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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by 리처드 도킨스 (tistory.com)
1장. 결코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시계공’이라는 말은 19세기의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의 유명한 논문에서 빌려 온 것이다. 1802년에 출판된 그의 논문 <자연 신학 또는 자연현상에서 수립된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증거>는 그동안 가장 잘 알려진 창조론 해설서이며, 신의 조재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주장으로 평가되어 왔다.
다윈이 발견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있지 않다.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하지 않는다. 전망을 갖고 있지 않으며 통찰력도 없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눈먼’ 시계공이다.
무엇이 복잡한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시계, 비행기, 집게벌레, 사람은 복잡하지만 달은 단순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복잡성의 필수 조건으로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불균일한 구조다. 그러한 불균일함, 또는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짐’은 아마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많은 물체들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로 복잡하지 않은 채,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부 구조가 불균일하다.
복잡성을 정의하기 위해 우연성(확률)이라는 수학적 개념을 시도해보자. 복잡한 것은 그 구성요소들이 순전히 우연을 통해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방법으로 배열된 것이다. 복잡성의 정의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나, 그래도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
우리가 얻은 해답은 복잡한 물건은 사전에 규정된 어떤 성질, 즉 단순한 우연만으로는 매우 얻기 힘든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물의 경우 사전에 규정된 그 성질이란 일종의 능숙함이다. 그것은 항공 기술자가 가진 감탄할 만한 비행 기술과 같은 고도의 능력뿐 아니라, 더 일반적인 능력, 즉 죽음을 모면하는 능력이나 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보존하는 능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육체 그 자체는(즉 죽었을 때에는) 환경과의 평형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살아 있는 생물의 체온, 산성도, 수분 함량, 전하 따위를 측정해 보면 그러한 것들이 주변 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죽으면 그 일은 중단되고 온도의 차이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은 주변의 온도와 같아진다. 앞에서 생물로 간주하기로 한 인공적인 기계들을 제외하면, 무생물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환경과 평형을 이루려는 힘에 순응한다.
2장. 훌륭한 설계
동물이 경험하는 세계의 형태는 주관적으로 형성된 내부 컴퓨터 모델의 성질에 따라 달라진다 그 모델은 진화에 따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물리적 자극에는 관계없이 내부적인 표현 형태로 쓰기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설계될 것이다. 3차원 공간에서 물체의 위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박쥐와 사람 모두 같은 종류의 내부 모형이 필요하다. 사람은 빛의 도움으로 내부 모형을 만드는 데 반해, 박쥐는 메아리의 도움으로 내부 모형을 만든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는 어느 경우든 뇌로 전달되기 전에 같은 종류의 신경 자극으로 번역된다.
3장. 바이오모프의 나라
생물에서 관찰할 수 있는 질서는 거의 무한한 수의 다이얼을 가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자물쇠에 비유할 수 있다. 단순한 체를 가지고 혈액 속에 있는 붉은 색소인 헤모글로빈과 같은 생체 물질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헤모글로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아미노산을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그것들이 스스로 운에 의해 헤모글로빈 분자로 결합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한 일이 실현되려면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행운이 따라야 한다. 이것은 아이작 아시모프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는 예로 자주 사용된다. 헤모글로빈 분자 하나는 아미노산들로 이루어진 4개의 사슬이 함께 모여 만들어진다. 이 사슬 4개 중 하나만을 생각해보자. 사슬 하나는 아미노산 146개로 이루어져 있다. 생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아미노산은 20개이다. 물건 20개로 146개의 고리가 있는 사슬을 만드는 경우의 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시모프는 그것을 ‘헤모글로빈의 수’라고 부른다. 146개의 고리로 만들어지는 경우의 수는 20을 146번 곱한 것이다. 이것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큰 수이다. 1억이라는 수는 1뒤에 0을 8개 붙인 것이다. 1조라는 수는 1뒤에 0을 12개 붙인 것이다. 우리가 구하려는 헤모글로빈의 수는 1뒤에 0을 190개 붙인 것이다.
