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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충신사 기독교 문서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joseph
최재선 중앙대교수 - 역경의 열매 신앙 간증 모음 2008/02/07
출처 = http://blog.naver.com/karamos/80048024855
(역경의 열매) [국민일보]1994-06-24
신앙유산이 바른 삶 밑거름
◎목사부친, 8남매 불러모아 매일 가정예배
73년 5월, 빌리 그레이엄 대전도집회가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지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설교후 시청자들에게 텔레비전 위에 손을 얹고 따라서 기도하라고 말하는 빌리 그레이엄목사의 말에 그대로 했으나 중계가 끝차고 전원을 끈 후에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구나』
절망감이 몸속 깊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통회자복하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한시간 가량 눈물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삶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은 것을 깊이 회개했다. 이 때 나는 박사학위도 주님의 사역을 위해 쓸 것을 결심했다.
「학원을 그리스도에게로」
일평생을 바쳐 추구해온 삶의 지표다. 중앙대학교 기독학생반의 인생문제 대수련회에서 변화받는 수많은 지성인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청년처럼 가슴이 설렌다.
귀국 후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애써온 지난날들과 가난과 전쟁으로 얼룩진 내 유년의 삶이 기억 저편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기는 어쩌면 암울했고 어쩌면 너무나 희망적이었다. 흙먼지가 계속되는 피난길의 행렬, 배고픔, 모두 일제시대와 6·25전쟁의 그림자 자락이 걸쳐진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가난과 역경을 딛고 지금의 축복을 누리게 된것은 모두가 신앙의 유산 때문이었다고 본다.
부친 최대위목사는 평양 숭실대를 졸업하고 일제에 항거, 기독청년운동을 전개하다 탄압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1938년 광주 무악산 기슭에 임시 자리를 잡았고 그해 1월25일 4남4녀 중 다섯째로 내가 태어났다.
부친은 논밭을 갖고 있지 않은 목사였기에 우리가족은 더욱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당시 먹을 것이라돈 곰팡이 난 콩, 깨, 나무뿌리, 그리고 형들이 비행장 건설 잡역을 하며 얻은 강냉이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는 믿음을 지키셨고 8남매를 모아 놓고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찬송을 부른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줄줄 암송하셨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입만 쳐다보며 따라 외쳤다. 시험기간에는 피곤하고 졸렸지만 꾸벅꾸벅 졸면서도 성구를 암송했다. 그 전쟁과 가난 속에서 비뚤게 나가지 않은 것은 바로 신앙의 유산 때문이었다.
국민학교시절 공납금을 제대로 못내 12개월 중 반 이상 학교에서 집으로 쫓겨와야 했다. 더 큰 슬픔은 6·25가 터지기 직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내 나이 열살이었다. 엄마를 잃은 상처가 견디기 힘들었다. 이것이 나를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늘 배가 고팠고 하루의 반을 걸어 다녔으며 어머니를 잃은 상처 때문에 학업에 열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뛰어 넘을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빈손 상경…대학생활 “막막”/최재선 중앙대교수:2(역경의 열매)
◎「요셉의 삶」으로 축복된 앞날예비/학업중단 위기마다 은총의 손길
아버님이 충남 강경지역에서 목회를 하셨기 때문에 중학교시절을 강경에서 보냈다. 집에서 학교까지 30∼40리는 족히 되는 거리를 새벽6시에 집을 나서 3시간을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장작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가끔 마을 어귀를 드나들었다. 짐을 싣고 출발하는 트럭위로 수십명의 학생들이 새까맣게 올라 탄다. 운전사는 장작으로 차를 두들겨 아이들을 쫓아내리고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우린 다시 트럭위로 기어 올라간다. 이러기를 10여 차례 하면 운전사도 지쳐 태워주고 만다. 화물열차가 다니기 전까지 하루 6시간을 걸어다닌 셈이다.
새어머니가 오셨다. 그분도 믿음이 좋아 아버지가 지방에 가 안계실 때도 우리 형제들을 모아 놓고 가정예배를 인도하셨다.
『최군 영어성적이 이게 뭐야』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영어성적이 낮다고 슬리퍼로 어깨쭉지를 얻어 맞았다. 너무나 분하고 속이 상해 『실력으로 복수하고 말리라』고 작은 주먹을 쥐고 결심했다.
화물차를 타는 왕복 2시간 동안 친구들이 옆에 와 방해해도 꼼짝하지 않고 서서 영문법을 공부했다. 영어로 씌어진 책은 뭐든지 붙들고 늘어졌다. 교과서, 영문법책 가리지 않았다.
이런 나의 노력으로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 영어고사와 충남 도대항 영어웅변대회, 논술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러자 눌렸던 내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내가 해외유학을 가게되는 밑거름이 된 것같다.
강경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생이 되자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날 가난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 때문에 학업에 열중할 수 없었던 나의 머리는 뒤늦게 열리기 시작했다. 전교3% 이내에만 들으면 대학에 특차입학을 할 수 있었다.
59년 중앙대학교 경제학과에 특차로 입학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내게 어머니는 2백원과 편지를 손에 쥐어주셨다.
당시 강경에서 서울까지 버스비가 1백20원. 남은 80원을 가지고 대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때 어머니가 주신 편지를 꺼내 읽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마음이 아프구나. 그러나 내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네가 믿을 줄 믿는다. 이제 의로운 싸움이 시작됐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것처럼 너를 지켜 주실 것이다. 요셉이 깨끗한 삶을 통해 축복받은 것처럼 너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것을 부탁한다』
어머니의 편지를 눈물로 읽은 나는 아무리 외롭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머물 곳을 찾았다.
