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적인 부르심
2022년 4월 17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1:11-12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는 없습니다.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인간 세계 안에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예수 안’의 세계에서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따라서 인간들이 자신을 성도가 되기 위해서 요구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간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의미를 줍니다. 자신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태세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이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부르심’의 시작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부터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서 던져 놓으셨습니다. 이 죄 속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이렇게 죄 속에서 버려진 예수님을 아버지께서 다시 불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원형’입니다. 즉 부르심이란 필히 죄 가운데서 부르심입니다. 괜찮은 인간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의미를 두는 바로 그 잘못된 세상 속에서 홀로 부르심을 입은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형성된 세계가 ‘예수 안’입니다. 이 ‘예수 안’에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이 ‘예수 안’을 형성하신 그 주인공 되시는 분이 자기 백성을 불러주게 되면 그들에게는 도착지점이 생기게 됩니다.
이 도착지점은 예수님의 일방적 부르심이기에 인간의 변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본인이 죄에서 ‘예수 안’의 세계로 나오신 경로가 만들어졌기에 인간에게는 오로지 무의미와 죄만 있을 뿐임이 벌써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르심 이후에 새삼스럽게 인간의 무의미가 의미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인간은 계속 무의미가 되고 예수님의 의미만이 의미가 남게 되는데 그래야 그 세계가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예수 안’의 세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 안’의 세계만이 부르심이 세계가 되는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취지의 완성된 내용도 동반해서 실현됩니다. 즉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복과 저주를 구체화하는 계획이 동반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따라서 부르심이 작렬하는 현장에서 필히 복과 저주, 양쪽도 그 실상을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의 민족이 자리나서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분리되면서 마치 그것으로 구원이 종결된 것처럼 여겨질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즉 애굽도 망하지만 이스라엘도 망합니다. 애굽도 저주대상이지만 이스라엘도 저주대상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은 애굽같은 이방민족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에 속합니다. 모두다 저주입니다.
요한계시록 11:8에 보면,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돔이 되었든, 애굽이 되었든, 십자가에 달린 장소가 되었든 모든 것이 동일한 장소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성도라고 불러주신 그 분이 서서히 신랑으로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름을 받은 자들도 서서로 신부(新婦)로 전환됩니다. 사랑의 절정은 혼인입니다. 혼인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있는 몸으로 ‘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신랑과 같이 있으므로서 제대로 된 영광된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혼인 잔치로 인해 이 세상 자체가 무너져내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차피 이 세상은 죄가 불바다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원숭이 집단에서 바나나를 준 우화가 있습니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준다니까 원숭이들이 화를 냅니다.
그래서 주인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준다고 하니 날 것이 기뻐합니다. 주인 보기에 원숭이들이 참으로 어리섰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에 소비되는 바나나는 일곱 개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차피 이 세상에 불로 태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은 일체 사회적 차이에 놀아나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엣날에서 애굽만 망하고 이스라엘은 안 망했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나라로 포로잡혀가고 난 뒤에서는 전 세계는 바벨론이라는 제국으로 단일화됩니다.
이 단일화된 바벨론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계 18:2) 그렇다면 무너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어린 양의 신부의 등장’입니다.(계 19:7) 신랑과 혼인하므로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두 육체가 한 몸이 된다’는 원리는 드디어 성취됩니다. 신랑이 영원스러므로서 신부도 같이 영광스럽게 되는 겁니다.
이 혼인식에서 많은 자들이 온다할지라도 여기에 철저하게 신랑되시는 예수님의 의지만 통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이미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는 타임에 대해서 미리 정신차려 아는 그런 처녀는 없습니다.(마 25:5) 신부는 결코 자기를 위한 신랑이 아님을 압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자기 신부를 챙깁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무의미를 도리어 반기고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2-04-18 07:20 6강-데살로니가후서 1장 11-12절(폭력적인 부르심)22041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12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1-12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평범한 인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 예수님, 은혜, 영광, 이 모든 것은 없는데서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고, 그 일한 것을 ‘부르심’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11절에. 불러주실 때 인간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형이 등장하는 것은 그냥 혼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고린도전서 1장 2, 3절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특수하게 폐쇄된 저들만의 세계를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예수 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불러주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것은 성도고, ‘예수 안’에서 거룩한 자고 그들에게만 은혜와 평강이 영원토록 계속 됩니다. 이 말은, 부르심이 없는 이상은 이런 혜택들이 해당되지 않는다, 성도라 할 수가 없다, 그 말이 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세계가 상실됩니다. 자기 세계가 없어요.
