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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열린 예배와 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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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현재 많은 교회에서 어떤 이유이든 지간에 예배의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분명히 예배는 끝없이 변화해야 함에는 예배에 작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모두 틀림없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요즈음 새롭게 시도되는 열린 예배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야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이와 함께 예배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열린 예배
예배 그리고 열린 예배?
예배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먼저 폴 훈(Paul Hoon)은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에 대한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와 인간의 응답(response)에 있다. 또한 에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던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프랭클린 지글러(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라고 말한다. 또한 로날드 알렌(Ronald Allen)은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의 존귀를 널리 알리는 능동적인 응답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의 능동적 성격을 강조하며, 참예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자주 변화되는 단순한 분위기가 아니라, 바로 성도들이 행하는 응답이다. 또한 예배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엄숙한 선포가 되어야한다." 이와 함께 랄프 마틴(Ralph P. Martin)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함은 바로 그에게 최상의 존귀를 돌려드림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홀로 이러한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웨버(Robert E, Webber)는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간에 존재하는 관계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위의 학자들은 바로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예배란 하나님의 현존이 가장 뚜렷하며 백성들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는 현장이 되어야함이 분명하여졌다. 즉 예배는 바로 계시와 응답의 가장 실감나는 현장이 되어야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육신의 사건과 구속 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너무나 놀랍고 고귀한 사건이기에,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인간들로부터 감격적인 응답을 받으심은 마땅하고 합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응답의 대열에 나선 무리들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What God has 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What God is doing),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What God will do)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총과 결부시키고, 그 인격적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 사람만이 참다운 예배의 정신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응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요한복음에서 선포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창조주 여호와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특히 지금까지 초대교회에 시작하여 형식주의에 반대한 개혁자들의 예배는 닫힌 예배인가? 라는 질문을 하여본다. 이에 대한 답은 굳이 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우리는 예배를 닫혔다 또는 열렸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과연 소위 말하는 열린 예배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할 필요성을 만나게된다.
열린 예배
위에서 살펴본 예배의 의미를 바탕으로 열린 예배를 살펴보고자 한다. 열린 예배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예배 스타일"이라 볼 수 있다. 즉 열린 예배의 취지는 아직 신앙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친구의 권유 등에 의해 한번 교회에 나와본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거리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예배와 교회에 호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 예배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가능한 한 기존의 신자들만 아는 것들을 피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쓰고 음악도 시대에 뒤떨어져서 일반인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것보다는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 열린 예배, 엄밀히 말하면 구도자 예배의 시작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교회 배경
여기서 열린 예배가 시작된 미국교회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왜 미국교회 예를 들면 Saddleback Church, Vineyard, Church On the Way, Grace Community, Calvary Chapel, Cottonwood Christian Center, Crenshaw Christian Center 등의 교회들이 이런 형태의 예배를 시도하는 것일까? 이들 교회들은 교회에 흥미를 잃고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젊은 계층도 교회를 계속 떠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교회로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과감한 형태의 예배를 시도하고 있다.
열린 예배의 정의와 목적
열린 예배는 말씀과 성령주도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정의에 따르면 요즈음 행하는 단순히 찬양위주 예배는 열린 예배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일종의 찬양예배에 불과하지 이를 구도자 예배 소위 열린 예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열린 예배의 의도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즉 교회가 구도자 혹은 방문자들을 의식하고 선교적인 마음(Mission mind)을 가지고 고안한 것이 열린 예배라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필요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의 전통을 이미 19세기 미국에서 거의 모든 교파의 예배에 영향을 끼쳤던 변경예배(Frontier Worship)에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예배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했던 특수 상황이었기에 기존예배와는 다른 새로운 예배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징을 보면, 교회 법규집이나 예배서에 구애를 받지 않고 행하였다. 또한 예배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열린 예배가 전적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 보다는 전도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긍정적으로 보면 불신자도 예배 드릴 수 있으며, 그들이 예배드릴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한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한다. 불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좋은 말로 구도자들(seekers)이나 교회에 친구 따라 "한번 나와 본"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계속해서 다음의 질문을 하게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은 아직 예배 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 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예배학자는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제대로 드릴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예배드리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한가지 앞서 내린 예배의 정의와 열린 예배와의 관련 속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배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예배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 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 생각하여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하며, 예배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기운을 얻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Seekers Service"라는 말 자체에 벌써 예배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의 기본 정신은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무엇을 받거나 무엇을 추구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 예배를 시도할 때 분명히 주의하여야 할 점은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어야지 인간을 향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예배의 계획과 준비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해서 또한 그에 의해서 되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자 내지는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계획은 다소 예배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예배의 겉모습 또는 형식에 비추어 하는 말이 아니다. 예배는 결코 회중 지향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점검할 때에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인가?"를 항상 점검하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인간 중심적인 예배의 유혹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다.
