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번 라이더. Wyvern rider
writer The Fool
[ 와이번 라이더 부대장 알드버크 벨든경. 그대를 반란 진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
위엄 있는 목소리가 궁내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건 황제의 말이 아니다.
[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명으로. ]
역시. 황제는 오지 않았다.
[ 대 파르너스 제국의 용맹한 와이번 라이더들은 저 극악무도한 반란군을 진압하라. ]
나는 발 밑에 깔린 붉은 카펫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언뜻 보았던 황제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저 목소리는 틀림없이 헤인터스 공작의 목소리 일 것이다. 나는 이제서야 중장기보병의 출병식 때에도 황제가 오지 않았다는 소문을 믿을 수 있었다.
고귀하신 폐하께서 심각한 여름감기에 걸려 수많은 후궁들의 손길 속에서 정성어린 간호를 받고 계실지, 아니면 술의 연못 속에서 또 어느 궁녀를 희롱하고 계실지는 폐하의 시종들과 저기 헤인터스 공작만이 알 일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는 대신 붉디붉은 카펫을 노려보았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므로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와인빛 카펫 뿐이었다. 너무 붉어 피로 물든 것처럼 보이는 카펫. 실제로 많은 충신들의 피를 머금었던 카펫.
[ 벨든경. 부디 승전하고 돌아오시오. ]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황후폐하의 목소리일 것이다. 불쌍하신 황후폐하. 오늘은 또 무슨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아픈 마음을 가리고 오셨을까.
가벼운 갑주 소리가 울리자 우리는 일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벨든 사령관은 군청색 망토자락을 위엄 있게 휘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우리를 지나쳐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황후폐하의 의복을 구경할 세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의 거만한 모습을 바라볼 세도 없이 다른 대원들을 따라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궁 밖으로 빠져 나왔다.
고풍스런 샹들리에의 밝은 빛을 뒤로 하고 나온 우리들을 맞은 것은 시민들의 환호성이었다.
[ 와아아아! 와이번 라이더들 만세!]
[ 반란군을 진압해 주세요! ]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모자나 맨주먹을 흔들며 소리쳤다. 벨든 사령관은 웃거나 팔을 흔들어 보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는 그에게 거만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뒤에 서 있던 내가 어색해져 버렸고 나는 누가 보아도 어설펐을 웃음을 지으며 팔을 흔들었다.
열광하는 청년들 뒤로, 수줍어하는 처녀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내 옆에 서서 걷고 있는 가돈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처녀들을 향해 손짓했고 그 손짓을 받은 처녀들 무리에선 어김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처녀살인마를 옆에 두고 이상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그건 같은 또래의 청년이라면 누구나 이 녀석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래. 전혀 나쁜 것이 아니라고...
[ 누란타스 평원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
나는 그 이상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 내 뒤에서 걷고 있던 폴디온에게 물었다. 그는 평소처럼 호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늘 그렇지만, 난 이 중년의 기사가 참 좋다. 이상한 뜻은 아니고.
[ 넉넉잡아서 2시경 정도는 걸릴 거야. 지금이 오전이니 태양이 이스트 카라본으로 짧게 그림자를 드리울 때 도착하겠지. 왜 그런걸 물어보는 거지? 언제 도착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
[ 아니, 그냥.....가만. 전 그런 거 물어보면 안됩니까? ]
할말이 없어서요... 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괜히 소리 높여 말했다. 폴디온은 잠시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 뒤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솔직히, 전혀 유쾌하지 못한 전쟁이야. 농민들을 상대로 와이번의 주둥아리를 놀리라니. 굶주림에 지쳐 들고 일어선 사람들이야. 그런 백성들을 상대로 칼부림을 해서 먹기 좋게 다듬은 다음 와이번들의 입 속으로 던져 넣으라고? 젠장.]
[ 마법사를 끌어들인 죄죠. ]
말은 이렇게 했으나 내 마음도 편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파르너스의 수도는 번성하는 반면, 황실과 귀족들에 의해 심한 착취를 당하는 주변 중소 영지의 주민들은 지옥 같은 기근에 시달렸다. 특히 동쪽에 위치한 이스트 카라본은 더욱 심했다. 야만족의 침입이 주로 일어나는 지역이지만 황제는 무관심했고, 가뜩이나 토지가 거칠어서 농사가 안돼는 지역에 수 공예품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귀족들이 여러 가지로 갈구는 곳이었다. 몇 달밤을 지새워 만든 공예품들은 모두 근방 영주들이나 수도의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빼앗기던 세월이 몇 년. 드디어 굶주림에 지친 그곳 백성들이 서로 연합해 봉기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지방의 작은 영지들을 침범하던 반란군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나라에서 금지하는 마법사들을 거액을 주고 끌어들였고, 그 전투력으로 이스트 카라본 전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로 전진해 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도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누란타스 평원에 이르렀다.