강의실 구석에서 자면서 하루 국화빵 한개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한달을 버텼다. 친구집에서 한달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 강경으로 내려갔다.
『항상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기회는 온다.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다려라』
부모님은 나를 위로하셨다. 정말 부모님의 말씀대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중간고사기간에 학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군 낙심하지 말고 서울에 올라와 시험만이라도 치르게』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의 시작이었다. 또 한 학기가 지나갔다. 2학기때도 학과장의 배려로 시험만 치르게 됐다. 그러나 계속 시험만 볼 수는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의 앞길 걱정에 매일 기도하셨다. 당시 임영신 중앙대학교 총장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아버지는 기도끝에 임총장을 만나러 가셨다. 그해 10월의 일이었다
학업·부업·캠퍼스복음화 “1인3역”/최재선:3(역경의 열매)
◎교목사모 금반지 빼주며 신앙생활 독려/기독학생회 후배 「믿음의 동반자」로 맞아
『아들이 학교에서 어떤 일을 해도 좋으니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중앙대학 임영신 총장은 시골에서 올라온 한 목회자의 청을 선뜻 승낙했다.
『영문서류를 정리할 비서를 마침 구하던 중이었습니다. 앞으로 2년동안 영어 서류작성을 도와주세요』 1학년2학기부터 임총장의 비서로 일했다. 상고출신으로 1분에 3백80타를 치던 나에게 그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년동안 총장 비서로 학생으로 성실히 일해 능력을 인정받아 대학과 대학원까지 등록금을 면제받았고 매월 생활비 2천원씩을 받아 생활했다.
기숙사비가 1천5백원 할 때였다. 대학 4학년 때까지 겨울에도 방에 연탄을 넣은 일이 없었지만 그때 추위를 견디는 훈련이 돼 후에 캐나다 미국유학 기간중 강추위를 너끈히 이겨냈다.
대학3학년 때는 총장실 청소를 하루 2시간씩 했다. 새벽4시부터 6시까지 청소를 하고 아침기도회에 참석,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작은 체구와 허약한 몸으로 2시간동안 소파밑, 유리창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나면 아침이 밝아왔다.
가난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난 이 모든 환경을 견디고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체중이 48㎏이었다. 젓가락처럼 말라갔으나 그 와중에도 난 기독학생반에 가입,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독학생반의 활동은 사막 중에 샘물을 만난 것같은 기쁨이었다.
대학3학년때 중대 기독학생반 연합회장에 당선됐다. 이 시기는 어느 때 보다 신앙활동을 활발히 한 시기였다. 전문사역자 처럼 눈코 뜰새 없이 바빴으며 전공공부보다 복음사역이 더 절실했다. 기독학생반 활동을 통해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한때 9개의 감투를 쓴 일도 있다. 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부회장, 서울시연합회장, 청년회전국연합회총무, 주일학교 교사연합회 총무등.
당시 교목이자 모교 교수였던 이여진목사의 인격적 교훈과 건전한 신앙관이 본보기가 됐다. 나의 어려움을 안 사모 신연식교수가 자신의 금반지를 빼 주었던 것은 잊을 수 없다.
기숙사생활은 그런대로 즐거웠다. 식당의 메뉴는 꽁치, 콩조림, 무김치, 우거지국이었다. 가끔 순대국으로 영양보충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모태신앙인, 보수적인 신앙관, 많은 봉사활동을 한 나의 모습은 훈련된 모습이었지 그리스도와 진정한 만남과 체험이 없는 것이었다.
부르심의 소명보다는 훈련이었다. 주위에서 완벽한 신앙인이란 소리를 들으며 종횡무진, 오로지 캠퍼스복음화를 부르짖던 나였음에도 진정한 체험이 없었던 것이다.
『기독학생반 출판부 차장이 필요해. 글재간도 있고 믿음이 좋은 학생 없을까』
『국문과 2학년 홍관옥이란 여학생이 있는데 모범적인 신앙인이래』
출판부 차장을 찾는다는 사실을 나의 친구가 말했다. 그녀는 맡은 일을 척척 잘도 해냈다.
우린 차츰 가까워져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8년간 교제끝에 67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초동교회에서 이여진목사의 주례로 혼례를 올렸다. 당시 부친의 목회지 마지막 월급이 7천원이었다. 구두 한켤레를 사고 양복도 빌려 입었다. 이불한채, 철제 캐비닛으로 흑석동 방2칸 짜리 셋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난 조교생활을 했고 아내는 중고등학교 국어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전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크리스천 대학생이란 말을 들으면서 생활했다. 겉으로는 완벽한 부부였다. 그러나 결혼 후 우리에겐 우선 순위가 어느 순간부터인지 서서히 바뀌어갔다. 68년 8월 첫아들이 태어났는데 너무나 잘생기고 영특했다. 하나님보다 내 가정이 소중하고 첫아들이 중요했다. 그러던 중 우리 부부에게 첫 시련이 닥쳤다.
첫아들 하늘나라로… “내탓” 통곡/중앙대 최재선:7(역경의 열매)
◎「영적수면」 징계 깨달아… 슬픔안고 유학길결혼 후 우선 순위가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전엔 누구보다 하나님과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나 하나님과 부모보다 내 가정이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완벽한 크리스천이라고 평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성령님과 함께하지 않고 우리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 열심이었던 것같다.
당시 난 유학 준비 중에 있었다. 내가 미리 유학가서 자리를 잡고 아내를 초청할 예정이었다. 아내는 고향 김포 양곡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출국전까지 중앙대 전임강사로 서울에 있어 우린 한동안 주말부부로 지내야 했다.