열린 예배의 구성체
열린 예배를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한사람의 교역자나 인도자 혹은 몇 명의 찬양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역자들이 전통적으로 입어왔던 가운을 입지 않음이 열린 예배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얼마나 마음이 빠른 변화에 진정하게 열려있느냐(Open Mind)?이다. 목회자 자신이 진정으로 초신자 구도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또한 이런 방향으로 목회를 하느냐? 에 달려있다. 만일에 몇 명의 신자를 모으기 위해 소위 말하는 "열린 예배"의 형식을 빌려온다면 반드시 이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미주에서 시도되는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의 몇 가지 구성요소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열린 교역자(Open Pastors) : 담임교역자 혼자 만의 연극이 아니라, 지교회에서 봉사는 모든 교역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즉 교역자 전체가 사역자팀(Minsters Team)을 구성해야한다. 즉 설교, 찬양, 기도회들의 인도, 성경공부 지도 등 여러 가지 사역의 분야에서 각 교역자가 나누어 역항을 담당하여야 한다. 소위 말하는 팀 목회(Team Ministry)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평신도사역도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목회의 모든 면이 열려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대두되는 사항이 열린 복장(Open Dress)이다. 예배인도자나 참예자들의 복장에 자유스러움을 지니자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찬반에 논의가 필요하다. 과연 기존의 복장에서는 진정으로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를 시작할수 없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심각하게 여겨야한다. 요즈음 교회들은 온.난방시설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양복을 입고 한여름에 교역자가 땀을 흘리므로 T셔스를 입고 예배를 드리자고 주장은 별로 설득력을 잃고 있다. 또한 말장난 같으나 모든 지역에서 예를 들면 추운 지방에서 얇은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과연 열린 예배인가? 하는 질문도 생겨나게 된다. 물론 열린 예배를 시작한 교회에서 주장하는 의미는 이런 방향은 아니다. 복장에 자유스러움을 지니자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 나오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하면 이 복장문제는 오히려 전통성을 지님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과연 우리는 T셔스를 입을 수 있을까?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창조주를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그 시기에 적절하게 정장을 입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
또한 설교자의 자세에서도 변화가 있어야함을 열린 예배를 시도한 교회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 예가 설교자가 설교단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사항이다. 이미 미주교회와 가장 전통을 수호하는 유럽의 교회에서도 설교를 설교단을 떠나서 행하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수정교회(Crystal Church)의 목사 로버트 슐러(Robert Schuler)이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핀 마이크를 사용하여 강단 위와 아래를 오가며 설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예를 들면 설교를 완전히 원고를 보지 않고 하여야 하며, 영상 매체를 통해 지도라든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매개체 등의 충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일주일에 설교를 10회 이상을 하여야하는 우리의 목회자에게는 참으로 커다란 짐을 안겨주고 있다. 설교가 성도들과 하나가 될 수 위한 설교가 되기 위해 설교자의 피나는 노력과 아울러 설교자를 도울 수 있는 매체가 함께 하여야 한다. 이와 함께 설교의 방법에 다양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시간에서, 또한 양태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스타일이 있다. 아무리 변화시키려하여도 그 근저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조용한 성격을 지녀서 설교도 조용조용하게 한다. 반대로 어떤 이는 목소리가 우렁차서 설교를 크게 하기도 한다. 이 두 경우에서 때로는 후자가 전자의 형태를 취해서 조용히 성서를 강해하며 설교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렵지만 전자의 설교자는 후자처럼 힘차게 메시지를 전하여야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설교자 스스로가 설교를 다양한 스타일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녀야한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도 국내에서는 설교하면 목사님이 100% 설교를 다 말로 해야함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왔다. 열린 예배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이것이 아니다. 즉 다양한 방법 - 드라마, 팬터마임, 찬양, 기도, 간증 등 -으로 설교를 하여야함을 주장한다. 이는 참으로 우리의 교역자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여야 할 부분이다. OHP는 더 이상 찬양가사나 설교본문만을 비추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 Beam Projector는 더 이상 교역자의 얼굴을 비추어서는 안된다. 설교에 필요한 내용 - 예를 들면 본문에 나타나는 지역의 위치나 당시의 문화 등을 나타내는 고고학 자료, 또한 이스라엘 특유한 식물이라 볼 수는 없지만 인터넷에 있는 사진자료 등 -을 비추는데 이용되어야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예배시간이 1시간으로 고정화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으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빨리 빨리 문화에 익숙해진 것도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도들도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주일을 드리기로 한다면, 예배시간이 몇 시간이든지 문제되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밤새 기도하며 말씀을 들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떤 시대에 있음을 되새겨 보아야한다. 물론 설교가 짧고, 길음이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예배를 말하면서 진정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되돌아 보아야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바리새인처럼 속은 다르면서 겉만 바뀌기를 원하지는 않는지를 상고하여야한다.
