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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계획서를 제출한 직후 의중에 꼽아 놓았던 기업체들을 바쁘게 찾아 나섰다. 가장 먼저 찾아간 기업이 두산그룹이었다. 이용일과 함께 찾아가 박용곤 회장을 만났다. 박 회장은 경동중학(현재 경동고) 출신으로 이용일에겐 중학 선배가 됐다. 때문에 프로야구 창단에 관해 서슴없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박 회장은 이 쪽의 얘기를 듣자마자 즉석에서 좋다고 했다. 전부터 야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이왕이면 서울지역을 맡고 싶다고 했다. 서울은 이미 MBC가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어 난감했다."(이호헌) 이호헌과 이용일에겐 두산의 프로야구 참여 의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연고지 문제는 추후 조정키로 하고 경북 대구지역의 제1 후보였던 삼성그룹을 찾아갔다. "청와대라고 하지 않으면 만나줄 것 같지 않아 처음으로 청와대를 팔았다. 그룹 비서실서 소병해 실장을 만나 청와대서 여차여차해 프로야구를 만들라고 한다. 그러니 삼성도 참여하길 바란다고 하자 소 실장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특히 그는 이건희 부회장도 언젠가 지나가는 말처럼 프로야구에 관해 말한 일이 있다며 꼭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했다."(이호헌) -------------------------------------------------------------------------------------- 삼성그룹 설득 과정서 청와대 이름 판다고 호통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삼성서 의외의 말을 듣자 이호헌과 이용일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동석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석호 이사가 기분 잡치는 말을 했다. 그는 비서실서 농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프로야구를 해라 마라 그런 식으로 강요하면 곤란하다. 청와대 이름을 팔고 다니면 무조건 된다는 사고방식을 버리는 게 좋겠다." 이호헌이 듣기엔 여간 불쾌한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만이 있을 이호헌이 아니었다. 성격이 꼬장꼬장한 이호헌은 그 자리서 노석호의 말을 받아 넘겼다. "우리가 언제 당신들에게 프로야구를 만들라 마라 강요를 했단 말인가? 우리는 이상주 수석의 말을 전하러 온 것 뿐이다. 당신은 프로야구가 청와대 압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는가?" 이호헌의 언성이 높아지자 소병해 실장이 끼어 들었다. "됐습니다. 최종 결정은 웃분들이 하실 일이지만 경북 대구지역은 우리가 맡는 것으로 하시지요." 라는 말로 분위기를 바꿔 노 이사와의 언쟁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노석호 이사가 이상주 수석에게 전화로 사실을 확인했던 것 같다. 삼성을 만나고 난 뒤 이상주 수석을 만났더니 '이호헌과 이용일이라는 사람이 프로야구를 만든답시고 청와대 이름을 팔며 공갈치고 다닌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수석은 '무슨 소리냐? 대삼성이 청와대 압력으로 프로야구를 만들 기업이냐?' 며 꾸짖은 뒤 '두 번 다시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이호헌) 삼성은 그 뒤 이건희 그룹 부회장의 재가를 받아 경북과 대구지역을 연고지로 한 팀을 창단키로 확정을 지었다.
-------------------------------------------------------------------------------------- 부산 맡겠다던 롯데까지 서울 연고지 원해 난항
삼성의 참여 통고를 받기 전까지 이호헌과 이용일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코오롱그룹 관계자를 만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코오롱이 거부할 경우를 대비해 포항제철까지 후보로 올려 놓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이 창단을 결정하므로서 코오롱이나 포항제철을 접촉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이들이 세 번째로 찾아간 기업은 실업 팀 롯데 자이언츠를 갖고 있는 롯데그룹이었다. 특히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서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를 운영하고 있어 프로야구 참여는 어렵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롯데그룹 신준호 부회장을 만나 부산과 경남을 연고지로 한 프로야구 창단을 권유하자 무조건 참여한다는 확답을 받아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며칠 지난 뒤 연고지 문제를 들고 나왔다. 부산을 싫다고 했다. 서울을 연고지로 달라는 것이었다. 서울은 그야 말로 만원이었다. 독자적인 프로야구 창단 계획을 갖고 있는 MBC에 이어 두산과 롯데까지 서울 입성을 노리고 있어 난항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후에 정책적으로 연고지를 배정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봤다. 이 보다 더 급한 것은 몇 개 기업이 프로야구에 참여하느냐였다. 우선 호남지역이 급했다. 제1 후보에 올라있는 삼양사를 찾아가기 위해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겸을 만났다. 그는 삼양사 김상홍 사장과 사촌 형제지간이었다.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교수이기도 한 김상겸은 프로야구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반색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동참에 대찬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권을 쥐고 있는 김상홍 사장이 문제였다.