자기 세계가 없는 것은 쉽게 말해서 무의미하다는 거예요. 무의미한 거예요. 불러줄 때는 내게 주어졌던 모든 의미가 다 깔끔하게 빠져버려야 돼요. 도축장에 가면 저울 있지요. 가축의 몸체 잘라놓은 것을 들어 올리잖아요.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들어 올릴 때 나에 대한 모든 것은 무의미로만 거기에 달려 올라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에 대해서 무의미, 나를 위한 것은 일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이 ‘부르심’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주님의 도발이에요. 과격한 도발입니다. ‘부르심’ 빼놓고 다 버려라, 하는 식이에요. 이것은 도발이면서도 굉장히 신기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거리에 가면, 교통경찰관들 여름철 복장에 보면 견대에 하얀 면장갑을 끼워놓은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멀리서 보면 그 경찰관 뒤에서 어떤 다른 손이 경찰관을 붙드는 모습 같아요. 얼핏 잘못 보게 되면. 허연 장갑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부르심’이라는 이게 얼마나 신기한지 내 손이 멀쩡하게 있는데, 나를 위해서 멀쩡하게 활동하는 내 손이 있는데 이것 말고 어깻죽지에 무슨 귀신 손인가, 이렇게 잡아당기는 거예요. 도축장에서 저울대로 잡아 끌어올리는 것처럼 주의 ‘부르심’이 우리를 통째로 잡아 올리는 거예요.
잡아 올릴 때 내 의미를 거기에 같이 넣어서 무게를 늘리지 마세요. 홀쭉하게 나의 의미가 다 빠져버리고 무의미로 되어야 돼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부르는데 불러주실 때 도착지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전에는 나의 세계였는데 그 도착지점이 뭐냐 하면,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을 깔끔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르심’을 입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성도는 아무도 없어요. 성도라는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교회 나와서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자기 무의미가 되는 게 아니고 계속 ‘나는 구원받아야 돼’라는 자기 의미로 자기 무게, 자기 중량을 계속 늘입니다.
귀신이 잡아당기는 그런 것은 없고 내가 열심을 내고, 내가 노력을 다하고, 내가 성경 지식이고 복음이고 몽땅 다 알아서 그것을 내 것 만들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르심’이라고 성경에 이렇게 있더라도 그 ‘부르심’을 ‘자기 소유화시키는 부르심’이에요. 이것은 ‘자기 안에서 부르심’이기 때문에 이것 조작된 겁니다. 이거 가짜입니다.
‘나를 위해서, 의 부르심’이 빠져 버려야 됩니다. 이게 제거 되어야 돼요. 그러면 왜 그렇게 하느냐? 이 ‘부르심’이라는 것은 아예 인간에게는 없고, 예수님에게 최초로 ‘부르심’이 거기에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일, 그 일이 ‘부르심’의 근원, 또는 시원, 시작점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부터 죽 보게 되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 ‘내어주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려요. 어디다 버리느냐? 죄에다가, 죄의 세계 속에 버려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죄 속에 들어온 거예요. 죄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과 창세 전에 사전에 약속된 바가 없으면 아들이라도 ‘부르심’을 입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은 아버지와 약속된 바 있어서, 일단은 죄 속에 들어와요, 죄 속에 들어와 놓고 그때부터 ‘부르심’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개시가 되는 거예요. 죄 속에서 ‘부르심’이 되기 때문에, 이 말은 어떤 인간도 ‘부르심’에 대해서 탐낼 자격과 권한이 없다는 뜻이에요.
어떤 인간도 저 불러주셔서 천국에 넣어달라고 요청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왜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죄 속에서는 예수님만 ‘부르심’을 입지 그 외에는 어떤 인간도 ‘부르심’을 입을 자격이 아무도 못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버림받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최초로 뽑혀 나올 때, 최초로 ‘부르심’을 받을 때 그때 만들어지는 게 뭐냐?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예수 안’의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구원받겠다고 교회 나오는 것 자체가 ‘부르심’하고 아무 연관성이 없습니다. 자꾸 그런 시도를 하게 되면요, 이것은 ‘조작된 부르심’이 돼요. 주께 이런 평을 받지요.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았다. 너는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악바리처럼 악을 쓰는데 나는 너를 용서한 적이 없어.”
같은 말이 뭐냐?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불러달라고 저요, 저요, 손들고 이렇게 했는데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부른 적이 없어요. “달음박질한다고 네가 구원되는 것 아니다.” 같은 말이 뭐냐? “너는 나의 세계에 들어온 적이 없다. ‘예수 안’에 들어온 적이 없다.”
네가 예수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가 뭐냐? 증거가 뭐냐? 아직도 네 구원에 네가 의미를 두고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 안’이에요. ‘부르심’도 없는데 성경에 ‘부르심’이 수십군 데 수백 군 데 나오니까 탐이 나서 ‘그래. 불러줘야 구원받지. 저는 주의 은혜를 믿습니다. 행함으로 구원 받지 않고 오직 주의 주신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것은 너의 몸부림이고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어요.
