담을 찾았지 않습니까?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럴 때 아담이 예수님께 뛰어 나와서 무릎을 꿇고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했으면 용서 받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변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변명입니다. “너 왜 이 일을 했느냐?” “무엇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저 여자 하와가 나를 꾐으로 먹었습니다.” 자기가 먹어놓고 난 다음에 책임은 하나님이 먼저 책임자입니다. 저 여자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둘째 책임은 하와에게 있습니다. 하와가 저것을 내게 주었기 때문에...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솔직한 죄를 다 고백하는 것이 제일 하나님을 만나는 빠른 길입니다. 내 죄를 우리 아버지 때문에 우리 어머니 때문에 우리 누나 때문에 동생 때문에 이웃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물론 스스로 자원해서 짓는 죄도 있지만 모두 다 죄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마음이 맞아야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맞고 죄를 짓습니까? 서로 손발이 맞아야 죄를 짓지. 그래놓고 난 다음 문제가 생기면 저 사람이 꾐으로 죄를 지었다고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늘 기억하는 것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학교 갔다가 오다가 외밭을 지나는데 외와 수박이 익어 있었어요. 그런대 내가 같이 오던 이마무라라는 사람 불렀습니다. “야야 오너라, 우리 수박 따먹자!” 주인이 있는 밭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어린아이니까. 그래서 그 애와 함께 수박을 따서 먹으니까 어떤 사람이 한 사람 뒷짐지고 모른 체 하고 우리 곁에 와요. 지나가는 사람도 아닌데 우리를 보더니 콱 하더니 우리를 잡아 버려요. 목덜미가 잡혔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때 “내가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좋았을 것인데 “얘가 따먹자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이마무라가 따먹자고 했어요. 나는 먹으려고 안했는데...” 그러니까 “이 놈의 자식아. 네가 따먹었다고 고백을 했으면 내가 너를 놓아줄 것인데 내가 저 원두막에서 보니까 네가 꾀더구나. 네가 저 이마무라를 꾀어서 네가 먹더구나!” 이마무라를 보더니만 “너는 가라! 너는 가라!” “너는 교장선생님한테 가자!” 그래서 내가 살려달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요. 거의 초등학교 2,3학년 때의 일인데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간절히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던지 나중에 용서해 줍디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보면“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거지 바디매오가 거지 옷을 벗어서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나간 것처럼 우리도 옛사람을 벗어 던져 버리고 회개하고 주님께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날 도와주시면 회개하겠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내가 전심전력으로 회개하고 나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예수님께 나가서 횡설수설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바라는 것을 주님께 아뢰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주님 찾아 왔는데 물어볼 필요 없잖습니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눈 나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디매오로 하여금 입술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앞에 나오면 여러분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횡설수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와 꿈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고 분명한 자기 믿음으로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분명하게 하지 않고 막연하게 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그러면 기도 응답이 안 됩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막대한 돈과 무기와 군대력을 가진 영국정부와 대결하여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마하트마 간디는 총 한자루 없었고 군인 한 사람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대한 무기와 조직과 군대를 가진 영국하고 싸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보면 계란 들고 바위를 던지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바위가 깨지겠습니까? 계란이 깨지지. 그러나 간디는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영국을 이겨야 우리나라가 산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간디는 승리를 거둔 후에 목표의 힘은 “목표의 힘은 군사력 보다 강합니다. 조직적인 정신력은 조직적인 군사력보다 위대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간디의 그 간절한 목표가 분명한 애국심이 영국의 그 방대한 군사력을 이기고 인도를 독립시킨 것입니다.
