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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s Letter(195) 2017. 9. 12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5-7)
지난 몇 달간은 너무나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1982년부터 전임사역을 시작한 이래 이와 같이 바쁜 일정을 보낸 적이 없었던 같습니다. 금년의 6-8월의 날씨는 유난히도 무덥고, 교제할 일들은 많았고, 해야 할 일들은 끊임없이 밀려오고 참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된 여름훈련계획(Summer Training Program)을 위한 준비와 인도, 여름 전체 수양회 (8월11-13일) Workshop과 메시지 준비(8월11-13일), 팀리더 계발을 위한 준비와 인도, 선교사들과의 교제와 필요들을 위한 섬김 등 너무나 많은 일들이 지나갔습니다. 금년에는 특별한 한 해이었습니다. 선교사들 대부분이 방문하고 돌아갔습니다. 아직도 이은정 선교사는 자녀 에스더의 대학진학을 돕기 위하여 이곳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여 보면 5월3일 이은정 선교사와 에스더의 귀국, 5월8일 김병기 선교사 귀국, 5월26일 문대헌 선교사 가족들 귀국, 6월 9일 김용범 선교사 가족 귀국, 6월28일 문대헌 선교사 가족 출국, 7월2일 김영일 선교사 가족 귀국, 7월8일 김영일 선교사 출국, 7월16일 이경하 선교사(지애, 지나)출국, 7월19일 김용범 선교사 출국, 7월23일 김병기 선교사 출국, 8월10일 정옥희 자매(애진)출국, 8월11일-13일 성열완 형제 가족 귀국 교제(일본 센다이), 정성근 형제 가족 귀국 교제(바레인), 염태호 형제 가족 교제, 그리고 박인숙 선교사의 타석수술을 위한 귀국(7월30, 8월29일 수술), 9월13일 출국 등 해외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한 바쁜 일정들을 보냈습니다. 이은정 선교사는 에스더의 대학진학을 위한 마지막 상담과 도움을 마치고 9월22일 출국예정입니다. 또한 인천에 계신 숙모님의 소천(7월9일)에 따른 복음전도를 위한 방문, 구원의 확신 점검, 안장예배 인도 등 일정도 더욱 바쁘고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8월28일부터 2학기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또 후학기 사역에 집중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감당해야 할 사명이나 직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할 일(Something to do),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 기대하는 바의 소망(Something to hope)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때론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지치고 힘들지마는 수고의 결실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기쁜 뜻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8월 11-13일까지 경주에서 전체 수양회에서 나눈 메시지를 정리하여 보냅니다. 영적인 삶에서, 사역에 있어서 유익되기를 소망합니다. 박 남규 부부 서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축복들(눅5:1-11)
본문 말씀(눅 5:1-11)
<서언>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시절의 선거유세의 구호는 “이게 나라입니까?”이었다.
최순실이란 한 여자의 국정농단으로 인한 정치실종, 대통령의 권위실종, 정상적인 국정운영의 망가짐 등 나라꼴이 엉망이 되었다. 그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대통령 탄핵, 감옥, 재판이 진행 중이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든 나라의 질서가 한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공적 질서와 계통이 와해되었다. 정상적인 나라꼴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게 나라입니까 하는 탄식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거 구호를 외쳤고, 그것에 국민들은 공감하였었다. 그 결과 그는 당선되었다.