“그딴 것은 너의 지식이야. 성경 지식이야. 네가 너에게 무게를 주고 네가 너한테 중량감을 주는데 그게 무슨 ‘부르심’이야? 네가 무거워서도 주저앉겠다. 무거워서! 네가 40년, 50년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께 행한 그것, 그 많은 업적과 실적이 얼마나 너에게 의미를 축적 시키는지 네가 잘 알잖아. 나는 그런 너를 부른 적이 없어.” 쏙~ 빠져야 되는데 빠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쟁여지고 채워지는 거예요. 자신의 신앙실적이.
그래서 이 ‘부르심’의 반대말은 뭐냐? 자기집착입니다. 자기 구원에 대한 집착이에요. ‘부르심’의 반대말이에요, 그게. ‘가짜 부르심’이고 ‘조작된 부르심’이에요. ‘예수 안’에서의 ‘부르심’, 그 ‘부르심’을 위해서 성경 전체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의 ‘부르심’이 어떻게 성도라는 것을 발생시키느냐? 그것은 ‘부르심’을 받은 당사자가 불러줄 때나 가능해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이 죄 속에 떨어졌고 오직 홀로 본인만이 아버지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던 그 효과, 그 효과의 그 토대를 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절차 있잖아요, 절차, 과정, 그것이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했고, 그 형성된 세계의 근거를 확장 시키는 의미에서 죄 속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불러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불러낸 자는 자기가 예상도 못한 새로운 소속감을 갖게 되고 자기의 영원한 변치 않는 자리, ‘예수 안’이라는 자리가 확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한결같아 가지고 인간의 어떤 변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부르심’이 돼요.
왜냐하면 내가 불러주기를 원했는데 주께서 불러준 게 아니고, 그렇게 둘이 짝짜꿍이 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우리는 죄 속에서 주님의 ‘부르심’ 죄 속에 다녀갔던, 그리고 죄에서 벗어난 그 능력으로 불러줬기 때문에 우리는 딸려 들어가면서 ‘아, 내가 불러주기를 원해서 부르심이 형성된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불리울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부르심’ 가운데서 누누이 계속해서 확정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내가 내 ‘부르심’에 요만큼도 관여한 바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은, 내게 속한 어떤 것도 주께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쳐주시는 데서 오는 고마움이 발생 됩니다. 왜 감사하냐?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일을 해도 거기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는 그것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영원토록 가져야 될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이에요.
예배에 늦게 오고, 뭐 무슨 짓을 해도, 사회적으로 어떤 일을 당해도 전혀 주께서는 “무슨 일이 있었어? 나 모르겠는데~”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우리가 우리에게 의미 있던 것은 주님한테는 무의미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7절에 보면 그게 나와 있어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라고 해놓고는 하시는 말씀이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게 지금 부르시는 과정 속에서 인간들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을 모조리 다 빼십니다. 사회적 차이를 뒤엎어 버리는 ‘부르심’, 인간의 어떤 행위와 죄악에도 전혀 영향을 입지 않는 그러한 ‘부르심’이 이게 정품 ‘부르심’이에요. 짝퉁을 뚫습니다. 진짜 성령이 부른 사람은 ‘짝퉁 부르심’을 분별할 수 있어요.
‘예수 믿고 그다음부터 바르게 살아야지.’ 백퍼센트 전부 다 거짓 짝퉁입니다. 왜? 자기에게 여전히 의미를 두고 그 의미가 쌓이는 것은 ‘예수 안’이 아니고 ‘자기 안’입니다. ‘자기 안’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부르심’을 위해서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죽 연결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게 됩니다.
