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적인 신앙(서론)[행 1:1-3]-1강 |
행 1:1-3까지를 보면 사도행전이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로 쓰였는가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나온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요즘 교회들의 큰 흐름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그 때와 같은 순수한 신앙과 열정과 그리고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승리를 다시 한 번 더 구가하자는 것이 초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사도행전에 있었던 내용들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이 기록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행한 기적들, 승리로운 업적들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1:1을 보면 알 수 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
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 1:1-2)”
누가복음 1장에 가면 전에 쓴 글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
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
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
이로다(눅 1: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동일인이 썼다. 처음에 쓴 것은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심을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 후의 일이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
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해 받으신 후에” 지금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끝이 아니고 그것은 어떤 큰 일의 한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 아직도 남겨 두신 일이 있기에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명하셨다. 또 사도들에게 그 일을 확신 속에서 하게 하기 위하여 부탁했었노라 여기 서문에 쓰고 있다. 그 나머지는 그 일이 어떻게 진전되어 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서두의 말씀으로 우리 신앙의 아주 중요한 부분 하나를 조금 수정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정적인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 정적인 신앙은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으니 주께 무엇이든지 기도 하면 응답받고 문제 해결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신앙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설명해 나가는 시각이 어떤 시각인가 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나의 모든 필요와 위기와 곤란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면 응답받는 자가 되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 일의 궁극적인 목적 중의 하나가 우리를 죄에서 꺼내서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완성해 나가는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사상이다.
두 신앙은 확실히 다르다. 정적인 신앙을 가지면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내가 요구하는 목표가 있고 그 일에 하나님이 도우시는 이로 등장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그에 반해 동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인 것과 함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계획 속에 우리가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와 방법과 필요가 내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정되고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서 나의 변화라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싸움거리가 된다. 3절을 다시 보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을 증거하시는데 그러니까 부활하셨다는 것을 무엇의 근거로 삼으시며 무엇에 대한 증거로 삼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기 위해서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의 부활이 결국 이제 도래할 하나님이 이루시고야 말 영원한 목적, 궁극적인 목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부분일지언정 ‘그것이다’라고는 이야기 안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은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완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 꺼내 놓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전부라고 하지 않으신다. 아직 남아 있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육체적 부활이 있으며 영원한 나라가 있으며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야 할 것이며 거기서 그리스도와 우리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살아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을 하나님이 혼자서 다 하시지 않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해 낸 우리들과 함께 이루어 가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완성하고 계시며 그 나라에 우리를 부르신 것과 같이 또 더 많은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 일을 우리가 가서 전도해서 불러오게 하신다. 우리에게 우리 피를 흘리며 우리가 무릎꿇어 기도하게 함으로써 그 나라를 만들어 가신다. 우리는 물론 실력없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왜 그토록 많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구약 성경은 거의 모두가 역사서이다. 신약도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쓴 전기이면서 일종의 역사서이다. 사도행전이 역사서이고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관한 역사서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목표를 가지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그렇게 멋지게 등장하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지 그의 끝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논쟁을 벌이며 잠자다 떨어져 죽은 청년을 살려 놓고 뱀에 물렸는데도 죽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가 또 잡혀간다. 그러다가 사도행전 28:30을 보면 끝이 시시하게 끝난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
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것이 엄청나게 시작했던 사도행전의 끝이다. 성령강림으로 엄청나던 장면들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용두사미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사도행전에서 그리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고 스데반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어떤 거대한 작품의 일부분을 조명하는 중에 어느 한 부분을 보이면서 그 일에 쓰임받는 사람들을 그 장면에 비춘 것에 불과하다.
베드로를 추적하고 바울을 추적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 나라를 만드시며 그 나라에 우리를 복된 시민으로 부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시키시며, 그래서 불러들인 그의 백성과 함께 그 나라를 확장하사 또 부르신 자들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여 더 넓고 더 크고 완전하게 하나님 나라를 키워가고 있느냐를 보이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내 남은 생애 속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를 봐야 한다. 내가 세상에서 취하고 싶은 목표와 계획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도와 주셔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 남은 생애를 통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 뜻을 위하여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가에 대해 늘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들어 있는 사도들의 신앙을 추적해 보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공통적인 핵심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목표를 두고 역사를 진전시켜 가시며 일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는 역사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
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
하라(딤후 4:1-2)”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면면이 이어 오시며 확장하시며 언제나 역사를 주도하고 끝내며 영원한 거룩한 역사로만 종결지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그 역사에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고 함께 몰입하고 둘을 접붙여 버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사도들이 가졌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는 그들이 이제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요 자녀요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그 나라가 도래한 다음에 황금 보석으로 꾸민 집에서 죽은 다음에 받은 것으로만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시니까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꼭 봐야 하는 것이다. 거기는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도 가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황금보석 집이 아니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해함도 상함도 없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짓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부름받아 벽돌을 나르고 삽질을 하고 모래를 나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기쁨이다. 그 기쁨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
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바울이 이것을 기뻐함은 나를 대접해 줘서가 아니다. 남보다 낫다고 인정해 줘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에 붙여줬다는 것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실패로 이런 식의 설명이 나온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
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0-41)”
하나님이 이 일에 붙여주는 것으로 해서 매를 맞는 것도 기뻐한다고 했다. 이 완성되어질 나라, 꼭 생겨질 나라에 우리를 붙여줬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그 나라에 소속하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완성하는 일에 붙여준 것이다. 그것을 기뻐했다.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내가 어떻게 남과 다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롭고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그가 이루어내실 이 나라는 얼마나 확실한 나라인가,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나라를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만드는 일에 우리를 붙여줬다는 것이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관은 이렇게 바뀐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
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
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
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
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지금 사도 바울은 죽고 사는 문제에 전혀 개인적인 차원에서 욕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삶이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주께 유익하면 죽는 것이고 사는 것이 유익이면 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들어보니 앞을 못 가리는 양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것이 주께 유익이므로 산다고 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사도들의 행적,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근거, 신앙, 목표 원리의 전부이다. 사도행전의 원래 기록 목적이 저들이 주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 나라를 준비하고 계신다. 거기에 우리를 시민으로 자녀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 복된 나라의 건설에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능력이 많아서,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이 그 일을 못하시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대접해 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동등히 대접해 주고 계신다. 놀라운 대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신다는 것과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사도들이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높고 전지전능하심과 그가 준비하시는 그 엄청난 영광과 계획을 보고 놀라는 동시에 그 일에 부름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과 고난을 감당하게 했으며, 하나님 앞에 부름받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이 기쁨에서 그 무엇도 저들을 실족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깨우치기로 하자. 그리고 사도행전은 결코 베드로나 스데반이나 바울을 높이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방불한 사람들이 그렇게 멋있게 변화되어졌다는 증거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가능한 얘기라는 것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이 축복들이 특권들이 이런 자리에까지 성숙되어 열매 맺기를 기대하며 이 말씀을 대하기로 하자.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1)[행 1:4-5]-2강 |
성경에는 메시야가 오신다는 대망사상, 큰 기다림이 있다. 이것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약속과 성령이 임하신다는 약속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약속 속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봐서는 하나고 작게는 둘로 나눌 수도 있다.
