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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은 한 편의 드라마로 읽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선악간의 분별이 주제이다. 이 본문에 따르면 우리가 올바른 분별은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섰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사탄 편에 선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예수가 긴 여행 후에 식사를 하려고 들른 집이다. 등장인물은 수많은 군중(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을 가진 예수를 가까이서 보려고 몰려 옴), 예수의 가족(예수가 미쳤다고 우려하며 그를 붙잡으러 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예수가 사탄과 한 편이라고 판단함) 등이다. 예수는 일련의 매우 짧은 이미지들을 통해 응대하신다.
첫 번째 이미지는 나라든, 가정이든, 사탄이든 갈라진 것은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집을 털기 위해 그 집의 힘센 사람을 묶어 놓는 이미지이다. 예수는 훼방자들을 아주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이 때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와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예수의 반응은 아주 싸늘한 거부이다: 그들은 내 가족이 아니다. 예수는 어리둥절해 하는 무리들과 늘 분별력을 결여한 제자들을 바라보며 “ 이들이 내 가족이다” 라고 말하신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끝까지 몰이해를 벋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16:8-13절 참고)
우리는 본문의 가족이나 율법학자들과 쉽게 동질감을 느낀다. “ 가족의 가치 (family values)”의 구호는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질서를 강력하게 수호하고, 성서를 그 근거로 끌어들인다. 교회적 권위에 대해서도 우리는 쉽게 동질감을 느낀다.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위원회에 참석하면서 찬송가를 고르고,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만찬을 계획할 때 우리는 교회적 권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의 조직의 기반에 그리스도를 위치시키고 그의 권위를 활용하여 교회의 권위를 강화시키려 시도해왔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을 살펴보도록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깨닫지 못해서 책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권위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당혹스럽다. 이 조직들은 험난한 세상에서 가정적, 종교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가정적이고 근본적으로 선한 의도를 가진 조직이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의 사역의
방향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예수의 사역의 이상한 특징은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이방인, 유대인, 가난한 자, 정신이상자, 병자, 노동계층, 여성, 세리, 성과 관련된 핍박자. 예수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대상은 그의 가족과 법을 잘 지키는
모범적인 율법학자들이다. 예수의 가족이나, 예수와 비슷한 방식으로 경건 생활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예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 여겨지는데 그들이 예수와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에 대한 헌신이 하나님이 아끼시는 망가진 인간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으로 변환되는 것은 매우 가능성이 낮은 일이다. 이들에게 예수의 사랑의 요구는, 너무 사리에 맞지 않아서, 마치 절벽에서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지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이 본문은 성령의 역사를 악이나 광기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가족이나 교회적 권위와 연관하여서 그러하다. 오늘 본문에서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지만 여러 치유의 이야기와, 치유에 대한 적대적 태도, 그 적의에 대한 예수의 분노와 좌절 등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이 본문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본다면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는 수많은 종류의 익숙하지 않은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라크 전투에서 전신의 3/4이 화상을 입은 신체, 스스로 체험하고 저지른 전쟁의 참혹한 공포에 전율하며 괴로워하는 전쟁포로, 아프가니스탄이나 팔레스타인의 다리가 절단된 어린이들, 알콜중독자갱생회 모임에서 담배와 커피를 연방 찾으며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아기를 안고 있는 레즈비언 어머니, 입양한 아기를 들고 있는 게이 아버지, 광산촌에서 옛날 스타일의 찬송가를 부르는 구질구질해보이는 남자들...