황제 나폴레옹도 전투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우리가 장악했다. 치밀한 목표 달성을 계획 했으니 이미 우리 이긴 것과 한가지다. 목표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면 일은 이미 반 이상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희미한 목표를 가지고 살면 승리를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잘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당신이 만일 어떤 것을 오랫동안 열심히 상상하고 마음속에 그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어떤 것을 목표를 중심으로 마음에 바라보고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에 분명히 가지면 때가 오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돼요. 지금은 눈에 안보일지라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분명히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만 우리 입으로 그것을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받은 줄로 믿으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으라는 것입니다. 안 받은 것을 받은 것처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고 믿고 있는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글로 써서 늘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바라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꼭 응답받아야 될 것이 있으면 흰 종이에 다가 분명하게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벽에 붙이십시오. 천정에도 붙이십시오. 화장대에도 붙이십시오. 일어서도 앉아서 그 목표를 바라보고 없는 것이 있는 이루어진 것처럼 바라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믿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없는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국민요정’이라고 불리는 김연아는 어린 시절에 일기장에 보면 “나도 스케이트를 열심히 타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야 되겠다”라고 늘 적었습니다. 그가 일기장마다 스케이트 선수가 되겠다고 했으므로 그 꿈이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인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축구선수인 박지성도 일기장에 “늘 축구를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대학교, 국가대표까지 갈 것이다.”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국가대표가 된 것입니다.
미국 제44대 대통령인 오바마는 1970년 어느 날 “나의 꿈”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나의 꿈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 흑인으로써 미국 대통령이 된 역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분명히 말하고 적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되고 만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인 이원설은 1958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미래 이력서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는 교수, 학장, 총장이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학장이 된 것은 그의 계획보다 11년이나 앞당겨졌고, 한남대학교 총장이 된 것은 미래 이력서보다 7년 앞당겨서 총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03년에 숭실대학교의 재단이사장으로 취임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종이 위에 기록해 놓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늘 바라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수첩을 가진 사람은 수첩에다가 적어 놓고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목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바라보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묻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내가 너 뭐해 줄꼬?” “몰라요.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 뭐해 줄꼬?” “예, 첫째 이것 둘째 이것, 셋째 이것. 이것을 해주십시오.” 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렇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5. 변화된 삶
특별히 바디메오에게 배울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떴지 않습니까? 눈을 떴으면 다시 옛날 자기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가라!”하니까 눈이 번쩍 뜨자 그는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서 여리고에서 떠나간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를 따라 여리고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도시 아닙니까? 저주받은 도시에서 장님이 되었으니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하루 거지생활은 상징적으로 예수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이 저주 받은 땅에서 눈이 어두워서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매일같이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피땀을 흘려 노력하며 살다가 늙어서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디매오는 눈만 뜬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주님을 따라가기 시작해서 여리고를 나갔던 것입니다. 저주의 도시에서 떠나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눈이 밝아지면 말씀을 믿고 저주의 생활에서 떠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속에 들어앉아서 예수를 믿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여리고에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 안에서 나는 살겠다. 그것 잘못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이 밝아지면 저주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나흘 동안 있다가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고 할 때 나올 때 온 몸에 수의를 메고서 입고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을 믿으면 묶인 데서 풀어놓아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마귀와 세상에서 해방되고 질병에서 해방되고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고 죽음과 절망에서 해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죄의 도시를 떠나고 마귀와 세상을 떠나고 저주와 고통을 떠나고 죽음을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차고 기쁘고 소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삶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된 삶을 우리가 얻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만 빈센트 필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작은 도시 이발사협회가 회의를 해서 그 도시의 가난한 지역을 찾아가서 가장 더러운 누더기 옷을 입은 술 취한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더러운 사람을 찾아가서 이발을 해주고 몸을 씻어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넥타이를 메주고 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신문기사로 나오자 한 사람이 자원해서 이 사람을 고용 했습니다. 내일 아침 8시에 직장에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8시가 되어도 직장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가 옛날에 그 사람이 살던 동네에 가보니까 곤드레만드레 술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넥타이를 메고 좋은 지팡이를 옆에 두고서 진흙탕 속에 뒹굴어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깨달은 것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주고 이발을 시켜주고 좋은 지팡이를 손에 들려주고 안경을 끼워주고 해도 옛사람이 그대로 있으면 옛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달라져야지. 속이 달라져야 달라지지 겉이 달라져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이 달라져야 돼요. 아무리 외모를 변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옛사람을 철저히 청산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새 마음을 입으면 겉은 자연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그냥 따라와요.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겉사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 론>
오직 진실한 믿음만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의 기적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자신이 악에서 선으로 어떻게 돌아섰는지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저의 모든 삶이 변화되어 이전에 제가 바라던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제가 전에는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의 눈에 악으로 보였던 것이 선으로 보였으며 선으로 보였던 것이 악으로 보였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삶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변하고 우리가 저주의 땅 여리고를 떠나 축복의 땅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고 예수보다 더 귀한 보배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차별 없이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를 모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어제 바디매오의 눈을 떠서 인생을 변화시킨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눈을 뜨게 하고 우리 인생을 변화시켜 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주님이 이 자리에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서 나갈 때 변화된 사람이 되어서 나가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받기를 원하십니까?