인류가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에 창 3:15에서 하나님은 이미 여자의 후손에서 인류를 구원할 자가 오실 것을 약속하신다. 성경은 주님의 오심을 두번에 걸쳐서 설명한다. 첫째는 영적인 차원에서 자녀들의 영적인 회복과, 둘째는 역사적인 회복이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렇게 주님께서 이 세상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거룩한 나를 새로 완성하시며 죽음이 없고 해함이 없는 나라를 시작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성경은 주님께서 오신다는 구약과, 오셨다는 복음서, 그 다음 사도행전에서는 승천하신 이후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주셨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언된 인류 미래사는 아직도 다 완성되지 않았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그 사이에 성령께서 강림하여 모든 신자의 마음 속에 임재하시는 사건이 여기에서 약속되었는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실현되었다.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 모두 안에 실제로 성령님께서 내재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는 우리가 거기서 살 집을 짓고 먹을 우물을 파고 다닐 길을 파는 것 이상으로 거기서 살아야 할 백성다워지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과제이다. 그 곳에서 살아야 될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흠도 점도 주름잡힌 것도 없는 자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붙잡고 있는 이 죄와 사망의 권세자를 깨뜨리기 위한 작업을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주인을 깨부수고 우리를 거기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
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
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
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우리는 마귀에게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었다. 구원이라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물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켰다는 사실이다. 내 자녀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외적 조건의 개선으로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내적 조건이 성숙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바로 성령강림이 갖는 가장 커다란 목적이 등장하게 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
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
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1-33)”
이것이 그 유명한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이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은 내용상에 있어서는 전혀 변화가 없다. 차이는 방법에 있다. 옛날에는 약속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외적 조건을 완벽하게 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내용은 같아도 내적 조건을 바꾸는 방법으로 달리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 방법이 성령의 내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
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
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
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하자 하나님은 에덴에서 추방하시고 그 길목을 화염검으로 막았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기 위한 방법이었다. 범죄한 것은 인간인데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다. 그 화해를 방해하는 모든 난관 또한 하나님 쪽에서 지금 해결해 나가고 계신 것이다. 찾아 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셨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난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
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
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
라(창 6:1-3)”
구약성경이 인간의 타락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두 가지 내용으로 말씀한다. 하나님이 계시던 장소로부터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의 끈이 끊기고 말았다. 우리에게 와 계시던 성령이 떠나가고 이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회복시키시는가를 보라.
내쫓기고 함께 있기를 거부당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셨다. 이것을 구약에 예언하셨고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
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
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8-30)”
하나님께서 말일에 하나님의 신을 충만히 부어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지금도 만들어 가고 계시고 완성하고야 말 것이라는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 일을 진행하는 중에 드디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성령님도 드디어 오셨다는 시각에서 평가해야 한다.
우리 앞에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루고야 말 것이며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져 가고 있는 동적인 신앙을 가지고 그런 의미의 진지함과 엄숙함,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
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
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
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
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
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
:50-58)”
우리는 결국 완성된다. 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완성하시고야 말 것이다. 그런데 신자의 갈등은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성경의 약속과 현실적인 나와의 차이에 있다. 그 공백의 자리가 성령이 등장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
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성령께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주된 대상인 우리를 그 나라에 걸맞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를 꺼내신 집념과 같이 능력과 지혜로 우리 자신을 내적으로부터 변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성령강림의 골자이다. 그가 보증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변화가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 쪽의 확인인 것이다. 하나님 쪽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실패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
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
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5-7)”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이 일을 시작하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결과를 이끌어 내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내게 와 계신 것으로 보아 실패가 아닌 성공한다는 증거로 삼고 성령님이 실제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
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롬 7:5-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
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
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
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
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
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9)”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시면 내가 그 성령을 좇느냐 안 좇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게 와 있으면 나는 영에 속한 자이고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 편에 선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자의 존재론이 나온다.
신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중 인격자이다. 자기 자신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존재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시는가 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것으로 나를 보신다.
하나님은 성령께서 하신 일을 그 분 혼자 하신 것으로 보지 않고 내가 같이 했다고 보아 주셔서 그것을 나누지 않고 성령을 나에게 보내셨기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기도, 생각, 한숨, 하신 일들을 내가 한 것으로 취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론이다. 실제로 성령은 우리를 대언하며 우리 대신 우리 몫을 하나님 앞에서 하시며 동시에 우리를 변화시켜서 성령이 우리를 전부 사로잡을 때까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
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
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
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
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
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
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6-11)”
예수 믿는 과정을 잘 살펴 보라. 예수를 우리가 언제 믿게 되었는가 하면 개인의 이성이 동의할 때부터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우리 마음에 오신 성령이 하나님 편을 들어서 신자가 된다.
생명은 무럭무럭 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와 계셔서 우리를 주장하시고 우리도 모르는 것을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시며 안타까와 하시며 우리 인생에서 사소한 부분까지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바꾸어 가고 간섭하고 인도해 가고 다듬고 완성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강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맺는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
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
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
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1-16)”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녀라는 신분과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가? 완성을 향한 놀라운 현실적인 과정이며 엄연한 사실임을 기억하고 다시는 절망하지 말자.
더 많이 항복하고 깨우침을 받고 우리의 모든 정성을 모아 성경이 요구하는 것과 같이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악에게 지지 말며 그 나라가 오기를 고대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우리가 우리된 복락들, 영광들을 다듬어 나가며 승리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자.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2)[행 1:4-5] |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시면서 사도들로 하여금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까지는 사역을 시작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왜 예수님은 성령강림을 약속하셨고 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일까? 성경이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것은 어떤 목적과 어떤 의미로 하고 있는 것인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이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기록한 말씀이다.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이 누가에 의하면 능력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사도들에게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약속하시고 성령강림 이후에 능력을 받고 나가서 그들의 사역을 완수했다고 하면 쉬운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그 사역을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성공으로 약속한 예는 없다. 구약이나 신약을 통틀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나가서 전파하고 깨우치는 사역자들의 사역이, ‘그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라고 약속되어 시행되는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
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
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
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
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8-10)”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기 위한 사역자로서의 일을 자청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고 보내시지만 보낼 때의 약속이 ‘네가 가서 하는 것을 아무도 못 알아 들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을 때 세상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
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
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
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누가 보아도 순교인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가 원치 아니하는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에게 주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사뭇 다르다. 성령강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간섭은 지금도 있고 또 있어야 마땅하고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약속 중의 하나이지만 그 뜻과 약속들을 우리 마음대로 오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에 관한 약속은 구약 요엘서에 예언되었던 일의 성취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
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8-29)”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
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 16:13-14)”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대한 깨우침, 진리에로의 인도, 진리 가운데서의 보호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엘서 2장의 말씀과 요한복음 16장의 말씀 가운데 공통분모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오심과 성령을 약속하신 가장 큰 목적을 진리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래 일이라는 공통된 단어가 등장한다. 우리는 위의 두 요절 가운데서 몇 가지 공통되는 내용을 추리해야 한다.
①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②그것은 진리와 연관이 있다.
③이 진리는 주님에 관한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성령강림을 약속하시며 제자들이 사역에 들어가기 이전에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를 능력에 두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능력이라는 것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추적해 보면 능력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장래 일과 진리에 대한 것으로 압축되었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된다. 이것을 차례로 살펴 보기로 하자.