때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황제는 부랴부랴 진압군을 파견했으나, 그것조차 열세에 밀리자 파르너스의 자랑인 우리 와이번 라이더 부대를 파견하는 것이다. 매우 꺼림칙한 싸움이다. 걷잡을 수 없이 강성해진 반란군의 전력 또한 문제지만 농민들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심난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와이번들은 궁성 밖에 위치한 작은 언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훗날 차기 와이번 라이더를 꿈꾸는 우리의 종자들이 그것들을 묶어놓고 있었고 사람들은 차마 그곳 까진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언덕 아래에서 그 인파가 끊겼다. 우리는 체인 메일을 철퍽거리며 언덕위로 올라갔다. 우리들이 내는 갑옷 소리는 순진한 백성들이 듣기에는 충분히 경외감을 품을 만했다.
우리는 가벼운 체인 메일을 입고, 그 위에 파르너스 제국의 문장이 새겨진 서코트를 덧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최대한 와이번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팔을 감싸는 뱀브레이스나 컨틀릿은 모두 소가죽이었고 금속이라면 미스릴로 만든 헷멧과 그리브, 사바톤 뿐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선 최고의 무장이었다. 하늘을 날며 칼을 휘두르는 싸움에는 망토가 필요 없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그것을 어깨에서 풀어 던져버린 우리는 일제히 와이번에 올라탔다. 언덕 밑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환호를 울리는 사람들 사이에 작은 꼬마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바로 어젯밤에 주점에서 친구들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던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 전 나중에 커서 테일더 아저씨처럼 용감한 와이번 라이더가 될꺼예요! ] 하며 나를 성가시게 굴었던 주점 집 아들녀석이었다. 그 꼬마녀석은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밝은 얼굴로 손을 머리위로 흔들고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파란 눈이 꼭 벨든 사령관을 닮았다. 하늘에 참 잘 어울리는 눈이지만 꼬마야, 넌 하늘보다 바다로 눈을 돌리는 편이 나을 거야. 와이번 라이더는 네 생각처럼 멋지기만 한 것은 아니거든.
저 녀석은 우리가 지금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피를 짜러 출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 졌다. 그래도, 난 저 꿈 많은 어린아이들과 소년들이 꿈꾸는 와이번 라이더다.
창공을 나는... 와이번 라이더. 비록, 내 뜻대로 날지는 못할 지라도.. 나는 하늘을 난다.
[ 워어어어어....이야! ]
벨든 사령관이 먼저 와이번 라이더 특유의 고함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그 뒤를 이어 50명의 라이더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비상했다.
[ 워어어어!!...이야!]
[ 캬아아아악!!!]
순식간에 크고 검은 날개들이 푸른 하늘을 뒤덮었다. 와이번들은 흉칙한 주둥이를 벌리며 기괴한 울음을 질러댔다. 육중한 와이번의 몸들이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높이 솟아오르자 밑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열광했다. 지금까지의 착잡한 기분들이 한순간 사라지며 짜릿한 스릴이 솟구쳤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치고 지나갔다.
태양이 불타오르는 이스트 카라본을 향해 51마리의 와이번들이 힘차게 날개를 퍼덕였다.
◇ ◇ ◇ ◇ ◇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지만 검은 박쥐 때처럼 넓은 하늘의 한 구석을 까맣게 물들이는 우리의 모습은 더없이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 흉폭한 와이번 때들마저 한낱 새 때처럼 그 품안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와이번의 약 2야드 정도의 긴 날개가 서로 부딪치지 않게 하기 위해 충분한 간격을 벌려가며 날았다. 이따금 와이번의 날개가 양옆으로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나는 다시 우울해진 눈빛으로 와이번의 울퉁불퉁한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돌기가 돋은 그것의 목에는 말의 갑주를 변형시킨 갑옷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전투에는 별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었으나 헤인터스 공작의 강력한 명령으로 인해 달린 것들이었다. 와이번 라이더 부대의 위엄을 갖추어야 된다나 어쩐다나...어쨌든 쓸모 없는 짓은 참 잘하는 위인이다.
내 와이번의 이름은 마호스이다.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의 몸에다가 천사의 날개를 붙여놓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무시무시한 괴수의 이름이다. 문득 이 녀석에게 '플라워 페롤'이라는 이름을 붙이라는 여동생의 거의 협박에 이르는 청을 거절하느라 죽을 고생을 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다른 동료들이 와이번의 이름을 짓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는지 궁금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들의 표정은 전에 없이 침울했다. 나는 이 침묵을 깨는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조용히 기다렸다. 역시, 내가 그 인물이 되기는 싫다.
