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혁당 재당 사건, 구국전위 사건으로 오랜 옥고를 치룬 류낙진 . 그의 뒷수식어는 월북의 빨치산 류낙진이 아닌,
통일애국지사 류낙진으로 통한다.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하였다. 1946년 남조선당의 입당을 하며, 6/ 25전쟁때
지리산의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 52년 체포 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53년 민간재판소로 이양, 5년형을 받고 57년에 출소했다. 60년대부터 벌인 지하활동이 발각돼 64년 체포된 후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이후 66년 월북했다가 다시 내려와 교편을 잡았으나 71년 보성 예당중 교사 시절 터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이 류낙진 선생 석방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류 선생이 이미 복역 기간(8년)의 절반 이상을 산데다, 양심수 가운데 가장 연로하다는 점, 또 5·18 희생자 유가족인 점 등을 참작해 달라며 적극적인 석방운동을 추진, 마침내 9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 2005년 4월 3일 숨을 거두었는데, 장례는 통일애국지사 고 유낙진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졌다.
과연 류낙진이 통일 애국지사인가? 하는 의문점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민주화의 흐름으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이 존폐 위기에 놓인 현상이지만, 아무리 월북을 하고 빨치산의 행동을 일삼았던 대표적인 류낙진을 통일
애국지사로 임명해야 겠는가? 이건 사회적 동정여론으로 흘러간 아주 대표적인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적은 어디인가? 국가보안법이 왜 생겼는가? 에 대한 생각을 안들수 없게 만든다. 과연 역사
적 심판에서 류낙진을 통일 애국지사로 맞아 들여야 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