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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교류 북나고야를 가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손수진
무안군과 북나고야시와 교류협력은 2006년 기업도시 국제공항 활성화 등 세계화 추진을 위해 이루어 졌으며 공무원들이 상호교류 방문하고 있다. 2009년 청소년 상호교류단 방문과 민간교류단이 몇 차례 상호교류 방문해오고 있다.
1일
이번에도 민간교류 차원에서 무안문화원이 주최가 되어 문화해설 협회, 일본어교육생 등 15명이 10월 31일 새벽6시30분 무안을 출발하였다
백창석문화원장님은 사정상 동행하지 못하고 문화해설협회장님이신 이정진회장님이 단장으로 함께 하시고 일본어가 되시는 서정찬 문화원 사무국장님이 인솔자가 되어 모든행사 준비 및 진행에 앞장섰다
김해공항에서 12시45분에 출발하는 대한항공을 타고 기타나고야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 도착하니 2시 10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할로인데이라 학생들이 온갖 모습으로 꾸미고 축제를 하고 있었다.
비즈니스급 호텔(치루시뉴테인)에서 여장을 푼 뒤 1박을 했다. 시월을 마지막 밤을 기타나고야에서 보낸다고 일행들은 들떠 있었으나 나는 여행의 피로와 함께 1인 1실인 숙소에서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2일
호텔에서 나오는 뷔페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약 50분 소요되는 시간을 달려 북나고야 시청에서 담당 공무원(통역 포함)의 안내로 북나고야 문화 복지시설을 관람했다.
미로쿠지 보육원, 키라리 양육지원시설을 둘러보았다. 대체적으로 깨끗하고 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인데 시민이면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고, 건물 또한 사용자의 필요에 맞게 설계되었으며, 어린이들의 놀이 기구 또한 친환경적인 것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화려하지 않고 검소하나, 이용자가 사용하기에 편리하게 꾸며져 있다. 키라리 양육시설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어린이들 1일 캠프가 열리고 있어 그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든 카레를 대접받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게임도 하며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시청에서 대접해 주는 중식으로 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모에노오카 종합복지시설을 시찰했다 그곳 역시 시민들에게 대부분 무료로 개방되어 있고 시민이면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져 있었다. 특히 그곳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무안군과 기타나고야의 교류를 기념한 탑이 세워져 있었다.
아이세노 사토 요양보호시설을 시찰하였다. 깨끗하고 쓸모 있게 지어진 공간의 시설들은 노인들이 생활하기에 조금도 불편함 없이 생활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져 있다. 특히 모욕 시설은 모든 것이 자동화 시설이 되어 있어 입욕을 하는 사람도 시키는 사람도 무리 없이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나오려 하자 할머니들이 손수 만든 종이모빌을 선물로 주셨다.
저녁시간에는 교류 환영회가 열렸다.
기타나고야 시장을 비롯하여 의원, 교육장, 상공회의소 회장, 등등 북 나고야 시의 각 기관의 기관장들이 다 나와서 환영 행사를 해 주었다. 그들 또한 11월 27일 무안군을 방문 한다고 한다.
3일
시민문화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지역의 어르신들이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준비한 것들을 발표하고, 직접 만든 먹거리며, 공예품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점심은 시청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는데 전통 있는 도시락 전문점에서 만든 것이라 했다. 일본 음식들은 맛도 맛이지만 시각적인 면도 신경을 많이 써서 어떤 것은 먹기도 아까울 정도였다.
오후엔 노리타케 숲에 가서 구경을 하려고 했는데 비가 쏟아져서 구경은 많이 하지 못하고 차만 한 잔 마시고 돌아 왔다. 돌아오는 길에 오스칸논 쇼핑센터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식사를 한 후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서 어머니가 살던 곳을 찾아가야 한다.