나는 좀 더 근원적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게 사람들입니까? 도대체 이것이 인간들이 사는 사회입니까? 우리들이 사는 인생과 사회가 왜 이렇게 망가졌으며 엉망입니까? 날마다 쏟아지는 현기증이 나는 뉴스들, 나쁜 소식들, 끔찍한 사건 사고들, 입에 담기
조차 어려운 죄악들,(예를 들면, 자녀 폭행, 살인, 협박, 갑질 등, 자기 자식이 운다고 입을 틀어막아 죽이는 일, 외출할 때 아이 목에 개 목줄을 침대에 묶어놓고 돌아오니 죽은 일, 살인을 취미삼아 하는 일들,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 10대들, 정말로 무섭고 두려운 인간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게 인간들인지 아니면 짐승들인지 때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끝나야 이 세상은 끝나야 되는지, 아니면 새로운 개선책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진정 우리에게 변화의 소망이 있을까?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 선한 사람들, 선한 행동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해결책은 있는지요? 어떻게 살아가면 행복하고 보람되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며 모든 사람이 즐겁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베드로의 인생 (Nothing의 인생)
(1)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인생이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배에 모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Simon answering said to him, Master, we have toiled(worked) all the night, and have taken Nothing: nevertheless at thy word I will let down the net)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Nothing이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결과다. 예수님을 삶 가운데 모시지 않은 수고는 헛된 것이었다. 그 결과는 허무함(공허)이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베드로의 인생은 아무 것도 없었다. Nothing이었다. 인생의 허무함(Nothing)이다. 그는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가의 평범한 어부이었다.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아주 평범하고 성실한 우리들과 같은 인생이다. 그런데 그의 삶은 너무나 허무한 인생이었다. 열심히 수고를 하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빈손이었다. Nothing이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이와 같이 아무리 수고해도 아무런 결과나 소득이 없다. 베드로는 성실한 어부이었다.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다. 열심히 수고를 하였다.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다. 밤새도록 수고한 어부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오는 감정은 허탈감과 허무감이다. 어부는 고기를 많이 잡아야 생계가 유지되고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생활의 여유도 가질 수 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것은 그 모든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다. 기대가 무너진 인생은 너무나 허무하고 허탈해진다.
베드로의 인생 가운데 무엇이 문제이었는가? 그는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였다. 그 결과 그의 배는 빈 배(empty boat)이었다.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 배이었다. 그의 수고의 결과는 Nothing 이었다. 텅 빈 배에 불과하였다. 어부에게 가장 큰 기쁨은 만선이다. 고기가 가득한 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의 기쁨이다. 그런데 그의 배에는 어떤 소득도 없었다. Nothing이었다. 얼마나 허무하였겠는가! 수고의 결과가 없을 때 주어지는 감정은 허탈감, 허무감, 공허함이다. 절망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절망감, 허탈감, 공허함 가운데 살아간다. 그래서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태어났다.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보지만 장래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3포 세대, 5포 세대, 이제는 n포 세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저축한 것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하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의 세상적인 쾌락에 머물러있는 여인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복된 삶은 자신이 수고한 만큼 결실을 거두게 될 때이다. 수고의 보람을 느낄 때 만족하며 충만하며 행복한 복된 삶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2)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때 그 수고의 끝은 허무하게 된다. 우리 인간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6)
왜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되었는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해답을 주었다. “이 세상이 채워줄 수 없는 갈망이 내 안에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세상을 위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참회록을 기록한 어거스틴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결코 쉼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20C의 지성파의 대부, 파스칼은 “인간 속에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무한한 심연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이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우리 안에 늘 불만족이 존재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하였다.“ 그 모든 원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가장 문제는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함이다. 즉 불만족이다. 공허함이다. 그 공허함과 허무함을 메우기 위해 인간들은 온갖 추한 일을 다한다. 쾌락과 향락, 우상숭배, 심지어 살인까지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 하는 일이 있다. 온갖 죄악을 저지른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무서울 것이 없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낙원(에덴 동산)을 빼앗겼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의 본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이 되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실존주의 철하자 Paul Tilihi(폴 틸리히)는 “사람이 불행한 것은 삶의 터전, 그 근본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는 근본을 회복하는 영적 변화운동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현대인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3가지 회색 그림자가 항상 따라 다닌다고 하였다. 즉 공허감(목적성의 문제), 죄책감(도덕성의 문제), 공포감(종교적 고민)이라고 하였다.” 허무함이 고통이 되고, 고통이 절망감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사람은 좌절한다. 좌절의 끝은 자살이다. 우리나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였는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연예인들 최근에는 야구 해설가로 유명한 하일성씨 등,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2)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으로 생각한다. 이 세상에 훌륭한 선생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저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으로 호칭한다. 실제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수 등 많은 선생님들이 있다. 선생은 단순한 존경의 대상이다.(랍비여, Master-) 흔히들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예수님으로 칭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한 선생으로 이해하거나 대할 때에는 삶의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예수님은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 단순히 훌륭한 선생이 아니다.
