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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곡 (穀)-색 (穡)-종선 (種善)-계전 (季甸)-우 (堣)-]
1.휘 계전 (季甸) 문열공 (文烈公) 의 둘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우 (堣) 대사성공 (大司成公) 의 전배위 (前配位)가 되시는 숙부인 (淑夫人) 이천서씨( 利川徐氏) 는 사성 (司成 ; 종3품) 서진 (徐晉) 의 따님이요, 판사재사 (判司宰事; 종2품) 서효손 (徐孝孫) 의 손녀요, 위위시승 (衛尉寺丞; 종6품) 서욱 (徐勗) 의 증손녀요, 채광록 (蔡光祿) 의 외손녀였다. 숙부인 서씨 역시 여느 한산이문의 며느리와 마찬가지로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명가의 후손으로 귀하게 성장하시다 한산이문에 시집오신 지체높은 분이셨다.
[참고: 문열공에겐 휘 육 (堉) 이란 맏아드님이 계셨으나, 일찌기 졸 (卒) 하여 후손들이 전하지 않아 보통 세간에는 휘 우, 휘 파 (坡), 휘 봉 (封) 세아드님들만 알려져 있음.]
우리는 이미 휘 축 (蓄) 망월암공 (望越菴公) 배위 정부인 (貞夫人) 이천서씨 편에서 이천서씨에 대해 잠시 알아본적이 있는데, 이천서씨는 태조 왕건 (太祖 王建) 을 도우며 고려 건국에 협력함으로써 고려시대를 주름잡았던 대표적 명문가의 하나로 부상한 집안이다.
시조 서신일 (徐神逸) 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은
사슴을 도운 은공으로 나이 85세에 귀하게 얻었다는 정민공 (貞敏公) 내의령 (內議令) 서필 (徐弼), 서필의 아들로 거란군을 외교담판으로 물리치고 강동6주를 회복한
서희 (徐熙) 장군 및
서희의 맏아드님 문하시중 (門下侍中) 서눌 (徐訥), 서희 장군의
따님으로 덕종 (德宗) 의 정비가 된 원목왕후
(元穆王后) 서씨에 대해 일전에 살펴 보았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서희 장군의 묘.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의 손자이자 서필의 아들인 서희장군은 우리나라 역대 외교관 중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희장군 흉상)
사실 이천서씨는 내의령 서필 이후 평장사 (平章事) 서봉 (徐逢) , 내사령 (內史令) 서희 (徐熙), 문하시중 서눌 (徐訥), 좌복야 (左僕射) 서유걸 (徐惟傑), 장야서령 (掌冶署令) 서유위(徐惟偉), 원목왕후, 형부상서 (刑部尙書) 서준방 (徐俊邦), 문하시중 서수(徐琇), 판삼사사 (判三司事) 서정(徐靖), 병부상서 (兵部尙書) 서존 (徐存), 좌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判大府事) 서린(徐嶙), 좌복야 서진부(徐振扶), 평장사 서성(徐成), 동지추밀사 (同知樞密事) 서순(徐淳), 판삼사사 서공(徐恭) 6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고려 최고의 문벌 귀족가문이었다.
이런 명문벌족 (名門閥族) 가문과 한산이문이 혼반 (婚班) 을 했다는 그 자체가 고려말-조선초기에 한산이문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입증하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동안 대대로 이어서 세력을 누린 한산이문이지만서도, 실상 가정선조로부터 내려와 목은선조의 증손자 되시는 분들까지의 여말선초 (麗末鮮初) 4-5대가 한산이문이 한반도 최고의 문벌 (門閥) 가문으로 부상하며 그 명성을 온 나라안에 떨친 최고의 영화스런 기간이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가 우리문중의 최고 전성기였다.
가정-목은 선조가 터를 닦아 놓으니 종덕 (種德) – 종학 (種學)- 종선 (種善) 세 형제분께서 고려말에 문과을 다 거쳐 높은 재상 벼슬을 살았을 뿐아니라, 조선조에 넘어와선 휘 맹균 (孟畇) 문혜공 (文惠公) 은 세종대에, 곧 있어 숙부인의 시아버지되시는 문열공은 세조대에 학자로서의 최고 영예인 대제학 (大提學) 에 올라 한산이문은 그야말로 한반도 최고의 학자관료 집안이 되었던 것이다.