[ 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나는 놀란 눈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폴디온도, 가돈리스도, 벨든 사령관도 아닌 커슨 소리트라는 젊은 라이더였다. 그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으로, 그의 첫마디에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젊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말에 제약을 넣지 않는 법이다. 다른 동료들도 그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말없는 것으로는 벨든 사령관과 맞먹는 우리 부대에서 3명뿐인 와이번 메지션중에 리더인 메버시즈도 소리트를 향해 이채로운 눈빛을 보냈다.
[ 우리는 왜 자기 자신을 위해 날지 못하는 겁니까? ]
커슨 소리트가 존댓말 할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이 부대에 많지만 나는 그의 물음이 벨든 사령관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사령관 또한 그것을 알았는지 잠시 후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가, 소리트? ]
[ 저는 마음껏 하늘을 날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서요!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저 자신을 위해 하늘을 날고 싶었단 말입니다. ]
맙소사. 이 친구가 기어코 이곳에서 일을 터트릴 모양이로군.
나는 평소에는 크게만 들렸던 와이번의 날개짓 소리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작게 들리는지에 대해 애꿎은 와이번들을 원망하며 불안한 눈으로 소리트를 바라보았다. 이봐, 그만하라고!
[ 그래서? ]
벨든 사령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리트는 더욱 큰 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 저 평야에서 기다릴 반란군은 다름 아닌 파르너스의 신민 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원할 뿐입니다. 나라에서 그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착취요? 강탈이요? ]
소리트가 점점 흥분해 하는 것 같자, 폴디온이 재빠르게 그 둘 사이를 막아서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령관은 아무 말 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런, 10년 동안 사라졌었던 멀미인가.
[ 하하하! 자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군. 저들은 황제폐하께 반기를 든 반역 무도한 역도들이야. 잠깐 어려운 주위 환경을 빌미로 제국을 위협하고 권력을 잡아보려는 작자들이라고 ]
맘에 없는 소리 하기는. 소리트도 그걸 알았는지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 저들의 봉기 원인은 그런 게 아닙니다. 설령, 권력을 잡더라도 저들은 이 썩어빠진 나라를 바꾼 다음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 이런..이런... 반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 그것은 곧 나라를 갈아엎고 자신들이 왕이 되고 귀족이 되어 좌지우지해 먹겠다는 거야. 제자리로 돌아가? 웃기는 소리. 자네는 어렸을 때 '플로벤드의 요정' 이야기도 못 들어봤나? 권력이란 건 황홀한 노래로 듣는 사람의 식음을 전폐하게 만들고 집착, 증오, 분노만 낫게 만드는 플로벤드의 노래와 같은 거야. 뜻하지 않게 잡았어도 한번 맛보면 절대 놓지 못하는 아편과도 같은 거지. 그것이 의도적인 반란에 의해 잡은 권력이라면 더더욱! ]
[ 적어도 이 썩은 나라보다는 나을 겁니다! ]
결국 도를 넘어섰다.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벨든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덧 뜨거운 태양 빛은 우리들의 머리 바로 위를 비추고 있었고, 사령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그의 파란 머리가 아쿠아 마린 보석처럼 황홀하게 반짝였다. 나는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번뜩 깨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이다.
[ 커슨 소리트. 더 이상의 무도한 발언은 용서하지 않겠다. ]
순간 하늘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스하게 느껴졌던 바람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와이번 라이더들의 얼굴 또한 파랗게 질렸다. 엄청난 위압감. 평생을 전장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제국을 위해 싸웠던 이 만이 가질 수 있는 세월의 무게였다. 끼르륵.. 하고 사령관이 타고있던 와이번이 묘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소리트도 벨든 사령관의 기세에 눌렸는지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철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여전히 새파랗게 질려있는 가돈리스를 바라보며 웃음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십년감수했네.
이윽고 누란타스 평야에 이르는 관문 같은 페트나실 산맥이 멀리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작은 산들로 시작한 그 거대한 산맥은 점점 높은 고산들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맥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 높이 솟아오른 산맥의 봉우리들을 바라보자 숨이 탁 막혔다. 우리는 바로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기암절벽을 피하기 위해 더욱 높이 날아올랐다. 기압이 심장을 압박해 오는 것 같다. 갈색 기암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은 계곡을 지나 산맥은 녹음에 휩싸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그린 드래곤의 모습처럼 긴 꼬리를 늘어뜨린 채 우리를 향해 도도히 고개를 쳐드는 것 같았다. 나는 상체를 약간 숙이며 와이번의 목에 더욱 밀착시켰다. 다른 동료들 또한 그렇게 했다. 하강을 위한 준비이다.
