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이라 했던가. 이방원에게 목숨을 빼앗긴 정도전은 이방원의 주도로 쓰인 역사 속에서 빛을 잃었다. 정도전을 재조명한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정도전의 빛을 되찾아준다. 또한 그 빛은 우리 모습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빛이 되어 준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눠 말한다. 그 하나는 사실로서의 역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록으로서의 역사다. 이런 역사를 두고 어느 역사학자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역사란 계속해서 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얼핏 보면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변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얼토당토않은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그 뜻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실로서의 역사도 기록으로서의 역사도 역사가의 현재적 해석을 거쳐 재구성되는 것이고 또 그럴 때 그 역사가 진정한 역사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보며 역사란 변화를 전제로 하며 변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의미를 만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한국사에서도 적용되며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도 적용된다. “이방원의 성공으로 ‘정도전 역적론’은 조선사 5백 년 간 의심할 바 없는 정설이 되었다.” 조선시대 이후에도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역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 정도전을 두고 지은이 조유식은 혁명가라 말한다. 조유식은 기존과 다르게 정도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행한다. 물론 정도전을 혁명가라 부르는 이가 조유식 혼자인 것은 아니다. 현대에 이르러 여러 역사학자들이 정도전을 두고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도전이 역적에서 혁명가로 변할 수 있었는지, 과연 정도전은 혁명가였는지 왜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정도전을 변명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정도전은 누구인가 정도전(1342~1398)의 호는 삼봉이고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도전의 집안은 경북 봉화에서 대대로 향리를 지냈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서 중앙 정부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은 없었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 이전까지는 그랬다. 정운경은 오늘날의 법무관 장관에 해당하는 형부상서까지 올랐다. 정운경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우연이라는 선비의 첩의 딸과 결혼했다. 우연은 고려개국공신 가문의 사위였는데 정운경은 우연의 사위가 되면서 중앙 귀족가문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고려 말까지만 해도 첩의 자식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으므로 첩의 딸과 결혼했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운경의 장모 그러니까 정도전의 외할머니는 승려 김진과 여자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김진이 속했던 우현보 가문 사람들에게 자기 집안 종의 자손이라고 업신여김과 괴롭힘을 받았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 개국공신이 된 이후에도 핏줄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천민출신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을 많이 겪은 탓일까. 정도전은 하층민에 대한 이해가 깊고 넓었고 훗날 정치를 하고 정치제도를 만들 때에도 하층민을 염두해 많은 활동을 했다.
정도전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당대 이름난 선비였던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이색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배워와 많은 개혁파 선비들을 배출했다. 정도전을 비롯해 정몽주, 이숭인, 권근, 이존오 등 여말선초에 중앙정계를 주름잡은 개혁파 정치가들이 모두 이색 문하생이었다. 이색이 전파한 성리학은 당시 온건개혁파 유신들은 물론이고 역성혁명파 유신들의 공통된 정치이념으로 널리 퍼졌다. 자기수양적 측면과 민본주의적 측면까지 겸비하며 유가의 이상인 도덕정치를 실현하려는 성리학은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진보적 이념으로 통했다.
정도전은 이색한테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함께 공부한 정몽주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정도전이 남긴 여러 기록들은 정도전은 이색보다 오히려 정몽주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하고 있다. 당시 불교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색은 호불의 경향을 보인데 반해 정도전은 정몽주와 함께 배불노선을 걷기도 했다.
고려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권신 이인임은 친원정책을 시행했다. 정도전은 친원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를 했는데 그러다 거의 9년 동안 유배와 유랑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정도전은 그 시간 동안 정치낭인이 되어 책을 읽으며 수양을 쌓는 반면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그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정도전은 일개 농부처럼 은인군자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정치낭인 생활 9년째 되던 해에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가고 훗날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했다.
정도전의 사상 정도전은 혈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치낭인으로 생활하며 하층민의 아픔과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는 민본사상을 키워갔다. 또한 이색에게서 배우고 정몽주와 함께 공부한 성리학도 정도전의 민본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공자와 맹자를 꼽을 수 있는데 정도전은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 심취했고 그들의 저작을 탐독했다. 정도전의 정치적 이상은 도덕정치와 의리정치였다. 이러한 이상은 공자와 맹자가 꿈꿨던 것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도덕적 의식 발전을 사회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보고, 사회역사 발전의 궁극적 목표를 인덕이 풍부한 사람들의 도덕적 공동체”로 보았다. 다시 말해 정도전은 공자와 맹자의 인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이는 귀신이나 상제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보던 당시 봉건시대 정신사에서 대단히 혁명적인 의의를 갖는다. 또한 이는 부패한 봉건시대에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상이었다.
실제로 정도전은 민본사상과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개혁정책을 펼쳤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은 토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부정축재를 막고 가난한 백성들의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전제개혁을 추구했다. 특히 그는 ‘계민수전(計民受田)’ 방식으로 철저한 개혁을 지향했다. ‘계민수전’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켜 모든 농민들에게 식구 수대로 토지를 분배하는 제도다. 정도전은 양전사업과 과전법을 실현시켜 권문세족들의 비리를 막고 대지주들의 토지독점을 막았다.