목은선조의 증손자대에 이르러 한산이씨는 시집오신 며느리들과 출가한 따님들까지 모두 합쳐 그 숫자가 대략 90여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문양공댁에 20명 미만, 인재공댁에 대략30여명, 양경공댁에 대략 30여명의 후손들이 생존해 있었으니, 촌수로는 모든 종원들이 10촌이내였던 바 그 혈육관계가 매우 가깝고 결속-유대관계가 끈끈하였었다. 목은 선조 증손주 시대 이후부터는 분가를 많이 하며 정치적 노선도 약간씩 달라지고 각 문중마다 가지는 특성이 점차 색깔을 띄며 굳어진다고 하겠지만, 이 당시야 말로 정말 “한 가족. 한 식구”란 생각이 강하였을 것이고, 한 지붕밑에서 한솥밥만 안 먹었다 뿐이지 모두가 “일가 (一家)”라는 통일적인 개념아래 똘똘 뭉치고 같은 사회적-정치적-학문적 운명의 길을 걷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 탓에 혼인같은 집안의 중차대한 일이 아마도 문중차원에서 의논해 이뤄진 경우도 적지 않았나 쉽다. 그런 연고로 문양공댁과 사돈을 맺은 타문중이 나중 인재공댁과도 사돈이 되고 (순흥안씨), 인재공과 사돈을 맺은 집안이 나중 양경공댁하고도 사돈을 맺고 (순흥안씨), 양경공과 사돈을 맺은 타문중이 또한 문양공댁하고도 사돈이 되는 경우 (이천서씨, 교하노씨) 가 속출했던 것이다. 사돈의 인연으로 몇세대에 겹쳐 한산이문과 유대관계를 맺었던 타문중들도 생겨 났다.
이천서씨의 고려조에 누린 눈부신 영화는 조선초기까지 그 맥을 이어져 내려오다 그 후엔 그다지 역사속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조선시대에 총 10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이중에 문과가 24명이고 무과 33명, 사마시 44명이다. 고려조에 최고의 번성기를 누리며 문벌가족으로 명성을 떨친것에 비하면 조선조에서의 활약상은 현저하게 열악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천서씨는 총 5만3407가구에 17만20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비교적으로 2000년도 인구조사에서 한산이문은 이천서씨보다 수만명이 더 적은 종원수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조사된 13만여명중에 호장공계 후손이 몇명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필자의 추측으론 10만여명이 되지 않을까 함. 대한민국 국민의 500명중 한 명을 가정-목은 선조의 후손이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임), 조선조에 생원-진사만해도 550명 정도를 배출했으며 이중에 문과급제자만 200명에 이른다.
숙부인의 현조부되는 서인 (徐諲) 은 서희장군의 5대손이 되는 인물로 공민왕 1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집의 겸 지제교 (執義 兼 知製敎) 에 오르고, 국성전 교수(國成殿 敎授) 로 천거되어 학문이 높아 많은 학도(學徒) 들이 따랐던 명망높던 인물이다.
공의 행장에 따르면 당시 고려는 내외로 전란 (戰亂) 이 일어나고 왜구 (倭寇) 가 창궐하여 어수선하여 학문에 힘쓰는 이가 드물었는데, 이때에 안문성공 (安文成公) 안향 (安珦) 이 국학 (國學) 을 설치하여 공과 이산 (李㦃), 이진 (李瑱), 이성 (李晟), 추적 (秋適), 최원충 (崔元冲) 등을 교수로 임명하여 교학 (敎學) 에 힘쓰게 하였다. 공은 과교 (課敎) 에 힘써서 문인 (門人) 으로 윤화걸(尹華傑), 김승인 (金承印), 김화식 (金元軾), 박이 (朴理) 등 제현 (諸賢) 이 있었다 한다. 뒤에 유청신 (柳淸臣) 의 모함으로 해도 (海島) 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된 후에는 전리 (田里) 에 퇴거 (退居) 하고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번계둔옹 (樊溪遯翁) 이라 자호 (自號) 하여 은거 (隱居) 하였다고 전한다.