예수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그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예수 주위에는 도덕적, 신체적, 영적으로 수준을 갖춘 사람들과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여기에 끼지 못했던 유일한 부류는 절실한 심정으로 예수께 다가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과는 달리 바깥에 서서 본인들이 가정과 종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군중들에게는 무한한 인내를 보이셨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모든 죄는 용서를 받을 것인데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악마의 위력을 혼동하는 것이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나쁜 소식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처럼 우리도 이 험한 세상에서 신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성령은 매우 거칠고 도전적이고 생소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온다. 동성 간의 사랑은 성령의 바람인가 사회 해체의 징조인가? 여성적인 신의 이미지는 정신 나가고 악한 것인가 치유적인 것인가? 우리가 분별을 잘못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가 이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치유의 주제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 온 것은 치유를 받으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처와 타인들의 상처에 대해 연민을 갖는다면 우리는 예수가 배격한 합법적 가족이 아니라 예수께 열망하는 군중들 속에 섞여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석적 관점
▶ 본문의 구조: 교차대구법 구조(chiastic structure) A-B-C-B’ -A’
3:20 배경: 예수의 가정/집, 무리, 먹지못함
A 3:21 예수의 가정
B 3:22 예수가 바알세블이 들렸다고 고소당함
C 3:23-27 비유: 갈라진 집과 힘센 사람의 집
B’ 3:28-30 성령모독죄
A’ 3:31-35 예수의 가정
처음에 집이라는 키워드가 나오는데 집들에 대해 나온다. 예수의 집은 교회를 상징하는데 한편으로 사탄의 집이나 갈라진 집에 대한 예수의 권세가 나타난다.
▶20-21절
이 구절에서는 ‘ 집’ 과 ‘ 가족’ 이라는 상징이 계속 나타난다. 무리가 모여있는 집은 오늘 본문과 마찬가지로 2:1-12의 사건을 상기시킨다: 가족, 무리, 죄의 용서, 율법학자, 신성모독으로 고소 등. “ 그들이 먹지 (빵을)못했다” 는 구절은 주로 성찬식을 하는 데 사용했는데 본문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의 가족들이 여러 가지 주요한 주제들을 소개하는 문학적 도구로 사용된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가 ‘ 미쳤다’ 고 생각했다. “ 미쳤다” 는 것은 문자적으로 “ 바깥에 서있다” 는 뜻이다. 누가 바깥에 서있는가라는 질문이 계속된다.
21절에서 “ 그가 바깥에 서있다” 즉 “ 그가 미쳤다” 는 것과 대조하여 31절에서는 예수의 가족들이 바깥에 서있다.
▶ 23-27절
배경과 구조를 세우고 난 뒤에는 중앙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일을 시작한다. 중앙에는 두 개의 비유가 있다. 22절에서는 바알세블의 힘을 빌려서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고소당했다(1:21-27참조). 비유는 이러한 고소의 논리에 대해 교차대구적 형식으로 반박하고 있다.
C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는가?
c 나라가 갈라지면 버틸 수 없다
c’ 가정이 갈라지면 비틸 수 없다
C’ 사탄이 갈라지면 비틸 수 없다
그러므로 사탄의 고소대로 예수가 귀신들을 쫓아냈다면 사탄이 끝장났다. 갈라진 나라/가정/귀신 즉 바깥에 서서 자신을 대항하면 끝장나게 된다. 막1:7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를 “ 능력이 있는이” 로 정의했다. 3:27에서는 예수가 힘센 사람(사탄)을 묶어놓고 세간을 털어가는 능력있는 이라고 한다.
▶ 28-30절
고소자들의 논리가 틀렸음을 밝힌 뒤 예수는 22절의 잘못된 고소의 결과로 돌아간다.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는 표현은 중요한 전환과 특별한 힘있는 주장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비방도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의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분명한 예외를 말하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29절은 복음서 본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이다. 문학적 구조는 예수가 바알세블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성령에 대한 모독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를 거짓으로 고소한 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이다(율법교사들이 신성모독을 고소한 막2:6-7 참조). 종교당국이나 정부당국에 의해 시달림을 받는 교회에게 말하면서 고소자들을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기억하라. 갈등은 또한 내부적이긴 것이기도 하다. 마12:22-32을 보면 성령을 거스리는 죄에 대한 이러한 선언은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신학적 토론으로 제기되었고, 그래서 마태는 마가의 선언을 “ 명확하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는가를 묻는 것과 마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포용성은 교회로 하여금 이 본문을 듣는데 더 가깝게 책임지도록 할 것이다.
▶ 31절-35절(지금은 누가 바깥에 있는가?)
이 구절은 예수의 가정이라고 시작한 곳에서 끝난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바깥에 서서 예수를 불렀다. 예수는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내부자와 외부자가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헌신에 의해 정의된다. 그런 가운데 외부자와 내부자를 정의하는데 하나님의 포괄적 사랑에 대한 선언과 자연적인 인간적(교회적) 성향의 긴장이 여전히 존재한다.