그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소리트가 대열을 벗어나 급 하강을 해버린 것이다. 모두들 분노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댔고, 일부는 소리트를 잡으러 하강하려고 했다. 그러나 벨든 경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저지했다. 나는 놀란 나머지 고삐를 놓칠 뻔했고, 폴디온과 메버시즈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발 밑을 바라보았다.
급 하강하던 소리트가 갑자기 다시 위로 솟아올랐다. 나는 그의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벨든 사령관에게 그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소리트의 광란에 가까운 비행은 계속되었다. 그는 와이번의 날개를 접었다 다시 펼치며 고속으로 날아가기도 했고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다가 빙글빙글 도는 등 전혀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는 행동을 했다. 그의 모습은 한편으론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아름답기까지 한 그 비행을 어느새 나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마음껏 날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권력이나, 명령이나,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그 심정은 나도 같았기에 나는 그가 죽을 만큼 부러웠다. 겁 없이 대열을 이탈하고 마음껏 하늘을 날아볼 패기가,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그래서 그 젊음이 부러웠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는 그 어리석은 젊음을 어리석을 정도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한참동안의 비행을 마친 소리트가 천천히 대열을 향해 날아왔다. 벨든 사령관은 그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도 한마디하지 않았고, 소리트는 더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 이제 후회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기사로서 그 존엄한 이름을 더럽힌 죄, 여기에서 갚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떠한 일에도 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황제 폐하는 주색에 눈이 멀었고, 귀족들은 권력과 돈과 명성에 눈이 멀었고, 백성들은 무지에 눈이 멀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의해 눈이 멀었고, 저는 젊음에 의해 눈이 멀었다는 것을요! ]
[ .... 그 말, 후회 없는가? ]
벨든 사령관이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왠지 일이 이상하고도 위태로운 방향으로 진전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는 어떻게든 그 둘 사이에 끼어 들려고 했다. 그러나 내 입과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폴디온또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 네! 후회 없습니다. 저는 드디어 제 마음대로, 제 자신을 위해 날아보았거든요. 처음이자...마지막으로. ]
저 멍청이가!
욕을 퍼붇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멍청이 입을 벌린 상태로 그 둘을 주시 할 수밖에 없었다.
[ 커슨 소리트. 너의 그 용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너는... 진정 젊구나. ]
더 이상의 진전은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폴디온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보다 먼저 벨든 사령관이 쩌렁 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와이번 라이더 부대 12대 대원 커슨 소리트. 너는 감히 황제폐하를 모욕하고 역심을 품었으며 와이번 라이더로서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써 와이번 라이더의 긍지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므로 나 와이번 라이더 부대장이며 진압군 총사령관인 알드버크 벨든은 너에게.... 라이더로서의 최악의 형벌을 명한다! ]
순간 등골이 오싹해 지는 것을 느꼈다. 라이더로서의 최악의 형벌이라.. 와이번 라이더로서의...
[ 추락형이다. ]
사령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열 가장 뒤쪽에서 날아오던 두 명의 라이더들이 빠른 속도로 소리트를 향해 다가왔다. 소리트가 타고있는 와이번의 양옆에 다가선 그들은 무서운 동작으로 칼을 뽑아들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와이번의 두 날개를 잘라버렸다. 소리지를 사이도 없었다. 날개를 잃은 와이번은 끼르륵 거리는 괴음을 내질르며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소리는 곧 멀어져갔다. 나는 마지막 소리트의 모습이 웃고 있었다는 것을 믿고싶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아무리 패기 넘치는 젊은이라 해도..그것은... 치기일 뿐이다. 치기일 뿐이라고! 바보같은! 멍청한! 어리석은 치기일 뿐이라고!
와이번은 비명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삐를 더욱 세게 부여잡았다.
◇ ◇ ◇ ◇ ◇ ◇
모두들 말없이 지루한 비행을 계속했다. 아니, 지루하지는 않았다. 극도의 긴장감이 우리들 사이를 휘감아 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소리트의 죽음을 기억에서 지우려 애썼다. 집에 두고 온 여동생 생각도 해 보았고, 몇칠 전 술집에서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 세비니아스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도중에 그만두었다. 나는 곰곰이 소리트에게 내려진 추락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하늘을 나는 와이번 라이더의 최고의 영광은 바로 하늘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서 공습하다가 대부분 땅에 떨어져서 죽는 와이번 라이더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 이었고, 운 좋게 늙을 때까지 살아남은 라이더들만이 와이번의 등 위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됐다. 하늘에서의 죽음을 꿈꾸는 그들에게 있어서 불명예스러운 추락은 최악의 형벌이다. 그러나 벨든 사령관은 최대한 소리트를 배려한 것이었다. 적어도 그의 와이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지는 않았으니까. 소리트는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고삐를 놓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아 뻣뻣해져 버린 것 같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49명의 라이더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폴디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그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는 증오에 찬 눈으로 벨든 사령관을 쏘아보고 있었다. 물론, 벨든 사령관은 맨 앞에서 날아가고 있는 중이라 그 시선을 정면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었다. 벨든 사령관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윽고 섬뜩할 정도로 서글픈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폴디온... 자네라도 평소처럼 웃어주게. 안 그러면 내가 고통스러워 못 참을 것 같군. ]
그때까지만 해도 벨든 사령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폴디온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그는 보는 이가 슬퍼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사령관님 다운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혀, 그 젊은 죽음을 애도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평야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
사실이었다. 이미 페드나실 산맥은 뒤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저 푸른 평야만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것은 바람에 의해 연두빛으로 물결쳤다. 초록색 바다같다. 이 초지를 벗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황도색 토양이 펼쳐진 광야가 나타난다. 바로 누란타스 평원이다.