제가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했을 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었다. ‘예수님은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인간 이상도 인간 이하도 아닌 단순히 훌륭한 분이다고 답변한 한 기억이 있다.
제 삶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순한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공부에 불과하였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 삶의 주인이시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결코 우리의 삶의 변화는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님을 알아가는 지식 가운데 성장해야 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베드로의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잡힌 고기를 보고 그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고백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예수님을 대한 베드로의 태도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선생에서 주님으로, 나아가 자신의 자아관도 변화되었다.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였다. 그는 회개하였다. 베드로는 지난날의 자신의 경험적 교만을 회개하였다. 갈릴리 바닥에서는 고기 잡는 일에는 나보다 나은 어부가 없었는데, 예수님은 고기 잡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목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하는 교만에서 회개하였다. 그는 지난날의 자신의 지식적 교만에서 회개하였다. 고기는 밤에 잡으며, 그물은 얕은데 내려야 고기가 도망가지 못하고 다 잡히는 데, 예수님은 대낮에, 그것도 깊은데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어부인 자신의 지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무식하게 고기 잡는 일이라고 생각한 교만이었다. 베드로는 믿음 없음을 회개하였다. 아마 베드로는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 말 속에는 아마 이제도 못 잡을 것이 뻔합니다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인격과 체면을 보아서 일단 내립니다. 마지못하여 순종을 하였다. 순종은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없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적 교만과 경험적 이성,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을 회개하였다. 또한 그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 예수님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깨달았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다. 예수님의 무한한 용서와 은혜를 경험하였다. 예수님의 한량없는 넓은 마음을 느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우리나라 석학의 이어령 교수의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책이 출판되었다. 결코 믿음은 지식으로, 합리적 이성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깨달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자신의 얄팍한 지식적인 교만, 완전하지 못한 경험, 불안한 이성적 판단,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돌아설 때 찾아온다. 오직 주님만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믿음은 주님께 굴복하며 항복할 때 찾아온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삶의 주인임을 고백할 때 일어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어느 지인이 보내온 카톡의 내용입니다. <제목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한때는 이 아름다운 집이 제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꾸민 아름다운 우리 집--잡지에 여러 번 나왔다고 내심 자랑스러워했던 우리 집, 행여나 때가 탈까 혹여 먼지 탈까 쓸고 또 쓸고 했던 우리 집--하지만 남편이 아프고 보니 제가 있을 곳은 궁궐 같던 우리 집이 아니라 몇 평 안 되는 비좁은 병실이더군요. 피곤한 내 한 몸 누일 곳은 푹신하고 안락한 라텍스 침대가 아니라 딱딱하고 좁은 보조 침상이더군요. 내꺼라 믿었던 남편과 공동명의로 되어있던 자랑스럽던 내 집도 알고 보니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만 봐도 뿌뜻했던 --참으로 고운 접시들, 참으로 이쁜 그릇들--난 왜 이렇게 꽃히는 게 많지? 남들은 그릇이면 그릇, 가구면 가구, 옷이면 옷--하나만 꽂힌다는데 난 왜 이모든 것을 다 갖고 싶지? 라며 투덜대며 만들었던 내 못 말리던 그릇 사랑, 그 수많은 이쁜 그릇들도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아무 소용이 없더이다. 제가 황량한 병실에서 쓸 수 있는 건--보잘 것 없는 플라스틱 접시와 종이컵뿐이더군요. 15자 붙박이장에 가득한 수많은 옷들과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명품 백들 이또한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서 편한 추리닝과 레강스면 족하더이다. 귀히 여기던 명품백도 필요 없더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십년 넘게 나의 자랑이었던--나를 빛나게 해준다고--나를 완전케 해준다고 믿었던 내 남편도 제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또한 내 것이 아니라고--이제 압니다. 내 분신 내 생명, 내 사랑하는 아이들조차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이 아이들 또한 그분이 제게 잠시 맡기셨던 선물임을 제가 잊고 있었네요. 이와 같은 이유로 근심, 염려, 또한 제 것이 아닙니다. 적혈구 수치가 모자라 수혈을 해도--의사가 제 아무리 무서운 말을 해도--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닌 걸 내 것인 양 소유하며 자랑하며 욕심내었던 제 무지를, 제교만을, 제 과거를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고(Nothing)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모든 역사를 행하신다. 반면 자신이 전부(Everything)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아무런 역사도(Nothing) 행하시지 않으신다.