목회적 관점
마가복음에서 가족들이 개입하는 사건과 예수 자신이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는 사건이 병치되어 있는 것은 예수와 종교 권력 사이의 갈등이 점점 더 심각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실제로 갈등은 죽게 되리라고 위협할 정도였다. 예수가 단순히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 두목의 권세 아래 있다는 비난은 예수의 주변에서 퍼지고 있는 루머와 실제 증언 모두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를 통제하려고 했고,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계속 증가하는 공적인 소동 때문에 골칫거리가
된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오늘 본문의 시작(20-21절)과 결말(31-35절)은 기독교 제자도의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가 자기를 만나려는 가족들을 아주 냉정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은 경건한 그림으로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일이 예수가 가족을 대하는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 가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야 한다. 친척들이 예수의 친형제들인가와는 전혀 별개로, 오늘 본문은 교회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중심적인 문제에 대면하게 한다. 이것은 마가공동체에서처럼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렇다.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33절)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35절)이라고 예수 자신이 하고 있다. 분명히 드러난 제자들 가운데 속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이다.
예수가 자기의 직접적인 가족들(제자가 되라고 부르심을 받지 않은)에게 냉정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진실을 찾아볼 수 있다.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9:40).” ; 누구든지 어린이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9:37).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11:23). 이러한 예들은 마가가 그리는 예수의 그림에서 신비란 무엇이고 제자도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오늘 본문의 중간 부분에서는 예수를 귀신들린 마법사라고 하는 율법학자들의 고발로 인하여 촉발된 거대한 긴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해서 긴장을 더욱 높인다. 여기서는 수사학적으로 답변하는 예수를 보게 된다. 예수는 그들에게
묻기를, 만약 자기가 귀신들렸다고 하면,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사학적인 질문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만약 아니라고 말하며, 그들은 예수를 고발할 수 없게 된다. 만약 그렇다고 말하면, 분열된 사탄은 망할 것이다. 예수가
그들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할 때 상황은 반전된다. 성령을 훼방하는 “ 용서받지 못하는 죄” 는 여기서 예수가 행한 치유와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는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러 시대에 걸쳐 기독교 사회에서 성령훼방죄의 목록이 지나치게
열심히 사용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가가 강력하게 주장한 기독론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마가는 기독론에 대해서 조직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이 예수가 말한 것과 행한 것 안에서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을 그의 죽음과 부활의 빛으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신약의 증인들이 증언하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마가가 예수에 대하여 긴장감있게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수는 어떻게 악의 권세에 저항을 선포하셨는가?
우리는 지금 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하신 후에 세상 안에서 말씀하시고 계명을 지키게 하고, 그리고의 지배와 통치가 완성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무엇이 예수를 마귀의 권세가 아직 남아 있는 세상에서 분열되지 않은 가정의 주인으로 만들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교회들은 분열된 가정, 적대감이 가진 권세, 맞고소 그리고 이념 그룹들 사이의 적대감 등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들은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우리가 지금 논쟁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온전하게 만들 원천이 있어야 한다.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예수는 우리들 가운데서 치유하시는 그의 사역을 하시도록 초청되어야 한다.
종교권력과의 충돌은 마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다. 마가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듣고 읽었을 의미를 유의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지금 우리가 제자도와 기독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그것을 이해한 대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제자도의 새로운 형태로 살아가면 예수는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새로운 연대를 하도록 하신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의 기쁨과 고난을 알아야 하고, 자기도취를 버려야 한다. 예수를 따르면 하나님의 온전한 가족으로 새로운 연대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따라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사랑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세상에 있는 수많은 죽음에 이르는 길과 죽음보다 더 강한가? 아마도 우리는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한 말, 선함은 증오보다 강하다는 말을 가지고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악한 자들의 기만과 술수보다 더 강하다. 예수는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서 우리의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포로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오셨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근대 혹은 포스트모던 독자들에게도 이상하게 들린다. 바알세불? 사탄? 마귀? 이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천사나 악마가 보이지 않는 오늘날 세상에서 이 본문으로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예수는 사탄과 파리들의 왕이라는 (lord of the flies) 뜻을 지닌 바알세불을 포함한 다른 마귀의 실체를 중요하게 취급한다. 예수는 사탄이라는 이름을 지닌 인격적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믿었는가? 그는 그랬던 것 같고 그래서 그 사실이 이 본문을 설교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 사탄” 이라는 이름이 뜻하는 실체를 좀 더 찾아보아야 한다. 사탄은 반드시 뿔과 붉은 꼬리를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롭고 화해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마귀의 권세를 의미한다. 이 개념이 예수가
여기서 규정하고 있는 실체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 사탄” 이라는 인격적 실체를 믿고 안믿고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충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 사탄” 을 의미하는 악의 권세에 우리가 포로가 되어있음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보면 사탄과 바알세불이라는 실체는 분명해진다. 곧 사탄과 바알세불은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에게 상처를 주는 힘이나 세력을 뜻한다.