나의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태어나 17년을 살다가 해방이 되자 부랴부랴 짐을 꾸려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는데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거미, 베를 짜다’라는 시에 그려져 있다. 그 시가 2009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7년 여름, 휴가를 받아 어머니께 갔더니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쉼 없이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하셨다. 졸면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희붐하게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나고 자란 곳에 대한 향수를 다 풀어내시고 그 다음해 가을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 가셨다. 그때 어머니 나이 팔십 지금 살아 계셨더라면 86세.
가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가보고 싶다, 곡 한번 가봤으면 싶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끝내 모시고 가지 못하고 이렇게 나 혼자 어머니의 그리워하던 곳을 찾아 나서려 한다.
4일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을 잠에서 깨곤 하다가 새벽 4시 일어나 준비를 하고 5시 로비에서 서정찬 사무국장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실은 이번 도요하시 방문도 서정찬국장이 없었더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기타나고야 방문을 계획하고 추진할 때 어머니 이야기를 슬쩍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냐고 그럼 이번 기회에 가봐야 하지 않느냐고 인터넷으로 지도를 찾고 일일이 표시를 해가며 하나하나 준비해 주셨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곤 어머니가 외우고 계시던 주소밖엔 없는데.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살면서 한 번도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좋지 않는 관계 속에서 일본에 살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고생하며 살던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자세한 자료가 있으면 찾아 가는데 쉬울 것 같다기에 외삼촌께 전화를 드렸더니, 그 때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 주셨다.
도요하시 역에서 10리쯤 가면 해변(운하)가 나오고 어머니는 후쿠오까 초등학교를 다녔으면 중2학년까지 다니다가 전쟁 막바지엔 군수품 만드는 공장에서 노역을 했다는 것이다. 집 근처엔 절이 하나 있었고, 도축장과 논밭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 이름은 가야마 마사꼬, 외삼촌이름은 가야미 히데오, 또 외삼촌 친구 분이 계셨는데 호나미 가끄미 그분은 지금도 거기 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어느 집 대문 앞에 나오시는 한 아주머니께 사정을 이야기를 하고 집 주소와 살던 사람들의 이름을 물어 보니 본인은 알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하던 일은 팽개치고 우리를 데리고 이골목 저골목 찾아다니다가 길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서 물어 보니 호나미상을 알고 있다며 그 집도 알려주셨다. 호나미상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자 머리 하얀 할머니가 나오셨다. 사정을 이야기 하자 본인은 호나미 상의 부인이고 호나미 상을 17년 전에 돌아 가셨으며 외삼촌을 안다고 하셨다. 옛날에 살던 집을 묻자 바로 옆집인데 해방 후 다른 한국인이 살다가 떠나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한국인이라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비어 있어 집주인은 만날 수 없었다.
호나미상 미망인인 할머니와 사진을 찍고 후쿠오카 초등학교를 찾아가니 휴일이라 교내는 한산하고, 축구를 하려는 듯 젊은이들 한 무리가 운동장에 서성이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이 운동장에 즐비하게 서 있었다. 학교 건물은 바뀌었을지 모르나 저 나무는 옛날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싶어 사진 몇 컷을 담고 젊은 선생님이 계시기에 옛날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느냐고 물으니 너무 오래 된 기록이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감회가 밀려온다.
다시 전철을 타고 일행을 만나기로 한 나고야 성으로 갔다. 나고야 성에서 일행들과 만나서 성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고 나고야 중부국제공항으로 가서 대한항공으로 김해 공항에 내리니 5시 20분이다 대기 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섬진강 휴게소에서 회장님이 사주시는 저녁을 먹고(모두가 그동안 먹지 못했던 매운 음식을 시켜먹었다.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한마디씩 하면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번 나고야 민간 교류단의 평가회를 가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하였고, 일본에서 배워야 할 점, 우리가 고쳐야 할 점 등의 평가 시간을 가졌다. 이번 여행에서 모두가 입을 모아 서정찬 사무국장님의 철저한 준비와 세심한 배려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이번 교류 단에는 일본에서 몇 년간 사신분도 계시고 일본어 공부를 꾸준하게 하신 분도 계셔서 가이드가 없어도 큰 어려움 없었다.