숙부인의 증조부되는 서욱은 문과를 거쳐 벼슬이 위위시승 (衛尉寺丞) 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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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의 조부되는 서효손 (徐孝孫) 은 고려말에 지금의 부수상격인 판사재사란 벼슬에 올랐는데, 공의 장인되는 사람이 누군고 하니 조계방 (曺係芳) 이였다. 조계방은 시작에 능해 동문선 (東文選) 에 그가 지은 시가 몇편 전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다음과 같다;
“헌홍시중언박(獻洪侍中彦博)-조계방(曺係芳)--시중 홍언박에게 드린다-조계방(曺係芳):
陽坡居士愛淸閑 (양파거사애청한)
: 양파거사는 맑고 한가한 것이 좋아
役役紅塵是强顔 (역역홍진시강안)
: 속세에 허덕이는 건 억지로 하는 기색이라
何日閉門麾俗客 (하일폐문휘속객)
: 어느 날에야 문 닫고 속객을 맞아
焚香相對說溪山 (분향상대설계산)
: 향 피워놓고 마주보며 산수를 이야기하랴”
서효손에겐 서진과 서척(徐陟) 두 아들이 있었는데, 숙부인 서씨의 친정아버지가 큰 아드님인 서진이였던 것이다. 숙부인의 숙부가 되는 서척은 벼슬이 창사 (倉使) 에 이르고 서척의 아드님, 즉 숙부인의 친사촌되는 서간(徐幹) 은 벼슬이 감찰(監察) 에 오른다.
숙부인의 친정 아버지 서진은 1399년 (정종1) 에 진사시 (進士試) 에 입격하여 생원 (生員) 이 되며, 이어 1401년 (태종 1) 에 증광시 (增廣試) 문과에 합격을 하였다. 이후 통정대부 감정 (通政大夫 監正) , 교리 (校理) 등의 벼슬을 거쳤다.
공은 1415년 (태종15) 에 헌납 (獻納) 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사간원 (司諫院) 에서 사간 (司諫) 으로 같이 제직하던 인물중에 한 명이 휘 맹균 (孟畇) 문혜공 (文惠公) 이었다. 이어 서진은1424년 (세종 6) 엔 사복 (司僕) 에 올랐으며, 이어 1426년 (세종 8) 엔 지울진군사 (知蔚珍郡事) 를 역임하였고, 1430년 (세종 12) 에 영천군사 (永川郡事) 에 임하여 졌다.
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1415년 (태종 15) 6월 21일날 흥미로운 일이 하나 생겼는데, 동전(銅錢) 의 행용에 관해 주조 (鑄造) 를 정지하게 된 사건인데 그 전말이 같다;
그날 사간원에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길,“대저 법(法) 이 세워지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호패 (號牌) 의 법과 저화 (楮貨) 의 법이 시행됨에 범법자 (犯法者) 가 많게 되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또 동전(銅錢) 을 행용하게 되면, 동전은 저화에 비하여 위조 (僞造) 하기가 더욱 쉬우므로, 반드시 범법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하물며 때는 바야흐로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장차 기근 (飢饉) 이 들려 하는데, 지금 동전을 행용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국가에서 비록 저화를 겸하여 쓴다고 하더라도, 민심이 동요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저화를 가지고 쌀을 사려 하여도, 마침내 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침은 끓이되 저녁을 끓이지 못하는 자가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니, 법을 창설하여 시행하는 것이 실로 미편(未便) 합니다. 청컨대, 동전의 주조를 정파(停罷)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때에 동전의 주조가 막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위조지폐에 관한 기사를 일찌기 접한 적이 있으니 휘 맹진 (孟畛) 판중추공 (判中樞公) 배위 정경부인 (貞敬夫人) 무송윤씨 (茂松 尹氏) 편에서 였다; 정경부인 윤씨의 남동생되는 윤자견 (尹自堅) 이 저화 (楮貨) 라고 부르는 화폐를 사사로이 위조로 발행해 사용하다 적발되어 곤장1백 대를 맞고 유(流) 2천 5백 리를 돌려주고 자자 (刺字: 중범죄자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중벌로 칼로 이마에 새겨 형벌을 먹물로 써넣는 묵형) 을 당하게 된 사건이었다. 윤자견과 공범자 (共犯者) 들은 찍어낸 위조돈으로 매양 술과 음식으로 연회 (宴會) 를 벌이고 심지어는 비싼 한우 (韓牛) 까지 잡아 먹었다고 살펴보았었다. 아마도 당시에 위조지폐의 범죄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였으며, 이제는 동전을 주조하여 행용함에 있어 그 위조성 위험에 대해 조정에서 사전에 우려하며 사간원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태종이 상소를 보고 말하기를,“지금 가뭄의 근심을 당하여 심중 (心中) 이 황홀(恍惚) 해서, 마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바람과 파도를 만난 것 같다. 백성들이 만약 폐단을 받는다면 어찌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명하여 동전을 주조하지 말게 하였다 한다.