생물의 탄생은 누적적인 선택의 결과다. 1단계 선택과 누적적인 선택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단계 선택에서는 선택되거나 따로 분류되는 것은 그것이 자갈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 한 번에 전체가 선택되거나 따로 분류된다. 반면 누적적인 선택에서는 그것들이 새끼를 친다. 달리 말하면 어떤 방법을 통한 첫 번째 거름 작용의 결과가 두 번째로 넘어가고 그 결과는 다음으로, 또 그 결과는 다음으로 하는 식으로 계속 넘어간다. 선택되고 분류되는 것들은 연속되는 ‘여러 세대’에 걸쳐 다시 선택되고 분류된다. 한 세대에서 선택된 최종 산물은 다음 세대 선택의 출발점이 되고 그러한 과정이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윈이 설명한 진화는 ‘무작위적이다’라는 믿음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정확히 진실과 반대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절대로 무작위적이지 않은, 누적적인 선택이다. 구름은 누적적인 선택 범주에 넣을 수 없다. 특정한 형태의 구름이 그 자신을 닮은 딸 구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진화에는 장기적 목표 따위는 없다. 먼 미래의 목표, 선택의 기준이 될 궁극적인 완벽함 따위는 없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 인간이라는 믿음은 터무니없는 인간 허영심의 산물에 불과하다. 실제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은 항상 단기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체의 생존이거나 아니면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공적인 번식이다. 수백만 년이 흐른 뒤에 뒤돌아보았을 때 그 과정이 어떤 머나먼 목표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단기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여러 세대에 걸친 우연적인 결과이다. ‘시계공’, 즉 누적적인 자연선택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장기적인 목표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4장. 진화의 갈림길
공학자에게 눈을 설계해 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시세포를 빛이 들어오는 쪽에 놓고 거기서 나온 정보를 전달할 신경을 시세포 뒤로 빼서 뇌로 연결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생각이다. 만약 시세포를 빛이 들어오는 방향의 반대쪽에 놓고 신경을 빛이 들어오는 쪽에 놓는다면 그런 엉터리 설계가 어디 있냐고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척추동물이 가진 망막의 형태다. 다시 말해 시세포가 신경 섬유의 뒤로 연결되어 있고 이 신경이 빛을 먼저 받는다. 이 신경은 망막 표면을 따라 이어져 어떤 한 점(맹점)에 모인 다음 망막을 뚫고 안구의 뒤쪽으로 나가 뇌로 연결한다. 빛이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시세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신경들의 숲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 기이한 눈의 형태가 물리 법칙에 맞는 적절한 형태로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실제의 진화 경로와 연관이 있다고 믿는다. 그 경로란 바이오모프의 나라에서 실제 생물과 동등한 것들을 통과하는 경로를 말한다. 눈의 기원이 되는 기관이 무엇이든 간에 거기서 출발하여 망막의 방향을 바른쪽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경로가 실제의 경로다. 그러한 경로가 아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상의 경로가 실제의 중간 생물의 몸에서 현실로 되었을 때, 그것은 불리한 것임이 판명될 것이다. 단지 일시적으로 불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진화를 방해하기에는 충분하다. 중간 종은 그들의 불완전한 조상들보다 시각이 뒤떨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장차 먼 후손을 위해 더 나은 시각을 만드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당장의 생존과 번식이다.
5장. 유전자의 힘
아마 생물은 진동하고 맥동하며 자극에 반응할 것이다. 또 ‘살아 있는’ 온기를 가지고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질은 모두 부수적으로 생긴 것이다. 모든 생물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불도, 따스한 호흡도, 생명의 불꽃도 아니다. 그것은 정보, 언어, 지시문이다. 생명을 이해하려면 10억 개에 달하는 불연속적인 문자를 생각하라. 생명을 이해하려면 맥동하는 겔(Gel)이나 연니가 아닌 정보 기술에 관해 생각하라.
유전자의 정보 저장 기술은 디지털 방식이다. 이 사실은 19세기 그레고어 멘델이 발견했다. 비록 그가 이런 식의 설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멘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자손의 몸에서 잉크와 물이 섞이듯 뒤섞여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자손은 부모로부터 여러 가지 유전자를 받을 때, 그것들을 구분하는 입자의 형태로 받는다. 각각의 입자에 관해 말하자면 자손은 그것을 물려받든지 물려받지 못하든가 둘 중 하나다.