여행 기간 동안 여러 사람이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이런저런 웃지 못 할 일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즐겁고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거미, 베를 짜다
손수진
오래된 집에 거미가 산다
그 집의 역사만큼 오래된 거미 밤마다 실을 뽑아 베틀에 건다
나고야에서 나고 자랐니라
해방이 되자 너도 나도 귀국길에 올랐니라
사나흘이면 가리라던 귀국길은 달포가 넘어 걸렸니라
시모노새끼에서 규슈로 가는 야미 배를 타고
동지섣달 바람은 얼마나 부는지 까불까불 가랑잎 같았니라
누렇게 부황 든 사람들은 바닥에 짐짝처럼 구겨져 있었니라
산후조리 못해 병든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축하고
핏덩이 동생은 내가 들쳐 업고, 애면글면 군산항에 내렸는데
쓰리꾼이 아버지 허리춤에 찬 전대 귀신같이 털어가고
지게꾼에게 매낀 보따리마저 잃어버리고
석탄차 얻어 타고 대구에 내리니 염생이 마냥 눈알만 반들반들
그런 우스운 꼴이 없었니라
고향집에 돌아와 열흘 만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닷새 후에 딱정벌레처럼 붙이고 다니던 동생마저 세상 뜨고
그때 나이 열일곱,
열아홉에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예단이라고 벌거지 터진 물들인 것 같은 명주베 넉자, 뿔스무리한 저고릿감 넉자
일곱세 무명베 두루마기 흑감 한 감, 동동구리무 한 통, 덧분 한 통
시집오는 날 아침까지 손수 밥해먹고
분 한번 못 찍어 바르고 얼굴 한번 못 본 신랑한테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길쌈도 못 배우고 말도 어눌하고 홀아부지와 살다가 시집이라고 왔는데
대추씨 같은 시엄시 땡감 같은 시누이 내 살아온 역사를 어예 말로 다하겠노
어머니 나이 팔십, 지금도 그 주소를 외우며
밤새워 술술 몸속에서 거미줄을 뽑아 달빛아래 철커덕 철커덕 은빛 베를 짠다.
아이지깽 도요하시시 하시라쬬 도고 산주 이찌노 니반찌
2009년 <<내일을 여는 작가>> 봄호 게제
<<2009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선정
첫댓글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한 글입니다
여행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셨네요
네 선생님, 어머님 살아 계실 때 가보고 싶어 하셨는데 모시고 가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 됩니다.
@손수진 제 까페로 옮겨갑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 일본을 찾아간 이야기에 가슴이 뭉쿨합니다. 쓰신 시, "거미, 베를 짜다," 이 시도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저도 작년 봄에 일본에 가서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가 다니시던 대학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 때도 물론 진한 감동이 있었습니다만, 손수진님의 어머니 경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위의 시도 무척 인상적입니다만, 손선생님의 경우가 워낙 특별해서 거기서 모티푸를 얻어 관련 시를 두어편 더 지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첫째는 고향을 잃은 어머니, 둘째는 낮 선 남자와 결혼, 이 두 개를 주제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시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작에서 가장 유위할 것은 철저한 형상화
(상징을 설명하여 그 상징이 뿜어내는 이미지로 말하기)이고, 다음으로는 시종일관 기법을 동원하는 일일 것입니다. (특히 냉소/반어/역설 등등) 하와이에서 지금도 활동하는 시인이 있는데 그 이가 사탕수수밭의 일꾼에게 사진 한 장 들고 찾아와 결혼한 분의 손녀입니다. 그 할머니 이야기를 가지고 시를 썼는데 참 잘 썼습니다. 제가 그 시를 읽고 오래전에 평을 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올려 보겠습니다. 그 시평이 손선생님의 어머니관련 시짓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참고해서 시를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