그런가하면 정도전은 척불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불교는 국가이데올로기이자 민간신앙으로 민족통합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누구보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승려들과 막역한 교유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 말에 이르러 불교는 세속권력과 유착하고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 이처럼 불교가 본연의 사명에서 벗어나 백성을 우롱하고 착취하기에 이르자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척불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이것 역시 그의 민본사상과 인본주의에서 비롯된 셈이다. 정도전은 불교를 버린 반면 유교를 취했다. 정도전이 유교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유교가 말하는 사랑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중생에 대한 사랑을 최고의 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가 말하는 천지만물에 대한 자비는 사랑에 있어서 순서가 없는데 반해 유교의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 유교에서는 부자간의 사랑, 모녀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등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그 시작으로 한다. 그리고 유교는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여 천하를 평화롭게 하라고 가르친다. 정도전은 이러한 유교의 사랑이 현실적이라 생각한 것이다. 또한 정도전은 승려들이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탁발로 생계를 잇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정도전은 <불씨잡변>, <조선경국전> 등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각 저술에도 민본사상과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그의 생각과 철학들이 담겨 있다.
정도전 vs 이방원 정도전의 사상과 실천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진보적인 성향의 것이었으리라.(물론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그것은 매우 진보적으로 보인다.) 특히 귀족 중심의 봉건주의 사회에서 그의 사상과 실천은 과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이 펼친 전제개혁은 지금의 토지공개념과 매우 닮아 있기도 하다. 올바른 정치,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한 정도전은 동시대인은 물론 후대들에게도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정도전은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이성계와 손을 잡아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도전을 비롯한 역성혁명파 지식인들이 이룬 조선 건국은 사상혁명적, 종교혁명적 요소를 바탕으로 봉건사회의 유신을 지향했기에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혁명적 사건으로 비춰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 정도전도 유배를 떠나기 전에는 온건개혁 성향의 사대부 주류들과 같은 정치노선을 취했다. 하지만 유배를 떠나고 유랑을 하며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스스로 농부가 되어 생활한 뒤 온건개혁파 지식인이었던 정도전은 역성혁명파 지식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성과 나라를 위한 혁명을 주도하고 성공한 정도전은 왜 조선사에서 찬밥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일까?
조선건국 과정에서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도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런데 이방원은 세자 책봉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이방원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장악했다. 이때 이방원의 이복 형제이자 세자였던 방석과 방번 그리고 정도전이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그런데 세자 자리, 나아가 왕의 자리가 탐이 났다면 세자만 제거하면 되었을 것을 왜 이방원은 정도전까지도 제거한 것일까?
이방원과 정도전은 함께 조선건국을 이뤘지만 정치노선이 서로 매우 달랐다. 이방원은 보수 · 안정지향적인 정치가였던 데 반해 정도전은 진보· 혁명지향적인 정치가였다. “이방원이 귀족적이었다면 정도전은 평민적이었고, 이방원이 우파라면 정도전은 좌파였다.” 무엇보다 이방원은 왕권중심주의를 추구했지만 정도전은 재상중심주의를 추구했다. 이방원은 “권력이 임금에게 집중되지 않고 신하에게 분산되면 그중에 반드시 간신이 나와 판치게 된다”고 보았다. 반면 정도전은 “그 자질이 일정치 않은 세습군주가 전권을 행사하는 왕권중심주의보다는 천하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국정의 중심이 되는 재상중심주의가 왕조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제도라고 믿었다.” 이처럼 정치제도, 권리 분배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이방원 입장에서는 왕권을 쪼개려는 정 정도전이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또한 정도전은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손자병법 못지않은 병법을 만들었고 개인에게 속한 군사들을 관군으로 전환시키는 사병혁파운동을 벌여 귀족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고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정도전을 죽이기에 이른 것이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타당한가 정도전은 이방원 때문에 사병혁파운동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요동정벌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방원이 없었다 하더라도 정도전은 실패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 후 혈통문제로 자신을 괴롭힌 우씨 집안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다. 또한 조선을 건국하고 혁명을 이루면서 장애가 된다면 그 대상이 스승이 되었건 죽마고우가 되었건 가차 없이 제거하고 처단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이러한 정도전의 모습까지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변명이 타당한 것인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봉건사회라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은 정당성을 얻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혁명적 차원에서 그랬다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게다가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혁명이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고 그것이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오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또한 정도전이 주장한 재상중심주의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도전이 이상으로 여긴 재상중심주의는 그처럼 사심 없이 공동체에 헌신하는 군자적 정치를 전제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심 없이 공동체에 헌신하는 군자’를 만나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정도전은 자신이 직접 쓴 <조선경국전>에서 “임금이 신하만 못하면 신하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여기에도 한계가 보인다.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할 수 있듯이 신하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살았다면 정도전에게도 한계는 있지만 철저히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는 봉건사회에서 그것도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힘쓴 정도전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특히 정도전만큼 백성들을 위하고 올곧은 정치가가 되려고 노력한 인물도 흔치 않다. 당시에 왕이 아니라 재상이 나라를 다스리는 새로운 체제를 구상해낸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방원이 죽고 정도전이 살았다면 정도전은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도전이 이방원과 대립했을 때보다 조금 더 앞으로 거슬러 가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정도전은 정몽주와 매우 절친하게 지냈고 둘은 정치적으로나 삶의 태도에 있어서도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취했다. 그런데 정도전은 고려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려했던데 반해 정도전은 고려 체제가 아닌 새로운 체제를 만들며 개혁을 하려하면서 둘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만약 정도전이 정몽주와 같은 입장을 가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최소한 혁명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더 현실적인 여러 방안들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정도전은 민본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은 당시 상황을 생각했을 때 진보적이지만 어찌 보면 그것도 봉건사회 귀족들의 생각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정도전의 민본사상은 백성을 주인으로 생각하기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입장에서 백성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이룬 조선 건국은 소수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탓에 조선 건국은 역사에서 더욱 빛을 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과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자신들이 생각한대로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심지어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음을 맞고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자신이 아끼는 충신을 죽이고 또 다른 아들들까지 죽이는 참극을 눈뜨고 봐야했으니.