2.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삶은 풍성하였다.(Everything)
예수님의 복으로 충분하다. 예수님 안에 있는 축복만으로도 충분하다.
(1) 베드로의 풍성한 삶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엄격히 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예수님께서 많은 배들 가운데 우연히 올라가셨는데 알고 보니 베드로의 배인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일생일대 최대 행운이다.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누구의 전도를 통하여서든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찾아오신 것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친구를 통해서, 교수를 통해서, 우연히 길가에서 어떤 분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서 찾아오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이며 축복의 시간이다.
인생은 만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풍성함은 올바른 만남에서 시작된다. 잘못된 만남은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간다. 불행의 시작이다. 파멸의 징조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만남으로 인하여 그들의 인생은 파멸로 끝나버렸다. 일생을 좌우하는 것은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이다. 우리의 영원한 삶을 좌우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배에 모셨다. 모실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말씀 하신대로 그대로 순종하였다. 풍성한 삶을 경험하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자신도 놀라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놀랐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6-7)
(2) 베드로의 풍성한 삶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경험되었다.
그의 풍성한 삶의 경험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5:5)
놀라운 결단이었다. 자신의 경험, 지혜, 이성적 판단, 자존심,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였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놀라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8-10)
시편 저자는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소유는 주님의 말씀을 지킨 것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시119:5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삶의 허무에서 충만함으로 변화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삶과 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9-10)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에 살아가면 풍성한 삶과 충만한 은혜와 복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 안에 어떤 풍성한 삶이 주어져 있는가?
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잃어버렸던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였다.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영생을 다시 얻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유한함에 대하여 비통해 하는가? 오래 살아도 100세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주 소수에 불과한 사람이 누리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얻었다. 생명이 풍성하여졌다. 우리나라 어떤 곳에 가면 150세까지 살도록 보장해 주는 명의와 신비한 약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인천공항은 날마다 북새통으로 터져 나갈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유한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영생)을 주셨다. 우리의 생명은 이제 너무나 풍성하게 되었다. 노아 홍수 이전의 인간의 평균 연령은 900세가 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900세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지난 7월에 소천하시기 직전에 숙모님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병상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영접하였다. 너무나 기뻐하셨다. 좋아하셨다. 임종 직전에 다시금 구원의 확신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누구를 가장 보고 싶으시냐고 질문하였다. 혹시나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만나고 싶은 분이 있으면 만나도록 주선하고 싶었다.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하나님을 가장 보고 싶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영접한 지 4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분명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지 감격하였다. 가족들과 함께 임종 예배를 함께 드렸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너의 등불 밝혀있나 기다린다 신랑이 천국 문에 이를 때에 그가 반겨 맞으리, 기다리던 성도들과 그 문에서 만날 때 참 즐거운 우리모임 그 얼마나 기쁘랴.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문에서 만나보자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② 말할 수 없는 은혜와 평강을 누린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복음의 유익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은혜와 평강이다. 은혜는 복음의 뿌리이고, 평강은 복음의 열매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원받았다. 나의 공로나 노력이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로 구원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베푸시는 호의, 즉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의 선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인가!!!
평강은 무엇인가? 이 은혜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평강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을 때 찾아온다.