지난 낮 설교가 어렵다고 제가 주의를 받았는데 오늘은 쉽게 갑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줄 때 아브라함에게 복과 저주, 두 요소가 다 같이 살아나도록 불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 그 개인을 불러주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개인과 불러주신 분과, 즉 주의 이름이 합세해서 어떤 것이 복이냐, 어떤 것이 저주냐, 복과 저주를 영원히 살려내기 위해서 ‘부르심’이라는 것을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을 소유할 수가 없고요, ‘부르심’ 안에 있지요. ‘부르심’을 지가 소유한 것이 아니고 큰 ‘부르심’ 안에 아브라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 ‘부르심’이 진행되면서 신약에 오게 되면 마태복음 2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쉽게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쉽게 될 수가 없어요. 성경 본문 자체가 그걸 요구합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지금 어떤 장면이냐 하면, 예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이에요.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데 성경은 그걸 반대로 뒤집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이고 애굽에 내려가는 ‘예수님 안’ 예수님의 세계가 그게 이스라엘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없는 거지요. 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탈출한 나라가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사람들은 그걸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애굽에서 벗어나서 따로 이스라엘 되면 그걸 구원된 상태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애굽과 그리고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전부 다 퉁쳐서, 다 통으로 합쳐서 거기에서 빠져나온 게 구원이에요.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 애굽과, 애굽이라는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이라는 택한 민족 그 둘 안, 모든 인간은 이방 민족 아니면 이스라엘, 이스라엘 아니면 이방 민족, 그 둘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성도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거기서 유일하게 탈출한 분이 있었으니 그분은 바로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성도를 희구하거나 기대하거나 희망할 자격조차 없었음을 ‘부르심’을 받은 자만 알아요. ‘아, 내가 무의미한 존재구나. 내가 있음 자체가 의미가 없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의미 있다고 자부하고 이 의미 있는 것을 천국까지 끌어당기려고, 천국까지 들어가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그런 의미 있는 행동을 했구나. 이런 나쁜 자가 어디에 있어!’
의미도 없으면서 자꾸 스스로 내가 자기를 조작해서 ‘의미 있어, 의미 있어, 나는 구원 받아야 돼, 우리 가정은 구원받아야 돼,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소, 내가 중보기도 해서 구원시켜 줄게.’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기한테 의미 있고, 자기 가정에 의미 있고, 우리 국가에 의미 있고, 아, 기가 차지요.
우리 교회는 아닙니다만 기존교회 식사기도 하면 식사기도 할 때 그냥 “안 주셔도 되는 양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국가문제, 대선 문제, 남북통일 문제까지 하면 국 다 식어요, 밥 다 식고요. 그것은 횡포입니다, 횡포. “주여, 이것 먹고 죽게 하옵소서.” 그러면 되잖아요. 그러면 된다고요. 어차피 의미 없는 것 내일 죽으나 오늘 죽으나 의미 없어요. 송 해처럼 구십 여섯 살 먹고 죽으나 지금 당장 죽으나 아무 차이 없어요. 의미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의미 없음이 확정 났어요. 이것은 아주 주님의 도발이라니까요. 극단적 의식이에요, 극단적 의식. 주님의. 다시 말씀 드립니다. 주님께서 죄 속에 왔다 했잖아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죄 속에 던져 넣었어요. 이 말은, 예수님이 도착한 그 세상이 전부가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는 구원도 없고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야 지당하고 마땅한 거예요. 여러분, 마땅함으로 깔끔하게 우리 인생 정리합시다. 전부 다 이게 마땅한 거예요, 그냥! 주인이 원숭이보고 이렇게 물었답니다. “바나나를 아침에 세 개 주고 오후에 내게 줄까?” 하니까 원숭이들이 다 와글와글와글, 화를 냅니다 ‘어, 왜 저렇게 화를 내지?’ 그러면 이렇게 한번 해볼까?’ “오전에 네 개를 주고 오후에 세 개 줄게.” 하니까 와~, 좋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하루에 소비되는 것은 7개이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이게 참 어리석은 원숭이들이지요.
이 세상은요, 이미 불로써 다 태워지게 되어 있어요. 불로써 소비되게 되어 있다고요. 불로써 소비되는데 대선에 되었다고 좋~다고……, 불인데. 보건복지부장관 후보되었다고 좋~다고……. 불바다 될 세계에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불바다인데! 이게 어리석은 거 아니에요? 주님께서 ‘부르심’의 원형, 근거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에게 있었던 ‘부르심’ 자체의 세계가 구성이 돼요. 구성이 되고 확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있었던 자기 ‘부르심’에서 이미 예수님의 자기 세계가 확정되었어요. 이것은 변치 않는 세계, 영원한 세계가 확정되었어요. 확정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확정되게 하신 그 능력과 자질을 그대로, 죄 속에 있었으니까, 예수님 자신에 죄 속에 그대로 던져진 것처럼 성령을 보내셔서 죄 속에 있는 자를 자기 속으로, 이 세계 안에서 그다음에 ‘예수 안’으로 일방적으로 불러내십니다.
불러 내시는데, 이제부터 중요해요, 불러 내시는 그 절차 가운데서 예수님 자신이 불러내심의 그 내용이 얼마나 크게 확장되고 구체화 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보여줘요. 뭐냐 하면, 불러주시는 분이 그냥 “불러냈다. 끝!”이 아니라 불러내시는 분이 서서히 신랑으로 달라져요. 남편으로 달라진다고요.