조확한 목사
1.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시자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맹인이 되어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여 때때로 낙심과 좌절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30세가 되던 해 뉴욕에서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집회에서는 집회 내내 죄와 허물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찬송가143장)을 계속 불렀습니다. 그러자 참석한 모든 회중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그녀도 어느 순간 큰 은혜를 체험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주님, 나같이 천하고 쓸모없는 소경이 무엇이 그렇게 귀하다고 날 위해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혼자 되뇌이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렇게 앞을 볼 수 없는 천한 몸도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때 그녀의 귓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무슨 말이냐? 내가 너에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지혜를 주지 않았느냐?’ 이러한 주님의 음성에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그대로 있었지만 심령의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이 보였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감격이 마음 가득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녀는 곧바로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처음 작사했던 것이 찬송가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의 갈길 다가도록’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비롯하여 무려 8,000여곡의 주옥같은 찬송시를 써서 그중에 24편의 시가 찬송가에 들어오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게 있습니다. 여러분,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나 후에 외견상으로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육신의 눈은 여전히 감겨져 있어 사랑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꽃도 그 밖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출세를 한 것도 아니고 건강이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낙심과 좌절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감사와 기쁨과 희망과 사랑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어둠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활짝 떠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떠지자 자신이 갇혀 있었던 어둠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로 나아와 하나님과 천국을 확실히 보면서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부분이 자꾸 하나님께 요구만 합니다. 하나님, 건강하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자식이 잘되게 해주세요. 경제가 활성해되게 해주세요. 물론 그것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령 그런 것들을 얻는다해도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래봤자 계속 죄와 무지와 원망과 근심과 불평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떠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진짜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하나님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고,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이 얼마나 복된 세상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눈, 신령한 눈, 은혜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면 올바른 분별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육신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면 어둠속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꾸만 인간의 그 작고 편협되고 어둡고 한계 속에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활짝 뜨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밝히 보며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분명하게 들으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자신의 상태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주님을 보고, 영원한 세계를 보려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어둠속에 갇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알아야 교만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 알고 다 보고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면 교만하게 자기마음대로 삽니다. 주님을 찾지도 않고 찾아오시는 주님도 거부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9:4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이 소경, 즉 다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무지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죄사함의 은총을 얻었을 것인데 자기가 다 본다고, 다 안다고 제멋대로 했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요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알습니다. 그래서 그는 풍요로운 도시 여리고에 살고 있었지만 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비굴하게 엎드려 동전 몇 닢 얻어서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해방시켜 줄 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앞에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생결단하고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4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뭐라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그러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분이 오셨으면 난 죽어도 그분을 만나야 된다는 심정으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 불쌍한 인생을 불쌍히 여시고서. 나는 어둠속에 있는 인생입니다. 나는 무시받고 천대받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십시오. 제 어둠을 밝혀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와같이 자신의 죄됨과 어두움과 한계와 무능함을 아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맞고, 내경험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니까요. 그래서 자기 이성으로는 천국과 지옥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제 잘났다고 제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은혜가운데 살지 못합니까? 왜 10년 20년 30년을 교회에 다녀도 생명력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한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가치나 경험이나 지식들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삽니다. 왜요? 자기가 똑똑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고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적용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은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둠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깊은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별거 아닙니다. 우리 생각, 이성, 잣대 옳지 않은 것 너무 많습니다. 우리 경험, 지식 정말 작은 것입니다. 