2) 찬양팀 : 열린 예배에서 찬양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찬양팀이 단순히 찬양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전체를 이끌어나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찬양을 담당하는 구성원들은 단순히 목소리가 좋거나, 악기만을 잘 다루어서는 안된다. 즉 이들은 예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학에 대한 기본이해를 지니고 있어야한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영적인 안목을 지녀서 예배에 역사 하시는 성령을 느껴야한다. 이를 위해 교역자는 이들과 함께 기도하며, 훈련시켜야한다. 이 찬양팀과 함께 지역에 따라 연극팀도 구성하여 때로는 교역자와 함께 설교를 진행함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3) 성도(Open Audience) :열린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청중이다. 아무리 교역자가 열려 있어서 준비하여 예배를 진행하여도 청중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예배가 된다. 이는 세상적인 코미디가 되며, 쇼로 전락한다. 바로 열린 예배는 청중의 참여와 적극적이 자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앞에서 찬양하는 팀은 흥이 나서 박수를 치며, worship dance를 하는데 청중들은 멍하니 팔짱끼고 있으면 이는 의미 없는 찬양이 된다. 이를 위해 교역자, 각 파트의 인도자 그리고 회중이 어우러지는 그러한 분위기가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우리는 위에서 예배를 하나님과 백성간의 대화 혹은 상호관계성 속에서 살펴보았다. 이 예배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어지는데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사항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예배와 커뮤니케이션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커뮤니케이션의 정의
커뮤니케이션 현상은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간단히 그리고 확실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논한 학자들의 정의를 살펴보자.
먼저 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영어 웹스터(Webster) 사전은 커뮤니케이션이란 전달행위 전달된 사실이나 정보 사상이나(thought) 의견의 상호교환 효과적 사상(ideas) 표현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독일어 두덴(Duden)사전에 따르면 상호간의 의사소통(Verst ndigung) 언어, 표시, 신호등을 통한 인간상호간의 교류(Verkehr)라고 기술하고 있다.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커뮤니케이션이란 단어는 라틴어 communicare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는 원래 공통 또는 공유한다 혹은 나누어 갖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communicare라는 라틴어는 동시에 성찬 성례전(Lords Supper)과 어떤 행위나 상황을 공유함이라는 두 가지를 지칭하는 그리스도인적 의미의 이중성을 지니는 communion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 또는 하나 이상의 유기체(organism)가 다른 유기체와 지식, 정보, 의견, 신념, 감정, 경험 등을 공유(共有) 또는 나누어 갖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이 현대에 와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그 뜻도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화되었다. 예를 들면 프라트(J. H. Platt)는 "커뮤니케이션은 가장 넓은 의미로서는 생물체와 외계가 결합되어 있다는 기본적 사실을 가리키며, 학문적으로는 생물체가 상호간에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내적인 사건이나 상태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미와 내용을 전달하며,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 정의하고 있다. 또한 쿨리(C. H. Cooly)는 "커뮤니케이션이란 그것을 통하여 인간관계가 성립되고 또 발전하는 메커니즘을 의미하는 것이며, 정신의 모든 상징 및 그것을 공간적으로 운반하고, 시간적으로 보지(保持)하는 수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페로우(Maxwell V. Perrow)는 "커뮤니케이션은 이상과 개념과 생의 방향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 자신을 타인의 삶 속에 연장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개념을 제시할 때 이것은 우리와 함께 동일한 신앙에 머물기를 요청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함께 형성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자극을 전달하는 과정,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의미전달과정으로 또한 생물체간의 의미전달이라 파악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커뮤니케이션은 만남이라는 관계성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만난다고 하는 상호관계가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멜(Roger Mehl)은 창세기 33장 21-22절에 나타나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모습을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상징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 만남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화이다.