그러면 부름받은 자라면 불러냈다, 가 아니라 뭐가 되느냐 하면, 서서히 그 신랑의 신부로 변신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불러낼 때 축복과 저주가 계속 키워지는 식으로, 그게 확실하게 구체화되는 식으로 전개과정이 되잖아요.
그런데 가다가 이게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로 이어져요. 출애굽기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자체를 불러줘요. 출애굽기 4장에 나옵니다.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모세를 애굽에 보내서 자기 아들을, 이스라엘을 국가 만드는 식으로 불러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복의 나라고 나머지 모든 것은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셔요. 성전을 허락하게 되면 성전이 유지되는 이스라엘은 복이고 성전이 부서지면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성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우상 섬겨가지고 이방 민족한테 성전이 박살 납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체가 저주받은 나라가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저주받았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느냐? 바벨론 나라로 이스라엘이 통째로 포로 잡혀가요. 포로 잡혀가게 되면 바벨론나라, 바벨론 이후의 모든 나라는 짐승의 나라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대변할 수가 있어요, 바벨론나라 전체가 저주받은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 저주받은 나라, 거기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바벨론나라에서 예수님의 신부가 거기서 등장을 해요.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게 되면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소돔지역 따로 있고, 애굽지역 따로 있고, 예수님 십자가 진 곳은 예루살렘 근처인데, 골고다 언덕인데 이 세 지역이 몽땅 같은 장소라고 이렇게 영적으로 지목을 하는 거예요. 애굽이다, 그 말이지요, 애굽. 이 세상 자체가 애굽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구약에서 애굽에서 뭐가 나와야 그게 이스라엘인데 이 이스라엘 장소도 나중에 소돔이 되고, 나중에 애굽이 되고, 이게 십자가에 달린 저주받은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놓고 요한계시록 18장에 보게 되면 이 세상을 뭘로 보느냐 하면, 2절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이 세상 자체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는 거예요, 단일체로.
요한계시록 19장 7, 8절에 보면“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렇게 해서 신부의 등장이 되는 겁니다.
이 지구의 모든 것이 단일체가 되면서 단일체가 되어야 나중에 이게 불로 심판받을 당위성이 성립되는 거예요. 한꺼번에, 이 세상 지구상의 모든 게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라는 말이지요. 왜? 바벨론이니까. 그러면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은 예수님과 결혼한, 혼인한, 어린양과 혼인한 신부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깔끔하고 깨끗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저분한 것은 다 없어지고, 저주스러운 것 다 없어지고 복된 세계만 형성되는 겁니다. 이게 ‘부르심’을 통해서 저주스러움을 확대시키고 그리고 그 안에서 복도 확대시키면서 하나님의 예수그리스도 어린양의 효과로 인하여 혜택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신부로서 이제는 복된 상황 속에 맑은 하늘처럼, 맑은 하늘 있지요, 바람도 안 불고 기온과 습도도 적당하고, 그 깔끔한 환경 속에 혼인잔치를 벌이는 거예요.
그 어린양의 사랑이라는 것, 사랑의 절정은 역시 결혼입니다. 결혼할 때 사랑이 완성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부르심’이라는 것은 뭐냐? 결혼하려고 불러주는 거예요. 결혼하려고 불러주는데 우리는 꾀죄죄한데 뭐 이래서 결혼식이 되겠어요?
신랑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걱정하지 마라. 이 남편의 영광을 위해서 깔끔한 웨딩드레스를 내가 준비했다.” 그 말이지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영광이에요. 영광스러운 신부가 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으로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신랑으로 돌변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신랑 있으면 뭐 있어야 돼요? 신부 있어야 되지요. 이 결혼식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의 노리는 바가, 마태복음 22장의 결혼식의 노리는 바가 결국 뭐냐 하면, 이 세상을 지독하게 저주하기 위해서 결혼식을 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님 아들의 결혼식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마태복음 22장 7절에 임금이 아들 결혼식에 오라고 했는데 오지를 않으니까 임금님이 화가 나서요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혼인잔치 하면서 나머지는 구경만 하라, 가 아니라 필히 그들을 진멸하고 지옥 불로 만들어야 될 이유가, ‘부르심’ 안에는 복도 있지만 반드시 저주도 같이 동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 전부는 아들의 혼인을 위해서 필요한 자, 의미 있는 자와 의미 없는 자를 주님께서 가려내는 그 작업이 태초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주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그리고 여기에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제 초청한 자가 안 오니까 이제 아무나 오라고 하는데 그 ‘아무나들’이 다 혼인식에서 대우받는 게 아니에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보고 하는 말이 13절에 보면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게 바로 지옥의 양상이에요. 그리고 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아브라함을 부를 때 그 대목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을 어떻게 불렀는지 창세기 12장 2, 3절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복의 근원 같으면 복의 근원만 이야기해야 될 텐데, 우리 예상은 “네가 복의 근원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 이걸로 끝.” 끝나야 되는 데 그게 아니고 “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저주가 동반해서 같이 나와요. 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복입니다. 어중간한 중간지대는 용납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성도로 불러주면 복이고, 신부(新婦)고, 신부 아니면 전부 다 지옥 가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부르심’ 불러줄 때 ‘예수 안’만 남기고 나머지는 저주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땅에 죄 속에 집어넣었거든요. 집어넣어 가지고 예수님이 무사히 그 ‘부르심’의 세계, ‘예수 안’의 세계를 형성하는데 성공을 했어요.