[ 소리트군은... 와이번 라이더가 자신을 위해 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건 모르는 말이네. 자네들은 전장을 몇 번 누벼보아서 잘 알 테지. 저곳이 바로 우리가 날아야 할 곳이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
[ ... 알고 있습니다. ]
폴디온이 쉰 목소리로 사령관의 말에 답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저 전쟁터에서는 오직 자신을 위해 날 뿐이었다. 살기 위한 비행보다 더 자유로운 비행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저 곳으로 이끈 것은 더러운 권력의 명령일 지라도 저곳에서만은 본능대로 움직인다. 나 자신을 위해 피에 젖은 날개를 퍼덕이는 저 곳에서는.
[ 폴디온 산트벅. 나는 인간이네. ]
[ 네, 알고 있습니다....예? ]
폴디온은 그만 우스꽝스러운 대답을 해버렸다. 나는 벨든 사령관이 소리트에게 내린 너무 잔혹한 형벌 때문에 잠시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는 제 정신인 듯, 아주 정상적인 말을 꺼냈다.
[ 소리트도 인간이었네. ]
[ 네, 소리트도 인간....예? ]
다른 대원들의 눈빛이 점점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변했다. 폴디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고, 메버시즈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마음 약한 가돈리스가 거의 울먹이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 이해하겠나?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 할 수 있는 인간일세. 소리트도 인간이었네. 하지만 나는 세월 때문에 옳고 그름을 판단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네. 세월은 나에게 쓸모 없는 가치관만 부여하고 지나갔어. 그리고 그 쓸모 없는 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선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어 버렸지. ]
[ 사령관님, 그 말은.....]
[ 그래. 그래도 난 내 신념을 따를 생각이네. 더러운 거름 밭도 농부에겐 중요한 것이니까. 나는 더 이상 그 밭에서 농작물이 나지 않아도, 악취에 속이 쓰리고 역겨움에 시달릴 지라도... 더럽다며 갈아엎으라는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지켜낼 것이네. 나는 그 거름이 토양 속으로 다 스며들고 나면, 그 어느 땅보다 비옥해 질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 ]
말을 마친 벨든 사령관의 얼굴은 이제까지 보아왔던 그의 모든 표정중에서 가장 행복한 것이었다. 그는 뿌듯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도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하늘에 있었지만 저 푸른 하늘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폴디온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사령관님! 집에 계신 부인께서 들으시면 더욱더 사랑이 불타오를 만한 멋진 말씀 이셨습니다! 돌아가자마자 제가 살짝 말씀 드릴게요! 사령관님은 멋진 밤을 맞을 준비만... ]
폴디온의 다소 무례한 농담은 끝을 맺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멀리 누란타스 평원의 황갈색 토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새까맣게 대지를 뒤덮은 병사들도. 가장 높은 곳에서 날던 메버시즈가 소리쳤다.
[ 사령관님! 반란군이 보입니다! 현재 진압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군이 수적으로 불리합니다. 서두르셔야 겠습니다! ]
이것이 내가 메버시즈에게 들은 가장 많은 말이었다. 나는 놀라워 할 새도 없이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와이번에게 하강 신호를 보내었고 대원들은 일제히 고도를 낮추었다. 벨든 사령관이 빠른 속도로 말했다.
[ 메버시즈! 자네는 다른 와이번 매지션들과 함께 위에서 우리를 엄호하고, 내가 별도의 신호를 보내면 곧바로 큰 거 한방 날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게나!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우리는 적군의 중앙을 격파하고 후방으로 후퇴한다! 아군이 대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해! ]
수적으로도, 마법사의 수로도 우리는 현저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전멸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노리는 건 최대한의 아군 후퇴. 이제 전장터는 바로 우리의 발 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전투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칼로 베고, 찌르고, 조각나고. 여기저기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들의 붉은 피를 보고 있자 내 안에서 흐르고 있던 피들이 역류하는 것 같았다. 뜨겁게 들끓어 오른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허리춤에 차고있던 칼을 빼내어 들었다.