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 인간과 인간간의 대화, 또한 작은 관점에서 성도간의 대화를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커뮤니케이션 기독교의 커뮤니케이션은 상대자가 알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 전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만나고 또 하나님과 만나게 하여 여기서 진실을 발견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피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전달이나 만남이 아니라 사랑이 긷든 만남, 대화가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가 1517년 종교개혁에 의해 신.구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로 나뉘었음을 주지하고 있다. 한 흐름에 있었던 가톨릭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커뮤니케이션과 그리스도인 신앙행위간의 밀접한 관계는 단순히 언어적 우연성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는 효과적인 가톨릭 신앙정신(Christianity)에 대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적 중심성(centrality)을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은 그리스도교적 증언(Christian Witness)이나 복음전파(evangelism) 청지기직(stewardship), 교육, 선교활동 등의 모든 사항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은 신의 은총과 그 은총의 계시(Revelation of Grace)는 신앙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행위라 말하고 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 더 나아가 환경과 환경간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비인격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비인격적 커뮤니케이션이 거론되는 첫째 이유는 현대에 있어서 순수한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구별의 의미성보다는 양자 사이의 차이와 상호 연결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점이다. 둘째 이유는 컴퓨터로 인해 인간의 능력을 확대시켰듯이 인간은 자신을 확장시키기 위한 비인격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 점차 의존하게 됨으로서 마침내는 인간의 환경 그 자체도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점이다. 즉 모든 객체(objects) 예를 들면 사진, 넘어지는 나무, 별빛의 파장 등은 모두 커뮤니케이트(communicate) 될 수 있으며, 여기서 제공되는 커뮤니케이션은 수신(受信)되고 해석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며, 그런 내용 곧 정보, 자료, 아이디어, 감정, 느낌 등은 그것이 개인의 외적인 것으로 외재화(外在化: externalized) 되기만 하면 커뮤니케이트 될 수 있다. 잠시 살펴보았지만 예배와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을 정의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을 말할 때 함께 다루어야 하는 사항이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진행 요소이다. 첫째가 Source/Encoder이고, 둘째는 Message, 셋째 Channel, 넷째 Receiver/Decoder 다섯째 피드백(Feedback)이다. 여섯째로는 장애물(Barriers), 마지막으로 상황(Context or Situation)이다. 이를 간단히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요소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고 피드백을 잠시 예배와 연결하여 다루어 보고자한다.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수신자에게 어떤 변화를 초래하며, 이런 분석을 통해 메시지 전달을 수정하거나 전면 개정 보완하는 데에 이용되는 피드백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즉 이 피드백은 커뮤니케이터에게 되돌아오는 수신자 또는 수용자의 반응이라 풀이 할 수 있으며, 이 피드백은 커뮤니케이션 효과측정의 지표가 되어진다. 이 피드백은 자신의 피드백(self-feedback), 청취자 피드백(listener feedback)으로 나뉘게 된다. 자신의 피드백은 예를 들면 자신이 행한 행동이나 말의 표현들을 재분석하여 다른 더 낳은 행동과 언어를 행하게 하도록 한다. 