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중전 의인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덕흥 부원군 김재남의 딸을 중전으로 맞았다. 이때 새 중전은 19세, 선조는 51세, 왕세자인 광해군은 중전보다 9살 많은 28세였다. 이 새 중전이 인목 왕후요 훗날 인목대비가 되는 비극적인 주인공이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그때부터 인목 대비의 비극적인 삶이 시작된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 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 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했다. 이와같은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했다. 도중에 이이반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했다. 이서는 장단에서, 이중로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반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했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다가 잡혀 서인(평민)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침, 정인홍, 이위경등 수십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 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 공신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후 남인 이원익이 영의정에 편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