임금이 또 이어서 말하기를,“뒷날 명군(明君) 이 나오면 이것을 행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한다.
임금이, 어떤 사람이 쌀 두 되를 가지고 저화 한 장을 바꾸려 하므로, 경시서(京市署) 관원이 방(榜) 에 준하여 매매하지 않는다 하여 그를 때렸다는 말을 듣고, 승정원에 전지하기를,“백성들의 고통이 이와 같은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고하지 않았는가?”
하니, 유사눌이 아뢰기를,“신 등이 들었다면 어찌 아뢰지 않았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헌납이었던 숙부인의 친정 아버지 서진을 불러서 묻기를,
“너희들이 말하기를, ‘동전이 시행되면 쌀이 귀해집니다.’ 하기에, 내가 곧 이를 정파했다. 너는 어디서 보고 들었느냐?”
하니, 공이 다음과 대답하였다 한다;
“거리[街里] 에 앉아서 장사하는 자들은 반드시 됫쌀 [升米] 을 얻어야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인데, 동전이 시행되면 쌀을 가지고 살[買] 사람은 없고, 동전을 가지고 살 사람은 많아져서, 앉아서 장사하는 사람은 살아가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신 등이 면밀히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헤아려 성상의 총명에 상달하여, 그 직책을 다한 것뿐입니다. 만약 백성의 고통을 들었다면 어찌 아뢰지 않았겠습니까?”
유사눌이 또 아뢰기를, “찢어지고 떨어진 저화(楮貨) 를 숫자대로 바꾸어 준다면 진실로 백성들에게 편익(便益)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간사하고 교활한 유수 (遊手) 의 무리가 조금이라도 찢어진 곳이 있으면 도장의 흔적이 있고 없음을 분간하지 아니하고 다 바꾸려고 할 것입니다. 사섬서(司贍署) 에서 도장 흔적이 분명한 것을 따지게 되면, 나가서 즉시 찢어 가지고 다시 들어와 교환해 갈 것이니, 어찌 각도의 민호(民戶) 에게 공급하는 것으로서 도리어 유수(遊手) 들의 이익이 피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서의 법에 따라 떨어진 저화 [軟楮貨] 2장으로써 새 저화 1장을 바꾸어 주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다.
위의 사건은 조선초기 당시의 화폐사용 및 사회생활상을 단편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으며, 동전사용은 이후 십전통보 (十錢通寶) 및 상평통보 (常平通寶) 를 통해 한양-평양지역에서 활성화를 띄고 나중에 전국적으로 유통-확산되었다.
이천서씨는 17개의 대파 (大派) 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밑에 크고 작은 종중 (宗中 ) 들이 있는데, 숙부인의 친정 아버지 서진은 이천서씨 교리공파 (校理公派) 의 중시조 (中始祖)/파조 (派祖) 가 되는 분이다.
[역사적 고찰 하나:
숙부인의 친정아버지 서진과 연관이 있는 조선시대의 동전사용에 대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이것은 조선전기의 일반적인 사회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역사적 사료라 할수가 있겠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 말의 혼란한
경제 상황이 이어지는 것을 극복하고 새롭게 들어선 왕조의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경제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화폐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적인 이익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조선이 개국되면서 처음으로 유통시키려 한 화폐는 “저화” (楮貨)
라는 종이로 만든 지폐였다.
이 화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지폐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까지 실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조선을 개국한 집권자들은 새로운 정부의 경제 안정을 위해 화폐 정책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저화의 구체적인 종류나 가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물물 교환 방식의 경제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편리한 교환 수단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런데 왜 처음에 종이를 이용한
지폐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송나라나 원나라에서 이와 같은 지폐가 널리 사용되어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종이 화폐가 고려에서도 많이 유통되고 있어 조선
초기에는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정부의 노력은 저화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인식 부족으로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한다.
그 후 세종 때 조선통보 (朝鮮通寶) 라는 동전을 새로이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 동전은 중국 당 나라의 동전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1423년(세종 5년)부터 17세기(인조 때)까지 만들어진 조선 시대 최초의 동전이다.