아내에게 아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늦게 울리는 한 통의 전화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여보 어서 내려오세요. 우리 아기가…』
아내의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 정신 없이 양곡으로 내려갔다. 아이는 김포읍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원에선 급성 뇌막염으로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동네아주머니들이 아기가 너무 귀여워 하루종일 데리고 다녔는데 의사는 아기가 햇볕을 너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 이 아이만 살려 주신다면 일평생, 하나님 영광 위해 살겠어요…』
아픈 아기를 업고 아기가 숨을 거두기전까지 찬송가 490장을 불렀다.
『봉헌할 물건 나 없어도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내 죄를 주께 다 고하니 주님의 보혈로 날 씻으사 눈보다 더 희게하옵소서. 간악한 마귀 날 꾀어도 주예수 앞으로 더 가까이 이 세상에 속한 그 허영심 또한 추한 생각을 다 버리니 정결한 마음 늘 내게 주소서』
지금도 그때 아내와 내가 애절하게 부른 이 찬송이 생각나곤 한다. 4일동안 아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애간장이 녹는 기도와 찬양을 드렸지만 아이는 태어난지 9개월 만에 밝은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떠나갔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데려 가셨지만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남겨 주셨다.
죄많고 위선적인 부모의 신앙을 징계하시기 위해 아이를 데려가신 것이다. 아기를 살려주신다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어야 했다.
아이를 묻고 돌아올 우리 부부를 보고 부친께선 『어이 아범아 네 자식 어데두고 혼자 왔는가…』고 땅을 치며 우셨다.
아이가 세상을 떠난 후 우리 부부는 미칠 것같은 공허감, 슬픔속에 인생, 신앙관을 재검검해 보았다.
『여보 아마 하나님께서는 아이를 데려가는 충격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영적수면을 깨울 수 없었나봐요』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안고 말했다.
『완벽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깨뜨리시는군요…』
그후 한동안 우리 부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완벽한 크리스천에게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 것같아 부끄럽고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첫아들을 잃은 것은 우리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아이를 가슴에 묻은 것이 69년 5월3일, 나는 그해 6월19일 정해진 날짜에 캐나다 토론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다.
열망의 유학생활 “주님과 만났으면”/최재선:5(역경의 열매)
◎학위보다 아들죽음 달랠 영접체험 집착/“구원받지 못하면 귀국하지 않겠다” 기도
69년 6월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고 한국을 떠나는 나의 마음에는 기쁨과 근심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자식을 잃은 아내를 두고 떠나야 하는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다. 첫아이가 세상을 떠난지 한달이 조금 지난 시기에 떠나는 유학의 발길은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의 길을 예비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간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국방대학원 조교로 군복무하며 대학원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유학의 꿈은 무르익어 갔고 전임강사로 강단에 서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드렸다.
『주님 나는 가진 것이 없어 유학의 길은 멀고 험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신 용기와 인내 노력으로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수년간 이를 위해 기도했고 학업에 열중했다.
당시 기독교 장로회 캐나다 연합교회는 1년에 한명의 목회자에게 전액장학금을 주고 유학의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몇해 동안 아무도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 장학금이 남는 실정이었다. 영어시험 때문에 목사님들은 유학의 자격을 얻기가 힘들었다.
캐나다 현지 교단에서는 이번 한번만 평신도 중에서 박사과정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기로 했다. 응모자가 20명이었고 그중에는 현직교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문교부시험에 나혼자 합격했다.
또 미시간 테스트가 토플 시험으로 바뀌던 첫해 사전 지식도 없이 토플시험을 봤다. 하버드, 토론토 대학에서는 5백∼5백50점을 요구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5백25점을 맞아 토론토 대학에 입학, 주님께서 예비해 주신 길을 걷게 됐다.
캐나다에선 전액장학금, 가족생활비, 왕복여비, 책값, 육아비까지 나오는 장학금을 받고 생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부친과 나의 기도, 끊임없는 준비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김포공항을 떠나는 내게 교수들은 『최군, 반드시 박사학위를 받아서 돌아오게』라고 말했고 제자들은 『교수님 박사학위 꼭 받고 오세요』라고 말했지만 이 축복의 소리들은 나를 괴롭혔다.
나는 박사학위 보다는 주님과의 만남없이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며 나는 『주님 이제 유학가서 주님과의 만남 없이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착하고 신실하다』는 평가때문에 마음 속에 늘 무거운 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진실된 체험을 했다고 여겼지만 단순한 모태신앙인으로 주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 같았다. 특히 아들의 죽음으로 학위보다는 하나님과의 체험적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강한 바람이 샘솟았기 때문이다.
캐나다 도착 1년후 아내가 왔다. 둘째아이를 임신한 아내는 집에서 기도와 성경 묵상으로 태교를 했다. 내가 도서관에서 밤12시에 공부하고 돌아온 어느날 현관문을 열어 준 아내는 감격해하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내는 묵상중 로마서 10장9절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뭐가 달라졌다고 해. 밥이나 가져와』 먼저 믿었다는 영적 자존심으로 아내의 감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겉모습이었고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나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열망하고 있었다.
마음의 빈방에 주님 모셨다/중앙대 교수 최재선:6(역경의 열매)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통해 구원확신/“나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라”
어린양 인도주님과 만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은 부질없는 나의 자존심과 위선적 신앙으로 캐나다에선 이루어지지 않았다.
72년 1월, 미국 버지니아 주립대학에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입학했다. 버지니아 주립대학에선 학생 한사람의 생활비만 장학금으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한국에서 둘째 딸아이를 돌보며 여비가 마련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아내는 편지 서두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참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는 눈물의 권고와 간청을 늘어 놓았다. 보고싶었던 아내가 가족들 소식보다 남편의 신앙문제에만 관심을 보여 난 폭언스런 편지로 답장했다.