“김상겸씨가 쉽게 찬성해서 호남지역도 됐구나 싶었다. 그러나 삼양사의 김상홍 사장을 만났더니 난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김 사장은 자신이 운동에 소질이 없는 것은 물론 관심도 없다고 했다. 때문에 앞으로도 운동부를 설치할 계획이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잔뜩 믿고 있다가 거절 당하니 그토록 허탈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다시 접촉한 기업이 금호그룹이었다.”(이호헌)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을 만나기에 앞서 금호실업의 박삼구 사장을 만났다. 박 회장의 아들이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호헌은 금호그룹이 프로야구 팀을 창단할 경우 회사 이미지 제고는 물론 제품 판매에도 커다란 선전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참여를 설득했다.
-------------------------------------------------------------------------------------- 호남 연고 삼양사 “관심없다” 거절하자 금호 찾아가 설득
박 사장은 역시 OK였다. 그러나 그는 프로야구 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소요될 것이므로 사촌형인 박상구 삼양타이어 회장과 의논한 뒤 부친(박인천)을 설득해 보겠노라고 했다. 기분 좋은 말이었다. 삼양사를 찾았다가 뺨 맞고 돌아선 것 같던 기분이 박 사장의 희망적인 말로 힘을 얻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금호그룹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해지길 학수고대하던 10월 하순. 뜻하지 않던 신문 보도로 낭패를 당했다. 81년 10월28일 자 동아일보에 은밀히 추진되고 있던 프로야구 창립 작업이 낱낱이 보도되는 바람에 금호그룹이 프로야구 창단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동아일보에 난 호남지역을 맡을 기업은 금호라는 보도가 화근이 됐다. 이 때까지만 해도 박삼구 사장이 부친인 박인천 회장에게 프로야구에 관한 내용을 건의하기 전이었다. 박 회장은 80 고령으로 병환중이 었는데 이 소식을 신문 지상을 통해 알게 되자 노발대발한 것이다. 특히 금호그룹은 재무구조가 튼튼하지 못해 프로야구를 운영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보도가 박 회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 같다.” 고 이호헌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주(청와대 교육문화 수석 비서관)는 다른 말을 했다.
-------------------------------------------------------------------------------------- “재정력 없다” 신문 보도로 금호 박회장 노발대발 창단 포기
“호남지역은 불행스럽게도 프로야구 팀을 창단할 만큼 큰 기업이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금호그룹이 대표적인 기업중의 하나로 꼽혔다. 신문보도가 나가자 하루는 금호그룹 박성용 부회장이 나를 찾아 왔다. 박 부회장은 68년 대통령 경제 비서관을 시작으로 70년엔 경제기획원장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한 뒤 79년부터 금호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는 경제통이었다. 돌연한 방문에 반가워 손을 잡았더니 대뜸 프로야구는 꼭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협조해 달라고 했다. 내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금호를 지명한 것은 대통령의 뜻이냐고 해서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금호는 빼달라는 것이었다. 노조와의 분쟁으로 골치가 아픈데다 적자까지 겹쳐 정신 차릴 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박 부회장은 야구도 좋지만 기업을 우선 살려놓고 보겠다며 간곡히 사양했다.” 어쨌든 금호그룹의 이탈은 충격이었다. 삼양사도 거절한 마당이어서 더욱 암담하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업은 대한교육보험이 있었지만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호남지역은 일단 덮어두고 충청도를 맡을 기업을 찾아 나섰다. 충청도의 대표적인 기업은 동아건설과 한국화약(현재 한화)이었다. 우선 동아그룹 계열사인 대한통운 김태경 전무를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찬성하지만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므로 그룹 사장단 회의서 논의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 충청도의 희망 동아건설은 최회장이 탁구 전념 내세워 반대
“사장단 회의서는 전원이 프로야구 창단에 찬성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원석 회장이 반대해 무산됐다고 전해 왔다. 당시만 해도 최 회장은 탁구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둔 마당이어서 탁구 외엔 관심도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선 남은 기간 동안 전력을 다해 지원하겠다며 사장단의 건의를 물리쳤다는 것이다.”(이호헌) 두산을 만나 참여를 확인 받고 삼성과 롯데도 참여할 뜻을 분명히 밝혀 의기양양하던 이호헌과 이용일은 호남지역의 연고기업으로 꼽았던 삼양사와 금호그룹서 거절을 당한 뒤 충청도 기업인 동아그룹서 푸대접을 받자 암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일로 만세를 부를 이들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도 풀 겸 호남지역의 기업을 소개 받기 위해 광주일보 김종태 사장을 찾아갔다. 김 사장은 광주 출신으로 대한야구협회 부회장까지 맡고 있었다.