종류는 대형과 소형의 2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초기에 만들어진 저화의 유통이 부진한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동전을 만드는 재료는 구리와 동으로 거의 일본에서 수입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동전 주조에 필요한 재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짧은 시일 안에 많은 양의 동전을
만들어 공급하기가 무리여서 각 지방에도 동전을 만드는 주전소를 15속에 설치하여 동전을 만들게 하였다.
정부는 이 동전의 유통을 늘리기 위하여 조세를 동전으로 내게 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동전의 원료가 부족하여 화폐 기능을 발휘할 만큼 많은 동전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또 물건의 실용적인 가치를 중시하여 쌀이나 베(옷감) 를 더 많이 이용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동전의 사용을 꺼렸다. 이에 따라 조선통보 역시 활발하게
유통되지 못하고 일부 지역에서만 특수하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정부도 이제 쌀이나 베 등도 화폐로 공식 인정하게
되었다. 15세기 말에 편찬된 「경국대전」에도 국가의 공식 화폐로서 베와 조선통보, 그리고 저화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일반 백성들이 화폐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여전히 베(옷감)
였다 한다.
한편, 세조 때에는 이러한 정부의 화폐 정책을 개선하려는 노력에서 또 다른 종류의
화폐를 주조하였다. 이 화폐는 전폐 ((箭幣) 라고도 하고, 버들잎의 모양과
비슷하여 유엽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팔방통보 (八方通寶) 라고도 하는 화폐는 평화시에는 화폐로 사용하고 전쟁 등의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용도를 가졌었다 한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발행된 화폐들은 사회 경제적인 발전이 아직은 화폐를 사용할 만큼의 수준에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화폐 원료의 부족으로 인한 공급의 부족 문제, 화폐 정책이 갖는 모순 등이
원인이 되어 사회 전반에 걸친 화폐의 사용은 결국 실패하였다.
조선후기 효종 때 주조 유통된 한국 최초의 고액동전 (高額銅錢) 으로 주로 동 (銅), 석 (錫), 납으로 주조한 십전통보는 소액동전 (小額銅錢, 當一錢) 10문 (文) 과 대등한 가치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십전통보는 1651년 (효종 2) 김육 (金堉) 의 건의로 개성지방의 민간인에 의해 사주 (私鑄) 되었다. 십전통보를 주조 유통하게된 주요 동기는 화폐원료난을 극복하고 보다 많은 유통가치를 조성하려는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또한 민간인에게 화폐주조를 허가한 것도 국가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보다 많은 양의 화폐를 주조발행하기 위한 파격적인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십전통보의 주조유통은 소액동전이 그러했듯이 한갖 시도에 지나지 않았을 뿐 계속 주조 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 최초의 고액동전 십전통보)]
생년
몰년
적서
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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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인에겐 두명의 친정 오래비들이 있었으니, 문과를 거쳐 공조참의 (工曹參議) 에 오른 서혼 (徐混), 역시
문과를 거쳐 부사 (府使) 직을 역임했던 서형(徐逈) 이었다.
서혼의 아들로 숙부인에게 친조카되는 서강 (徐岡, ?~1461) 은 세조의 총애를 받고 한때는 성균관대사성 (成均館大司成) 자리에 까지 오른 인물인데, 1447년 (세종 29)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문한직 (文翰職) 을 역임하였다.
서강은 이후 1452년 (단종 즉위년) 집현전부교리 (集賢殿副校理), 경연부검토관 (經筵副檢討官) 으로『세종실록』편찬에 기사관 (記事官) 으로 참여하였다. 다음해는 홍문관수찬 (弘文館修撰) 으로 『병요(兵要)』편찬에 참여, 품계가 한 단계 오르게 되었다.
2년후인 1454년에 서강은 행집현전부교리 (行集賢殿副校理) 로 『문종실록』편찬에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한 뒤, 사간원의 우헌납 (右獻納)-좌헌납 (左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서강은 세조의 편에 서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적극 도왔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 뒤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로 원종공신 (原從功臣) 일등에 책봉되었다. 지사간원사 (知司諫院事) 를 거쳐 1459년 (세조 5) 예문관직제학 (藝文館直提學) 으로 사헌부감찰 (司憲府監察) 이근 (李覲) 과 함께 왕명으로『잠서주해(蠶書註解)』를, 다음해 김구(金鉤), 최항(崔恒) 등과 함께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校正) 하였다.