종이 다르면 주소 체계도 다르다. 예를 들면 사람은 46개의 염색체를 갖고 있는 데 반해 침팬지는 48개를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종 간에는 주소 체계가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주소별로 내용을 비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유연관계가 매우 가까운 종들, 가령 인간과 침팬지는 같은 주소 체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 공통된 내용들이 몇 개씩 뭉쳐 있는 부분들이 있다. 구성원 전체의 DNA가 같은 주소 체계로 되어 있는 집단을 종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구성원이 같은 수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염색체의 길이 방향으로 구획된 모든 장소는 개체들 간에 서로 대응하며, 대응하는 장소에는 같은 번호가 붙어 있다는 말이다. 같은 종에 속하지만 구성원 간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그 장소에 들어있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화는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DNA의 각 저장 장소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내용 중 어떤 것이 득세하는가하는, 유전자의 빈도 변화에서 비롯된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내용들은 어느 때건 개체의 몸속에 들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집단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대립 유전자들의 빈도 변화이다. DNA의 주소 체계는 그대로 보존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저장 장소에 들어있는 내용의 통계적인 수치가 변화하는 것이다.
DNA의 정보가 전달되는 두 가지 경로, 즉 수직적 전달과 수평적 전달 간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DNA 정보는 정자나 난자를 만드는 세포의 DNA로 수직적으로 전달된 다음에 다음 세대에게 전달된다. 또한 ‘옆으로’, 즉 수평적으로도 전달된다. 생식 세포가 아닌 세포, 예를 들면 간세포나 피부세포 따위에 전달되고, 그러한 세포들 속에서 다시 RNA에 전달된다. 그다음 단백질에 전달되고, 그 결과 배의 발생 과정에 따라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최종적으로 성체의 형태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수평적 전달과 수직적 전달은 ‘발생’이라는 프로그램과 ‘생식’이라는 프로그램에 각각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종 전체의 보존용 DNA 속에서 수직적으로 전달되는 것 자체가 궁극적으로 성공이지만, 성공의 평가 기준은 대개 유전자가 수평적 전달을 통해 신체에 어떤 작용을 나타내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컴퓨터 바이오포프와 똑같다. 가령 호랑이의 몸속에 있는 특정한 유전자가 턱 세포에 수평적 영향을 미쳐서 경쟁 유전자보다도 더 날카로운 이빨을 만들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는 보통의 호랑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냥감을 물어 죽일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
DNA 복제 과정에는 여러 가지 ‘실수 수정’ 공정이 개입되어 있다. DNA의 암호가 돌에 새긴 상형 문자와 같이 안정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이 과정은 더욱 필요하다. 오히려 거기에 관련된 분자들이 너무 작기 때문에(수천권의 신약 성경이 1개의 피 머리에 올라갈 수 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열 운동을 하는 다른 분자들과 부대끼고 있다. 메시지의 글자를 뒤바꿀 수 있는 끊임없는 유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세포 속에서는 하루에 대략 5000개의 DNA 문자가 사라지지만 수리 메커니즘을 통해 즉시 복구된다. 수리 메커니즘이 존재하여 끊임없이 작용하지 않으면 메시지는 조금씩 사라질 것이다. 새로 복제된 DNA의 내용을 검토하여 틀린 곳을 수정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리 과정에 속하는 특수한 경우뿐이다. DNA의 뛰어난 복제 능력과 정보 저장 능력은 주로 이 수리 메커니즘 덕분이다.