시73:22절 보십시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설마 짐승같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러나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죄가운데 있고 한계와 약함과 허물가운데 있는 것이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이걸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인정한다면 제발 그 알량한 내 생각과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죄와 어둠과 무지와 연약함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간절히 주님을 부르짖어 찾으며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께서 역사하심으로 정말 새 생명의 은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님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작음을 인정하였으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 인생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한계를 해결해 주셔서 온전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실 분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어두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인생의 무지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 인생의 현재와 영원한 미래에 대하여 답변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과 구원하심 밖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고백 속에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결국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47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여러분,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는 ‘나사렛 예수’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와 ‘다윗 자손 예수’는 천지차이입니다. 나사렛은 빈민촌과 같은 곳으로 나사렛 사람은 가난하고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비하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즉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주이심을 믿었기에 그야말로 사생결단하고 요청을 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보세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너 같은 더럽고 추한 거지가 어딜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이 너 같은 것은 거들떠 볼 시간이 없으니 저리 꺼지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니들이 뭐라 그래도 좋다. 날 무시하고 욕하고 천대해도 좋다. 그러나 난 저분을 붙잡아야 된다. 저분만이 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하면서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야 합니다. 나오는데 그냥 나오는 둥 마는 둥, 나오면 나오고, 아니면 말고 하는 어정쩡한 태도로 주님 앞에 나오면 은혜받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은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이런 각오로 누가 뭐래도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죽어도 예수님 만나 은혜 받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기어이 받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나올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말거나 욕을 하거나 말거나 그냥 죽자사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4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드디어 구원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모든 것 다 팽개쳐 버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때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5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간절한 요청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한마디에 날 때부터 몇십년 동안 감겨져 있던 눈이 떠져 모든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모든 멸시와 천대와 고통도 사라진 것입니다. 어둠과 좌절과 멸시 속에서 살던 인생이 은혜와 기쁨과 감사 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진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일한 구세주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십니다. 어둠과 절망과 낙심과 원망과 불평을 없애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고 생명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살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오늘 바디매오처럼 예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나의 지식도 경험도 이성도 얼마나 작은지요. 그런데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에 의지해서 살아왔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소서. 나를 받아 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의 생명, 나의 기쁨, 나의 구원이십니다. 그러므로 나 이제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사오니 저를 받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소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임하실 것입니다. 눈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선명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추한 것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오늘 바디매오에게 임했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고 생명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크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임덕순 목사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두 제자가 예수님께 와서 뭔가 조용히 개인적인 부탁을 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들이 하는 말이, “주님이 왕이 되시는 날, 우리중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 라고 청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예 그렇게 할 수 있나이다.” 그러자 말씀하시기를 “만약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나의 좌우편에 앉게 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내 목숨을 주러 세상에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이어진 사건이 오늘 읽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소경이요 거지인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는 나를 제발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자,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핀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가 다가오자 주님은 그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소경은 아주 분명하게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간구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푼돈도 아니고, 다리나 위장의 건강도 아니라 우선 눈을 떠서 보는 것입니다. 그는 가장 핵심적인 요구사항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눈뜨는 것임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떤 정치인이나 보통사람에게 요청했더라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경거지는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고, 즉시 눈을 떠 보게 되었습니다.
핵심적인 요청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적임자에게 구해라.
