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13일 선택형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는 고3 학생들. 2014학년도 수능시험부터 국·영·수 세 과목을 A·B형으로 나눠 시험을 치른다. photo 조선일보 DB |
교육과학기술부가 2011년 선택형 수능 제도를 도입하면서 밝힌 취지는 수험생이 자신의 학력 수준과 진학할 대학의 계열 등에 따라 난이도를 선택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모든 학생이 같은 난이도의 시험을 치르느라 생긴 부담을 줄이고 더불어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 선택형 수능을 그대로 실시해도 되겠느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교과부는 지난 3월 29일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행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예정대로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수험생과 학부모는 물론 일선 학교 현장과 대학 입학처에서까지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재수생 아들을 둔 학부모 최미선(52)씨, 고3 딸이 있는 학부모 윤민옥(45)씨도 수능 시험을 불과 200일 정도 앞두고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과 함께 찾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선택형 수능에 대비해 사교육 업체를 알아보는 학부모들로 붐볐다. 한 수학전문학원의 상담실은 이미 만원. 20분을 기다린 끝에 ‘상담실장’과 상담을 할 수 있었다.
“따님은 인문계니까 수A(수학 A형)라고 무조건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에요. 어느 유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점수도 달라지고 등급도 달라질 거거든요. 학교에서는 수업을 이끌고 나가는 것도 벅찬데 답은 학원밖에 없어요.” 아무리 들어도 바뀐 입시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던 윤민옥씨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시험 접수하기 전까지는 성적이라든가, 다른 학생들이 어떤 유형을 많이 선택하는지를 보고 옮겨갈 수도 있거든요. 3월 시험 치고 B형에서 A형으로 옮긴 학생이 저희 학원에서만 5명이에요.”
상담실장은 작년과는 아예 다른 시험 방식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최미선씨에게는 “재수생이야말로 학원은 필수”라며 밀어붙였다.
최미선·윤민옥씨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자 컨설턴트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모의고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상담을 해주고요, 방학 때 길게 한 번 상담 시간이 있어요. 수능까지 7개월 코스 다 해서 180만원이에요.”
컨설턴트는 유명 업체보다 10% 정도 저렴한 비용이라 자랑했지만 실상 컨설팅 횟수는 6번. 한 번에 30만원이 드는 가격이다.
온종일 대치동 학원가를 돌아다니며 최미선·윤민옥씨는 국어·수학·영어를 전문으로 하는 보습학원과 입시컨설팅을 등록했다. 총 비용은 255만5000원. 그마저도 컨설팅 비용 180만원을 제외한 75만5000원은 매달 들어가야 하는 돈이다. 최미선씨는 “아들이 수학이 약해서 작년에는 수학학원만 등록했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모르니까 학원 세 군데를 다 다녀야 해서 부담이 커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윤민옥씨는 “큰아들 수능 치르고 나서 ‘다시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다시 대치동에 왔다”며 “앞으로 들일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솔직히 세상이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전국진학지도협의회장 이성권 교사(대진고)는 학부모들의 불안과 관련해 “선택형 수능은 정상적인 진학지도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선택형 수능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A형, B형을 선택하느냐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눈치작전을 펼 수밖에 없어요.”
등급제로 평가되는 수능은 모집단의 4%까지 1등급, 11%까지 2등급 등으로 나뉜다. 선택형 수능 제도 아래에서는 A형과 B형에서 각각 등급을 결정하는데, 국어 A형을 치는 학생이 10만명이라면 1등급 학생은 4000명이 된다. 이성권 교사는 여기에서 복잡한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중상위권 대학의 수시 전형에는 수능 최저 등급을 넘겨야 한다는 기준이 있죠. 수시 전형을 노리는 학생들은 어느 유형을 치르느냐에 따라 합격 여부가 좌우될 수 있어요.”