[ 공격!! ]
벨든 사령관이 소리쳤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와이번을 급 하강 시켰다. 와이번들의 두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한 적군의 머리 위를 스치는 순간, 폴디온은 어느새 움켜든 플레일을 흔들며 고함을 질러댔다.
[ 야아아아아!! 식사시간이다!!! ]
[ 우어어어어!! ]
[ 키야아아아악!! ]
검고 커다란 날개들이 순식간에 전쟁터 위를 뒤덮었다. 이 맑은 날 어둠이라도 덮쳐온 듯 적군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우리는!!
[ 와이번 라이더 들이다! ]
적군 하나가 소리쳤다. 나는 와이번을 수평으로 날게 하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물컹한 무엇인가 베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딱딱한 감촉이 손에 와 닿았다.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검에 힘을 가했다. 아까 소리친 적군의 머리가 튀어 올랐다. 머리는 땅에 툭 떨어졌고, 그 위를 말 하나가 밟고 지나갔다. 그 머리의 뇌수가 사방으로 터질 때, 나는 두명의 목을 더 추가시켰다. 적군들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 베기가 훨씬 수월했다.
나는 그때 마침 허공을 가르는 검들을 피하기 위해 와이번을 살짝 위로 틀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주위에 있는 적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역시, 위에서 공격하기에는 머리 만한 것이 없지! 검을 쥔 손이 뜨거워졌다. 적군들도 밑에 있는 자신들이 불리한걸 알았는지 나에게 덤비는 것을 꺼려했다. 주저하는 그들의 품을 날카로운 검과 창이 꿰뚫었다. 나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와이번을 위로 날렸다. '불쌍한 백성들...'이라는 생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나에게 남은 건 전사로서의 본능뿐이다.
나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가돈리스가 상당히 고전하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확실히 많은 숫자의 적군을 상대로 긴 바스타드소드를 내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속으로 와이번을 몰며 검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저절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베고 지나갈 수 있었다. 아군 적군 못 가리는 게 문제지만.
나는 가돈리스를 둘러싼 적병들을 무너뜨리며 그 사이를 활보했다. 내 검 끝엔 거칠 것이 없었다. 검 끝이 스치는 곳에는 어김없이 피가 튀었으며, 나는 짜릿한 쾌감 속에서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 으아아아--앗!!]
검을 사선으로 내리긋자, 기분 나쁘게도 뇌수와 피가 뒤엉켜 내 서코트에 튀겼다. 안면만 싹 잘려나간 적은 쓰러져서 한동안 꿈틀 대었다. 나는 그의 고통에 찬 몸부림을 구경하지 않았다. 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구경할 만한 대상은 수도 없이 많다. 나는 또 한번 팔을 휘두르며 곁눈질로 다른 와이번 라이더들의 동태를 살폈다.
와이번들의 날개는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흉악하게 일그러진 라이더들의 얼굴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 하나를 찾아내었다. 폴디온은 신나게 플레일을 휘두르며 적군들의 머리를 박살내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진득한 피 안개가 피어올랐다. 저, 저건 악마다..그래, 나는 폴디온 보다는 고상한 와이번 라이더라고. 행복하게 여기라고 친구!
나는 그 이름 모를 친구에게 머리만 따로 분리되어 하늘을 구경할 수 있는 영광을 안겨다 주었다. 빠르게 휘두른 내 검에 의해 그의 머리는 쾌속으로 떠올랐다. 절단된 모가지 밑에서는 뜨거운 선혈이 붉은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지극히 황홀한 죽음이다. 인간이기에 맛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도 잔혹한 죽음이라고! 나는 울컥 울음이 밀려오는 것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의 피는 너무나도 붉었다. 내 피처럼. 당연하지, 같은 인간이니까!!
입가에 흐르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검을 휘두르는 내 등 뒤로 갑자기 폭팔음이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와이번을 위로 띄어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에서 화살들이 덮쳐왔다. 나는 무모하게도 검을 휘둘러 그 화살들을 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화살들은 나의 살을 파고들기도 전에 무엇인가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건...?
