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월 21일 뉴스에 따르면,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주력 업종인 휴대폰 등 전자, 전기, · IT제품과 자동차 부품 등의 수출 호조에 힘입은 결과라 한다. 마산 자유무역지역관리원에 의하면 2010. 3월 중 수출은 3억8300만 달러, 수입은 2억5100만 달러로 전년 동월에 비해 각각 24.6%와 15.1% 증가하였으며, 특히 월별 수출 실적으로는 지난 2008년 11월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 마산자유무역지역" 은 최초 " 마산수출자유지역" 으로 출범했다.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공단으로 조성된 마산자유무역지역은 어언 창설 40주년을 넘어섰다. 지금의 마산 자유무역 지역이 들어선 곳은 예전에 갈대밭이 무성한 곳과 일부 바다를 준설 매립하여 조성한 것이다. 마산시 회원구 양덕2동과 봉암동 일대이다. 그동안 이 지역은 선진 기술 및 외국자본의 도입과 수출·고용 증대로 우리나라의 무역진흥 기반을 구축하며 국가와 지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세계 최초로 조성된 자유무역지역인 대만의 수출가공구와 함께 세계에서 성공한 자유무역지역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 수출전진기지의 효시인 마산자유무역지역은 수출 확대와 국제수지 개선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구상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가 빚은 합작품이다. 전경련이 1963년 3월 산업시찰차 일본에 들렀을 때 당시 일본에서 기업을 경경하고 있던 재일교포 실업인 들이 모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와, 이 사람들의 재산 반입 등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어느 해안지대에다 ‘특수지역’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다.
이후 1965년 자유중국이 까오슝에 자유지역 설치작업에 들어가고, 1967년 전경련 회장 등이 태평양 아시아 지역을 시찰하는 길에 까오슝에 들렀을 때 감명을 받아 재계인사들에게 설득하였고, 그들의 귀국보고서가 청와대에 제출되면서 박 대통령이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 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임해수출산업 자유지역설립 제1차 구상안’을 작성하여 1969년 2월 열린 제2회 수출진흥 확대회의에 보고하였고 박 대통령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자 민관합동으로 ‘자유지역조성 전문위원회’를 설치하고, 2차 구상안을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하게 된다. 마침내 1969년 7월 당시 경제기획원장관이 자유지역을 설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마산이 선정된 과정
정부가 자유무역지역의 적지를 선정하기 위해 남해안 일대의 마산, 진해, 여수, 목포 등을 비롯한 8개 지역을 대상 후보지로 삼고 이곳들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현지답사 등 사전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천연적 입지조건이나 자연, 기상조건들이 양호할뿐만 아니라, 이미 마산시에서 임해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1966년 7월 건설부장관의 허가를 받아 해상준설토와 산토(山土)로써 마산시 봉암동지역의 저습지와 해안 매립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조성경비 면에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유리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어 마산항이 선정됐다.
마산에 자유무역지역이 조성되자 특히 이웃 일본이 투자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일본 외무성 공사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투자환경조사단이 1970년대초 마산을 찾았는데, 이 공사는 “마산수출 자유 지역 의 전망이 양호하다”며 “민간인들에게 직접 수출 자유 지역의 현황을 주지시켜 입주에 호응토록 권유하겠다”고 말했다. 1970년 후반들어 일본 경제계와 중의원 등의 마산자유무역지역 시찰이 이어졌다. 당시 경제대국을 자처하고 있던 일본은 한국이 거리가 가깝고 임금이 싸며 우수한 노동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일본 의 투자를 환영하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한국에 대한 투자를 적극 모색했다. 투자업체중에는 미국계 기업도 있었으며, 핀랜드 등 기타 국가들도 있었다.
자유무역지역 장기 발전계획은 ?
입주업체는 수출을 목적으로 물품을 제조·가공 또는 조립 하는 기업체로서, 외국인 투자기업 과 합작기업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수출전망이 밝고 외화가득률이 높으며 제조기술이 우수하고 노동 집약도가 높은 국내외의 기업체들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1990년 이후 노사관계의 안정과 함께 수출 및 생산활동이 활발 해지자 많은 입주업체들은 시설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정부는 입주 업체들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이 지역 경제활성화를 위하여 이 단지를 첨단 산업단지로 조성하기 위한 장기 발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개발과 환경보존
인간의 욕심이 멈추지 않는 한 대자연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새로운 환경이 창조되는 순환을 되풀이 한다.그 순환 속에서 우리는 많은 고통과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60여년중 공업단지 조성은 이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위업이었지만 그로 인해 자연의 혜택과 아름다운 산하를 빼앗기는 등 그 부작용 또한 막대했다. 세상이 변해가는데,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도 많다. 공업단지 조성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과연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냉정하게 평가하여야 하겠지만, 경제성과 개발 이익을 항상 먼저 생각했기에 우리는 환경문제라는 부메랑을 지텨볼 수 밖에 없었다.
근로자의 희생을 딛고 선 경제발전
마산수출자유지역 (지금의 자유무역지역)은 1970년 수출을 늘려 불황에 허덕이는 국가경제를 일으킨다는 명분속에서 설립되었다.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하는 일본기업의 경우, 5년 동안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재료, 자본, 기술, 인력을 마음껏 동원하여 제품을 생산, 판매할 수 있다는 특혜가 제공되었다. 그 대신, 우리는 근로자 취업기회를 확대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고, 일본의 고급기술을 배워 기술인력을 양성한다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또한,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일본 기업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공장과 공장설비 일체를 우리나라에 헌납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사양산업으로 밀려난 설비가 대다수였다.
수출자유지역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들은 한때 수만명에 달했다. 그 중 상당수 근로자는 나이가 18세 이상에서 25세 이하 여성 근로자들이었다. 여성 근로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다. 섬유, 의류, 봉제, 전자업 등에서 주로 일했다. 장시간 근로와 저임금, 인권의 사각지대도 허다했다. 수출산업 역군으로 경제발전에 기여했지만, 그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임금 문제로 고용불안이 서서히 대두되었다. 그리고 일부 업체는 노사 문제로 인해 공장을 폐쇄하고 떠남에 따라 지역 경제 및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먼 타향에서 온 여성근로자들은 월급을 부모님 생활비나 오빠의 학비로 보내는 바람에 배움의 길과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좌절되는 경우도 많았다. 개발시대의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배움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직업현장에 뛰어들던 70~80년대 그 시절이었다.
마산자유무역지역이 앞으로 마산의 지역경제 발전에 더 큰 활력소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조성전후
1971년 4월 7일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건설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왼쪽 두번째) 대통령(사진 위쪽)과
1970년 9월 열린 제1호 입주기업체 자가공장 기공식 장면
<마산수출자유지역 25년사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