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듯한 온돌방에서 자고 나면 참 개운하다. 단잠을 잤다. 아침 햇살이 집안 깊숙이 들어온다. 살짝 휘어지기도 하고 삐뚤어지기도 한 밤색 서까래가 하얀 벽과 천장과 잘 어울린다. 살금살금 일어나 마루로 나가 책을 조금 읽었다. 엄마에 대한 글이 있다. 갑자기 엄마 생각에 목이 멘다. 전화를 걸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받은 딸의 전화에 엄마는 감격한다. 그까짓 전화 한 통에 감격하는 엄마의 외로움에 내가 사무쳐 밖으로 나왔다. 청사포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는 바다는 눈부시다. 소나무 한 그루 멋지게 하늘 한 쪽을 차지하였고 작은 꽃밭엔 백일홍 나팔꽃 등 여름꽃이 아직도 한창이다. 주인의 손길이 조금만 닿은 듯한 마당은 그 자체로 ‘거기 그렇게 있는’ 자연이다. 모든 색들은 햇빛 아래서 정직하다. 나팔꽃은 보라색이 아니다. 파란색도 아니다. 나팔꽃색이다. 아무도 그 색을 배합해내지 못한다.
누군가가 꺼이꺼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길 돌담에 걸터앉아 한 젊은 여자가 애절하게 오빠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 울음은 아침 공기를 흔들면서 내 가슴께로 밀려온다. 나도 저렇게 내장이 다 끌려올 것 같이 울어 본 적이 있다. 문득 전화기 너무 그 여자의 오빠가 야속하다. 그러나 여자여, 더 이상 오빠를 붙잡지 말거라. 사랑은 본래 영원하지 않단다.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집주인에게 감사 편지를 썼다. 등 뒤가 따스하다. 오늘 하루 좀 덥지 싶다.
박쟁과 나는 콧노래 부르며 터덜터덜 걸어서 ‘엔제리너스 커피’를 찾았다. 투명한 아침 햇살과 연애질을 하는 푸른 바다와 몇몇 낚시꾼과 한산한 카페는 영화에서 본 듯한 풍경이다. 나는 기어이 커피라떼를 마셨다. 이런 날 이런 곳에서 커피 아닌 다른 무엇을 마신다는 것은 어쩐지 투박하다.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 아니라도 과일주스보다야 그래도 이 풍경에 더 잘 어울린다. 외국인 여행객 커플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들어온다. 달맞이고개에서도 숙소를 못 구해 청사포까지 넘어온 것일까. 그들 덕분에 더욱 영화스럽다. 작은 고기잡이배들이 출항을 하고 “고등어 사세요.”를 외치는 트럭 하나 지나간다. 이 곳의 바다는 일상과 어개를 나란히 하는 바다다. 그래서 이 커피집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두 개의 등대가 정면으로 보이고 테이블 간격도 넓고 미팅룸도 둘이나 있는 이곳은 도심의 카페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 다름이 사람들을 끌고 올지 외면당할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멀리 사는 나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짐작컨대 외면당하지 싶다.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메모를 끄적이는 카페는 도시인들을 위로하는 곳이다. 이곳은 외곽이다. 외곽의 카페는 연연들의 장소다. 연인들은 의지에 앉아 시간을 잘게 부수며 소소한 수다를 즐기지 않는다.
우리는 커피잔을 부디쳤다. 나는 기어이 한 마디했다. 잔 부딪치는 소리보다 조금 크게 ‘남은 가을을 위하여!’
아직도 가을은 한 달 이상 남았다. 이제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지고 하늘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스산한 저녁들이 밀려올 것이다. 수확의 풍성함 뒤에 조락의 쓸쓸함이 얼굴을 내밀 것이다. 나는 가을의 이 두 얼굴을 좋아한다. 풍성하기만 하다면 인생이 아니다. 쓸쓸하기만 해도 살맛이 나지 않는다. 두 가지는 서로의 뒷모습이니 엄살 부리지 말고 쓸쓸함까지 사랑하여라.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무 밝고 환한 사람, 명랑함이 물방울처럼 톡톡 튀는 사람에게 정이 덜 가는 이유을 알겠다. 생의 이면에 깃든 쓸쓸함의 그림자를 감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맹목적 희망 예찬은 타인에 대한 애정 결핍처럼 보인다. 자신의 풍요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행복과 희망을 강요한다. 결핍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없을 때 물질적 풍요가 부족함이 없다 해도 삶은 조화처럼 생기가 없어진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모른다.
해운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햇빛은 강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다. 모자도 안 가져오고 선글라스는 지아님 차에 있다. 그냥 그대로 다 받아냈다. 그래도 습기가 없으니 더위가 가볍다. 솔숲엔 소풍 나온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기 시작한다. 내 또래 여자들의 소풍이 제일 예뻤다. 그네들도 남은 가을을 위하여 오늘 여기에서 소풍을 즐기겠지.
대로변 포스터를 하나하나 살피며 걸었다. 퇴직 후엔 일주일씩 부산에 머물며 하루에 한편씩 이것저것 골라가며 영화를 봐야지. 영화 한 편 보고 느리게 해변을 걷다가 노천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잠시 졸다가 다시 어슬렁어슬렁 몰운대나 다대포로 노을구경을 가야지.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딱 제 시간에 맞춰 상영관에 들어갔다. 몇 편의 단편영화가 이어졌다. 가을을 지나는 두 강도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커피와 책이 등장한다. 가을에 어울리는 두 소재다. 하나 더하라면 여행일 테지.
하마터면 닥스 매장 밖 매대에서 가방을 살 뻔했다. 검정색과 골드가 섞인 초콜릿색에서 망설였는데 박쟁이 말렸다. 둘 중에 하나 선택이 어려우면 안 사면 된다고. 맞다.
어두워 오는 차창 밖 풍경은 금세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해가 짧아지면 가을은 이미 깊다.
첫댓글 퇴직하면, 부산에서일주일!! 그땐제가당신스케쥴에묻어서움직이겠군요 :)
아님아예, 한몇년을통채로해운대서사시면좋겠어요ㅡ 제주도는비행기타야해서좀부담이고, 한가로움과는어울리시지만시골과는또그리잘어울리시는분아니시니, 도시로움과여유로움, 세련됨과못미침을동시에지닌해운대, 맘도넓고발품도넓은지아님도있고, 매년부산내려가는쓸만한비서도있고, 아ㅡ 생각할수록해운대당신에게딱인데요!!
깊어가는 가을~ 여유있는 여행에 발랄한 애인?과의 동행이 더욱 감미로왔겠네요...전 부산하면 별다른 추억은 없는데.. 깊은 밤 오래전에 들렀던 달맞이 고개의 카페에서 커피한잔 하는 내 모습을 그려봅니다.
둘중에 하나 선택이 어려우면 안사면 된다란 말이 상당히 좋은이야기 같아요...............^^
아~ 정말 부산 영화제 기간에 부산을 가고 싶었는데 이걸 보니 더 아쉽네요.............^^
감사합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