청취자 피드백은 질문을 하였을 때 상대방의 반응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피드백은 예배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전혀 전달이 안 되는 예배, 응답이 없는 예배순서, 찬양, 설교 등은 바로 전혀 의미 없는 예배로 바뀔 수 있는 커다란 위험을 내포하고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른 나라에서 성공하였고, 현재 몇 교회에서 행한다고 하여 전혀 깊은 연구나 고찰 없이 그대로 모방하는 식의 예배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지역에 따라, 예배 공동체인 교회에 모인 성도들의 문화적, 지식적 차이, 또한 연령 등에 따라 달라져야한다. 한 예를 들면 찬양의 내용과 그 찬양을 부르는 방식도 달라야함은 마땅한 일이다. 그 예로 7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기타가 교회 안에서 연주되었지만, 아직도 이를 금지하는 교회가 있다. 또한 현재 불려지는 다양한 형태의 찬양들 예를 들면 C. C. M. 등이 모든 성도들에 의해 불려질 수는 없다. 그러기에 예배에서 사용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예를 들어 찬양이라는 수단도 다양한 형태로 전환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우리는 최첨단의 시대 안에 살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수에 국한되었던 컴퓨터와 이에 관련된 분야는 더 이상 그 소수에 머물지 않고 있다. 예배공동체인 교회 역시 이러한 수단들을 이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를 더 말한다면, 모든 교회가 첨단의 기기(機器) - 예를 들면 수백, 수천 만원이 소요되는 컴퓨터와 빔 프로젝트(Beam Projector) - 와 악기들의 사용은 교회에 따라 장점보다는 위험과 단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배의 순서와 예배에 사용되는 모든 요소들에는 이러한 피드백의 검증이 이루어져야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목표
커뮤니케이션의 목표(Goals)는 크게 3가지로 나뉘어진다. 즉 정보교환(Information Exchange), 자신의 생각 혹은 사상을 다른 사람이 따라오도록 설득(Persuasion) 시키는 데에 그 목적을 두며, 그리고 여흥과 오락(Entertainment)을 주는데 있다.
본 논고에서 커뮤니케이션 이러한 목표에 대해 상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위의 커다란 목표를 예배와 연결하여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생각되어질 수 있다. 즉 예배 안에서 우리는 여러 방법을 거쳐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안에 더욱더 다양한 매체들이 사용되어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역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은 누가 주체가 되느냐? 하는 문제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면 이는 잠시는 효력을 발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또 다른 더 효과가 강한 방법들 즉 또 다른 극약방법이 필요악처럼 대두되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 주체가 되시면 교역자 성도들이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이 주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된다.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오병이어가 바로 이것이다. 마찬가지로 예배 준비, 예배순서 등의 모든 주체가 주님이 되어질 때 바로 우리는 삼위일체 되시는 그 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어가게 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배를 통해 진정한 주님이 나타나시고 성령께서는 비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예배 안에서 우리 성도들은 바로 즐거움과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된다.
커뮤니케이션과 메스 미디어(Mass Media)
메스 미디어의 종류를 살펴보면, 책, 신문, 잡지, TV, Radio, Film(영화, 심지어는 만화영화까지 포함한), 연극, 컴퓨터 등이 있다.
위에서 열거하였듯이 많은 종류의 메스 미디어가 있고, 요즈음 많이 사용되는 도구가 바로 컴퓨터이다. 여기서 잠시 컴퓨터의 이점을 다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좁다. 그러므로 단점을 한가지 지적하고자한다. 최근 많은 컴퓨터 이용자들이 인터넷(Internet) 등을 통해 소위 말하는 Cyber World 즉 가상공간 안에서 지난 세기에 만나보지 못한 엄청난 정보들을 접하게 된다. 예를 들면 친구를 만나지 않고 E-Mail 혹은 여러 종류의 통신을 통해 시간을 초월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또한 이 공간을 통해 세계의 온 정보를 접할 수 있고, 특이나 세계의 각 대학 도서관을 거의 자유스럽게 드나들며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점은 참으로 우리가 컴퓨터에 감사할 내용이다. 이에 반해 엄청난 손실도 나타나고 있다. 이름하여 나 홀로 인터넷: 新 군중 속 고독이다. 미국의 스탠포드 대 사회 계량연구소 조사팀에서 행한 설문 조사를 토대로 조사책임자인 노먼 니 교수는 이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49%가 하루 평균 1-5시간 사용하며, 22%가 5-10시간을, 또한 14%가 10시간 이상을 이용하고 있다. 그는 질문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포옹할 수 있는냐?"