개체는 단지 DNA가 그들의 천문학적인 수명중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짧게 거처하는 일시적인 용기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존재 방식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쉽게 생겨날 수 있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 이슬과 같은 존재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쉽게 생겨날 수 없지만 일단 한번 생겨나면 오래 가는 바위와 같은 존재방식이다. DNA는 두 가지 존재방식 모두에 있어서 탁월하다. DNA 분자 자체는 물리적 성질이 이슬과 같다. 조건만 갖춰지면 매우 빠른 속도로 생겨난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대부분이 몇 개월 안에 망가질 것이다. 바위와 같은 내구성은 없다. 하지만 DNA가 갖고 있는 문자들의 배열 형태(정보)는 가장 단단한 바위와 같은 내구성이 있다. 그 형태는 수백만 년을 버틸 수 있고, 바로 그것이 DNA가 오늘날 존재하는 이유이다. DNA와 이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슬은 새것이 낡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슬이 다른 이슬을 닮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특별히 자신들의 부모 이슬을 닮은 것은 아니다. DNA 분자와는 달리 이슬은 족보가 없다. 따라서 어떤 정보를 전달할 수 없다. 이슬은 저절로 만들어지지만 DNA의 정보는 복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6장. 생명 탄생의 기적
케언스스미스는 지구에 출현한 최초의 생물은 스스로를 복제하는 규산염 같은 무기 결정에 바탕을 둔 존재라고 믿는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기물 복제자, 즉 DNA는 나중에 그 역할을 넘겨 받았거나 찬탈한 것이 된다. 그는 이 넘겨 받음에 대한 생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제시했다. 가령 돌로 만든 아치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은 상당히 안정된 구조물이어서 돌들을 붙여 주는 시멘트 없이도 수년 동안을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다. 진화를 통해 어떤 복잡한 구조를 만드는 것은 모르타르 없이 한 번에 1개씩 돌을 쌓아 올려 아치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그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다. 아치는 마지막 돌까지 제자리에 끼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안정된 상태가 되는 것이지 그 중간 상태는 불안정하다. 그렇지만 돌을 끼워 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빼낼 수도 있다면, 아치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마찬가지로 DNA와 단백질은 모든 부분이 동시에 존재할 때에만 지탱할 수 있는 안정되고 우아한 아치의 두 기둥이다. 따라서 초기에 어떤 받침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해야지, 그러지 않고 그것들이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생겨났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케인스스미스는 최초의 복제자가 진흙이나 점토에서 발견되는 무기물의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결정이란 원자나 작은 분자가 고체의 상태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것을 말한다.
7장. 건설적인 진화
자연선택은 무언가를 제거하기만 할지도 모르지만 돌연변이는 무언가를 부가할 수 있다.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결합하는 방법 중에는 오랜 지질학적 시간 동안 삭제보다 부가를 많이 함으로써 복잡성의 구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서로 ‘적응한 유전자형’이고 다른 하나는 ‘군비 확장 경쟁’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공진화와 서로에게 환경이 되는 유전자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유전자들은 항상 자신들이 포함되어 있는 환경 속에서 번성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선택된다. 환경이라고 이야기할 때면 흔히 포식자와 기후를 포함한 외부 세계를 떠올리게 되지만, 각각의 유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환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각 유전자가 만나는 다른 모든 유전자이다. 그렇다면 유전자는 어디에서 다른 유전자를 만나는가? 대부분은 그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는 개체의 세포들 속에서이다. 각각의 유전자는 몸속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다른 유전자의 집단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가에 따라 선택된다.
유전자 자신이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오직 유전자 풀 속에서 생존하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할 뿐이다. 진화하는 것은 유전자의 팀(team)이다.
살을 베어 무는 데 적합한 이빨을 만드는 유전자는 고기를 소화하는 데 적합한 창자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유리하게 된다. 역으로 식물을 으깨기 좋은 이빨을 만드는 유전자는 식물을 소화하는 데 적합한 창자를 만드는 유전자가 우세한 상황에서 유리해질 것이다. 어느 특정한 계통이 일단 풀보다 고기를 잘 처리하는 유전자 팀을 구축하기 시작하면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강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생물계는 기본적으로 박테리아와 그 밖의 세포로 나뉜다. 우리는 그 밖의 쪽, 즉 진핵 생물이라 총칭하는 그룹에 속한다. 우리와 박테리아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의 세포 내부에는 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세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세포들에는 염색채를 포함하고 있는 핵, 복잡한 막 속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라 불리는 소형 폭탄처럼 생긴 물체 그리고 식물의 (진핵) 세포에서 발견되는 엽록체 등이 있다.
군비 확장 경쟁은 개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적 시간 척도에서 진행된다. 그것은 한쪽의 계통(예를 들어 포식자)이 진화시킨 장비의 개선에 따라 직접적인 결과로 다른 한쪽의 계통(피식자)이 살아남기 위해 장비를 개선시키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연선택이 건설적인 힘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아보았다. 하나는 종 내의 유전자 사이의 협동 관계와 관계가 있다. 우리가 토대로 삼은 기본적 가정은 유전자는 이기적이어서 유전자 풀 내에서 자신의 수를 늘리는 데 주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를 둘러싼 환경은 역시 같은 유전자 풀 속에서 선택된 다른 유전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동일한 유전자 풀에 있는 다른 유전자와의 협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만이 그 유전자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따라서 공동의 협동 목적을 향해 수미일관 작업을 수행하는 거대한 세포체가 진화하게 된 것이다. 서로 분리된 자기 복제자들이 아직까지도 원시 수프 속에서 싸움을 하는 대신 거대한 몸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몸이 통합되어 일관된 합목적성을 진화시킨 것은 유전자가 같은 종내의 다른 유전자가 제공한 환경 속에서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다른 종의 다른 유전자가 제공하는 환경 속에서도 선택되기 때문에 군비 확장 경쟁이 전개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진보적이고 복잡한 설계라고 인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를 나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원동력이 된다.