그러면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그 쓰레기는 어떡할까요? 그거 뭐 버려야지요, 그것은! 그것은 지옥 불에 버려야지요 .자기 소임 다 했잖아요.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의 결과로서의 자기 소임 다했잖아요. 불러주지 않아서 지옥가는 것, 그것에 대해서 억울해하면 안 돼요. 우리는 어차피 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차피 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 않은 자를 지옥 불에 집어넣는 것에 대해서 같이 크게 동감을 합니다. 같이 동감해요. 공감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예수님 없는 사람과 상종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 기뻐하면서 잘 알지요. ‘부르심’ 요소가 없는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지요. 당연한 거지요. 이상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작업이 마태복음 25장에 더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에 보면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어리석다는 것, 아까 어리석은 원숭이 이야기했지요. 여기에 신랑은 하나인데 신부 하겠다는 사람이 열 명이에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이 ‘부르심’에는 나를 위한 사적인, 내 개인을 위한 ‘부르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불러주시는 분에 종속되어야 되지 내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그런 것은 이 비유에 의하면 어리석은 자에 해당돼요. 어리석은 처녀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 어리석은 처녀, 신부로서 탈락된 처녀,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신부 되겠다고 후보감으로 자기가 여기 쑥 들어왔거든요. 여기서 이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기 조작에 나섭니다. 그 신랑의 신부가 되겠다고 자기 쪽에서 뭔가 만반의 행동을 취하지요. 신랑이 오기만 하면 신부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나름대로 노력을 다 합니다.
그런데 25장 5절에 보면 신랑이 더디 옵니다. 더디 오니까 그 열 명의 처녀가 다 자요. 지혜로운 신부는 눈 막 비비면서 안 자고 있는 게 아니고 열 명 다 자요. 열 명의 여인들이 다 잡니다. 다 잔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의식할 수가 없다. 그 말이에요. ‘나는 신랑 오기를 기다려야지. 절대로 안 자겠어, 안 잘거야.’
주께서 한 명이라도 깨어 있으면 신랑은 대기에 들어가서 안 옵니다. 보니까 아홉 명은 자는데 한 명은 정신 바짝 차리고 기름 준비해서 있거든요. 안 옵니다. 열 명 다 자야 돼요. 단 한 명도 신랑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해야 됩니다. 단 한 명도.
그렇다면 여기서 어리석다, 지혜롭다, 의 결정은 그 처녀 본인의 결정하고 아무 상관 없습니다. 슬기 있는 이 여인들은 등을 준비하는데, 그 등 준비했지요, 열 명 다 등 준비했어요. 열 명 다 나름대로 신랑 올 때 뽑힐 수 있는 가능성의 조치를 본인들이 다 한 거예요.
그런데 미리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거지요. 왜 그러냐? 신랑을 원하는 자가 본인이기 때문에 신랑 올 때 타이밍 맞춰서 신랑 올 때 “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불빛으로 자기 존재를 밝히는 그 작업은 어디까지나 누구 솜씨냐 하면, 깨어 있는 나의 솜씨인 것을 우리는 평소 일상생활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에 관해서 나는 빈틈이 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기한테 항상 유의미, 의미 있는 존재에 대해서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철두철미하고,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부르심’의 반대말, 자기에 대한 집착이에요. 자기집착입니다. 집착을 그만둔 적이 없어요. 내일을 남한테 맡긴다? 그것은 어리석은 거지요.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거지요. 남이 내 인생 보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 세상 모를 때는 주님이 도와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세상에 나가 보니까 세상에서 내가 나서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생 한 70 가까이 되어보니 아시겠지요. 이것은 뼛속까지 경험한 거예요. 뼛속까지 경험한 거예요! 내가 나를 돕지 않으면 하나님도 돕지 않는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경험한 거예요.