[ 이 멍청아! 눈 똑바로 뜨라고! 바로 뒤에서 적이 공격하는 것도 몰라? 여차하면 위로 올라와! 여기는 넓은 실드가 펼쳐져 있다고! 언제 저 빌어먹을 놈들한테 무너질 지 모르지만! 제기랄! ]
메버시즈가 욕을 섞어가며 소리쳤다. 그의 두 손에는 언제 또 만들었는지 화염구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어디론가 힘차게 던지며 와이번을 몰았다. 그는 지금 적군 마법사들을 상대하랴,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랴, 위험에 처한 동료들을 구하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날아가는 그의 뒤통수를 멍 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마호스는 흥분했는지 시끄럽게 끼룩거리며 그 날카로운 손톱으로 적군들의 머리통을 감싸쥐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액체가 내 발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와이번의 날개 밑으로 핏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그때, 거대한 빛의 구체가 내 바로 옆으로 작렬했다. 마호스는 그 충격파에 밀려 몇 미터를 날아갔다. 나는 직감적으로 마호스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를 태우고 있는 그 괴수의 몸이 떨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메버시즈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 이런 젠장! 신성계열 마법이야! 저거 한방 맞으면 와이번이고 뭐고 끝장이니까 알아서들 피하라고! 아, 사령관님! 8 클래스입니다! ]
의외로 사령관의 목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그는 폴디온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메버시즈의 말을 듣자마자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8클래스라고!! 메버시즈, 잠시만 버텨주게!! 대원들! 나를 거점으로 해서 퇴로를 뚫어! ]
그러자 나를 비롯한 와이번 라이더들은 점점 와이번들의 고도롤 높여가며 비행했다. 어느새 벨든 사령관을 중심으로 좁혀 들어간 라이더들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8클래스? 그게 도대체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경지란 말이야? 그것도 왜 하필이면 반란군쪽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적군의 중앙으로 침투했다. 화살 하나가 마호스의 목덜미에 박혀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팔이 빠지도록 검을 휘둘렀다. 적군 하나가 제법 빠른 속도로 도약해 마호스의 목을 노렸다. 나는 재빨리 검을 뻗어 그 검을 막아내고는 마호스를 옆으로 틀면서 적의 손목을 쳤다. 순식간에 손목이 사라진 적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고 나는 일말의 여유도 없이 검을 내리 찍었다. 뜨거운 피가 눈가를 적셨다. 마치 흐르는 눈물처럼.
[ 사령관니이임!!! ]
폴디온의 비명소리가 귓전을 치자마자 나의 고개를 저절로 벨든 사령관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공중에 그는 없었다. 대신 그가 와이번을 타고 적군들을 공격하고 있었던 바로 그 자리 밑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꽤 직책 있어 보이는 장수 2명과 대치 중이었는데, 옆에는 무참하게 찢겨진 와이번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벨든 사령관은 분노한 듯 보였고 두명의 장수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사령관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고래고래 벨든 사령관을 불렀다. 밑에서 무서운 기세로 찔러오는 창들을 피하며 그를 향해 마호스를 몰았다. 그러나 나보다 더 빨리 폴디온이 사령관 근처로 다가서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밑의 살기들을 베어내며 벨든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오른쪽 어깨에 큰 검상을 입고는 불안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장수 하나가 달려들자, 그는 노련하게 피하면서 검날로 적 장수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피는 튀지 않았다. 벨든 사령관의 검은 단단한 오리하르콘이다. 젠장, 질 못은 미스릴 갑옷이로군!
나는 더 이상 그의 싸움을 지켜 볼 수 없었다.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몇 발의 마법구가 작렬했기 때문이다. 저 병신 같은 8클래스 짜리라는 적군마법사는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죽였다. 오직 와이번만 맞추면 된다는 심보인가? 빌어먹을!
그때 나는 폴디온이 괴성을 지르며 벨든 사령관 쪽으로 뛰어드는 것을 목격했다. 벨든 사령관은 다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 위를 적군들이 피에 물든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폴디온은 와이번에서 뛰어내려 두 장수들을 향해 플레일을 휘두르고 있었다. 때마침 주인을 잃은 와이번은 폴디온의 머리 위만 배회하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날아든 빛의 구 한방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그 끔찍한 광경에 욕을 씹으며 위로 날아올랐다. 내가 날아오름과 동시에 하늘에서 무엇이 툭 떨어졌다. 와이번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와이번 메지션중에 한 명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마치 굶주린 이리들처럼 적군들은 그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메버시즈가 하늘에 펼쳐놓았다는 실드는 이미 사라졌는지, 화살은 아무런 방해받지않고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화살세례들을 피하며 폴디온을 향해 날아갔다. 이런 멍청이! 죽으면 안돼!!
폴디온의 플레일은 두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다행히도 그들 중 한 명의 머리를 맞춰 쓰러뜨렸지만, 그 바람에 그의 플레일은 회전을 멈췄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등 뒤로 다른 한 장수의 검이 파고들었다. 폴디온의 입가에서 튀어나오는 피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분노로 속이 뒤집혀지는 고통을 느끼며 장수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검을 휘둘렀다.
[ 이런 개자식!! ]
그는 갑자기 튀어나온 공격에 놀라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무거운 갑옷 탓인지, 시끄러운 갑옷 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나는 그 때를 틈 타 폴디온을 낚아챘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높이 비상했다. 한꺼번에 무리한 힘을 쓴 탓인지 팔이 끊어질 듯 아파 왔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폴디온의 뺨을 두드렸다.