Peace with God(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면 불안이 없다.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작금의 한국 상황은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와 미국 군대가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마음의 평강이 찾아온다. 불안하거나 초조하거나 두려움이 없다. 이것이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의 축복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였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의 풍성한 축복을 날마다 경험하고 살아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진정한 평강(화평)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가 완전히 변하면서 찾아오는 평안이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있던 우리가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 있다는 증거이다. 이 은혜는 믿음이 지극히 약한 신자라할지라도 이런 고귀한 지위를 얻은 것이다. 이 평강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롬5:10) 그리스도의 완성된 일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히 의로워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평강이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살후3:1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얻은 평강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은 시116:7이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③ 포기할 수 없는 소망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골1:5)을 언급하고 있다. 이 소망은 온 지구 안에도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망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에는 끝까지 품는 “소망의 풍성함”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6:11-12) 이 소망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고 권면한다. 이것이 소망이다. 또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영생의 소망과 부활의 소망과 상급의 소망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시련을 넉넉하게 극복하게 한다.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천국을 사모하게 한다.(벧전1:6-9).
우리는 이미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 죄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예수님께서 다시 강림하실 때 비로소 그 구원의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미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은 온전히 구원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소망의 풍성함으로 인해 지금 우리는 결국에는 찾아올 모든 것에 대한 온전한 확신과 기대를 누릴 수 있다. 우리 성도들에게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우리를 불러주신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도록 기도하였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1:18)이와 같은 좋은 소망을 은혜로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기를 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2:16-17)
④ 최고의 기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누리는 또 하나의 풍성한 삶과 축복은 기쁨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복음 안에는 기쁨이라는 놀라운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베푸신 최고의 선물이다. 그 선물의 내용은 기쁨이다.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로 하여금 얼마나 기쁘게 하였었는가!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기 위하여 요15장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그 목적은 우리의 기쁨을 돕기 위한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어떻게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가능하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날마다 기뻐할 수 있다.
날마다 우리의 구원받은 사실은 기억하며 살아갈 때 기쁨이 또한 충만할 수 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벧전1:5-6, 빌4: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날마다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렘15:16) 기도하는 삶을 통하여 또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요16:24)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우리 영혼의 영원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기쁨이며 평강이며 소망인가! 그리하여 생명책에 함께 기록된 성도들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다. 천국에 가면 영원히 함께 해야 할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1-4)
(5) 깊고도 깊은 사랑
-손동표 형제님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메시지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평강 가운데 살아간다. 넘치는 소망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간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간다. 날마다 하나님의 깊고도 깊은 사랑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요!
아! 나는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넘쳐야 한다.
<무엇이 더 필요해> 재인용
시편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떤 목사님이 이웃 교회에 시무 하는 후배 전도사로부터 자기 교회의 주일 밤 예배에 설교를 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고 날짜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이웃 교회의 전도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보에 싣기 위해 설교제목과 성경본문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본문은 시편 23편 1절부터 6절까지" 그러자 전도사님은 ”그러면 제목은 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고 대답했습니다. 전도사가 이를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 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아마 그 뒤에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약속한 주일밤 저녁 예배에 그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아 강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밤 예배 설교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가 콱 막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에, 핀잔처럼 전도사에게 한 말이 제목으로 붙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찬송을 하면서도,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서도 제목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목사님은 "그래, 제목대로 설교를 하자!"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준비한 설교의 원고를 덮고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을 바꾸니 말씀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푸른 풀밭의 싱싱한 풀을 원하십니까, 맑은 시냇가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은 그 풍성한 풀밭에서 풀을 뜯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너무 배가 불러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양은 배가 불러도 몇 시간씩 계속 풀을 뜯고 우물거리며 되새김질을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목자에게서 오는 참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 분의 양이 되니 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며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기도에 수없이 많은 요구사항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는 것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달라는 말도, 푸른 풀밭에 눕게 해 달라고 울면서 조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목자가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그래서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 것, 그것이 진정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0-11)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더(better) 풍성한 삶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기쁘고 즐겁고 만족하며 감격하고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관심이다. 주님은 이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책임지고 계신다.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의 구원이다.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우리의 영혼을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풍성하신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며 충만하도록 해야 한다. .
마이클 호든은 <복음이 이끄는 기독교>에서 “신앙 여정의 첫 시작만이 아니라 중간과 끝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이다.”라고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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