대한교육보험이 제3의 후보로 떠오른 것은 김종태 광주일보 사장의 제의에 의해서였다. 대한교육보험은 호남지역과 직접적인 연고는 없었지만 설립자인 신용호 회장의 고향이 전남 영암이어서 무연고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사장으로 있던 손도심씨(작고)를 세종로 교보빌딩으로 찾아갔다. 김종태 사장이 전화로 대충 얘기한 탓인지 신 회장과 함께 있었다. 잘 됐다 싶어 프로야구 얘기를 꺼내며 창단을 권유했다. 손 사장이 즉석에서 “좋다”는 거였다. “됐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손 회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사장이 찬성했으니 철석같이 믿을 수 밖에 없었다.”(이호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사무실로 들어서자 전화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신 회장이 승산 없다며 참여할 뜻을 철회한다는 것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 “힘을 냅시다. 도 아니면 모라고 누가 압니까?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어요. 아직 해태가 남아 있으니 걱정 말아요.”
-------------------------------------------------------------------------------------- 호남지역은 도민들 성금 모아 해태 창단 지원 아이디어
광주일보 김종태 사장이 위로를 했다. 김 사장은 경복고 후배인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을 어떻게 하든 설득해 프로야구 대열에 참여시킬 테니 걱정 말라는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해태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삼양사나 금호그룹은 물론 대한교육보험에 비해 재정력이 약했다. 이를 걱정하자 김 사장은 자신있게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만에 하나 해태가 단독으로 창단할 능력이 없을 경우 일본 히로시마 카프의 경우처럼 전라도민들의 주를 모아 도민 구단을 만들면 될 것이 아니냐는 뜻을 밝혔다. 듣고 보니 전혀 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다. 김 사장이 발벗고 나선다면 어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이호헌) 궁한 김에 믿어 보기로 했지만 고육책임엔 틀림 없었다. 이 때만 해도 해태는 단독으로 프로야구 팀을 창단할 능력이 없는 그룹으로 꼽혔다. 더욱이 같은 업종은 피하기로 창립 계획서에 밝히고 있는 마당에 해태를 참여시킬 경우 롯데가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일단 덮어 두기로 했다. 호남지역 만큼 급한 지역이 경기 강원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의 선정 기업으론 현대와 한국화장품이 후보로 올라 있었지만 대한항공(KAL)을 보유하고 있는 한진그룹도 유력한 후보였다. “호남지역이 난항인데다 충청지역까지 오리무중이어서 그 동안의 결과도 보고할 겸 협조를 얻기 위해 이상주 수석을 만났다. 그러나 이 수석 역시 뾰족한 수가 있을 턱이 없었다. 마침 약속이 있다며 이 수석이 외출하기에 함께 차를 타고 청와대를 나오며 경기 강원 지역은 현대가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정주영 회장과는 오래 전부터 잘 안다면서 카폰으로 정 회장과 통화를 했다. 내용은 “저녁 6시에 만나자”는 거였다.”(이호헌)
-------------------------------------------------------------------------------------- 이상주수석 현대 정회장과 담판 “올림픽 전념” 내세워 거절
현대는 프로야구에 눈 돌릴 짬이 없었다. 정주영 회장이 9월 서독 바덴바덴 IOC 총회서 88년 올림픽대회를 서울에 유치한 직후여서 시기적으로 프로야구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현대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상주는 약속대로 저녁 6시 정주영 회장을 찾아갔다. 정 회장을 만나 마지막으로 설득할 참이었다. “프로야구 창립 계획이 확정 된 뒤 정주영 회장에게 몇 번 프로야구 참여를 권유한 일이 있다. 그 때 마다 농구와 배구가 있어 야구할 마음이 없다고 거절하곤 했다. 이런 전철이 있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권유하기 위해 정 회장을 만났다. 예상한 대로 “No” 였다. 진짜 이유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선 다른 데 눈 돌릴 틈이 없다는 것이었다.”(이상주) 큰 일이었다. 현대의 프로야구 불참은 현대 하나로 끝나지 않을 징후가 보여서 였다. 