『당신은 전도부인이 아니므로 나를 신앙으로 교훈하려는 태도는 버려요. 당신은 나의 아내로만 있으면 돼요』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내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 과제로 남아 있었다.
73년 봄, 아내는 미국으로 왔다. 그러나 나의 구원문제를 강력히 촉구하는 아내와 나의 갈등은 당분간 지속됐다. 아내가 복음서적을 읽으라고 건네주면 『내가 박사학위 받으러 왔지 책읽으러 왔나』라며 집어 던졌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아내의 모습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발견했고 나는 초조하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이 방황하는 내 자신이 두려웠다. 아내가 성경공부모임에 나가고 없던 어느날이었다. 그동안 아내가 추천했던 책을 아내 몰래 서재에서 빼내어 읽고 있는 중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가 텔레비전으로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설교를 듣는 내 마음 속에 이번 만큼은 그리스도를 만나야지라고 결심했다.
빌리 그레이엄목사는 『사람들 마음엔 여러개의 마음의 방이 있어 그곳에 어떤 것이 가득 차있으면 주님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외칠 때마다 청중들은 아멘으로 따라하십시오』라고 주문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은 텔레비전 위에 손을 얹고 따라서 하라고 했다. 그대로 했으나 나의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텔레비전이 꺼져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번이 최후의 기회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다시 기도했다.
1시간동안 눈물로 절박한 기도를 드렸다. 그때였다. 낮고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나를 삶의 수단으로 삼아 왔으나 이제 부터는 나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라』
부드러운 음성은 나를 감동 시켰고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찾았던 삶을 회개했다. 세살 때부터 오늘까지 죄지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그 한가지 한가지에 대해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2시간 후 갑자기 큰 멧돌이 나를 치는 것을 느껴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내가 왜이럴까』
일어나서 이것은 어떤 표적일까 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이제부터 사랑한다』
내 가슴은 박하를 먹은 듯한 환한 기쁨이 넘쳤고 입에선 감사가 연발됐다. 창밖의 자연 풀 새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시 보였다.
『주님 이제부터 나의 인생의 목적이 되소서』
그날 밤 버지니아 주립대학 유학생 20여명을 초청해 이 기쁨을 간증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결신했다. 이제야 전도의 능력을 주심을 알게되었다. 주님의 체험 없이는 열매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유학생들은 우리 집에 와서 예배를 드리길 원해 성경공부모임이 시작됐다.
하나님께서 장학금 주셨다/중앙대 교수 최재선:7(역경의 열매)
◎박사과정 학비 막막… 1주일 작심기도/“지급명령 내렸다”응답… 8. 000달러 받아
성령충만함을 체험한 나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이 즐거웠다. 마침 박사학위 논문 자료를 분석하고 있던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6개월동안 수리과정에 들어갔다. 이 시간동안 아내와 나는 수많은 복음서적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여보 이 구절 좀 읽어 봐요』
우린 상대의 무릎을 쳐가며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기쁨을 나누었다. 6개월동안 몸속의 육적인 것들을 꺼내고 세포마다 성령충만함으로 채워 넣었다.
이 시간 동안 우리부부는 3백여권의 책을 읽었다. 영서를 3일에 한권씩 읽는 셈이었다. 이 때 복음서적을 읽으며 나의 신앙관 가치관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립하고 체계화했다. 많은 지성인들을 가르칠 수 있는 밑거름을 준비한 시기가 됐다. 이 기간은 영적인 제2차 변화과정이었다.
우리사역은 이때부터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됐다. 이민생활에 지친 교민, 갈등하는 유학생 부부들에게 상담자 역할을 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또 나의 길을 예비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많은 기적을 만들어 내셨다.
한편 월남전 이후 미국대학은 자연과학 분야에 쓰던 장학금을 인문과학분야로 돌려 많은 한국유학생이 장학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방연구비가 자연과학분야에 지급되지 않자 인문과학 분야의 장학금을 자연과학분야에서 되돌려 갔다.
따라서 미국 전역의 인문과학 장학금을 받는 외국인에 대해 10%만 지급하라는 미국정부 지시는 마지막으로 장학금을 받았던 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1주일동안 먹을 식품을 미리 준비해 두고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를 했다. 내가 도움을 청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기도후 하나님께선 학과장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장학금을 주라고 명령하셨다」고 전하라고 하셨다.
학장실 문앞에서 용기를 잃었다.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도저히 학과장에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명령한다. 너는 전하기만 하라』
하나님께선 마음속에 계속 말씀하고 계셨다. 몇번이나 주저하다 노크를 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학장은 안경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 인사도 하지 않은채 또박또박 말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학금을 미스터 최에게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학과장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천장만 쳐다보았다.
『주님 저분의 마음을 돌이켜 저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말하게 하소서』
나는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의 입가를 쳐다 보았다. 웃음이 번지면 「예스」이고 이마를 찡그리면 「노」일 것이다. 그의 입술과 이마를 번갈아 쳐다 보며 기다리고 서있었다.
5분이 경과되도록 아무말 없던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게 아닌가.