능력, 진리, 그리스도 이 셋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밀접한 관계이며 같은 내용인지 모른다.
성경이 신자와 불신자를 나눌 때 이 진리라는 단어로 나눈다. 불신자는 진리에 의거해서 자신의 인생 목표와 방법을 삼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목표와 방법을 삼는 자이다. 신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깨우치는 것을 벗어난 진리와 절대와 영원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인생의 목표와 방법을 가지는 자라고 나눈다.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장과 같은 말씀이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3-15)”
여기서 불신자와 신자를 갈라놓을 때 불신자의 생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짓이다. 그들은 진리를 모르고 신자는 진리를 안다. 에베소서 4장을 보면 자명하게 밝혀진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
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
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인간은 원래 자기가 생각하고 경험하고 감각하는 테두리밖에는 생각할 줄 모른다. 거기서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정하고 어떤 성취가 있고 실패가 있다. 그러나 신자는 영원한 나라가 있는 것과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있는 것과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범죄했다는 사실과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다. 그것을 담당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 진리를 깨우치는 일이다. 그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내용 속에 있다. 진리가 곧 예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요엘서의 주장이나 요한복음 14장이나 16장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설명이 그렇게 나타나 있다. 요엘서에서 성령을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 너희 자녀는 장래 일을 말할 것이다.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장래 일이라면 우리가 70-80년 살고 죽는 이후의 일, 우리의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길이보다 더한 영원이라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역사와 영원이라는 나라가 있음에 대한 깨우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이가 꿈을 꾼다고 했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꿈을 버리게 된다. 그런데 요엘서에서는 분명히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면 늙은이가 꿈을 갖는다고 했다.
늙으면 늙을수록 더 많은 꿈이 생기는 것이다. 젊은이는 이상을 본다. 그가 상상하지 못했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약속하신 이유이다.
인생이 뭐냐, 세계가 뭐냐,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깨우침이 성경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시며 간섭하시기 위하여 성령이 약속된 것이다.
진리를 아는 자가 그의 인생과 시간과 노력이 누적되어 갈 수 있는 목표와 방향과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을 능력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은 우리에게 보내지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깨우침과 그 사실에 대한 현실적인 준비와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은 약속된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고 남과 비교하여 펄펄 뛰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남과 다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남을 허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간섭하게 하시고 우리가 뜻한대로 잘못된 결정이나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를 제어하시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고달픔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겪는 아주 신비로운 경험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바로 우리의 계획과 뜻과 욕심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도록 간섭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
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 8:
8:26-29)
성령이 빌립을 직접 좌우한다. 빌립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아는 바도 없고 예지한 바도 없고 필요성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른다. 성령께서 그를 강권하여 이 광야로 내보냈고 이 내시를 만나게 하신다. 그가 전혀 모르던 일에 그가 부르심을 받는다. 광야는 좋은 곳이 아니다. 성령은 그렇게도 역사하신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
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행 13:1-4)”
초대교회에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성령께서 간섭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보낸다. 초대교회에서 만일 사람들끼리 뽑았다면 아마 베드로와 요한을 뽑았을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성령께서 더 강하게 간섭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
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이때 만일 성령께서 막지 아니하셨다면 구라파보다 아시아가 문명이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성령께서 아시아로 못 가게 해서 결국 로마로 가서 유럽으로 복음이 먼저 전파되고 서쪽으로 돌아서 미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늦게 들어왔다.
성령께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선한 일이고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막으셨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성령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일단 없고 또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할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배워야 하며 거기에 있는 것을 습득해야 하며, 우리가 고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나의 삶과 존재와 나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부름을 받고 있다. 이 일을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치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사 우리에게 이 일을 넉넉히 하도록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일일 이루어졌다. 그렇게 기록된 성경이 사도행전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대하여 민감할 준비를 하며 민감하게 반응할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우리의 생각에 민감하고 우리의 욕심에 훨씬 많이 사로잡힌 자들이다. 내 욕심에 사로잡히면 종교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열심을 부리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께서 이제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우리로 장래를 내다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서 우리에게 깨우치사 우리를 그리스도의 뒤를 좇는 자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바울에게 성령강림을 허락하시고 방언을 하게 하시며 기뻐 뛰게 하시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하셨지만 그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하여 쓰여질 수 없고 쓰여진 적도 없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그들의 뼈를 묻었고 소리없이 죽어갔던 기록이 사도행전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욕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주를 향하여 가진 모든 열심과 속에서부터 일어나는 정열이 무엇을 위해서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십 년 간의 인생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성령의 인도로 바로 서야 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여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으로 간섭하는 것을 왜 물리치고 우리가 사회에서 이루어야 할 업적과 남보다 잘났다는 자기 집념을 위하여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밖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가? 왜 남에게 지지 못하며 악에게는 져서 시험에 드는가? 왜 우리 마음 속에서 평온 빼앗기며 주님이 칭찬하시는 자리에서 떠나 사람들이 박수치는 자리에 가 있는가? 돌이켜야 할 때이다.
우리가 혼자가 아닌 것과 그런 이유로 부름을 받지 않았던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새삼스럽게 결심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증인 (1)[행 1:6-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행 1:8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신 것이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천국 도래와 세상 역사의 끝이 지금이냐고 물은 것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다만 그때까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오늘은 이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바로 구원관이다. 그들은 이미 선민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유일한 대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자기들은 구원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언제 실현시켜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빨리 주께서 주의 나라를 임하게 하여 자신의 옳음을 확인시켜 주고 원수들이 빨리 멸망받는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거기에 대하여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고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증인이 되는 일이다’ 라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질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또 그에 대한 대답이 왜 ‘증인’이라는 말로 등장하느냐 하는 것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문과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된다. 제자들의 질문은 마치 이것과 똑같다.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 할 때에 좋아하는 학생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다. 지금 제자들이 말하는 ‘주의 나라가 임하심이 지금입니까?’라는 물음은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시험을 통해 자신들의 우수함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자신들의 의로움과 저들의 불의함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유일한 종교적인 본능이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이것은 신앙심을 갖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인 본능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옳음’을 갖기 위함이다. 기독교를 믿으면 내가 더 옳은 사람이 된다는 발상이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리다’라는 분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은 “증인”이다.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인간을 심판하시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마태복음 25:31-46을 보자.
나중에 주님이 오셔서 판단하시는데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했다’ 하시고 다른 한쪽에게는 ‘너희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하신다. 그런데 서로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놀란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한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구제를 했다, 좋은 일을 했다’ 하는 문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좋은 일, 구제, 봉사, 헌신 등의 대상’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눈에 안 띄는 자이고 도와줘도 별 볼 일없는 자이고 생색이 안 나는 자이다.
지금 주님의 대답은 옳다, 그르다가 아닌 대상에 관한 문제로, 대인관계의 문제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옳음도 그 옳음이 이론적이고 절대적이지 않고 누구에게 했느냐의 문제이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
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
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
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
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사사건건 충돌했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 관원들, 종교지도자들의 싸움거리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였다. 그들은 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책망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고 함께 죄를 저지르는 공범죄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호세아 6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고 하셨다. 여기서 제사란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옳음을 증명해 내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나는 옳다, 틀린 일을 행하지 않았다’ 하는 것보다 긍휼이 낫다는 것이다.