현대의 불참 소식을 전해 들은 삼성은 기회 있을 때 마다 “현대가 빠지면 우리도 못한다”며 백기를 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삼성이 현대의 불참을 이유로 포기하겠다고 한 것은 군소 기업만 참여하는 마당에 대삼성이 낄 수 없다는 체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이호헌) 이런 사정을 들어 정 회장을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 교수!” 정 회장은 이 수석을 항상 교수로 불러 줬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프로야구가 성사되지 않습니까? 그 문제는 그 때 가서 생각키로 하고 다른 기업을 찾아가 설득해 보시지요.” 정 회장은 일말의 여운을 남기고 있었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현대의 완곡한 거부로 한진그룹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접촉을 시도했다. 이상주가 대한항공 송영수 상무를 소개해 찾아갔다.
-------------------------------------------------------------------------------------- 대한항공 적자 내세워 거절 한국화장품 연고지로 서울 요구
“대번에 난색을 표했다. 당시만 해도 대한항공은 연간 2백억원이란 적자 투성이 기업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도저히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프로야구를 해 봤자 돈만 까먹을 것, 처음부터 포기하자는 의도였다.”(이호헌) 대한항공도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거절하진 않았다. 마침 조중훈 사장이 해외 출장 중이어서 귀국하면 상의해 추후 결정을 짓겠다는 정중한 표현을 썼다. “조 사장이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뒤 대답은 “대항항공이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어 프로야구를 할 경우 주주들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참여할 수 없지만 수지가 개선된 2년 뒤엔 꼭 참여하겠다”는 말로 거절해 왔다.”(이호헌) 현대와 한진그룹서 거부 당한 이호헌은 한국화장품 임광정 사장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임 사장은 실업야구팀(한국화장품)을 운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야구협회 회장까지 맡고 있는 야구선수 출신 기업인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프로야구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임 사장은 프로야구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연고지는 서울로 하되 한국화장품에 소속된 기존 선수들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어서 한국화장품의 참여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큰 일이었다. 호남지역에 이어 경기 강원지역에서도 연고 기업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했으니 암담하기만 했다. “당시만 해도 프로야구는 승산이 없다고 본 것 같다. 시기적으로 기업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니 선뜻 프로야구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를 하질 못했다. 오늘은 이 회사, 내일은 저 회사 식으로 구걸하러 다니는 꼴이 됐다. 할 수 없어 이상주 수석의 도움을 청했다.”(이호헌) 이상주는 주저 없이 럭키금성그룹 이헌조 기획조정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프로야구 관계로 사람이 찾아 갈 테니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이 수석은 잘 될 것이라고 했다. 럭키금성은 소비재가 많은 그룹이라 프로야구를 맡으라고 하면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이호헌)
-------------------------------------------------------------------------------------- 경기 강원지역 펑크 나자 이 수석, 럭키금성그룹에 전화
