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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강릉의 힘! 굴산사지 당간지주 글/사진: 이종원
굴산사지 전국의 여러 절집을 순례하다보면 선종을 개창한 구산선문의 절집을 모두 가고픈 충동을 느껴본다. 히말라야 8천미터 봉우리를 차례로 정복하는 산악인의 고집이라고 할까?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가지산문의 보림사, 성주산문의 성주사, 사자산문 법흥사, 희양산문 봉암사까지 보았고 사굴산문의 굴산사까지 다녀왔으니 그 뿌듯함이야 이루 말 할 수 없다. 수미산문 광조사는 북한 해주땅에 있어 통일을 기약해야 하고, 창원의 봉림사는 국립박물관 마당의 부도와 탑비를 접하는 것으로 만족해 본다. 그러나 외형만 둘러보았을 뿐 한국 불교의 주류인 선종의 깊은 뜻을 더듬어 보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다음에는 그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해본다. 굴산사는 851년(신라 문성왕 13)에 범일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는 매우 번성했던 사찰이었다. 전성기때에는 승려 수만도 2백여명이 넘어 쌀 씻은 뜨물이 동해까지 흐를 정도로 큰 가람이었다고 전해진다.그러나 조선시대에 소실되어 굴산사는 세인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1936년 강릉지방의 대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발견되었고 이 때 부근 주민이 ‘사굴산사’라는 한문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이 절이 사굴산문을 연 굴산사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보물 86호) 몇 해전 이 거대한 당간지주를 처음 접했을 때 망치로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었다. 이 큰 돌은 어디서 가져 왔으며 또 어떻게 세웠고 어떻게 천년을 버티고 살아왔는지...돌덩이를 보고 무한한 의문과 감동이 교차되었다. 한반도의 척추를 가로 지르며 북쪽으로 치달았던 태백산맥도 이 당간지주를 지나칠 때는 움찔 했을 정도로 힘이 넘쳐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운이며 영동지방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높이가 5.4 m니까 아파트 3층 높이 정도 될 것이다. 거기에 당간마저 꽂았다면 10층건물 높이의 깃발이 태백의 바람을 맞고 펄럭였을 것이다. 그 감동을 상상해 본다.
표면은 매끄럽게 다듬지 않았고 투박한 정자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돌의 끝부분만 투박하게 다듬어 놓았고 어떠한 치장이나 기교도 보이지 않는다. 누런 논 한가운데 서서 감자바위처럼 지주의 역할만 할 뿐이다. 막내 딸 주겠다는 말 한 마디에 10년을 묵묵히 일하는 머슴이었다. 집도 절도 사라지고 주인마저 가 버린 이 땅을 천년이나 지켜왔다. 아둔하고 우직한 사랑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당시 석공들은 참으로 대담하고 자연에 순응할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바로 뒤에 펼쳐진 태백준봉을 일으키려고 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거대한 당간지주가 서 있다면 절터는 얼마나 클까? 아무리 둘러봐도 절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이 황량한 논이 바로 절이었단 말인가? 틀린 말은 아니다. 남아있는 석조물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이 마을 전체가 굴산사였음을 말해준다.
당간지주에서 논을 가로질러 가면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이 나온다. 어깨가 딱 벌어졌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수인에는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얼굴의 앞면은 다리미에 밀린 것처럼 전부 깨져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다. 누가 이렇게 무서운 만행을 저질렀을까? 오늘도 고통에 일그러진 등신불처럼 굴산사지를 지키고 있다.
학산리 우물 학산마을에 한 처녀가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 속에 해가 떠 있어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떴는데도 여전히 해가 있었다. 그 물을 마신 처녀는 아이를 가졌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마을 뒷산 학바위에 버렸다. 어미 심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보다. 걱정이 된 처녀는 날이 밝아 학바위를 다시 찾아 갔더니 학과 산짐승이 젖을 먹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굴산사지 개창자인 범일이었다. 그 우물은 석천이라고 불리우며 동네 사람들의 빨래터로 쓰였다. 2002년 태풍 루사때 흔적없이 사라지고 근래 새로 복원하였다.