또한 인간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할 컴퓨터 사용이 엄청난 불편과 불이익을 주고 있음을 "인터넷 세상은 또 다른 감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조금은 멀리 벗어나는 지적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범죄와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악영향을 받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소위 변화해 가는 문화에 적합한 예배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주고 있다. 즉 예배에도 많은 미디어들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예배가 참예(participation)하는 면보다는 주로 보여주는 예배로 변화할 수 있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미 미국에서는 오랜 전에 시작된 Drive In Church, 영상예배-가정에서 방송을 통해 드리는 예배 등은 장점과 더불어 위에서 지적한 단점을 포함하고 있음을 예의 주시하여야한다. 이를 위해 교역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와 예배를 주관하는 교역자들은 함께 더불어 전문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가는 말
우리는 위에서 잠시 예배와 열린 예배 또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현재 몇 년 전과는 놀라울만하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전 세계가 하루 생활권이며 굳이 다른 나라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안방에 앉아 온 세계를 알 수 있다. 분명히 예배는 다양화되어져야하며 많은 요소와 도움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되어져야하는 사실은 여전히 누가 주관하는 예배인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 인간이 그저 사람을 모으기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예배인가?
성서를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많은 악기를 주셨다. 또한 우리들은 이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악기사용에 있어서도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예를 들면 1950년대만 하여도 풍금이 있었던 교회는 부자교회에 속하였다. 이런 풍금에 익숙하였던 연령에는 전자악기는 아직도 생소함을 찬양 인도자들은 인지하고 있어야한다. 이는 첨단 장비나 예배순서 변화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와 지역사회에 걸맞은 예배순서 변경과 첨단장비(컴퓨터, Beam Projector)가 사용되어져야 한다. 예배순서에 대해서는 총회가 1997년 {표준예식서}를 통해 좋은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요즈음 열린 예배와 각종 악기 장비와 함께 전통악기를 사용하여 토착화의 예배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에 복음성가 가수 송정미는 전통악기 반주로 찬양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찬양의 작사, 작곡 및 편곡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되고 있다.
구도자의 예배 또는 열린 예배의 출발지인 미국 시카고 근교에 있는 Willow Creek Church 예배는 찬양, 연극, 헤비 메탈을 사용한 귀가 찢어질 듯한 음악, 그리고 유색인종은 거의 보이지 않는 백인 일색의 회중 등의 예배이다. 이는 어떤 의미로는 단면으로 "백인문화"를 보여주는 예배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백인문화의 결실이 우리 한국의 문화라고 비유되는 "김치문화권"인 한국교회에 얼마나 잘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열린 예배는 복음을 모르거나 새로 믿는 사람들을 좀 더 편안하고 친숙한 분위기에서 복음을 접하게 하기 위한 아름다운 선교가 됨이다(사실은 "열린 집회" 혹은 "전도집회"라는 명칭이 예배학적으로는 적당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열린 예배를 계획하고 주관하는 사역자들은 한국교회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문화와 심성을 고려하는 집회를 계획하고 이끌어야 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하여할 문제가 바로 토착화이다. 이 토착화의 문제는 단순히 악기와 복장만을 바꾼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한국 민족의 문화와 맞물리는 문제이며, 동시에 과연 우리의 것만을 고집 하는 것이 토착화인가 하는 문제도 함께 다룰 복잡한 문제이다. 분명한 사실은 토착화는 단순히 외국의 것을 무조건 물리치고 한복이나 거문고 가야금 등을 사용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님은 당연하다. 이와 함께 모든 예배가 구도자 예배화 시키며, 지교회에 적용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또한 사실은 미국의 모든 교회가 열린 예배형태로 예배를 진행하지 않음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의 시작은 바로 교회에 흥미를 잃고 떠나가는 성도들을 다시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또한 새로 믿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 시작되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생각하여보면 오히려 한국교회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일주일에 여러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성도들의 계층과 연령층에 따라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함께 참예할 여러 예배에 대한 연구가 다시금 이루어져야한다. 한 예를 들면 주일에 3회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이중에 한 예배를 찬양을 중심으로 드릴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수요예배는 정말로 성서해석을 중심으로 한 말씀의 강해와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기도회 예배형태로 그 성격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이미 기존 예배 형태 속에도 열린 예배의 형태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교역자들 중에는 저녁 예배, 수요예배 시에는 교역자 가운을 입지 않고 설교를 하고 있다. 열린 예배와 커뮤니케이션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과연 예배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되새겨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 인간이 주인인가? 인간을 모으기 위한 예배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인가?를 매순간 점검하여야한다.