아무리 수능이 상대평가라고 할지라도 60만명 중의 4%와 10만명 중의 4%는 다르다. 게다가 우수한 학생들이 어려운 B형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중상위권 수험생의 경우 자칫 한 문제만 틀려도 등급이 추락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또 많은 대학에서 B형을 선택하는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준다. 서울시교육청이 3월 치른 전국연합학력평가 통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전체 응시자 52만8367명 중 87.2%인 46만999명이 영어 B형을 선택했다. 이 상황에서 중하위권 수험생에게 A형을 선택하는 것은 모험이 될 수도 있다. 입시전문가들조차 “6월에 있을 모의평가 결과를 보고 A형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일부 대학의 경우 가산점 비율이 영역별로 5%에 불과해 쉬운 A형을 쳐 점수를 높이는 것이 가산점을 받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계산도 있다.
이러다 보니 쉬운 수능으로 침체기에 빠졌던 학원가는 다시 활기를 되찾는 분위기다. 서울 양천구 목동 A 영어학원의 원장은 “올해 들어서만 학생 수가 20% 늘었다”며 “대부분 고3 학생인데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심화영어회화 과목을 배우러 오는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입시컨설팅 업체가 호황을 누리고 있어 기자가 직접 만난 입시컨설턴트는 “요즘 대치동에서 ‘입시컨설팅’을 내세우지 않는 학원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각 영역 전문학원을 비롯해 논술학원에까지 입시컨설턴트가 상주하고 있었다. 대개 1회 상담에 10만~30만원을 요구했고 기본 3~6회는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입시전문업체 하늘교육이 지난 1월 학부모 10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학부모의 1.9%만이 ‘선택형 수능이 사교육비를 줄였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사교육비가 늘었다’는 응답은 36.4%, ‘그대로’라는 응답도 61.7%에 달했다.
한 입시전문기관은 서울 지역 174개 고등학교 중 영어 B형의 출제 범위인 심화영어회화 과목을 개설하지 않은 학교가 108곳에 달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교과부는 곧바로 반박 자료를 내고 “전국 고교의 86%가 영어 B형 과목을 교과 과정으로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학교 현장의 분위기는 다르다.
무엇보다 근 10년간 큰 틀만 10차례 넘게 바뀐 수능 제도에 A·B형이 도입되면서 갈수록 객관성을 잃게 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성권 교사는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능 제도가 타당성과 신뢰성을 가지는 일”이라며 선택형 수능이 가져올 부작용을 염려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온전히 ‘운’으로 시험 성적을 받을 수도 있다”면서 “시험은 객관적인 측정 도구가 돼야 한다. 그런데 선택형 수능이 도입되면서 수능시험 자체가 전략적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1월 10일에는 고려대·연세대·서강대·성균관대 등 서울 지역 9개 사립대 입학처장들이 공동 성명서를 내고 “선택형 수능 시행을 유보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성명서에서 입학처장들은 “학생이 교육 실험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며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대입 전형에 혼란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에 대해 김윤배 성균관대 입학처장(시스템경영공학과)은 “선택형 수능이 도입된 취지는 좋지만 달성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입시 현장에서의 혼란도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고교 서열화를 불러와 공교육 정상화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김 처장은 “B형을 선택하는 학생 수에 따라 학교가 서열화될 수 있다”며 “사교육 시장으로 유입되는 학생 수가 늘어날 뿐 아니라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과부는 이미 3년 전에 예고한 제도인 만큼 예정대로 시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송선진 교과부 대입제도과장은 “2009년부터 1년 넘게 정책 연구를 거쳐 2011년에 발표한 사항”이라며 “그동안 대입정보 설명회를 개최하고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성 컨설팅을 진행하는 등 준비를 해 왔다”고 말했다. 최창완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입학전형지원실장도 “2011년 고1부터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돼 2014년 수능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수능 체제 개편은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교과부 입장을 뒷받침했다. 오히려 수능을 얼마 앞두지 않은 지금 입시전형을 재조정한다면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며 “대대적인 설명회와 상담, 교사 연수 등을 통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하도록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