남을 멸망시키고 손해를 끼치면서 나만 옳다, 나만 죄를 짓지 않았다는 식으로의 옳음은 성경이 말하는 옳음과는 다르다고 주님은 지적하신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
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
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
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비유는 겸손이나 교만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의로움이 왜 평가를 받지 못하는가?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렸다’라는 식의 의로움은 성경이 원하는 의로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의로움은 그의 의로움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옳다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여인을 죽이지도 않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주께서 지금 모든 신자에게 요구하는 성경의 의(義)라는 것은 결국 그를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죄에서부터 돌이켜 살려내자는 싸움이 성경이 원하는 의로움이다. 이에 비해서 인간이 갖는 의는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린 사람입니다. 하나님 빨리 오셔서 내가 옳으니 상을 주시고 저 원수를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것 밖에는 없다면 그것은 의가 아닙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6이하에 나온 질문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있는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에 네가 해야 할 일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디까지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그들이 심판을 요구하는 이웃들인 예루살렘, 유대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붙잡고 있는 로마를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구하기 위해서 복음은 가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마저도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를 칼로 붙잡고 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꺼내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이것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성경은 내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얼마 만큼 이익을 얻고 은혜를 입었느냐로 나의 옳음을 점검하라고 요구하고 있지 나의 옳음이 저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끊임없이 들고 나온 것들을 살펴보자.
안식일 논쟁,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문제, 죄인과 왜 식사를 함께 하느냐는 문제 등등이 모두 율법을 가지고 나오는 문제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
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15)”
모든 계명, 율법이라는 것은 전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의로움은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나는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지 않았다, 살인하지 않았다’와 같이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웃 사랑의 문제이다. 새벽예배, 철야기도에 아무리 열심히 참석했어도 그것이 주께 다가가는 열심이어야지 남을 판단하는 경지로 간다면 종교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
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
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
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
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1-5)”
지금 이 사람에게 손이 낫느냐 낫지 않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시나 안하시나를 보려고 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그가 불구에서 나아진 기쁨에 동참하고 그가 지금 불구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간데 없고 고치면 율법을 통해 고소해 죽이리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 유대인 중에 정치적인 한 집단으로서 분리파라는 유명한 정치, 종교적인 집단이었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대로 경건하게 살자고 모인 정치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이기도 한 특별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들이 가진 의가 주를 향한 열심이 주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옳음,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한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법을 지키는 마음이 아니다. 악하고 나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선한 길로의 안내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
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
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
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
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사도 바울은 고생고생해서 지금 이 시간까지 와 있다. 그는 죽으면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날 것이며 지극한 영광과 상급 속에 영접을 받을 것이다. 그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빌립보 교회 교인들,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그의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서 이익을 볼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고생의 길도 기쁨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말씀처럼 “내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우리는 그러한 “너희”를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 앞에 우리가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는 구별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더 살아야 하겠고 더 나를 죽여야겠고 이들을 위하여 더 기도해야 되리라’는 입장에서 그들을 붙잡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들은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여 요청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기에 홀로 기도하며 안타까와 하며 ‘너 회개하기 전에 죽으면 안돼’라고 부르짖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에 있어서 신앙의 정당한 방향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용서하며 얼마나 많이 용납하며 기도하며 안타까와 하는 자인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얻게 하며 긍휼과 자비를 펼치기를 기뻐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인격과 표정과 사람의 모든 것을 바꿔 나가도록 채찍질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방향이다. 그럴 때에 우리의 인생이 기적과 환희와 승리로 가득 찰 것을 약속한다.
증인 (2)[행 1:6-8] |
사도행전 1:6-8까지의 이 내용에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물질계, 이 세상이 언젠가는 그 역사와 존재가 끝날 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종말은 오게 될 것이고, 그날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질 것이다. 돌연한 종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점진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의 종말은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끝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기 때문에 끝을 내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처소, 본향으로 약속된 나라가 올 것이며, 완성될 그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언제 끝날 것이냐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이 세상이 언제 끝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도래할 나라를 준비하는 것만이 우리의 책임이다.
영원히 주어질 나라에서 우리의 수준, 우리의 모습을 준비하며 그 나라를 건설하며 그 나라에 불러들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도대체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기다려야 하며 어떤 일들을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펼쳐보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상세한 조목들을 확인해야 된다.
마태복음 28장은 사도행전 1:8을 확대해서 설명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여기에서 세 가지 명령이 떨어진다. ①제자를 삼으라, ②세례를 주라, ③가르치라. 이 세 가지를 우리는 대 위임령이라고 한다. 이 셋 중에서 오늘은 먼저 제자삼는 일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태튜어(mathematics)’라 한다. 옛날에는 제자가 되면 그 스승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살면서 평생을 그와 같이 했다. 부자지간의 밀접한 관계 버금가는 관계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제자라는 말의 의미가 많이 희석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제자,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야 하는 증인이 되는 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우리에게 맡긴 커다란 명령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 속에서 보통 신자들은 전도를 하라, 예수를 전하라,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거기에는 전도하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제자를 삼으라고 했다. 이렇게 쓴 이유는 주께서 그의 나라를 건설하시며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른 우리들을 훈련하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는 것이다.
‘전도를 한다’는 것과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아주 다르다. 전도는 보통의 경우 선포적일 수밖에 없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고 증언하기를 바라는 내용들을 그에게 말이나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나의 존재와 삶의 모습과 모든 것을 바쳐서 상대방을 설득하라는 책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이 제자삼는 일이 없어진 것이라고 본다. 현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신앙의 형태는 교회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상태는 신앙의 내용을 듣고 즐기고 돌아가지 그것으로 어떻게 각자의 생활 속에 녹아 내렸는가를 점검받는 일은 거부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내 인격과 삶에서 어떻게 녹아 내리고 있는가를 점검받는 것을 싫어한다. 디도서 1장에서는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
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
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
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5-9)”
디도를 바울이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장로들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장로들을 세우는 이유가 저들로 하여금 생명된 말씀의 진리, 신앙의 내용들을 지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로는 어떤 사람을 뽑느냐 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고 신앙이 좋고 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고 아주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장로는 그가 갖고 있는 신앙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아 가장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다. 장로의 기준으로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가장 실제적인 생활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의 말이 권위를 갖는 것이다.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하고 불신자가 있는 세상에 나아갈 때 신자란 바로 그 입장에 서는 것이다.
‘저들은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며 이 세상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살지 않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그들의 양식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자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의 도전을 진리의 자극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나누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
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
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
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
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17-20)”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하고 권력 붙잡고 돈을 긁어 모은다. 그러면 신자들은 어떠한가? 그것으로도 성이 안차서 예수까지 믿는 자들이다. 왜 예수를 믿는가 하면 배부르려고 믿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길이 아닌 길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똑같은 길, 똑같은 목적을 두고 똑같은 짓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의 총, 칼과 저들이 가진 모든 권세 위에 예수까지 믿어서 기도까지 하며 그 일을 이루려고 한다. 성령까지 받아 남을 해치고 자기가 성공하려 한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가 부흥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말씀의 흥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흘러 넘쳤다. 그런데 언제나 기독교 역사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부흥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예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달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역사학자들은 어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습관화해야 한다고 한다.