이것이 본문이 가르치는 핵심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어떤 동작을 취할 때는 뭔가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거지가 아무 말 없이 내민 손에도 한 푼의 돈을 구하는 요구가 들어있고, 총총걸음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발걸음 속에도 열심히 일해서 인정도 받고 승진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습니다. 총각 처녀의 서로 마주보는 눈길 속에도 나만을 사랑해달라는 요구가 들어있습니다. 4월 초파일에 사찰로 향하는 발걸음 속에는 가족들의 건강과 평안에 대한 요구가 있고, 주일마다 교회로 모여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구원을 얻었으면 하는 요구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오신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평생에 교회란 곳은 한번도 와 본적이 없었는데,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의 정성에 이끌리어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계실 것인데, 그래도 아무생각도 없이 따라온 분은 없을 것입니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고 오셨습니까?
바라는 것의 크기는, 상대하는 사람의 능력의 범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자기 손주 한테 원하는 것은 기껏해야 뽀뽀 한번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고, 사장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인정해주고 월급을 올려주기를 바랄 것이고, 의사에게는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는 바램을 갖고 찾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한다면, 그 상대가 가진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나아왔습니까? 천지의 주재,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께 왔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능력자이고, 고생하며 사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는 능력의 제한이 없습니다. 돈도 권력도 지혜도 건강도 그분이 주관하십니다. 정말 주실 수 있는 분을 찾아왔으니 시시한 것을 구하지 말고 정말 중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돈이 필요해서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빌고 싶으십니까?
지난해 우리나라는 금융자산 100만 달러 이상을 소유한 백만장자가 6만1,000명이나 늘어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합니다.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가 조사해 15일 발표한 ‘세계 재산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금융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인 ‘다액 순자산보유개인(HNWI)’은 770만 명으로, 전년에 비해 7.5% 증가했답니다. 지역별로는 홍콩이 30%가 증가해 가장 높았고, 인도 22%(6만1,000명), 한국이 18%로 3위를 했다는 겁니다. 한국에 부자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도리어 불행한 수치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기간동안에 우리나라의 GDP는 2.9%밖에 성장하지 못했는데, 백만장자가 된 사람은 18%나 늘었으니, 그들이 부자가 된 것은 많은 중산층이 무너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많이 가진 것만큼 누군가가 더 가난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부자가 된 그 사람 자신은 행복해졌을까요? 잠깐 자만심을 얻었을 뿐이고, 그것이 진정한 위로나 행복이나 미래의 소망을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돈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거나 평안을 주거나 소망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깐 편리를 주지만 도리어 불안과 갈증을 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오신 여러분 중에는 돈을 바라고 오신 분은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전도하신 분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아니면 여기 선 목사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여러분을 부른 건, 목사도 아니고 전도자도 아니고 사실은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 우리가 예수님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이라는 주님의 제자는 빌립보라는 도시에 가서 전도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우리도 전도하면서 그 말씀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바라야 할 것은 시시한 것이 아니라 아주 큰 것인데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님 이십니다.
그럼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원은 하나의 작은 물건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삶의 기회와 능력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진리를 따라서 착하게 산다. 질병을 치료받고 풍성한 삶을 산다. 윤리적으로 고상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를 훨씬 벗어나서, 새로운 삶의 기회와 능력을 부여받아 새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독교에 수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많은 불치병자가 기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나를 통해서도 많은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힘쓰는 교회들이 유명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그것에 힘쓰지 않습니다. 병 고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병 고치는 일에 힘쓰면 많은 병자가 치료될 수 있지만, 교회가 그 일에 주력하면, 그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에는 높은 교육이 있습니다. 한국의 근대교육은 기독교의 영향이라는 것을 부인할 분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교육을 대신하려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닙니다.