『하나님이 주라고 했으면 줘야지. 예산대로라면 장학금을 줄수 없지만 여기 저기서 긁어 모으면 8천불은 장학금으로 줄수 있네』
학과장은 이장부 저장부를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일단 장학금을 받으면 지도교수의 연구를 1천시간 도와야 했는데 난 그런 수고도 않고 논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확신의 기도」엔 바드시 응답”/최재선:8(역경의 열매)
◎논문 제출단계 분석 컴퓨터 에러 “발동동”/아내, 이웃들에 중보기도 부탁… 작동 정상화74년
박사학위 논문을 3장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컴퓨터 자료분석 결과치가 반이 틀리게 나왔다. 프로그램에 에러가 발생한 것이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프로그램의 잘못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컴퓨터공학과 과장, 지도교수, 컴퓨터지원연구소의 자문을 받아도 그들도 알지 못했다. 내가 활용한 프로그램이 고도의 실력을 요구해 아무도 에러를 찾아낼 수 없었다. 3백줄가까이 되는 프로그램을 고치기 위해 8천달러의 비용이 필요했다.
이로인해 나는 거의 박사학위를 포기할 단계까지 이르렀다. 논문제출 마감일과 귀국날짜를 4개월 남겨둔 시기였다.
맥이 빠지고 실의에 차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본 아내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일이 있긴 무슨 일이 있어. 여자가 밥이나 하지』
『하나님께선 남편과 아내는 한몸이라고 했어요. 남편의 고통을 알아야 기도해 줄 수 있지요』
아내에게 대충 설명을 하고 밤11시경 친구집에 볼 일이 있어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아내는 수첩을 꺼내 50여명의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12시, 내 남편의 컴퓨터문제 해결을 위해 중보기도해 주세요』
『저 여자가 돌았군』
난 중얼거리며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난 이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게 됐어』
변명하듯 친구에게 얘기하며 한국에 돌아가야 겠다고 되뇌었다. 친구에게 한탄한들 변할게 없었다. 새벽1시경 그 집을 나왔다. 눈이 자동차 위로 1m가량 쌓여 있었다. 차를 겨우 발견해 시동을 건채 멍하니 앉았다.
『주여, 주여』를 부르짖으며 10분간 엎드려 있었다. 너무나 답답했다. 유학기간중 하루도 밤12시 이전에 도서관을 나온 일이 없어 도서관귀신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내게 박사학위논문 제출 4개월을 앞두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막막한 일이었다.
『가라』
주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다.
『주여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연구소로 가라』
대학연구소로 가서 불을 켜고 히터를 켰다. 테이블위에 발을 얹고 근심만 하고 앉아 있었다.
『왜 기도하지 않느냐, 왜 프로그램을 보지 않지』
『내가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주님께선 계속 말씀하셨지만 난 컴퓨터계산서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싫었지만 억지로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3번을 다시 읽어도 역시 잘못된 부분을 찾을수 없었다.
『왜 믿음없는 눈으로 바라 보느냐, 믿음의 눈으로 다시 찾아 보라』
믿음의 눈으로 4번째 프로그램을 보았다. 확대경처럼 어떤 한 곳이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중 철자 하나가 틀린것이 발견됐다. 그 한 글자를 고치니 프로그램은 제대로 돌아가고 계산이 올바르게 됐다.
이튿날 오전7시 컴퓨터 계산서를 가지고 아내에게 보이며 커다란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계산이 올바로 나왔고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어』
『나는 어젯밤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새벽까지 고민했군요』
아내는 50여명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고 50여명의 친구들로부터 기도 응답받았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고쳐 주셨다. 확신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그제서야 알았다.
기도의 지혜」로 대학원장 굴복”/중앙대 교수 최재선:9(역경의 열매)
◎논문서도 「하나님 찬양」 빌미 “학위 못준다”/“그런형식 엾었지만 「거부」도 없었다” 반박박사학위
논문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한국인으로서 박사학위 논문을 영어로 작성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자기 앞에 앉을 때마다 먼저 기도하고 논문작성을 했다. 그러면 놀랍게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체계도 세울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논문 초안을 작성해 제출하면 지도교수는 종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고쳐서 3차까지 반환했다.
지도교수는 한달동안 내 논문을 돌려주지 않았다. 논문이 잘못돼 볼 것이 없어 아예 돌려주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한 나는 교수를 찾았다.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를 보고 지도교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최군 미안하네. 나는 이미 논문을 돌려준 줄 알고 있었네. 자네 논문은 한글자도 고칠 데가 없더군』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에 나는 감격했다. 컴퓨터 사정으로 논문이 완성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겸손히 엎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75년 1월, 드디어 논문심사의 날이 왔다. 교수들은 내게 심사규정을 의논해야 하니 잠시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오전9시부터 낮12시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냉수와 콜라를 연거푸 마시면서 기다렸지만 심사위원들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기도 후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교수실 문을 노크했다.
『오, 내 정신좀 봐. 그동안 최군 논문을 보고 교수들과 한국전쟁과 한국에 대한 얘기를 정신없이 하다보니 논문심사를 깜박 잊었네. 이 논문은 심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된 논문일세』
지도교수는 이 논문이 한국에 어떤 기여를 하길 원하느냐는 질문으로 논문심사를 마치며 악수를 청했다.
『축하하네 최박사』
조금전까지만해도 최군이라고 부르던 교수가 나더러 최박사라고 부르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만약 6개월동안 컴퓨터가 수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2년6개월만에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3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6개월」은 영적인 성숙기였기에 값진 시기였다.
또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박사학위논문 서문에 쓴 내용때문이었다.
『나를 지도해준 지도교수님과 기도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일이 있게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이 내용을 대학원장이 거부했다.
『논문을 통과시킨 것이 지도교수가 한 일이지 어째서 서문에 하나님께서 쓰게하셨다는 말을 써넣는 건가. 이 논문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네』
대학원장과의 일대일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문이 다른 나라에 없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대학원장은 영국 호주 캐나다 몇몇 대학으로 확인해 보았고 그런 논문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서문을 고치거나 굽힐 수 없었다. 기도로 지혜를 구했다.
『주여, 제가 어떻게 말해야 대학원장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다시 물었다.
