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렉터 박사를 기억하는가?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악마적 본성의 현현인 렉터 박사는 바로 그것 때문에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안소니 홉킨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렉터 박사는 영원한 생명력을 얻었다. 영화나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이 갖는 일반적 거부감 대신, 렉터 박사가 이상한 매력으로 우리들을 유인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극소수의 악마적 본성 때문이다. 우리는 그와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더 가까워지는 역설적 모순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전공인 심리학은 물론이고 예술 각 분야 혹은 요리에 대해서까지 전문가 이상의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다거나, 상대방의 빈 곳을 꿰뚫어보는 놀라운 통찰력, 감옥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지만 탁월한 분석력으로 다른 범죄자들의 내면과 다음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렉터 박사의 캐릭터는 매우 독특하다. 고귀한 삶의 기품이 넘쳐나는 그가 식인 살인마라는 생각을 도저히 가질 수 없게 만든다.
국부마취로 두개골을 절단한 뒤 뇌의 일부를 철판 요리로 만들어 다시 그 뇌의 소유자에게 먹이는 엽기적 장면은 [한니발]이 끝나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로 이어지는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가 [레드 드래곤]이다. 그러므로 [레드 드래곤]에는 한니발 렉터 박사가 스탈링을 만나기 이전의 사건들,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고 어떻게 붙잡혀서 FBI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가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그의 범죄가 시작되기 이전에, 렉터 박사라는 존재감만으로도 악의 실체를 충분히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가령, [레드 드래곤]의 첫 장면.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한다. 렉터 박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을 음미한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플룻 연주자가 조금씩 틀리자 렉터 박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다음 장면, 오케스트라단의 후원자인 렉터 박사가 단원들을 초대해서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만찬을 베푼다. 그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음식의 재료를 묻자 렉터 박사는 비밀이라고 대답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가를. 플룻 연주자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그들의 대화 속에 잠깐 삽입된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렉터 박사가 차가운 감옥 속에서 두꺼운 유리를 앞에 두고 FBI 초보 수사관 클라리스 스탈링과 만나던 장면을 기억한다. [양들의 침묵]은 각각 다른 형태로 상처 받은 남녀의 미묘한 긴장감이 살인사건과는 또 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유리라는 질료는 현실공간에서 그들을 단절시키지만 시각적으로는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들은 연인인가? 그들은 적인가? 우리는 클라리스와 동일시되어 렉터 박사의 자문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렉터 박사와 동일시되어 클라리스에게 삶의 지혜를 한 수 전하고 있는가.
렉터 박사를 소재로 한 토머스 해리스의 원작소설은 [레드 드래곤](81년), [양들의 침묵](86년), [한니발](99년)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들은 지금까지 모두 4번 영화화되었다. [레드 드래곤]이 [맨 헌터](86년)라는 제목으로 [히트]를 만든 명감독 마이클 만에 의해서, 그리고 이번에 다시 [러시아워]의 브렛 레트너에 의해서 리메이크된 것이다. [양들의 침묵]은 91년 조나선 드미 감독에 의해, [한니발]은 2001년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각각 영화화되었고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므로 [레드 드래곤]이 [맨 헌터]와 비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맨 헌터]에는 렉터 박사가 FBI 수사관 윌 그래엄에게 붙잡히기 이전의 이야기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양들의 침묵]처럼 렉터에게 자문을 받아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려는 그래엄과, 래드 드래곤이라는 살인범의 범죄를 음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레드 드래곤]은 [맨 헌터]에 비해 원작에 충실하다. 그리고 훨씬 상업적이다. 가볍고 경쾌한 행보로 사건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흥행전선에는 이상이 없다. [맨 헌터]에는 몇 차례 등장하지 않는 렉터 박사를 여러 번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가 존재하지 않는 시리즈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레드 드래곤]에는 [맨 헌터]의 우울한 비장미나 [양들의 침묵]의 스탈링과 렉터 박사 사이에 존재했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꼭 남:남의 대결이기 때문은 아니다.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대결 못지않게, 안소니 홉킨스와 수사관 에드워드 노튼의 대결은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비장미 넘친 화면으로 삶의 비극성을 표현하지도 않고, 팽팽한 심리적 대결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CF를 통해 입신양명한 브렛 레트너는 할리우드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여 지나치게 무겁지 않으면서도 관개들이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선에서 매듭을 짓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유머가 넘쳐나 관객들로 하여금 웃음을 짓게 만든다.
오히려 인상적인 연기는, [양들의 침묵] 이전의 렉터 박사를 연기하기 위해 몸무게를 10kg이나 감량한 안소니 홉킨스 대신, 유년시절의 상처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연쇄살인범 돌로하이드 역의 랄프 파인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알마시 백작이나 [쉰들러 리스트]의 나치 친위대 장교보다 이런 배역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렉터 박사 없이 [레드 드래곤]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거대한 상징처럼 영화 전편에 그의 넓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가? 그것이 렉터 박사 시리즈가 전해주는 파장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