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파란옷의 소녀 /김채영
파란색은 피안 (彼岸)의 저쪽에서 온다는 장콕도의 시 '파란색의 비밀'처럼 신비의 베일에 감춰진 빛깔이다. 일상의 구도 속에 적절하게 조화로우면서 파란색은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럽다. 파란색은 마치 유리창 밖의 풍경처럼, 혹은 양초를 입힌 종이처럼 실체는 눈에 보여도 본질은 손에 묻어나거나 결코 순화 될 수 없는 아릿한 그리움 같은 것이다,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아스라한 둔덕이나 벌판 위에 파랗게 내려앉은 이내는 애수를 동반하고 가슴에 젖어온다. 초저녁의 하늘은 파란색으로 깊어지다가 검푸르다가 종내는 까만 어둠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여명직전의 하늘도 강물처럼 파랗게 물들어 온다. 검푸른 물이 조금씩 바래면서 푸르다가 파란색으로 서서히 밝아 아침 하늘의 지평을 열어준다. 하루는 이렇듯 파란색을 정점으로 동이 트고 날이 저무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하늘은 청공 지수가 높기로 유명하다. 날씨나 계절에 따라 하늘빛의 조화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어 기상학에는 하늘의 푸르름의 정도를 재는 청공계 (靑空計) 즉 사이아노미터가 있다는 데 그것으로 파란색의 농담 과 채도 를 관측한다는 것이다.
파란색은 왠지 뜻 모를 슬픔 같은 빛깔이다. 파란, 입 밖으로 내뱉을 때 파란 (波瀾)이라는 어감은 쓸쓸하다 못해 슬프다. 파란 만장 (波瀾萬丈)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생애, 그 파란(波瀾)과 파란색이 너무도 어울리는 느낌이 든다. 파란 중첩(波瀾重疊) 물결이 만길 높이로 격랑을 일으키며 거듭된다는 뜻으로 인생살이에 있어 빠른 변화와 기복을 대변해준다. 파란색은 소리 없이 무늬를 만들며 파문이지는 빛깔이다. 파란을 일으키는 물결의 예민한 반동, 비구니의 삭발에서 애잔하게 투영되는 파르라니한 빛깔, 몸에 든 멍의 파란빛이며 사연이 많아 가슴에 멍든 상처도 파랗다고 하지 않는가.
삼신 할매의 손자국이 난 아기의 엉덩이의 몽고반점 또한 파란색이다. 겨울밤 하늘에 얼음처럼 투명하게 명멸하는 파란별, 불꽃 속의 파란 심지나 저문 하늘에 흩어지는 파란 연기, 그리고 습기 젖은 자리에 피는 달개비 꽃의 파란 빛깔, 이러한 파란색에서 나는 몽환 과 비애 와 한 을 반추해본다. 그러고 보니' 파'자가 들아 가는 단어들은 유난히 역동적이다. 파도. 파편. 파경. 파계. 파탄. 파장. 파멸---- 그 단어들의 민감한 움직임에서 유년의 집 담장 위를 방범수단으로 장치했던 예리한 파란 병 조각을 보듯 전률과 아픔을 감지한다.
파란색을 유난히 즐겨 화폭에 담았던 화가 모딜리아니, 그의 작품 제목들도 다수가 파란색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파란 에어프런의 소녀, 파란 상의의 소년. 파란 옷의 소녀, 파란 눈의 소녀 등...굳이 파란이라는 제목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의 그림에서는 벽면이 파랗거나 초상화의 콧수염이 파랗고 누드 여인의 베개조차 파랗다. 추운 느낌의 파란빛처럼 모딜리아니의 생애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유화와 데생, 조각 등의 세 분야에서 많은 수작을 남겼음에도 그는 삶은 한끼의 빵이 절박할 만큼 불우한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알콜 중독과 뼈아픈 고독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으며 결핵과 아편으로 고생하다가 마침내 아까운 3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파리한 얼굴에 초점이 없는 파란 눈동자. 모딜리아니는 생전에 자신이 그린 인물들의 모호한 시선을 통해 꿈꾸듯 파란빛의 피안을 넘겨다 본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의 영화 속에서도 파란색의 숨겨진 비밀이 퍼즐의 장치처럼 교묘하게 맞춰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금지된 노래, 자살자의 찬가로 알려져 세상에 충격을 던져주었던 전설적인 헝가리 음악이 있다. '글루미 썬데이'는 작곡가 레조 세레스가 연인 헨렌에게 실연 당한 뒤 작곡한 음악이다. 이 노래의 저주는 실존 인물 레조 세레스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글루미 썬데이를 작곡한 뒤 손가락이 굳어지고 실명의 위기에 놓였으며 끝내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등졌다. 수백 명의 사람들을 자살로 유도해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던 미스테리의 음악 ' 글루미 썬데이'는 오랜 세월 뒤에 영화로 재구성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레조 세레스가 문제의 음악을 탄생시켰던 1935년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리얼하게 영화 글루미 쎈데이'가 전개된다. 매혹적인 여인 일로나와 바다같이 넓은 포용력을 갖춘 애인 자보의 삶에 끼여든 남자, 안드라스 .그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인 미남청년 안드라스와 일로나는 짧은 순간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로 인해 일로나와 자보의 관계는 혼선을 빚는가 싶지만 오히려 예기치 못한 반전으로 이끄는 묘미가 압권이다.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지극히 자유분방한 배덕행위. 글루미 썬데이는 자칫 난해하게 발전 될 수 있는 과도한 스토리임에도 인간적인 참사랑과 숨가쁘게 반복되는 절망은 서정적인 영상과 맞물려 호소력이 짙게 다가온다.
영화 속에 삽입된 애조 띤 주제곡과 영상으로 연결된 파란색의 비밀. 그것은 관객들에게 은밀하게 접근하여 비극적인 효과를 빚어내는데 일조를 했다. 일로나의 옷은 거의가 파란빛이다. 파란 원피스, 파란모자, 하얀 블라우스에 파란 꽃자수 무늬, 그녀의 생일날 연인, 자보에게 받은 선물도 파란 머리핀이다. 그녀는 파란 꽃을 가슴에 가득 안고 계단을 내려오다 레스토랑의 일자리를 구하러 들어온 안드라스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 파란 색조가 비극의 예시였을까.
글루미 썬데이에서의 파란색의 출몰, 스크린에서 일로나를 통해 보여주는 파란색은 슬픈 사랑의 역사였다. 그리고 모딜리아니가 선택했던 일련의 파란색의 그림들은 그의 시린 삶이며 방황으로 점철된 고독한 언어가 아니었을까.
".파란색의 비밀은 잘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오는 도중에 엷어져 산이 되어 버린다...하지만 여기선 모든 게 신비다. 사파이어도 신비, 성모 마리아도 신비. 사이폰도 신비, 수부의 저고리 깃도 신비, 눈부시게 파란 햇살도 신비, 그리고 내 가슴을 꿰뚫는 파란 눈빛도 신비다. " 장콕도는 나직이 파란색의 비밀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도 파란색의 비밀을 다 알지 못하기에 점령하지 못한 신비로움을 의문의 부호로 남겨 놓는다. 파란색은 얼핏 우리가 넘겨다 볼 수는 있지만 합류할 수 없기에 몽상 속에서 안개처럼 애틋하게 젖어온다. 안개가 습기로 손에 만져지지만 결코 실체를 잡을 수 없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