내용의 전달 이전에 습관의 전달, 규칙의 전달이 더 급하므로 형식의 전달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형식주의라는 것은 늘 경계를 해야 하지만 형식의 전달이 없으면 내용은 훨씬 더 형식보다 끊어지기 쉽다.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철저한 의식과 규칙으로 그들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문제지만 유대인으로 하여금 유대 민족주의의 신앙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온 유일한 방법이다. 형식주의는 무섭지만 내용주의는 더 무섭다.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요구들을 가장 원색적으로 펼쳐야 하는 규칙과 명령으로서의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자신의 것으로 굳어지지 않는다. 자녀에게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원색적인 규칙들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성경책이 보이도록 들고 다니라. 그것이 우리를 굳게 만들고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한다.
형식주의를 반대하면 내용주의라는 우리의 실력을 무시한 지점까지 끌고 간다. 그러다 보면 신령한 내용들을 고수하는데 손해를 봤다. ‘나는 내용주의자다’ 하면서 많은 형식들을 놓아 버렸고 그 형식을 놓자 그 안에 담을 내용마저도 떨어뜨린 지점에 와 있게된 것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설교를 듣고 마음으로 감동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흘러나올 최소한의 원색적인 규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2차, 3차적인 더 높은 차원으로 나가는 것은 더 안된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 내용이 무엇으로 가야 하느냐는 놓친 채로 열심히 했다는 것밖에 없다는 것으로 본다. 그 감동만이 남아있지 감동한 것으로 내가 바라보는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진전되어지는 것으로 적용된 것이 없다. 늘 그 수준이다. 교회생활에 익숙하고 성경 내용에 익숙한데 사람이 커 가는 것이 없다. 그 목표 지점을 향하여 다가가는 것이 없다. 형식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가 가진 내용들을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제자를 삼으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 기독교를 들먹이지 말고 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세상을 꿰뚫어 지나가는 사람의 실력과 지식을 이제 겸비해야 한다. 그것이 제자된 사람이다. 우리에게 습관으로 젖어야 한다.
본문 중 여기 ‘증인’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에서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테르라’인데 이것은 영어의 martyr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martyr는 순교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증인이 되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 사실, 자기가 항복한 그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거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심각한 싸움에 그 심각함이 없어졌다는 것이 현대교회의 큰 병이다.
배가 불러서 그렇게 되었다. 배가 불러지면서 교회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놓아 버렸다. 교회는 치장하기에 바빴고 사업을 하기 시작했고 업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선교가 어떤 국력의 신장같이 교회 실력의 한 모습이 되었으나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진리의 진리 됨의 폭발력은 많이 희석된 느낌이다.
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목숨을 건, 뼈를 깎는 싸움이 아닌 남은 힘의 싸움들이기 때문이다. 잉여분에 관한 것이다. 전도도 선교도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체력, 경제력, 정신력의 잉여분에 관한 것으로 하지 그것이 없으면 쓰러질 정도로까지의 문제로 충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수준이 낮아서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분명히 그 수준에 와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은 책망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부여받은 명령과 부름받은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이며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이웃들 앞에 커다란 문제인가? 마태복음 5장으로 결론을 내려보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
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
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
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말로가 아닌 행동으로 이 행동은 또 종교화된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말은 곡물을 재는 그릇이다. 말을 뒤집어 놓고 등불을 켜서 그 속에 넣어두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을 비취게 하기 위하여 불을 켜서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다.
신자를 삼으면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모든 어두운 곳 위에 갖다 놓고 비취게 하기 위해서 그를 빛으로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왜 우리 자녀가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한 인간이 한 세상 생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생활한다는 면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시켜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우리의 자신있는 근거가 없기 없기 때문에 공부,공부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신자로서 부족하다.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자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주를 믿으며 주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신자답지 못하다. 우리는 빛인데 연기 외에는 내지 못한다. 완전공해이다. 우리의 특권, 우리의 사명, 우리의 영광된 소망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제자를 삼으라. 이것이 갖는 엄청난 내용들을 다시 되돌아 봐야 한다. 우리는 짧은 인생살이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인 것을 놓치지 말고 오늘 배부르기 위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중요한 목표들과 복된 내용들을 놓치고 사는 것을 부끄러운 줄을 아는 원래의 신자된 자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증인 (3)[행 1:7-8] |
왜 주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라, 교화하라, 신자를 만들라 하지 않으시고 제자를 삼으라 하시는가? 사람에게는 구원보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그의 인격이 되고, 그의 사상이 되고, 모든 면에서 그가 드러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를 삼으라는 내용 속에 구체적으로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세례를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9,20을 다시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한다. 제자를 삼은 뒤에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과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오늘은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왜 제자를 삼는데 수반되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려 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세례를 주라는 내용 속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성경에서 세례를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연합한다. 성경이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를 할 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과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신자끼리도 한 몸으로서 하나가 되었다는 통일성에 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세례를 주라는 뜻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몸으로 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교회라고 한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 그의 지체로서의 연합, 통일을 말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몸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라. 그래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통일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금의 역사를 끝내고 우리에게 약속된 나라가 언제 시작될 것이냐 하는 시간과 기한은 우리가 정할 것이 아니지만 그 나라는 반드시 온다. 우리는 그 나라에 초대되고 있고 그 나라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하셔야 할 부분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증인되는 일이요, 모든 사람을 제자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일이다.