분명히 예배는 자체 안에 능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고 이에 대해 성도들은 응답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예배 전통과 변화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를 분석하여 이에 적절한 매체들을 통해 인간 중심이 아닌 삼위일체 되시는 분이 중심이 되는 귀한 예배들이 이루어지어야 한다. 이는 몇 명의 신학자, 교역자 및 찬양인도자 등에 의해서 만은 안된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심을 믿으며 신학과 교회가 하나 되어 나아갈 때만 이루어진다. 또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서만 예배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축제로만 즐겨서는 안되며 바로 지역사회를 향한 공동체성을 창출하여내도록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온 세계 우주에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예배 전통과 변화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를 조화시키는 예배의 한 모형을 제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예배순서의 실례
<찬양으로 예배에 참예할 마음을 준비토록 한다.
정확히 예배를 시작할수 있도록 시간에 맞추어 교역자들은 성가대와 함께 입장(약 5분전에)한다.>
예배의 부름
송영
참회의 기도
사죄의 선언
영광송
신앙고백 또는 성시교독
찬송
기도
성경봉독
1. 구약의 말씀 2. 서신서의 말씀 3. 복음서의 말씀
찬양
말씀 선포
목회기도
찬송 혹은 주기도문 찬양
봉헌
봉헌기도
성도의 교제
찬송
파송의 말씀
축복기도
송영
* 영광송을 제외한 찬송은 경우에 따라 복음성가로 전환할 수도 있고, 찬양은 지역에 따라 민속악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 또한 예배의 형태는 각 예배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를 시킨다. 예를 들어 주일저녁예배는 찬양을 중심으로, 수요예배는 성경주해를 중심으로, 금요기도회는 기도회를 중심으로 기도제목을 여러 가지 제시하여 함께 기도하도록 한다.
Abstrakt
Ge ffnete Gottesdienst und Kommunikation
Zur Zeit wird es versucht, den Gottesdienst zu ver ndern, um den Gottesdienst richtig zu erh lt. So die neue Liturgie wird gestellt. Der Sogenannte Ge ffnete Gottesdienst. Dann uns wird eine Frage danach gestellt, ob der bisherigen Gottesdienst der Zugemachten Gottesdienst ist. Die Antwort wird danach nicht gebraucht. Aber die Frage erschient uns danach, was eigentlich Ge ffnete Gottesdienst ist. In unser Zeit werden nicht nur die musikalische Instrumente sondern auch Masse Medium im Gottesdienst benutzt. Z. B. Beam Projektor, Computer, O.H.P. usw.
So in diesen Artikel wird geschrieben, was der Gottesdienst ist, was Ge f rtete Gottesdienst ist, und das Verh tnis zwischen den Gottesdienst und die Kommunikation ist.
Zuerst, m ssen wir danach fragen, was der Gottesdienst eigentlich ist. Die Antwort dar ber ist nicht einfach. Aber in Beantwortung Gottes Gnade ist die eine allgemeine. Bei dieser Beantwortung k nnen manche Medien nutzt werden. Bei der Benutzung kommt die wichtige Frage danach, wer der Hausgeber der Gottesdienst ist. Gott? oder Mensch? Die Antwort dar ber ist ganz klar. Nat rlich Gott selbt. So bei der Benutzung der Medium sollen wir sorgf ltig untersuchen, ob die Instrumenten, Medium oder C. C. 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ganz in der lokalen Kirchen gepa sind, oder eigentlich brauchen.
Kommunikation ist Verst ndigung untereinander, zwischenmenschlicher Verkehr besonders mit Hilfe von Sprache, Zeichen. Oder die ist die Verbindung Zusammenhang. Die f hrt mit den Medien durch. Z. B. Fernsehen, Audioger, Computer, O.H.P. besonders Menschen selbst auch. Der Gottesdienst m ssen mit der Hilfe der solchen Medien durchf hren. Der Gottesdienst soll nicht ein Show werden sein. Daf r wird wieder solche gepr ft, wer der Hausgeber ist. Der Gottesdienst, der nur durch die Menschen gef hrt oder geplant wird, kann den Gottesdienst eigentlich nicht genannt werden. Solcher Gottesdienst ist nur ein Show, das nur f r den Menschen selbst gehalten wird.
Sicher mu der Gottesdienst sehr aktiv, lebendig sein. So der heutige Gottesdienst mu unter den biblischen, historischen Hintergrund und mit der Hilfe der modernen Kultur und der Medien f hren. "Ich habe Wohlgefallen an Barmherzigkeit und nicht am Opfer(Hosea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