이 중 몇 개를 나열하자면 하나는 인종차별 세력(the power of race)으로 그것은 한 그룹이 다른 그룹에 대해 피부색깔이나 문화적 유산으로 인해 더 우월하다고 우리에게 속삭여서 믿게 만든다. 또 다른 것은 가부장 세력 (the power of patriarch)으로 이것은 남자는 여자를 지배해야한다고 속삭인다. 또 물질주의 세력 (the power of materialism)은 돈이 생명을 줄 것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무기와 전쟁이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군국주의세력(the power of militarism)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죽이게 만드는데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기도 한다.
-마가복음의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이런 범주의 세력이 있음을 인식해야만 하고 우리가 자비롭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 속에서 마주쳐야만 하는 세력임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는 재산을 빼앗기 위해 강한 자를 묶는 은유를 사용한다. 이
비유를 사용하여 그는 우리의 삶 속에서 “ 강한 자” 의 포로가 되어있음을 보여줄 복음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사탄의 포로된 것이 드러나야만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지닌 영광스러운 자유를 발견하기 위해서이고 바울도 로마서 8:21에서 [롬 8: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는 “ 사탄” 이라는 이름으로 상징화된 권력과 힘의 포로가 되는가? 본문에서 예수는 어떻게 우리가 포로가 되고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위해 우리를 포로로 만든 한가지 핵심적인 것을 말한다. 예수의 가족들이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말하니까(그의 가족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다. 그를 보러 온 가족들의 요청에 예수는 자신이 그들과 거의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33절-35절). 예수가 가족과 갈등을 벌인 일은 이번 사건만은 아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12살 때 전형적인 십대들의 반응을 보여 3일간 사라진 것으로 인한 부모들의 걱정을 불식시킨적이 있다: “왜 당신들은 나를 찾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에서도 예수의 목회 초기에 가나 혼인잔치에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어머니의 요청에 화를 내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12장에서 그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주기위해 왔다고 분명히 하고있다. 오늘 마가복음에서도 그를 보러 온 가족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우리를 돌보고 사랑하고 또 양육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사탄에 매이게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런 과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경험을 들려주려한다. 나는 1950년대와 60년대를 미시시피강 삼각주지역에 있는 아칸소주 Deep South에서 자라났다. 이 지역의 남부지역 거주 백인들은 시민인권운동에 저항하였다. 나는 이 시민인권운동에 반대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백인우월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인종차별(racism)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이데올로기를 허접하고 터무니없는 사람들이 아닌 나의 어머니나 교회 리더등과 같은 사랑으로 돌보는 이들로부터 배워왔고 또 받아들였다. 그들은 악하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를 나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에 포로가 되어있었고
그래서 인종차별주의야 말로 생명을 발견하고 유지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점차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들려오는 다른 소리 즉 인종차별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내 가족과 공동체와 내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투쟁이었고 어떤 면에서 현재도 지속하고 있다.
-나는 왜 예수가 이 세력들을 “ 사탄” 이라고 불렀는지를 알고 감사하게 되었고 자기의 가족들이 이 문제의 한 부분임을 지적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반가족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 되려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예수는 자기가 죽은 후 어머니가 돌봄을 받아야 할 것을 분명히한다. 나에게 있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산은 어머니이고 또 소년시절부터 나를 양육해준 교회이다. 갈등과 위험에 기반하고 있는 이 본문은 나에게 어려운 구절이다. 이 본문은 예수를 따르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상기시켜주고 또 다음 주 성서정과에서 미리 보듯 위대한 가능성도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가장 작은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놀라운 일이 펼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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