범일국사 부도 (보물 85호) 지난번 찾았을 때 아무리 둘러봐도 이 부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정표도 시원치 않고 시골이라 물어볼 사람마저 없어 무척이나 난감했다. 이번에도 역시 주변을 샅샅히 둘러 보았건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또 다시 포기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왠지 오기가 발동했다. 두 번이나 실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멍가게로 들어가 위치를 알아냈다. 경사길을 올라가니 허름한 슬레이트 집 옆에 부도는 숨어 있었다. 따사로운 볕을 쬐고 있는 부도가 얄밉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부도는 당간지주만큼이나 힘이 있고 개성이 넘친다. 비스듬히 누여 있는 팔각의 받침돌 각면마다 복스런 사자가 돋을 새김되어 있었다.
그 위에 접시모양의 받침돌이 놓여 있는데 천상세계를 말하듯 구름문양이 가득 피어 있었다. 꽃잎처럼 둘레를 따라 양감을 준 것이 인상적이다. 그 안쪽에 큼직한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다. 팔각의 괴임돌 위에 놓여 있는 하대석은 요강단지가 얹혀 있는 것처럼 탐스러웠다. 표면엔 구름문양을 가득 새겨놓았다.
팔각의 중대석 모서리마다 구름 기둥을 새겨 넣었고 그 안쪽에는 다소 뚱뚱하게 보이는 비천상과 공양상이 천상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화려한 연꽃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는 상대석도 명품이다. 화려한 조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몸돌에 이르러서는 기둥만 양각한채 아무 장식도 없는 민무늬였다. 화려함에 이은 여백의 효과라고 할까? 지붕돌 밑은 처마선이 그려져 있으며 그 위 보개에는 귀꽃이 새겨져 있으며 보주까지 올려져 있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매우 아름다운 조각의 집합체임을 발견한다.
강릉 신복사지 아담한 절터에 오로지 3층석탑과 불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작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석물들은 간절한 마음들을 교감하고 있었다. 시너지 효과 때문일가? 보면 볼수록 부처님을 향한 염원들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탑과 석불좌상의 형식은 주로 강릉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한다. 굴산사지가 태백준령과 어울리는 힘이 느껴진다면 변방에 속한 강릉 사람들의 소박한 염원은 신복사지에서 느낄 수 있다. 색깔이 다른 두 절집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묘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금이야 박물관으로 들어가 있는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이 생각나기도 하고 화엄사의 '사사자 삼층석탑' 옆에 모셔진 연기조사도 떠오르기도 한다.
신복사터 석불좌상 (보물 84호) 전체적으로 복스런 미소가 얼굴 가득 퍼져 있다. 입은 꽉 다물고 있고 이가 빠진 할머니처럼 포근하다. 대중을 구하기 위한 근심 때문일까? 눈은 아래를 지긋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마엔 백호가 선명하다. 폐사 되기 전엔 금이나 보석이 빛을 발했겠지만 지금은 횡한 구멍만 파여 있다. 원통형 관 위에는 무겁게 보이는 팔각지붕돌을 올려 놓았다. 귀는 큼직하여 목까지 이어지고 있고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다. 코의 돌을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 때문인지 코가 뭉그러져 있다. 신체의 일부분을 공양해서 그런지 아니면 문드러진 할머니의 얼굴 때문인지 정감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천의를 입고 있으며 옷주름이 바닥까지 흘러나왔다.
신복사터 삼층석탑 (보물 87호) 각 층마다 굄돌이 끼여 있어 특이하게 보인다. '어디서 봤더라?' 맞아. 경복궁 옆마당에 있는 홍제동 5층석탑의 모습과 흡사하다. 기단의 복련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것 같은 꽃잎이 길죽하게 흐르고 있었다. 1층 몸돌에는 홈이 패여져 있어 문비가 있었던 흔적이다. 상륜부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태풍 루사, 매미때 이 곳은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석탑과 불상에 진흙이가 탑 위까지 올라왔다. 그 시련을 이기고 다시 선 것이다. 소나무 사이로 햇볕이 비친다. 진리를 향한 염원은 쉼이 없다.
*신복사터, 굴산사터 가는길 서울 -영동고속도로-강릉IC-관동대학정문쪽으로 가다보면 동해고속도로 바로 밑에 신복사지가 있고 관동대학 정문을 지나 구정면쪽으로 가다보면 굴산사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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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가보고싶어지네...
부러버라 대장이...
2월 답사 기다렸는데 없어서 서운 하군요 강릉이나 삼척 3월에 가면 어떨까요?
모놀 대장님~ 참으로 행복하신 분입니다. 많이 많이 부럽네요. 그길들이 그립기도 하구요. 3월 답사 , 저도 찬성입니다.
항상 건강행복하세요 매번 구경 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