/ 기독교에 윤리가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대자대비해서 오백라한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오백 라한이 석가를 박해한 것도 아니고, 석가의 부모를 해친 것도 아닙니다. 제 삼자로서 용서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교는 석가모니의 대자대비를 아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신체에 못을 박는 사람들을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대자대비 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만든 종교의 윤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잘 하는 것입니다. 도적질 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고 살인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원수는 용서해 주면 아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그것을 열배나 뛰어 넘는 적극적인 계명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원수를 갚지 않아도 언젠가 또 원수를 증오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가 필요한 것을 적극적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원수가 너무나 미안하고 죄송해서 마치 정수리에 숯불을 얹어놓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 사랑에 굴복하게 되고, 그래야 원수관계는 완전히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윤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못한 윤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윤리를 자랑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핵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에 박애정신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적의 병사도 치료해주는 적십자운동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시작한 단체입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세어보아도 기독교는 박애운동중의 박애운동이요 윤리중의 윤리이며, 최첨단의 교육기관이고, 삶 전체를 인도해주는 인생의 푸른 목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알맹이가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얻은 축복에 감사해서 생활 속에서 맺는 열매에 불과하고,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오늘 그 값진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인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 됨과 부활과 영생이 포함됩니다.
그 구원의 첫 단계는 용서입니다. 평생 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죄인이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고, 죄를 지은 자는 사망한다고 이미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살려고 몸부림쳐도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를 해결해야만 사망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는 자신이 지은 죄를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대신 매를 맞고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면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 사건을 나를 위한 구원사건으로 믿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요, 그렇게 죄 사람을 받은 사람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십니다. 이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조금 더 건강하게 살거나 돈을 더 벌거나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일입니다.
구원의 다음 부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을 때는 돕는 자가 없었습니다. 기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이 안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래서 점을 치고 운세를 보면서 불안하게 기웃거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날마다 보호하시고 말씀으로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과 생활의 분명한 원칙이며 삶의 바른 길을 찾아주는 나침반이고, 미래를 보여주는 확실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 말씀을 가지고, 날마다 순간마다 내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은 자기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물질중심적인 사람이 되게 하지 않고 영의 사람이 되게 하시며, 죄만 지었던 사람을 선을 행하고자 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현실에만 마음을 두게 하지 않으시고 내세에 마음을 두게 하십니다. 성령은 감사하게 하며 서로 사랑하게 하며 피차 섬기게 하십니다. 그런 삶에서 정의와 평화와 선한 행실과 행복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는 더 놀라운 단계의 구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생입니다.
부활이 무엇일까요? 죽었던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확실하게, 아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신기하게 들리십니까?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부활을 약속하셨을까요? 한번 하늘을 날아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부활한 몸으로 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천국이라고 일컫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에 여러 번 초청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서 대신 못 박혀 죽으신 것이고, 거기 나 혼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데리러 오시는 두 번째 방문이 재림이며, 거기에 들어가서 살아갈 몸이 바로 부활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무덤 속에 묻혀 있던 시체들은 부활을 하고, 그 시대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새 몸으로 변화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방불하게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영생이요 구원의 완성입니다.
너무나 신비해서 쉽게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비한 일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가득차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볼까요?
강낭콩을 심었는데 영 다른 싹으로 나오는 것처럼, 통보리를 심었는데 보리 싹으로 나옵니다. 그것처럼, 사람은 장례할 때 묻은 썩은 몸, 그 형태가 아니라 새 몸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장구벌레가 물 속에서는 다른 곤충을 잡아먹는 거식벌레였는데, 그것이 물 밖으로 나올 때는 뭐가 되는지 아십니까? 하늘하늘한 멋진 날개를 가진 잠자리가 되어 나옵니다. 물속에서의 삶을 끝내고 이제는 물 밖에, 공중에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기회와 몸을 주신것입니다. 배춧잎 위를 기어다니던 징그러운 배추벌레는 뭐가 되는지 아십니까? 어느 순간에 어여쁜 하얀 나비가 되어 온 들판을 날아다닙니다. 신비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현재일이나 미래일이나 모두가 신비입니다.