따라서 우리에게는 무의미, 의미 없음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내가 의미가 없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심지어 예수 믿는 것도 내 결심과 결정으로 한 것인데 그게 왜 의미 없습니까? 그게 어떻게 무의미합니까?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를 두기 때문에 그 의미를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하기만 하면, 등불 나오면 등불 준비하고, 기름 나오면 기름 준비하고, 다 내가 나한테 충실하게 조치를 내릴 그런 용의가 다 있는 거예요. 우리는 절대로 어리석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몽땅 신랑 올 때를 아무도 모르게했다는 이 지혜에 대해서 인간은 능력이 없어요. 그 타이밍을 아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신랑의 신랑 됨에 합한 신부는 오직 신랑의 일방적인 결정과 조치를 존중하는 자만이 그걸 신랑의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신부다운 거예요. 내가 나에게 조치하는 그것은 조작된 신부입니다. 가짜 신부입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일방적으로 지혜롭다, 슬기롭다, 한 것은 다섯 명, 열 명이 아닙니다, ‘5+5’에요. 열 명으로 같이 붙일 수가 없어요. 5의 무리, 5의 집단 따로, 다른 5의 집단 따로 두는 거예요. 이렇게 따로 두는 것은 주께서 일방적인 결정과 택하심이 되는거예요. 청한 자는 많으나 택하심은 적다, 할 때 그 택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거예요.
만약에 주께서 택한 신부가 네 명이 기름을 준비했는데 한 명이 아직도 행동이 느려서 기름을 준비 못했다? 주님 안 옵니다. 주님이 오지를 않아요. 열 명의 처녀들은 본인의 사정에 대해서, 본인이 어떤 형편인지에 대해서 본인에 대해서 아무 아는 게 전혀 없어요. 이게 무의미에요. 인간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채로 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돼야 그게 바로 사랑이고 그 사랑의 열매가 결혼입니다. 그런 신부는요, 남편만 바라보고 남편만 의미 있어요. 자기한테 아무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 축복과 저주 두 개 다 있어요. 아브라함을 부를 때.
사람은 누구나 복을 원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 생각이고 주께서 부르실 때는 복과 저주, 두 개 다 불러요.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부터 보게 되면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게 24절이고요, 25절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말은, 죽은 자가 마땅히 요청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죽어 있어, 인간아!” 그냥 죽을 인간이 그냥 죽어 있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안 죽었으면서도 죽은 체하면서 실눈 뜨고 주께서 생명 주시는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 그러지 마세요. 그냥 죽어. 그냥 죽어버려! 눈뜨고 그러지 말고.
엑스트라가 죽는 역할 하는데 아직 카메라가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눈 뜨고 그러면 감독이 “컷! 다시, 다시!” 26절에 있는 대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문제에요. 우리가 요청할 권한으로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무의미하니까요. 의미 있는 것은 아들과 아버지만 의미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의미 없어요. 그냥 죽는 역할만 하면 돼요. 참 쉽죠, 잉!
세상에 이같이 쉬운 게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가볍고 기쁜 일이 또 있겠어요? 인생의 무게 얼마나 여러분을 괴롭혔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요? 자기 무게를 자기가 감당 못해서 헥헥거리면서. 주님께서 그걸 어리석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똑똑하다고요? 어리석어요! 어리석다고요! 뭐 경북대학교 병원장 하면 똑똑한 사람인줄 알아요? 이 세상은 어리석은 인간들밖에 없어요.
그런데 27절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절이 중요해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너희들 지식과 너희 지혜안에서 포함될 내용을 내가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인간의 능력으로 알아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게 기이함이에요.
뭐가 기이하냐? 29절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게 기이한 거예요. 그러니까 참 인간 팔자 더러운 팔자, 인간이 죽으면 괜찮아요. 자살해서 죽으면 괜찮은데 인간은 못 죽어서 사달 난 거예요. 안 죽어요. 기어이 죽은 자를 끄집어내요.
왜냐하면 복과 저주 양면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요. ‘예수 안’과 ‘예수 밖’을 다 보여주고 천국에 들어갈 자와 지옥 갈 자를 다 보여주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그런 심판권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등장하게 된 그러한 시료, 실험쥐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피조물로써 당연한 거지요. 창조주를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것은 마땅한 거거든요.
그래서 생명이 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처럼 너한테 영광이 있다, 이게 당연한 게 아니고, “웬일이야? 주님만 영광 받아야지. 왜, 그 영광이 영광 부스러기가 왜 저한테 떨어집니까? 이거 기이한 일이네. 세상에 제가 뭐 했다고요? 이 무의미한데, 제가 무의미한데 왜 이렇게 영광을 받아야 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야 됩니까? 혼인잔치에 참석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신랑이 인테리어한 천국, 새롭게 장식한 그 천국에서 왜 영원토록 복락을 누려야 됩니까, 주여? 이거 반칙 아닙니까? 이거 도발같은데요?”