『대학원장님. 그럼 하나님께서 이 논문을 쓰게 하셨다라고 쓴 서문 때문에 논문을 받지 못한 사례가 외국에 있었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대학원장은 영국 호주 캐나다 등에 알아 봤고 없었는지 『할 수 없군』하며 내 논문을 접수했다.
이때 나는 기도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체험했다.
율동의 찬양」캠퍼스 첫도입/최재선 중앙대교수:10(역경의 열매)
◎귀국뒤 모교서 강의… 갈수록 기독반 “텅텅”/「확신」 갖고 수련회 열자 복음불기둥 “활활”
미국유학 생활을 서서히 정리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귀국하기 위해선 여비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아내는 봉제공장에서 하루 8시간을 일했다. 수입에서 십일조를 바치고 병환 중에 있는 부친에게 생활비 보내며 여비를 모았다.
그런데 정기적인 성경공부를 하던 우리 부부는 로마서 13장을 읽으며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주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롬13:7)
우리가 받은 보수 역시 세금을 내지 않은 것이고 유학생 부인의 취업도 법적으로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당시 많은 유학생 부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우린 단기간 여비마련을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그날로 6개월동안 다녔던 봉제공장을 그만두었다.
귀국하기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 파티에서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미국인 친구들이 모인 파티에서 우린 이 간증을 했다. 우리의 얘기를 들은 할머니 한분이 스픈으로 스테인리스 그릇을 땡땡땡 치며 『주목해 주세요』라며 우리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며 기도하기를 청했다.
며칠후 킨슬리교수가 여비로 족할 3천달러의 수표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교수이며 장로였던 킨슬리교수는 우리에게 당부했다.
『최군은 귀국하면 새로운 차원의 선교사역을 해야 할텐데 너무 책을 많이 읽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지혜를 의존할까 염려가 되네. 하나님의 말씀은 진부한 것같아도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으니 가감없이 말씀만 순수하게 전하세요』
그후 사역을 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잊은 일이 없다.
75년 2월10일 우리 부부는 조국복음화의 새로운 열정과 기대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나는 복음의 세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였다. 이런 소명을 갖고 대학 강단에 섰다. 내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75년 3월부터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다. 첫날 20∼30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이튿날 1백여명이 모였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발을 구르며 회개를 하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이시기에 통성기도, 율동, 박수치며 찬양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중대 캠퍼스에 등장했다.
그러나 한 종교지도자가 나를 이단으로 몰아 치자 학생들은 떠나갔다. 6개월간 학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던 예배실은 텅비어갔다.
당시 한국교계는 성령이란 단어를 쓰는 사람을 이단시하는 분위기였다. 기도원에 올라갔다.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샘물처럼 솟았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듯이 다시 시작해보기로 결심하고 캠퍼스로 돌아왔다.
정식으로 기독학생반에 남아 있는 숫자는 8명이었다.
『내게 있는 소망과 기쁨을 너희에게 전하고 싶다』
『교수님은 우리의 선배이자 스승이시니 교수님을 믿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청계산 기도원에서 밤10시부터 다음날 새벽2시까지 간증을 했다. 학생들 모두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방학 중 1차 수련회에 21명, 2차 수련회에 1백99명이 참석,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이것이 중앙대학교 기독학생반 변화의 첫날이었던 셈이다.
캠퍼스 복음화 “놀라운 역사”/최재선:11(역경의 열매)
◎비기독학생 초청 「인생문제 수련회」 20년째/참석자 대부분 「예수체험」… 새 신자 결신 “은총”
75년2월, 귀국후 흑석동의 수도시설, 화장실, 전화도 없는 3평짜리 판잣집에서 살면서 부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방에 20여명의 학생들이 찾아와 찬양하면 천국과 같았다. 학생들은 우거지국만 끓여주어도 맛있다고 매일 찾아왔다. 그 작은 판잣집에서도 결신의 시간은 계속됐다.
이곳에서 성경공부한 학생중에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박사, 목사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78년부터 대학캠퍼스는 성령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각 대학의 기독학생반 지도교수들이 찾아와 질문했다.
『어떻게 하면 최교수처럼 학생복음화운동을 잘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성령께서 명령하실 때 순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요』
그해 5월 인생문제대수련회를 시작했다. 인생문제대수련회는 매년 열려 현재 20회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않은 학생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하고 성령충만 받게 하는 성회이다.
1박2일동안 4∼5강좌로 진행된다. 「인간의 조건과 갈등」「타락이후의 갈등」「당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구원의 확신」「율법으로부터의 해방」「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성령충만한 삶」「능력있는 삶」「하나님의 사랑」등 강좌로 말씀을 증거했다. 이 수련회를 위해 한달전부터 아내와 기도를 한다.
인생문제수련회라는 명칭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인생을 논하겠다고 화투와 술 담배를 가지고 오지만 술병 마개 한번 따지 못하고 화투는 만져보지도 못하고 수련회에 푹 빠지게 된다. 다만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앞에 내어놓을 수 있다. 첫 강좌에서 반정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집회 후엔 대부분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인생문제대수련회에서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중 첫회 수련회에서였다. 한얼산기도원에서 1백99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이중 50명 정도만 크리스천이었고 1백50명가량이 비기독인이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회복, 성령충만,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이란 강의를 듣고 매일저녁 20∼30명의 학생들이 손들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마지막 시간이었다. 한 ORTC학생이 『질문있습니다』라고 손을 번쩍 들었다.
