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제식 변호사는 누구인가! ◆
1957년 7월 10일(음력) 충남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 604(운산2리 갈말 부락)에서 넉넉지 못한 농부의 8남매(2녀6남)의 장남(위로 누님2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 김기경은 2009년 4월 82세로 작고하셨고, 어머니 최상례는 2011년 12월 30일 뇌경색으로 몸이 불편하셔 현재 해미면 귀밀리 천사요양원에 계십니다.
집사람 이현묘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 잘 하고 있는 현모양처입니다. 큰 아이 김지선은 이화여대 법대와 전남대로스쿨을 졸업한 후 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수습 중에 있고, 아들 김상우는 서강대학교를 졸업반입니다.
대산초등학교(42회), 대산중학교(14회)를 졸업하고 인천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20회)한 후 재수를 거쳐 197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가정형편상 대학 1, 2학년 시절에는 대학입시생 집에 입주하여 가정교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본격적인 고시공부를 시작할 무렵인 1979년 봄에 급성 십이지장궤양천공으로 수술을 받는 바람에 1년 휴학을 하게 되고 그 탓에 징집면제처분을 받았습니다. 건강이 어지간히 회복되어 가는 1979년 겨울부터 고시 공부를 시작해서 1982년에 실시된 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고시 공부하는 동안 교재비나 고시원 하숙비는 모두 부모님과 둘째 누님이 잡은 갯지렁이 판매 대금으로 대주셨습니다.
1980년 봄 신군부의 등장으로 휴교하는 동안 인지면 산동리 도비산 자락에 있는 석천암에서 5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습니다.
지난 3월 5일 고향 서산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옮긴 후 석천암에 들러 김기태 주지 스님과 선대 스님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였습니다.
누님들과 형제들은 넉넉지 아니 한 가정환경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3월 5일 개업식 때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잠시 감정이 복받쳐 말을 이어가지 못하기도 하였는데 제 이야기를 듣던 큰 누님의 "동생 괜찮아"라는 외침에 참석한 청중도 눈시울을 적셨다고 합니다.
현재 서산에는 서산시청 총무국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한 큰 매형 부부, 교보생명 서산지소장을 역임하고 현재 동문34통 통장으로 재직 중인 작은 매형부부, 제 바로 밑에 동생으로 저 때문에 많은 희생을 한 둘째 동생부부, 삼성토탈에 근무하는 막내 동생 부부가 살고 있으며 갈말부락에는 사촌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큰형인 저를 제일 이해해주던 셋째 동생이 타계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김제식 변호사에게 서산 의미는
북쪽이 고향인 호나라 말은 북풍에 의지하고, 남쪽이 고향인 월나라 새는 남쪽 나무에 둥지를 튼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는 옛말이 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首丘初心)는 말도 있습니다. 하찮은 금수조차 고향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모양입니다.
고향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제게도 고향 서산은 제가 언젠가 뼈를 묻을 어머니 가슴같이 포근하고 따뜻한 곳입니다. 고향 선배이신 杏邨(행촌) 안과순 선생님은 위 글귀를 친필로 써 보내주셨습니다.
◆공직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일과 보람 있었던 일은!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의 말을 비교적 잘 들어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억울하게 처벌받아서도 아니 되지만 교활하게 법망을 빠져 나가려 하는 사람에게는 엄히 단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한번은 전직 법부장관 사모님의 집사 역할을 자처하는 분을 사기 혐의로 직접 구속한 일이 있었는데 구치소에 들어간 그분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주었다며 감사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사기나 상해 등으로 고소를 당하는데도 그 때마다 매번 불기소되는 여성이 있었는데 불기소 기록을 전부 찾아 혐의를 밝혀 직접 구속하여 실형을 선고받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힘없는 다수 피해자의 권익을 보호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50여회의 고소를 제기한 변호사의 부친을 무고혐의로 구속한 일도 있었는데 그 변호사는 부친의 고소 습벽 때문에 한때 자살을 고려하기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부친을 피해 제가 부임한 시골 검찰청 관내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공직 생활하면서 당사자의 말을 잘 듣고, 갖은 변명을 하며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에게는 엄한 단죄를 하였다고 자부합니다.