[ 폴디온..폴디온!! 정신차려요, 폴디온 산트벅!! ]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폴디온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느덧 창백하게 변해버린 그의 입가에 붉은 선혈은 너무도 선명했다. 내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피 중에서 가장 맑은, 선명한 붉은색의 피.
[ 폴디온! 정신차려, 네 피를 보라고! 봐.. 이렇게 붉잖아? 당신은 젊어! 죽기엔 너무 억울한 나이라고! ]
그러자 폴디온은 금방이라도 숨 넘어갈 듯 한 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웃고있는 그가 나를 더욱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 넌...더 젊잖아... 우리는 모두 젊잖아.. 나도..너도...베, 벨든 사령관님도... 소리트도... 마음껏 날아보고 싶었잖아...쿨럭! 나는 와이번 라이더야. 고맙다. 테일더... 난..하늘에서...죽...]
[ 개같은 소리 말아! 죽는데 하늘이랑 땅이 뭐가 달라!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어, 알아? 죽는 건 마찬가지야! 어흐윽...폴디온!!!]
나는 오열했다. 피가 솟구쳐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다 죽여 버릴 거야. 황제도, 저 빌어먹을 반란군 장수도!! 나는 폴디온의 시체를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땅에 내려놓고는 다시 마호스를 타고 날아올랐다. 마지막 폴디온의 모습은 너무도 평온했다. 하늘에서 죽었다는 게 그렇게도 기분 좋아?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소리 높여 웃었다. 짭짤한 눈물과 비릿한 혈향이 어우러져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오열을 토하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와이번의 날개를 접어 급 하강했다. 저 빌어먹을 화살들은 떨어지지도 않는다. 무수한 화살들이나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 중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혔을 때, 나는 폴디온이 그랬던 것처럼 붉은 선혈을 토했다. 그러나 내 피는 그의 그것처럼 붉지 않았다. 묘한 절망감. 화살촉이 살갗을 파고들자 비명대신 고함소리가 나왔다. 나조차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내 눈에는 각양 각색으로 비춰지는 피들이 환상적인 향연을 펼쳤다. 그러나 이 피도 아니다.. 저 피도 아니야...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내가 10살 때 였던가. 아버지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 테일더, 넌 꿈이 뭐니?
아버지가 물었다. 옆구리엔 새총을 찬 코흘리개 어린애였던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 하늘을 나는 거요!
아버지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으음.. 그래? 그럼 새가 되면 되겠구나.
- 동물이 되는 건 싫어요!
- 그래? 그럼... 마법사를 하면 어떻겠느냐? 아니지, 너는 머리가 나쁘니까 안돼.
- 아빠!!
- 흐흠.. 그럼 어떻게 해서 하늘을 날 생각이냐?
나는 가슴을 펼치며 소리쳤다.
- 나는 와이번 라이더가 될거예요!
- 와이번 라이더?
- 네! 저 무시무시한 괴수를 타고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거예요! 아버지도 태워 줄게요! 그러니까... 죽지 말아요.
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말했다.
- 난.. 죽지 않아. 그러니 너도 빨리 커서 훌륭한 와이번 라이더가 되렴.
-네!!
약속과 달리, 아버지는 그날 밤 숨을 거두셨다. 나는 그때 까진 몰랐었다. 가장 빨리 가장 높은 하늘에 도달하는 방법을. 아버지는 알려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육체를 버리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방법을. 그러나... 나는 이제 알 수 있다. 젠장, 하늘이 너무 파랗다. 소풍가기 좋은 날씨다.
사례 9.
- 창공을 가로지르는 주요인물들[날씨 : 맑음, 시간 : 관계없음]
- 공습 장면
[날씨, 시간 : 관계없음, 공습의 주체는 용과 같은 비행 생물을 사용해도 관계없음]
- 출병식[날씨 : 맑음, 시간 : 오전]
- 서코트: 갑옷위에 입는 튜닉같은 겉옷
- 뱀브레이스: 팔뚝을 감싸는 갑옷
- 그리브: 정강이를 감싸는 갑옷
- 사바톤: 발등 덮개
퇴고도 하지 않고 쓴다음 곧바로 올린거라 허접하기 그지없습니다.
전쟁하는 글은 고사하고 사람 죽는것, 하늘을 나는 것도 처음 써보는 겁니다. 참 즐거운 시간이였죠~ [빙글;]
아무튼, 옆에 식염수가 있으시다면 다행입니다. 신종 눈병에 감염됬다고 저에게 치료비는 청구하지 마시구요. 다들 좋으시간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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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7,29 - by. The F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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