『니체, 사르트르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모두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데 교수님은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겁니까. 거짓말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날 참석한 1백99명중 1백98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단 한명 남은 그의 말이었다. 나는 순간 하나님께 화살기도(순간적으로 하나님께 쏘아 보내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 학생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 나머지 학생들은 나와 그 학생을 번갈아 쳐다보며 『최교수는 이제 끝장이구나』라는 측은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 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할테니 따라서 복창하시오』
학생은 2번까지 따라했으나 3번째 『하나님은 죽‥』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1백98명의 학생들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 10분 후에 학생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그 학생에게 『하나님은 죽었더냐』라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님을 만났느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학생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외치려는 순간 누군가 큰 손으로 뒷덜미를 꽉잡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왜 죽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해 쓰러지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1백99번째 학생이 드디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은 영으로 살아계신 것을 모두 알수 있었다.
교내 부흥성회 뜨거운 열기”/최재선:12(역경의 열매)
◎1천여 학생들 참석 「기도의 강물」 넘쳐/“눈총”속 지유집회 개최… 쾌유자 잇달아
78년 미국 데이비트 로스 목사일행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중앙대의 성령운동 이야기를 듣고 학교에서 부흥성회를 열기 원했다. 부흥성회를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어깨에 띠를 두르고 교문에서부터 대학극장으로 학생들을 모았다. 1천2백명이 모였다. 그런데 로스목사의 설교를 통역한 내게 하나님께선 부흥성회 후 그자리에서 은사집회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저를 망신 주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많은 사람들 앞에 목사도 아닌 제가 은사집회를 하다니요』
그러나 하나님께선 계속 마음 속에 말씀하시며 순종하길 원하셨다.
로스목사와 의논 후 나는 다시 강단에 섰다.
『여러분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충만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받는 것인지 몰라도 분명한 것은 믿는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능력받으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받기 위해 대학극장 뚜껑이 날라가도 좋으니 일어서서 10분간 큰소리로 기도합시다』
1천2백여명 중 50여명만 남고 모두 일어섰다. 대학극장은 기도의 강물로 차고 넘쳤고 기도가 그칠줄 몰랐다.
이 때 난 지성인들에게 복음은 단순하고 소박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어딜가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후 어느날, 아내와 기도하는 중 학내에서 치유집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정문에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는 사람은 오세요. 하나님이 치료해줍니다』라고 쓴 현수막을 걸었다. 21세기 대학내의 이런 현수막은 눈길을 끌기 충분했고 따가운 눈총도 많이 받았다.
집회 10일을 앞두고 캠퍼스를 걸어 가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학교에 미국 버지니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있는데 공부를 너무해서 정신이 돈 모양이야. 아마 경제학과 교수라지』
세명의 교수들이 걸어가며 내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누군지 짐작은 갔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꾹 참았다.
『주님께서 내 억울함을 아시리라』
집회 당일이 됐다. 출근하며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오늘 한 사람도 오지 않았으면…』
자신 없는 말을 뇌깔였지만 어김없이 약속된 집회시간이 됐다. 대학교회에 3백명이 모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꿇고 우리 부부는 학생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89명이 집회에서 육적·영적치유를 받았다.
경제학과 4학년에 얼굴이 늘 어둡고 이마엔 내천자를 그리고 다니던 학생이 있었다. 그는 집회후 간증하길 원했다.
그는 그동안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엄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해 자신과 엄마는 온갖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젠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천사같았다.
화학과 김영환군은 폐병 3기로 자퇴원서를 쓰고 정문을 나서다 현수막을 보고 발걸음을 돌려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치유받고 학업을 계속해 현재 연세중앙침례교회 집사가 됐다.
약학과 한 여학생은 치유집회 때 치유받지 못해 그후 열린 인생문제대수련회에 다시 참석했다. 허리디스크로 꼼짝할 수 없던 그녀를 친구들이 들것에 실어왔다.
제주도에 5천평 감귤밭을 갖고 있던 부친이 사기를 당해 고생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모친은 삯바느질로 자녀들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다. 등록금 낼 때만 되면 허리가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미움이 오기 때문이란 것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녀가 『주여 용서합니다』라고 말하자 허리에서 뚝하는 소리가 나더니 디스크가 치료됐다. 그리고 10년후 제주도에서 약국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런 소문들이 퍼지자 의대생들은 실험중 누가 쓰러지면 들것에 싣고와 기도를 부탁하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다.
목사안수 받고 캠퍼스전도 본격화/최재선:13(역경의 열매)
◎평신도로선 한계절감… 뒤늦게 신학대 마쳐/교회설립 아내와 함께 영혼구원 사역 전력
『주님 제가 목사 안수를 꼭 받아야만 할까요』
부친께선 8남매중 맏이와 둘째는 목회자가 되길 원하셨다. 두 형님은 현재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부친은 셋째인 나에게 『경제학 공부한 장로가 돼 형님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기 바란다』고 말씀하셨지만 경제학은 직접 돈을 버는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물질을 초월한 삶을 살게 하셨다.
그러나 내 인생에 생각지 못했던 목회자의 길이 준비돼 있었다. 목사가 아닌 평신도가 말씀을 전하니 몇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기독학생반에서 훈련받은 학생들은 각 교회로 가서 리더로 봉사활동을 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담임목사는 『학생, 누구한테서 훈련을 받았는가』『그 사람의 직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평신도인 교수가 가르쳤다고 말하면 『아무리 교수라해도 목사가 아닌 평신도가 말씀을 가르쳐서는 안된다』며 기독학생반활동을 못하게 했다.
또 학생들은 영적욕구를 채우지 못해 갈급해하는 반면 학교에서 받은 성령충만함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가 몇년 계속되자 학생들은 점점 결집력이 약해졌다.