정도전의 혁명은 조선을 건국했다는 점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나 많은 이들의 동의와 힘을 얻지 못하고 사병개혁운동과 재상중심주의 체제 건설을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정도전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우리 역사에서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 미래에 정도전은 또 다른 색의 빛을 지니지 않을까.
미완의 혁명
역사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바꿔가며 역사는 끊임없이 흐른다. 그리고 흐르는 물이 움직이며 형태를 달리하듯 역사 또한 그렇다. 역사관에 따라 역사가 주는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흔히 조선사에서 역적으로 알려진 정도전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게 한다. 특히 이 책은 정도전의 행적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축소시켜 그린 <태조실록>의 내용에 대해 반박한다. <태조실록>에는 이방원의 입김이 크거나 적게 작용했던 탓에 이방원과 다른 생각을 가진 정도전의 모습이 왜곡되게 나타났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 나타난 정도전은 가히 혁명가라 불릴만하다. 정도전은 당시 진보적 사상으로 통했던 유교 성리학을 익혀 그것을 토대로 여러 정책을 폈다. 9년 여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을 하며 하층민의 백성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그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어 민본사상을 체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고려 말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꾸고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기도 했다. 조선을 건국하고 난 뒤에는 재상중심주의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귀족에 의해 사회 전반이 좌지우지되고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재상중심주의 정치 체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혁명을 하는 과정에서 정도전은 정치가로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덕분에 정도전은 토지를 국유화하고 토지를 골고루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는 토지제도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도전을 성공한 혁명가라고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도전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재상중심주의를 주장했던 정도전은 왕권중심주의를 주장한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정도전의 사병혁파운동도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정도전은 개인 소유의 병사들을 관군으로 전환시켜 국가 방위를 튼실하게 하고 병사를 동원한 무력을 앞세워 비리를 일삼는 귀족들을 막아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하려했다.
정도전의 혁명이 실패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도전의 꿈꿨던 재상중심의 정체 체제는 공화제나 의원내각제와 비슷하다. 봉건제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정도전은 봉건제 사회에서 이미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많은 귀족들과 왕을 상대로 싸워야 했는데 정도전은 자신과 뜻을 같이할 많은 이들을 모으지 못했다. 정도전이 추구한 민본주의에도 한계가 보인다. 정도전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 나가려 애썼는데 그것은 단순히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 그쳤다. 다시 말해 정도전의 민본주의는 백성을 주인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만일 정도전이 백성을 주인으로 한 정치를 펴 나가려 했다면 그는 더 많은 동의와 힘을 얻어 혁명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정도전이 훌륭한 혁명가였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정도전은 이색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정몽주와 절친한 사이였다. 정도전은 정몽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정몽주를 의지하며 지냈다. 이것은 정몽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몽주는 고려 사회를 유지한 채 개혁을 하려 했던 데 반해 정도전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개혁을 하려 했다. 정몽주가 온건개혁파라면 정도전은 역성혁명가였던 셈이다. 이렇게 생각이 나뉘면서 둘은 멀어져 갔고 정도전은 정몽주를 죽이기에 이른다. 정도전은 정몽주 말고도 스승이었던 이색 등 자신과 정치 노선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가담했다. 혁명마다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겠지만 모든 혁명은 현재보다 나은 사회, 좀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두에 나서는 소수의 힘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밀어줄 다수의 동의를 얻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도전은 혁명에 앞장서는 소수로서 힘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다수의 힘을 얻지 못한 셈이다. 또한 아무리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혁명 과정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에 혁명이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방원이 죽고 정도전이 살아남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고 조선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미 흘러온 역사를 두고 그 반대 상황을 생각해 본다는 것이 어찌 보면 덧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통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새로운 교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 나타난 정도전의 업적과 한계를 되짚어 보면서 역사의 한 장을 다시 써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