곤충의 평생 동안 알, 벌레, 나비로 몸을 바꿔가며 살아갑니다. 한 생명인데도 알일 때는 나뭇가지에 붙어있기 좋도록 작은 알 덩어리로 만드시고, 벌레일 때는 식물의 잎에서 살아가도록 작은 다리를 많이 붙여주셨고, 나비일 때는 하늘을 날도록 아주 예쁜 날개를 주셔서 공중을 날며 삽니다. 그들의 몸은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맞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몸입니다. 똑같이 그 생명인데도, 몸은 그가 사는 환경에 따라 여러 개의 몸을 갖습니다. 신기하지요? 이 모두가 하나님이 만드신 일입니다.
허파로는 물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들에게는 아가미로 숨을 쉬는 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날개 없이는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들에게는 가볍고 강인한 날개를 가진 몸을 주셨습니다. 다리가 튼튼하지 않고는 거친 들을 누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에게는 강인한 다리를 가진 몸을 주셨습니다. 신비하지 않습니까?
호주에 가면 오리너구리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그놈은, 주둥이는 오리부리를 가졌는데 몸은 너구리입니다. 털이 북덕북덕하게 난 짐승인데, 물속에서 살고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합니다. 이놈이 대체 새입니까? 짐승입니까?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참 신비한 일입니다. 상상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맞는 멋진 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물인 곤충과 짐승들에게도 신비한 몸을 주신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이요, 당신의 형상인 사람들에게, 그것도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에게, 누추하고 병드는 몸을 딱 한개만 주시겠습니까?
김 선일씨가 이라크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분한 일입니다. 그가 참수되어 죽었으니 그의 생명이 끝난 것입니까? 성경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천국을 약속해주신 하나님이, 그 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나라에 가서 살아갈 신비한 새 몸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약속을 책임지기 위해서, 신비한 세상을 만든 솜씨로 부활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다 신비이고, 세상에는 신비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의심할 능력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마시지 않고는 못사는 물을 보십시오. 그게 전혀 다를 바 없는 물인데, 언제는 딱딱한 돌덩이 같은 얼음이 되고, 언제는 출렁출렁한 물이 되고, 언제는 보일락말락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지 않던가요? 분자가 바뀐 것은 아닌데, 환경 따라 물은 완전하게 모양이 변화합니다. 물에 열이 가하면 수증기로 변화합니다. 물을 그릇에 담아서 가스렌지에 올려놓고 따다닥 하고 불을 켜면, 조금만 지나면 쓰르르 하면서 물이 끓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면 서서히 물은 수증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아무리 고집센 물도, 나는 끝까지 물로서 살거야 하면서 버티지 못합니다. 물과 불과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 물에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되도록 하셨기 때문이고, 사람은 신비한 그것을 날마다 사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그릇 밑에 불만 다가와도 물이 수증기로 변화하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사는데, 우리의 몸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심판 주 하나님이, 천국에서 살자고 우리들의 무덤을 찾아오시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몸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변화시키시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변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이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잘 믿지 않으니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다시 비밀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단 회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일회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살리시되 또 다시 고생하고 갈등하고 병드는 이 몸으로가 아니라, 죄 없는 천국에서 살아갈 완전한 새 몸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몸은 늙지도 병들지도 서럽지도 않는 완전한 새 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로로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살다 부활의 새 몸을 얻어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새 삶,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구원을 셋트로 얻습니다. 이 구원이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에, 병 고치는 기적도, 특별한 윤리도, 그 어떤 사회사업도 덜 중요하게 여기면서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 이 축복을 알려드리고 나누어 드리려고 여러분을 오늘 하나님 앞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예수를 여러분의 구주로 믿어, 구원을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어떻게 받을까요? 선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싶어서 가게 앞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갖고 싶어도 아이는 그것을 살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장난감 자동차를 영 못 갖습니까? 아버지가 선물로 사주시면 가질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가진 좋은 것은 거의 다 선물로 받은 것이지 제 돈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든지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전체의 구원을 선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오신 모든 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믿어서 구원의 선물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장차 부활과 영생을 누리시고, 오늘 이 땅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당당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