신학을 공부해 목사 안수를 받기로 결심했다. 일단 학생들이 안심하고 배우고 자유롭게 활동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개교회 목회보다는 캠퍼스 선교를 지원해주는 캠퍼스 밖의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사실 대학채플을 인도할 때 목사 안수를 안받았기 때문에 축도를 못한 사정도 있었다.
80년 침례교신학대학에 입학했고 83년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흑석동에 선한교회를 세웠다. 성도들의 대부분은 중대기독학생반 졸업생이나 재학생이이었다.
중앙대 기독학생반은 현재 서울과 안성캠퍼스에 각 1천여명의 회원이 가입돼있다. 아침기도회는 오전7시50분부터 시작되며 학년별 성경공부, 중창단찬양연습, 정기예배, 형제자매모임이 요일별로 진행된다.
또 격주로 철야기도, 연간 2차례의 수련회, 5월 인생문제대수련회, 전도여행 이외에도 학생들은 드라마와 찬양으로 각 교회 공연을 하는등 하나님의 영적 군사들로 훈련받기에 여념이 없다.
나 역시 20년째 기독학생반 지도총무를 담당하고 있다. 아내는 지도위원으로 찬양과 경배, 내적 치유사역에 동역하고 있다. 교목과 지도교수들이 도와주고 있다.
기독학생반의 졸업사은회는 눈물과 감격으로 뒤범벅이 된다.
『교수님, 이 학교에 들어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새생명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전공 학사모와 기독학생반 학사모, 이렇게 두개의 학사모를 쓰게 돼 기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깨를 누르던 피곤이 눈녹듯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용솟음쳤다.
『홍관옥사모의 내적치유 강의와 식사 한그릇 없이 기독학생반을 졸업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학생들은 우리집에 자유로이 드나들며 찬양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90년 흑석동에 집을 짓기까지 옷장 하나 없이 살았다. 남들은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문이 닫히지 않는 장롱을 누가 만원을 얹어주며 쓰라고 해서 한동안 사용한 일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은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이 습관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린 늘 베풀며 살려고 노력했다.
전도의 값진열매에 감사/최재선 중앙대 교수:14·끝(역경의 열매)
◎부흥집회 참석자들 “삶 달라졌다”에 보람/집 교회부지 헌납… 아내 여성교육원 설립
86년 미국 유펜대학 교환교수로 가게 돼 필라델피아에 1년간 머물렀다.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한국교포를 대상으로 25차례의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횡격막 암으로 고생하던 한 성도와 손이 올라가지 않던 한 장로님이 치유받았다. 프린스턴대 유학생들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확신합니다』라며 두손을 높이 들고 걸어 나왔다.
아내는 미국여성들의 성경공부모임 위민스 바이블스터디 리더로 활동했다. 아내는 이 시기동안 고국에 돌아가 가정회복을 위해 사역할 것을 서원했고 그를 위해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아내는 페이스신학대학에서 1년동안 주야로 공부해 성서문학석사, 3년동안 공부해 「크리스천 가정의 건설」이란 논문으로 종교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우린 페이스신학대학 기숙사에서 머물며 교포들을 세그룹으로 모아 제자훈련을 시켰다. 지금 그곳에 영성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며 바울이 마게도냐, 에베소에 가서 믿음의 씨를 뿌린 것처럼 어디를 가든지 주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나는 1년 후 교환교수 기간을 마치고 아들과 귀국했고 아내는 딸과 남아서 계속 공부했다. 아내가 미국에 남아 공부하는 나머지 3년동안을 떨어져 지내며 그리움으로 마음이 아플 때도 있었지만 앞으로 우리가 펼칠 사역을 기대하며 기도하며 기다렸다. 아내는 귀국 후 여성과 가정에 대한 관심을 갖고 부모자녀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춘 한국기독교여성교육원을 92년 설립했다.
90년 유럽여행중 네덜란드 파인에 있는 한국교회를 방문했다.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최교수님 맞지요』
담임목사인 김순성목사는 흥분한 목소리로 성도들에게 내 소개를 했다.
『이 분이 바로 김순성목사를 변화시킨 분입니다. 85년 예수 페스티벌 때 최교수님의 마태복음 8장 「승리한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듣고 은사 받고 목사가 돼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한인교회를 방문했다.
『중앙대 최재선교수님이시죠. 서울대 예수페스티벌에서 교수님 설교를 듣고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후 독일 영국 미국 목포대학 광주대학 등에서 『바로 교수님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습니다』라고 말하는 지성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전도의 열매들이 얼마나 값지고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의 모든 열정을 바친 위로가 된다.
교수생활 수입의 반이상은 선교비로 사용했지만 하나님께선 늘 채워 주셨고 베푸는자의 위치에 서게 하셨다. 난 교수직을 갖고 있기에 목회자 월급은 받지 않고 사역하며 4년전 살고 있던 주택을 교회부지로 헌납했다. 건물의 지하1층 1, 2층은 교회로 3, 4, 5층은 학원복음화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93년 유럽청년학생 수련대회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집회에 청년대학생 80여명이 참석했고 이중 이혼 직전에 이른 두 가정이 화합되기도 했다. 또한 뮌헨 교포교회에 이단의 세력이 침투하고 있어 일곱교회를 다니며 그릇된 이단의 술책에 대해 강의했다.
앞으로 우리 부부의 사역은 지성인과 지도자들을 제자훈련시켜 성령의 은사를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소망이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영적재충전과 쉼을 줄 수 있는 수련원을 세우고 싶은 것이다.
『가난과 연약함 속에 풍부함과 강함이 나온다』는 감사의 고백을 한 바울처럼, 극한 가난 속에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은 나에게 늘 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숱한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실히 믿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신앙유산 때문이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