이것은 지금 어떤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해 나가야 될 일이지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은 지금 완성되어 있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세례를 주라는 것은 세례를 줌으로써 제자를 삼는 일이고, 제자를 삼아서 이제 완성시켜야 하는 일의 시작이며 과정이고 방법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받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이제부터 새로운 과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우리를 그 몸으로 부른 이 세례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
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유대인들의 집짓는 법은 주춧돌 대신 모퉁이 돌을 놓고 거기서부터 벽을 양쪽으로 짓되 그 큰 돌을 의지하여 건물을 지어 나간다. 밑에 주춧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코너가 기초가 되는 셈이다. 그 모퉁이 돌이 주님이시다. 그분을 의지해서 거기에서부터 이어져서 그리고 거기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이 지어져 간다는 말은 부름을 받아 모퉁이 돌과 연합을 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까지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
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
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2-13)”
우리가 짓는 집에 주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모퉁이 돌이 되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성경은 부름받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고 연합하여 훈련을 받는 이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목적이 있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성도들 간에도 하나이다. 이 하나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
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
로 세우느니라(엡 4:15-16)”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됨을 지키는데 성령의 열매가 동원된다.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고 하나님이 무리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목적지는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을 벗어나 영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경지에로의 초대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훈련을 여기서 받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빠져 남을 물어뜯는데 익숙해져 있다. 내 마음에 선한 것이 없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에서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쳐 복종시키는 것을 비로소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교회를 요구하고 있고 제자를 삼는 문제에서 교회를 요구한다. 제자 삼으라. 그리고 세례를 꼭 주어 교회에 그를 불러 들이라. 신자들끼리 한 몸이 되는 훈련을 시키라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선한 의도는 있지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처음에는 열심도 생기지 않고 결심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겠다고 결심을 해도 되지 않는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열망은 있으나 절대로 의자에 앉지를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열심이 실제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와서 맨 뒤에 숨지 말고 사람들 옆에 끼어서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라. 이 훈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을 훈련하는 곳이며 교회가 무엇이 분명히 유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
교회는 이 두 가지가 꼭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훈련을 받아야 된다.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수권이다. 또 하나는 그 안에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의 동등함과 다양함이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지켜야 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
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
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그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그에게서만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어 큰다. 우리 몸을 봤을 때 명령은 머리를 통해서만 떨어진다. 머리에서 명령하지 않았는데 팔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면 병에 걸린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의 최고 병이 무엇인지 아는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앙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를 떠나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뺏기 위해서만 교회를 이용하고 있고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일이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교회를 오고, 자신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마음에 어떤 불안감 때문에 헌금을 내서 때우는 것이 아닌가? 오늘 우리는 우리가 세워 놓은 목표에서 기독교를 오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수권을 인정해야 한다. 그로부터 만이다. 그가 하라고 한 것만을 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 앞에서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많이 요구되었던 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힘써 지켜야 한다.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뉘는 곳이니 나뉘지 말아야 한다. 싸워 나뉘기보다는 져서 연합하여야 한다. 교회는 이 훈련을 받는 곳이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신자들의 동등함 신자의 하나 됨에 관하여 이런 요구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
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
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
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
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
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
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유일한 원리가 있었다면 복종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이란 믿음의 싸움이다. 신자들이 왜 주님의 요구를 묵살하는가? 교회에서는 주님이 더 잘 아실지 모르지만 세상을 사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보다 지혜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우리보다 우리를 더 아끼시고 사랑하시며 선하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교회에서 돈내는 것은 쉽다. 사업하는 것이 쉽고 전도하는 것이 쉽다. 그러나 그것 말고 자신이 변해달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최고로 내건 것이 성품적인 싸움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들은 세상을 목표로 살고 있지 않구나 하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악착스럽게 세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살지 말고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주 앞에 칭찬받을 사람으로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주님께서 요구한 이 문제들을 싸움의 내용으로 삼아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싸움의 내용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제자도 (1)[행 1: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행 1:8을 확대시키면 마 28:19-20이 된다. 우리는 이미 제자 삼으라,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다루었다. 오늘은 가르침에 관한 말씀을 생각해 보자.
가르침에 있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들이 필요하다.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과 가르칠 내용이다. 오늘 우리는 가르칠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나라를 준비시키며 영원한 나라 확장과 그 나라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과 그리고 그 나라에 걸맞는 시민으로 가르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것은 입술만의 전달이 아니요 모범을 보여야 하며 삶의 원리요 목표요 자세요 근본적인 한 인격과 존재의 아름다움으로써 증언해야 될 것임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
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생명은 무엇인가? 영적인 차원에서의 우리의 존재와 그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뜻, 목적 이런 것이 설명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내용은 진리에 관한 것이다. 진리를 깨우쳐야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 다음에 복을 받는다. 그런데 복받는 것만 앞세우고 그 앞에 있는 다른 것은 모두 없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제대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스스로 원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고 이루어 나가야만 한다. 그것들을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될 것 속에 포함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칠 것 중의 그 가르침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이 생명과 진리에 관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목표하고 있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꺼내면 서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결국 가르치라는 명령 속에는 이런 일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소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밖에 모르는 것이다. 세상은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서만 이 비밀이 증거되고 이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우리에게 커다란 특권이며 동시적으로 책임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세상에서 꼭 붙잡고 있어야 되며 그것으로 증언해야 하는 것들, 그것들이 무엇이냐를 우리는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
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
하라(딤후 4:1-2)”
이것이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말인가이다. 이 가치 체계, 영원한 시각을 갖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우리가 책임지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책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지키시며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그리고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자만이 가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런 배경과 항복이 없이는 전할 수 없는 말씀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
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2-4)”
세상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표가 내 수중에 있지 않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도 내 실력에 있지 않다. 우리는 나의 주인을 나로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 삼으며 나의 생각과 나의 모든 원리와 달려가는 발걸음이 주의 은혜 속에 있기를 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자연인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설명하고 납득해서 되는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요 책임인 것이다.
저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며 자기네 뜻을 이루기 위한 좋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세상을 향하여 영원을 준비시키며 세상을 것을 좇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자라는 이 중요한 증언을 목숨걸고 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한 집단이라기보다는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방법 플러스 알파로 예수까지 믿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보다는 눈 앞에 있는 것이 더 급한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말세에는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 말세에 관한 증거에서도 제일 많은 것은 언제나 많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수란 무서운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
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
이니라(마 7:13-14)”
이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꾀를 짜고 지혜를 모아서 나타나는 결론이 아니다. 신앙자체도 그럴 수 있다. 늘 명심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행했는데도 주님께 합격점을 받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
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
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
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
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
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11-13)”
말세에 나타날 큰 징조 중의 하나가 말씀에 대한 기근이라는 것이다. 물질 문명의 부요로 말씀의 기근을 낳았기 때문이다.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이 세상에 대하여 미혹을 적게 받는 것이 사실이다. 삶이 어려우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만 삶이 즐거우면 세상을 사는 재미로 신앙과 말씀을 멀리 한다.
고린도전서 2장으로 가보자.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책임을 갖고 어떤 의미에서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
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
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
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6-8)”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 비밀을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충성이다. 바로 그 일에 증인인 것이다. 이것을 상대방에게 전하는데 있어서 남득되지 않고 말의 지혜나 세상의 학문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고난을 받을 수 있고 조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힘쓰라는 디모데에게 주어진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세상이 동의를 하든 안하든 사실이다.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준비하고 계시며 이 세상은 조만간에 끝이 난다.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주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행한대로 상과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예비되어 있다. 이 사실에 관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상대방이 믿든 안믿든 그것은 두 번째 문제이고 사실을 사실이라고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가진 바 책임이다. 이것은 우리가 맡은 것이다. 이 일을 놓치고 산다면 우리는 신자가 아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세상의 요구와 지금 눈 앞에 있는 편안함 때문에 이것을 감추고 있다면 우리야말로 불충한 사람들이다. 다른 말로 매국노이다. 천국을 팔아서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언제나 이 생명과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과 결부시켜서 한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라(신명기)’ 이것을 우리의 삶에 잘 나타나도록 해야 하고 이것이 가르침의 첫 번째 내용이다.
‘너희라도 신자답게 살아봐라.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보여봐라’ 이런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지금 신자답게 살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신자답게 살았다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거의 실패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말라기 2장에 이 부분과 연관된 중요한 말씀이 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
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
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말 2:7-9)”
여기에서 제사장은 우리 모두를 가리킨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라고 한다. 제사장이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고 그가 아는 것, 본 것, 하나님 앞에서 받은 명령이 아닌가?
그것을 가서 전하지 않고 딴소리를 한다. 제사장이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 노릇을 해야 하고 그래서 백성은 제사장으로부터 율법을 구해야 한다. 그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질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지켜야 할 모든 신자의 책임이다.