1461년에 서강은 대사성이 되었는데, 같은 해 7월 왕이 충순당 (忠順堂) 에서 종친(宗親), 재추 (宰樞) 를 불러 연회를 열고, 그도 입시 (入侍) 하게 하였다.
이 때 왕은 서강에게 병서(兵書), 장자(莊子), 노자 (老子), 불교 등에 대해서 강(講) 하게 했는데, 서강은 왕의 숭불 (崇佛) 을 논변하다가 불경죄로 몰려 장 (杖) 40여 도(度) 를 맞고 후원(後苑) 에 감금되었다가 교살당하였다.
그 뒤 세조는 언사 (言事) 에 의한 사사 (賜死)를 뉘우치고 서강의 후손을 서용 (敍用) 할 것을 명하였다. 1470년 (성종 1) 에는 서강의 장모인 참판 이정손 (李廷孫) 의 처 윤씨 (尹氏) 의 상언 (上言) 으로 직첩(職牒) 이 회복되었다. 서강은 평소 성품이 너그럽지 못하고 경박하다는 평이 있었으며, 시비의 변론을 좋아했다고 한다.
숙부인의 외조부 채광록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아쉽게도 필자가 문서에서 찾을수가 없었다.
숙부인은 남편되는 대사성공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셨는데, 첫째 1녀는 전주인 (全州人) 익현군 (翼賢君) 이견 (李璉 ) 의 장남인 괴산군 (槐山君) 강회공 (康懷公) 이지 (李漬) 에게 출가하였는데, 시아버님되는 익현군 이견은 세종의 서자였으며 수양대군 (首陽大君) 의 계유정난을 도와,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佐翼功臣) 1등에 책정되었던 인물이다. 둘째 2녀는 순창인 (淳昌人) 조경 (趙瓊) 에게 출가하였고, 셋째 1남은 휘 장윤 (長潤) 봉화공 (奉化公) 이다.
외아드님 휘 장윤 봉화공의 후손들은 나중에 아주 현달하여 훌륭한 인물들을 조선조를 통털어 대거 배출하여 가문을 빛내었는데, 봉화공의 후손들이 문열공계열에서도 가장 번성하였다; 일찌기 명문가로 널리 알려진 충남 (예산의) 석루공파 (石樓公派), 취암공파 (醉菴公派), 삼산공파 (三山公派) 가 모두 봉화공의 후손들이다. 보통 한산이씨를 거론하면 세간에서 “노론벌족 (老論閥族)” 혹은 "노론벌열 (老論閥閱)" 이란 단어를 쓰는데 이 명칭은 일반적으로 봉화공의 후손들에 잘 적용된다 할 수 있겠으니, 인재공계열의 일파와 더불어 봉화공의 후손들은 (당색이 남인계열이었던 석루공파는 제외) 주로 여당이였던 노론에 속하며 조선말기까지 그 세력을 누렸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숙부인은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며 관료생활을 오래한 남편되는 대사성공을 잘 내조하고, 또한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하여 나중 그 후손들이 한 왕조에서 큰 역사적 족적을 남긴 명가로 거듭나는데 기틀을 다진 훌륭하신 분이였다고 삼가 정의를 내릴 수가 있겠다.
2.휘 계전 문열공의 둘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후 대사성공의 후배위 (後配位) 가 되신 숙부인 안동권씨 (安東權氏) 는 목사 (牧使) 권숭지 (權崇智) 의 따님이었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셨는데 첫째 1남은 세윤 (世潤) 어모장군 장사랑 (禦侮將軍 將仕郞 ) 이요, 둘째 1녀는 진주인 (晋州人) 군수 (郡守) 유한장 (柳漢長) 에게 출가하였다. 휘 세윤 어모장군 장사랑의 후손은 손이 귀해 휘 세윤공 이후로 12대 연속 독자로 이어오다 24세때에 절손되어 현재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이상 내 멋데로 풀어 본 우리 할머님네 이야기였다.
첫댓글 약간은 미흡한 면이 있지만 본인이 추적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자료를 찾아 정리해 글을 올렸습니다. 애시당초 한국의 이천서씨 대종회 및 종원과 연락을 취한것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못하였는데, 나중에라도 더 상세한 자료를 입수하면 내용을 보완하도록 하지요. 선조님들의 행적을 찾는 작업은 계속 쉬지 않고 지속되는 영구한 여행같습니다.
다음편엔 10세 휘 봉 헌평군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편이 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