나아가 사법연수원 교수를 지내면서 젊은 후배 법조인들과 함께 한 동안(1999년 3월부터 2001년 6월까지) 참으로 행복하고 보람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견 법조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고등학교시절 불어 공부한 경험을 살려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 있는 사법관학교를 1년간 연수(1991년 8월~1992년 8월)한 것도 정말 보람 있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힘들었던 일은 평검사시절에는 2년에 한 번꼴로, 부장검사이후로는 평균 1년마다 전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가족들과 함께 못한 점이 힘들다면 힘들었다고 할 것입니다.
◆서산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게 된 동기는!
1985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 2008년 3월 20일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장으로 공직을 마치고 부산에서 2년 가까이, 서울에서 3년 간 변호사로 활동하는 동안 고향에는 부모님 생신, 설날, 추석 등1년에 겨우 4차례 방문하였습니다.
오래간만에 가족,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생들을 만나 정담을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공직 생활을 하기에 급급하여 고향 서산 태안의 발전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하였습니다.
지역 주민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을 위해 봉사 차원에서 변론을 하고자 고향 서산시 중앙로10 옛 서울병원 자리에 지난 3월 5일 사무실을 냈습니다.
◆지금 어떤 봉사활동을 하고 있나요
5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국선변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료 법률상당을 제법 하였습니다.
서산에서는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뇌 병변과 지체장애로 지팡이에 의지해 보행할 수밖에 없는 60대 중반의 노인이 옆집에 사는 분으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보청기를 분실하고, 안경이 손괴되었으며 발로 밟히는 상해를 입었음에도 지팡이로 구타당하여 상해를 입었다고 고소한 사건에서 경찰조사에 참여하여 충분한 진술기회를 갖도록 하고, 변호인의견서를 제출하여 약자인 그분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한 사실이 있습니다.
고소를 한 사람은 위 장애인의 부인을 성추행하고, 삽교천 휴게소 등지에서 삶은 번데기와 고동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코란도 승용차를 예리한 못으로 마구 긁어 그 사실을 고소하자 무고에 가까운 고소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심신이 온전하지 아니한 여성을 성노리개 삼고 폭행을 일삼은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 고소를 대리하면서 조사에 참여하여 편안한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도록 도와준 일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서산시 장애인복지관을 출입하는 위 60대 노인의 제보로 서산시 장애인 복지관 직원에게 알려져 서산시장애인복지관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안군장애인복지관, 충남지체장애인협회태안군지회와도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서산 태안지역 장애인의 법률복지와 권익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부녀자 등 약자의 권익 향상을 위해 변호사로서 할 일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고향 발전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한 점 솔직히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속죄하는 차원에서라도 앞으로는 고향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다소 시간이 걸리고 힘들더라도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그 길을 찾아 나서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3개월여 동안 지역주민들을 접촉하면서 변호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유를 가지면서 제가 취미로 하던 색소폰(앨토) 연습도 다시 시작할 생각입니다. 지역 색소포니스트들과 함께 한다면 더욱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서산=김정한기자<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첫댓글 김제식 친구 변호사 사무실 개소식 하는 날
모든 일을 접고 남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행사에 참석을 했습니다. 많은 하객들로 발디딜 틈 없이
성황리에 큰 일을 치루는 것을 보고 역시 제식이 친구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나를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가족사에 대한 편지를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혀지는 것을 보니
인정과 감성도 풍부하구나를 느꼈습니다. 직업상 좀 샤프한 것 같았지만
솔직담백하고 이웃사랑에 몸소 실천하며 사는 것이 부럽고, 존경과 귀감이 되었습니다.
김제식 친구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평생장애를 않고 살던 철학자 헬렌켈러가 이런얘기를 했더군요,
내 생각이 올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바보다 라고말이요,
그렇습니다, 우리나이쯤 되면 내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는 이젠 남을 먼저 배려하고
배풀려고 하는 인덕이 필요할때가 아닌듯 싶습니다,!
요즈음 내가 가끔 행사장에 참석을 해보면 제식이 친구님 모습을 뵙곤합니다,
만나면 짧분시간에 깊은 얘기는 못나눠도 눈빛과 몸에젖어있는 열정 뭔가를 느끼곤합니다,
동안 경험을 잘 살려서 남은 생애를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더욱 큰 그릇에 역활을 할수 있도록
우리모두 힘을 모아 정성을 들여보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듯 싶습니다,
귀향하여 고향에서 약자를 위해 또한 서산지역에 발전을 위해 힘쓰는 친구님에 모습이 아름답 습니다~~~
다른 사람의 맘 산다는 것이 맘 같지 않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고향에 와 새롭게 옛 친구들을 만나 이해와 우정의 깊이 더하는 기쁨을 갖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