베드로후서 3장에 있는 말씀으로 오늘 설교의 결론을 맺으려 한다. 거기에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 체계, 영원한 나라의 소망, 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조롱하며 잘못가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
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
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
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
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
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
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
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
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
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
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
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
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
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
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
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
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벧후 3:1-18)”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우리가 그 영원한 비밀을 알고 있기에 전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면 안된다. 그러면 빛이 비취지 않고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영원한 나라의 증언은 끝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운명을 지고 있지 않고 시대와 역사와 민족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제자도 (2)[행 1:8]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앞장에서는 가르침이라는 요구가 우리가 갖고 있는 내용의 절대성, 우리만이 갖고 있는 내용이라는 문제에서 우리가 가진 권위, 우리가 가진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이 말씀을 살폈다.
오늘은 ‘왜 주님께서는 가르치라는 요구를 내걸었는가?’ 하는 면들을 살펴보자. 가르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교육은 크게 나눠서 두 가지를 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용량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하나는 판단력을 주는 것이다.
교육의 중요한 목표는 그가 가진 것을 확대하고 또 언제 어떻게 이것을 쓸 것인가를 그에게 맡기도록 판단력까지도 그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라는 말 속에는 피교육자가 교육자와 대등하고 독립된 가치를 인정받는 존재라는 뜻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이 말씀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많이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소모된다고 생각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
가르치라는 말 속에 하나님의 가장 궁극적인 관심사는 우리의 행복이요, 완성이요, 우리의 영광이라는 것이 감추어져 있다.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할꼬라는 표현은 사실 훨씬 깊은 내용이다. 우리 부모들에게 가장 큰 욕심이 있다면 자신을 위한 것보다 자식을 위한 욕심이 있지 않은가? 자식이 잘되도록 온갖 정성을 다 기우리고 때로는 매도 드는데 그 이유가 나중에 자식의 덕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식이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만으로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흘러나온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다. 신자가 잘해서 하나님께 덕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자녀가 잘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는 기쁨이다.
성경이 그의 자녀, 신자들에게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어떤 내용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는가를 이 차원에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
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
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
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
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
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하나님의 요구는 이것이다. 그의 온전함 같이 우리도 온전해 지는 것, 그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 목표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유지하시고 확장하시는 일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장 애타 하시고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시고 가장 큰 능력으로 간섭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와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말씀하시고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무엇으로 되는가? 믿음 이외에 어떤 방법도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하고 말씀한다. 이것은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아무런 것도 없다. 그러나 바로그것이 성경의 시작이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십자가로 불러내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런 표현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바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인생을 살게 하신다. 그것 자체가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빚어내신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
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
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3-17)”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라 하는 기능적인 차원이나 수단, 일의 차원에서 요구하지 않고 신분이나, 수준, 본질에 관한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고 했다.
여기서 행위란 무슨 일을 했다는 업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의 수준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안되고 일을 해라,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봐서 나타난 것이 ‘그’라는 것이다.
신자면 신자 같은 모습이 어디선가 실력으로 나타나는 수준이어야 한다. 남들 눈치보면서 따라하는 정도면 안된다. 꼭 건드렸을 때 그의 실력이 나오는 거기까지가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을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구구단 외우듯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내용들을 외우고 그 다음에는 실천해야 한다.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돌려 대라고 하셨다. 연습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문제는 오른 뺨 맞은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억지로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를 가야 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
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
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
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
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
이다(욥 7:17-21)”
이 말씀은 고난을 참다 못한 욥이 불평하는 말씀이다. 욥의 말이 옳다. 나 같은 것 하나가 잘한다 한들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 하나 못한다 한들 하나님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일일이 참견하는 일이 귀찮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결국 우리가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것만은 아니다. 매 맞지 않고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단지 매맞는 것이 두려워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태도도 옳지 못하다. 그러면 전혀 잘못이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매 맞지 않고, 한 자 한 자 따져 들어가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머리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그래서 어렵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본적, 주소, 전화번호, 이름을 갖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으며 십자가의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의 본적이고, 주소며, 주민등록이다. 그것은 채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서 그 완성을 향하여 지금 가르치고 있고 인도하고 있고 간섭하며 그것을 훈련시키기 위한 인생과 삶의 현장 속에 우리는 놓여 있는 것이다.
이름을 쓰는 것으로 우리는 채점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런 시험과목을 거쳐야 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
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
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
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
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
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
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
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
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4:31-5:9)”
이것이 신자의 구구단이므로 외워야 한다. 이것으로부터 많은 응용이 나온다.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십시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며 감사하며 용서하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처음부터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작해서 열심히 하자. 맞는 문제만 하지 말고 틀린 문제일수록 더 해야 한다. 성경에 있는 대로 하자. 빛의 자녀처럼 행하기로 결심하자. 이것이 구구단이다. 외워서 신령한 인격을 넓히라. 깊어지고 높아져 가야 한다.
제자도 (3)[행 1:8] |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행 1:8은 한마디로 제자도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최후의 명령을 받고 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고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신자의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할 때 이 제자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고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①제자를 삼아라 하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며 그들에게 이 천국의 복음과 진리들을 전달하느냐 하는 문제 이전에 이 말 자체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와 주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할 만한 모델이 될 수 있느냐, 인격적인 자세와 품격을 갖추느냐 하는 데 더 많은 초점이 있다.
②가르치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드신 인간에 대하여 어떤 가치를 인정하시고 어떤 대우를 하시는가가 담겨져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고자 하는 어떤 일에 대하여 우리를 수단과 방법으로 부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제자도라는 것을 쉽게 나가서 전도하며 기독교에 대해서 증언을 하는 것으로 그 내용을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전도를 하고 교화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너무 쉬운 답은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로의 발전과 우리의 책임에 방해 요소가 되고 있다.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신자란 어떤 모습을 가지며 어떤 생활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강한 의문을 제기할 만한 사례가 나온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
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
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
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2-5)”
세례 요한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세례까지 주었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들으니까 본인이 생각했던 메시야상과는 너무 많은 거리감이 있었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던 일은 안하시고 사소한 일만 하고 계셨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다 옳은 것으로 보이고 인정하지만 그때 입장으로는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 대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이야기하신다. 말하자면 메시야상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신자상을 한 번 살펴보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
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22)”
지금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백성인 지기 민족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이고 물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막았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
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베드로가 상상하고 있는 메시야의 사역과 그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역할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과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인 종교관과 세상살이에서 생겨난 상식이라는 것 때문에 신앙에 대하여 우리가 어처구니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
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
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
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여기 능력이라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일이 제시되고 있다. 선지자, 귀신을 쫓아내는 일, 권능을 행하는 자. 만일 제자도가 일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이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을 목표로만 삼고 끝낸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며 꾸짖으셨다. 그런데 이 문제를 처음에 등장시킨 이유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못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자도라고 하는 엄연한 주님의 명령을 앞에 두고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주께서 어떤 목적으로 어떤 요구를 할 것이냐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제자도가 언제나 어떤 일을 이루는 방법이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한다. 성경은 최고의 신앙 자세를 능력이 아닌 순교로 제시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요한복음을 끝내면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시고 천국 열쇠를 맡기시며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약속했던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중에 순교하리라는 예언을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 고 원하는 곳
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
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가장 큰 임무를 부여받은 베드로마저도 그 일을 수행하고 완성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의 일을 하다가 중간에 실패하는 것으로 끝냄으로 능력이 성경에서 높이 평가되고 요구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훨씬 더 깊은 통찰력을 가져서 신자상, 신앙생활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개념을 소유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기능만으로 전쟁에서 전투를 잘하는 사람을 보고 용병이라고 한다. 용병은 아무리 전투를 잘해도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전투하는 것은 애국심이나 책임이 아니라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잘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투력은 인정하지만 그를 훌륭한 군인이라고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훌륭한 군인은 때에 따라 그가 전투에 실패하는 한이 있어도 그가 어떻게 힘을 다 썼으며 나라를 위하여 어떻게 개인적인 것을 희생했느냐로 가늠하기 때문이다.