정말 감격스러우면 이래야 돼요. “주님, 저한테 왜 그래요, 정말? 미쳤어, 정말!” 지금 나 혼자 미쳤다! “주님, 저한테 왜 이렇게 폭력적이에요? 왜 천국 넣어줍니까?” 이거 폭력 아닙니까? 내 자존심과 명예와 가치, 내 행함, 내 열심 깡그리 다 무시해주시는 폭력, 교회 오래 다님, 헌금함, 십일조 냄, 선교했음, 설교했음, 강의했음, 깡그리 다 무의미한 것으로 죄로 규정해주시는 이 폭력, 이게 얼마나 반갑고 감사한 이야기에요!
누가 한 말대로 네가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네가 사랑을 알아? 혼자 사는 것만 배웠지요. 평생 동안 마귀한테 걸려서. 같이 사는 이 사랑을 알아요? 이 신랑신부는 예수님의 ‘부르심’의 최종 완판입니다. 완전판이에요. 그게 <아가>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아가>가 이래서 즐거운 거예요.
아가 2장 10절에서 14절, 너무 좋은 구절이라서 천천히 읽어드리고 싶어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함께’ 함께, 에요. 더불어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깨끗하지요. 깔끔하지요. 신부를 위해서 인테리어 잘 해놨습니다. 새집이에요.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반구는 비둘기에요.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신랑이 우리보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다 너 신부를 위해서 내가 핀 꽃이다. 내가 준 무화과나무 열매다. 먹어, 먹어, 먹어!” 이제 따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 안’의 세계, ‘예수 안’의 세계는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 되는 세계가 ‘예수 안’의 세계에요. 우리는 그분의 신부가 되는 세계에요.
이게 창세기 2장의 아담 만드시고, 그 뼈로 아내 만들고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을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한 몸 되게 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주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향기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토하는 거예요. 에이 먹어라, 하고 향기로 우리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 라일락 향기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뒷부분으로 가면 함께 그냥 가지 않아요. 함께 가자, 가 아니라 함께 빨리 달려라, 빨리 달려라!
얼마 전에 그런 설교 했지요. 신혼부부가 바닷가에 가서 신부가 “나 잡아 봐~라!” 하면 신랑이 “너 잡히면 죽인~다!” 한다 했지요. 나 잡아 봐라. “빨리 가자. 마음껏 달려라. 구애받지 말고. 이게 신랑이 사는 곳에 네가 같이 살자. 너 같이 살자.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 아무도 너를 해칠 자 없어.”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반응은 뭡니까? ‘역시 예수 믿어주니까 이런 보상이 주어지는구먼.’ 이게 아니라, ‘왜 저한테 이런 사랑의 폭력을 행사하십니까? 제가 뭐 했다고요? 제가 뭐 했다고 이렇게 큰 사랑을 주십니까? 이웃사랑 한 적도 없고, 남을 도와준 적도 없고 나는 나만 챙겼는데, 나에게만 의미 있게 나는 살았는데 왜 이런 사랑을 주시는 겁니까?’ 막 볼 째비면서 ‘이게 꿈이냐?’
그때 천국에서 내달릴 때에, 마음껏 영광 받고 내달릴 때에 지옥 간, 예수님의 ‘부르심’의 요소가 없는, 지옥 불에서 그 시간에 영원히 흐르는 그 시간에, 영원히 흐르는 고통의 시간에 서 있는 저주의 역할을 해야 될 부름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지옥에서 같이 영원히 죽지 않고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 오셨어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이 말은 뭐냐? 나의 모든 의미를 예수님 하신 일과 바꿔버리는 것이 바로 성도한테 일어나게 하신 주님의 도발이에요. 나의 모든 가치, 내 자존심, 가치, 돈 모아놓은 것, 지위, 명예, 이 모든 것, 이 쓰레기를 예수님 ‘부르심’만 있다면 나머지 다 버려도 괜찮은 거예요. 예수님 ‘부르심’만 있다면 그 ‘부르심’만 남고 나머지는 다 빼, 다 빼버려. 우리의 그 후의 어떤 변덕도, 어떤 까불까불도 주님의 ‘부르심’은 건재합니다.
끝으로, 정말 끝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조작된 부르심’, ‘조작된 부르심’, 불러줬으니까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그 ‘조작된 부르심’, 아직도 ‘부르심’을 자기소유화 시켜 가지고 자기한테 아직도 의미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나의 자질과 선한 능력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처럼 하는 이 모든 ‘조작된 부르심’은 도중에 땡, 탈락입니다.
오직 감춘 것은 드러내는 식으로 주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 ‘부르심’ 안에서 우리가 아무 의미 없는 그 가벼움으로, 존재의 그 가벼움으로 주께 찬양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