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은 제27대 충숙왕과 제1비인 고려인 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이었
다. 장남인 제28대 충혜왕에 이어, 충혜왕의 두 아들이 제29대 충목왕과 제30대 충정왕을 역임했었
다. 공민왕 역시 11세 때부터 연경에 볼모로 잡혀가 성장했는데, 왜구가 활개를 치며 온 나라를 노략
질하고 다니는데도 충정왕이 너무 어려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자 원나라 황제가 21세인 공민왕에
게 보위를 내려주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1351년 12월, 연경에서 결혼한 원나라 공주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귀국했다.
공민왕은 조정의 실태를 파악한 뒤 1352년 3월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충정왕을 사사하고 그 측근
들도 대거 숙청하는 등 그 동안 누적되어 있던 고질적 적폐들을 청산하기 시작했다. 공민왕이 즉위했
을 때 고려와 마찬가지로 원나라도 전국에서 홍건적의 봉기가 일어나 제국이 흔들리고 있었다. 공민
왕은 한동안 나라 안과 조정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1352년 2월, 공민왕은 그때까지
존속하며 사사건건 국정에 개입하고 있는 정방을 폐지했다. 1225년 무신정권의 우두머리 최이가 설
립했던 최고 행정기관이었다.
공민왕은 1352년 3월 개혁교서를 반포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본격적으로 혁신에 착수했다. 원나라의
여러 제도와 풍속을 일신하고 고려풍을 되찾는 것도 중요한 혁신과제였다. 공민왕은 자진해서 변발
을 자르고 헤어스타일을 고려 식으로 바꾸었으며, 몽골 복장 대신 고려의 옷을 입고 고려의 미풍양속
을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 그 동안 원나라 감독관들의 눈치만 보던 중신들도 기꺼이 왕을 따라 고려
의 복색으로 바꾸었다. 공민왕은 백성들에게도 몽골풍습 추종을 금지시켰다. 관제도 제11대 문종 대
의 고려관제로 바꿔나갔다.
1356년에는 내정간섭의 중심지인 정동행성과 원나라 연호를 폐지했다. 제 누이 기황후만 믿고 상왕
노릇을 하던 기철과 그 측근들도 모조리 숙청했다. 8월에는 원나라 다루가치 벼슬에 있는 여진족 이
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의 협조로 쌍성총관부를 없애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탈환했다. 1258년 원나라가 설치했던 쌍성총관부는 고려를 지배하던 통치기구였다.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는 일족과 함께 고려로 귀화했으며, 공민왕은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서 그에게 소부윤 벼
슬을 내렸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토지제도와 노비 문제였다. 토지와 노비는 국가재정의 핵심이자 양반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 무신정권 100년과 원나라 지배 100년 동안 권력자들은 모든 정책을 자신에게 유
리하도록 바꾸어 토지와 노비를 마음대로 나눠가졌다. 무신정권의 잔당들과 원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은 중신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저항했지만 공민왕은 원래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이 정책은 13
66년 중 신돈의 기획으로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완전히 정리되었다. 중신들이 불법으로 획득
한 토지는 국고로 환수하거나 원소유주에게 반환했으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은 면천하여 원
래의 신분으로 복귀시켜주었다.
1352년 8월에는 각 부처에서 따로따로 전결‧처리하던 모든 판결송사를 5일마다 왕의 재가를 거쳐 실
행하도록 법령을 바꾸었다. 각 부처 선군도관들의 독단적인 처결을 금하여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왕의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조치였다. 같은 달, 공민왕은 무신정권 이후 폐지됐
던 서연(書筵)을 재개하여 모든 국사를 왕이 주재하는 어전회의에서 활발하게 토론하도록 명했다. 이
자리에서 그 동안 권력자들끼리 나라와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무고한 양민들을 잡아다 노비로
부린 일들이 밝혀져 토지를 몰수당하고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학문이 깊은 원로들이 왕에게 경서‧
사기‧예법 등을 가르치는 제도도 부활했다. 이러한 모든 논의는 문서로 기록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공민왕의 배원(背元) 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나라는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토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
다. 이에 공민왕은 서북면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개경 주위에 외성을 쌓아 적침에 대비했다.
이때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홍건적이 세력을 넓혀가자 원나라는 고려에 화해를 요청했다. 1355년 홍
건적은 송나라를 세우고 요동으로 진출했으나, 원나라가 강력하게 저항하자 고려로 기수를 돌렸다.
1359년 홍건적은 4만 군사로 압록강을 건너왔다. 양국 군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홍건적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유린했다.
1361년 10월에는 홍건적이 10만 군사로 2차 침입을 감행했다. 개경이 홍건적에게 점령당하자 공민왕
은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까지 몽진했다. 주흘산 중턱에 있는 혜국사에도 이때 공민왕이 잠시 피난했
던 시절의 일화가 얽혀 있다. 1362년 1월, 고려군은 20만 병력으로 홍건적을 압록강 건너로 몰아냈다.
홍건적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개경을 비롯한 전국 각지는 이미 초토화된 후였다. 궁궐이 전소된 터라
공민왕은 죽주와 진천에서 행궁생활을 하며 전쟁의 참화를 몸소 겪었다. 공민왕은 배원정책을 환화
하여 정동행성을 복원하고 원나라 관리들을 상주시키면서 여러 가지 정책적 협조를 이끌어냈다.
1365년 2월, 출산 중이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아이와 함께 죽었다. 가뜩이나 전란에 시달리며 심약
해져 있던 공민왕은 완전히 실의에 빠져 중 신돈에게 국사를 일임하고 주색잡기에 빠져들었다. 일개
중이 국사를 좌지우지하자 중신들의 반발이 자심했지만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신임은 확고했다. 그
러나 신돈이 왕조차 우습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자 1371년 7월 공민왕은 신돈과 그의 추종자들을 모
조리 처형했다. 그러나 공주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는 못해 공민왕은 개혁군주의 의지를 완전히 상
실한 채 주색잡기로도 모자라 남색에까지 빠졌다.
1374년 9월, 공민왕은 대취하여 잠자던 중 역도들에게 암살당했다. 천수 44세, 재위 23년 만이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를 비롯하여 여섯 왕비를 두었다. 그 중 제6비 반야가 낳은 우가 제32대 우왕
에 올랐다. 반야는 중 신돈의 첩이었는데, 공민왕이 후사를 걱정하자 후궁으로 내주었다. 후궁으로
입궐할 때 반야는 이미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이
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한 얘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느 쪽 주장이
맞든, 1365년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공민왕이 국정 수행의지를 상실하면서 고려는 실질적으로 막
을 내린 셈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