신자란 군인이 전투력이 없으면 안되는 것처럼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과 그것에 의하여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복음에 대한 강렬한 도전성을 놓치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놓고 있으면 일단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신자라고 할 때 군인이 전투력만으로 인정받지 않듯이 그의 신앙생활이 전도라는 원색적인 전투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과 시대적인 조건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상사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결정하여 그것을 지켜내느냐의 싸움이다. 우리는 일상사는 종교생활과 상관이 없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성경 읽고 기도하기 훨씬 이전의 싸움이다. 성경보고 기도한 것이 여러분의 이웃 사람과 대화하고 자녀교육을 시키는 데서 우리를 신자다운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여기서 비로소 요한복음 13장의 사랑과 사도행전 1:8의 그 구절이 하나로 만나는 것을 본다. 제자를 삼을 때 우리가 꼭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우리를 스승으로 하는 이유를 꼭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주를 본받는자 된 것같이 다른 사람이 나를 스승으로 본받을 때 나를 본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본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에게 녹아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그 내용이 방법적. 능력적으로 일을 성취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술과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한 인격과 자세와 모습으로써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줄 알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싸움은 언제나 이것이다. 억울함과 복수심과 경쟁상대로서 이웃을 만나지 말고 이웃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할 대상으로 만나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가장 많은 요구는 이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또 이것을 다 행한 자는 율법을 다 이룬 자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종교성을 띤 원색적인 싸움인 경우가 드물고 사실은 이 자세의 싸움이다.
바울과 모세는 ‘주여 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려면 나도 같이 보내 주십시오’라는 마음을 가졌다. 이 자세가 아니면 그것은 신앙생활에 입문하지 못한 것이다. 이웃 앞에 설 때에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과 양보가 없으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은 좌절을 맛볼 것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싸움이 있으며 은밀한 중에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이웃에게 진리와 신앙이라는 차원에서 우리가 가는 길로 저들이 구부러진 것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진리와 빛을 던지는 자로 우리를 세우며 주님께서 요구한 것 같이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그들을 항복시켜야 한다. 썩는 밀알이 되라는 요구가 등장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자도 (4)[행 1:9-10] |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는 가장 큰 이유를 하나님께 매어 달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주를 위하여 헌신하는 마음과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할 마음을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안 주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복은 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모든 조건과 모든 기초에 관한 기본적인 충분한 조건일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어려움들은 그 어려움을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내가 만들어져 가는 일종의 학교 공부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신자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핵심이 되는 사명은 사는 것이다. 이 말은 생존한다는 말이 아니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앙생활하면 일상생활에서 많은 시간들을 구별해 내어 주를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는 신자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보좌 우편에 가 계신 가장 큰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으며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가치가 최고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영원한 것이며 절대적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곁은 떠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만들기 위하여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셔서 내가 그 기초 위에 서서 내 힘과 정성을 다 바쳐 주를 위해 무슨 할 일이 있는 자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쪽이 주를 위해서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하여 시대와 역사와 환경과 일 속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셔서 그 사람들과 부딪히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영원한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어떤 업적을 남기는 싸움이 아니라 모든 일상 생활에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반응이요 영원한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자세와 실력을 키우기 위하여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하여 부딪혀 나를 만들어 가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전부 내가 잘 할 수 있고, 잘 알고 있는 전공 분야에만 상대를 끌어 들여서 비교하며 스스로를 신앙인이라고 자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학교 과목을 우리가 정하지 않듯이 우리가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과목을 우리가 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신앙인 되기 위해서 이런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목표를 정하면 대부분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훌륭한 것이다.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듯이 우리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일상적인 우리의 생활을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정한 교과과목이다. 우리의 아내, 남편, 이 시대, 이 환경, 이웃, 친척 등이 과목이다. 그들과 부딪히면 신자로서 반응을 해야 한다.
세상에서 훌륭해지는 것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서 대접받는 것 말고 하늘 나라에서 대접받는 것으로 세상의 유혹과 괄시를 이기고 나가는 싸움을 해야 한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는 데 시험받지 않아야 하고 악으로 악을 갚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왜 구제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잘못이겠는가? 그런데 그것 하나밖에 없으며 그게 유일한 신앙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것은 열매이다. 그것은 과정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에 전도나 구제로 나타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이야말로 삶인 것이다. 과정이 생활이고 만들어진 일은 결국 이룬 일이고 열매이고 결론이다.
그런데 또 우리는 이 결론을 나열만 하고 있지 모두가 과정이 없다. 모두가 모여서 결론을 나열하는 법에만 익숙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점수를 잘 받는가 어떻게 해야 대접 잘 받는 괜찮은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있지 그렇게 되는 과정을 겪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둘로 나눠서 산다. 세상에 나가서 사는 법과 교회에 와서 엄숙 떠는 법을 양손에 들고 사는 교활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영원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점검하여야 한다. 그게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우리는 훨씬 더 많이 실패한다. 정답을 알고 있는데 정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울부짖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체념도 해야 한다. 그런 기간들을 거치고 거쳐서 드디어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 이상하게도 그런 신앙생활로 모두가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속은 썪어 있으면서도 안 그런 얼굴을 하고 있고 남에게도 할 말 없고 스스로에게도 항복을 못하니까 신앙생활에 힘이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으로 가서 이 문제의 결론을 내리자.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
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
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
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
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
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3-40)”
믿음의 위인들에 관한 설명이다. 그들이 어떤 일을 찾아갔다고 묘사하지 않고 그들이 삶에 부딪힌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영원한 목적지를 가는데 불어닥치는 칼날과 돌과 환난과 핍박과 경멸과 시험을 뚫고 걸어갔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해서 이런 방법과 이런 디딤돌로 저기를 갔다가 아니라 내가 일을 정하고 삶을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환경과 시대는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그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영원한 목표로 가는 길에 이것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갔다는 것이 믿음의 위인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설명이다.
우리들도 중요한 싸움을 한다. 나는 큰일을 못하니까라고 생각하지 말고 큰일이 아니라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주를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죽는 것같이 오늘 사소한 문제에서 영원한 나라를 걷는 사람들로 유혹과 환난과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 동등한 대접을 받는 일이고 동등한 목적지를 향하여 내딛는 한 걸음이다.
그 한 걸음이 쌓여서 영원한 나라로 간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그런 의미에서 목숨을 건 싸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직까지는 대부분 실패한 여정이었을지 몰라도 실패될 수 없도록 운명되어진 사람이고 그 싸움이 매일, 그리고 가장 사소한 것으로, 평범한 것으로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것을 고쳐달라고 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 내가 영원을 준비하는 데 이익을 본다는 것과 그 길을 구부러뜨리려고 이 유혹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매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루하루가 분명히 주께 가까이 가는 영원한 나라의 사람다워지는 일에 어느 만큼 진전이 있는가로 늘 자기를 점검하는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