8장. 폭발과 나선
수컷이든 암컷이든 모든 개체는 수컷에게 특정 성질을 가지게 한 유전자와 암컷에게 그와 완전히 똑같은 성질을 가지게 한 유전자 양쪽을 모두 가질 가능성이 높다. 즉 수컷의 성질에 관여하는 유전자와 암컷에게 그 성질을 좋아하게 만드는 유전자는 개체군 속에 제멋대로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연대해 있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암컷은 실용적인 최적값보다 긴 꼬리를 좋아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긴 꼬리를 좋아하는 암컷이 매우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훌륭한 설계라는 판단 기준보다 긴 꼬리라는 패션에 민감한 라이벌 암컷은 설계의 측면에서 비효율적이고 형편없는 비행 기술을 가진 새끼를 낳을 것이다. 반면 짧은 꼬리의 수컷을 좋아하고, 패션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는 돌연변이 암컷이나, 특히 우연히 실용적인 최적값과 일치하는 길이의 꼬리를 좋아하게 된 돌연변이 암컷은 비행에 적합하게 설계된 비행 효율이 높은 후손을 낳고, 그 후손은 패션에 더 민감한 라이벌 암컷의 자식과의 경쟁에서 확실히 우위에 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돌연변이 암컷의 자식은 훨씬 효율적으로 비행할지는 모르지만, 개체군의 대다수를 이루는 암컷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극히 소수의 암컷, 즉 패션에 무감각한 암컷의 관심밖에 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수파의 암컷은 수가 적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당연히 다수파의 암컷에 비해 찾기 어렵다. 교미가 가능한 여섯 마리의 수컷 중에서 단 한 마리의 수컷만이 큰 하렘을 차지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는 다수파에 속하는 암컷들이 좋아하는 방향을 추종해야만 큰 이익을 누릴 수 있다.
9장. 구멍 난 단속평형설
진화생물학자들 내부에는 폭넓은 선전이 이루어진 일파가 있는데, 그 주창자들은 자식을 단속평형자론이라고 부르며 가장 영향력있는 이전 세대의 학자들에게 점진론자라는 딱지를 붙여 놓았다.
대돌연변이가 유리할 것인지, 즉 그것들이 진화적 변화의 토대가 될 것인지 여부에 대한 논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돌연변이가 어느 정도 큰 가에 대한 논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돌연변이가 크면 클수록 유해하고 그에 따라 어느 종의 진화에 결합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실제로 유전학 실험실에서 연구되는 거의 모든 돌연변이는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의 입장에서는 유해하다.
작은 개조가 수없이 거듭되는 것으로도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어떤 복잡한 기관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나의 이론은 붕괴할 것이다.
10장. 진정한 생명의 나무는 하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류 체계 중에서 실제로는 단 하나의 유일한 체계가 존재한다. 유일하다고 부르는 것은 완전한 정보가 주어질 때에 그 체계에 대한 완벽한 의견 일치를 통해 옳다, 잘못이다. 또는 참이다. 거짓이다. 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유일무이한 체계란 진화적 관계에 토대를 둔 체계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체계를 부를 때는 생물학자들이 가장 엄밀하게 부여한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분지분류학이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박테리아는 외형상 서로 달라 보여도, 분자적인 기반에까지 내려가 보면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것은 유전 암호 자체에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유전자의 사전은 각기 세 가지 문자로 이루어진 64개의 DNA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단어 하나하나에는 각기 단백질 러너의 정확한 단어가 대응한다.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는 생물은 모두 오직 하나의 선조로부터 유래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자의적일지라도 64개의 DNA 단어 하나하나까지 거의 동일한 유전자적 사전을 그 선조로부터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