그러나 이호헌은 경기 강원지역도 중요했지만 호남지역이 더 급했다. 호남지역을 맡을 기업을 찾지 못하면 프로야구는 성공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또 정부가 프로야구를 출범시키려는 의도에서도 벗어난다고 봤던 것이다. 이 때만 해도 이호헌은 프로야구는 정부 차원에서 창단을 서두른다고 보고 있었다. 광주 민주화항쟁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드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때문에 광주항쟁의 주역인 호남을 제외하면 프로야구는 존립이 유명무실해진다고 생각했다. “전라도민의 주를 모집해서라도 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고 광주일보 김종태 사장의 뜻이기도 했다.”(이호헌) 호남지역의 연고기업으로 꼽았던 삼양사와 금호그룹 및 대한교육보험으로부터 거절을 당한 뒤 의기소침해 있던 이호헌과 김종태 사장은 비밀리에 해태와 접촉했다. 김종태 사장은 경복고 후배인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을 만나 프로야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호헌은 MBC의 프로야구 창단 작업에 관여하고 있던 김동엽을 중간에 넣어 박 회장을 설득했다. “김동엽에게 박건배 회장을 만나 프로야구에 참여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는데 경기 강원지역이 펑크났을 때 연락이 왔다. 박 회장을 만나 의중을 떠 봤더니 확답은 없었지만 의사는 있는 것 같다는 거였다. 그래서 광주일보 김종태 사장과 단숨에 달려가 만났다. 그러나 박 회장은 그 자리에서도 확답을 피했다. 청와대 당무자와 만나 뜻을 들어본 뒤 결정하겠다는 답만 받아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 해태 박 회장, 이 수석 만나 OK한 뒤 감독으로 김동엽 요구
하지만 큰 소득이었다. 당무자라면 이상주 수석이니까 귀뜸만 해 주면 어렵지 않게 설득하리라 믿었다. 해태 박 회장과 이 수석의 만남은 시내 모처에서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이 수석은 왜 프로야구를 만들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가며 설명을 했다. 해태 박 회장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박 회장은 한참을 듣고 있다가 ‘호남지역은 우리가 맡지요’ 했다. 그 순간 박수라고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이호헌) 그냥 맡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박 회장은 프로야구 참여에 조건을 내세웠던 것이다. 김동엽을 해태 창단 감독으로 줘야 팀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 김동엽이 거절하든 말든 그 자리에서는 문제 없다는 말로 박 회장의 심지를 굳히는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해태의 참여로 프로야구 창단 작업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럭키금성그룹만 참여하면 지역에 상관없이 6개 기업이 프로야구에 뛰어드는 셈이 됐다.
프로야구 창립 총회 날짜도 잡혔다. 11월 25일 신라호텔서 6개 구단 대표들이 참석해 프로야구 창립을 온 세상에 알릴 계획을 세웠다. 이호헌은 희망 찬 꿈을 안고 11월 하순 럭키금성그룹으로 이헌조 기획조정실장을 찾아갔다. 청와대 이상주 수석이 전화를 해놓은 뒤라 싶게 만날 수 있었다. “이 수석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탓인지 프로야구 참여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룹 최고위층이 외유 중이어서 지금 결정할 수가 없으니 며칠만 참아달라는 거였다. 낭패였다. 프로야구 창립 총회를 3일 앞둔 마당에 기다려 달라니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내 기색을 눈치 챘는지 오너가 돌아오면 꼭 참여할 테니 결정만 늦춰 달라고 했다.”(이호헌)
-------------------------------------------------------------------------------------- 럭키금성 절차상의 문제 들어 창립총회 참석보류 요청
할 수 없었다. 이호헌은 프로야구에 참여한다는 가정 아래 창립 총회에 참석은 해달라는 절충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절충안도 거절 당하고 말았다.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오너의 승낙을 받아야만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 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끝끝내 의견의 폭을 좁히지 못한 채 이호헌은 허망하게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답답했다. 그렇다고 럭키금성그룹 오너의 귀국을 기다렸다가 재가를 받은 뒤 창립 총회를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프로야구 창립 총회는 이미 잡아 놓은 뒤여서 움치고 뛸 수도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5개 연고 기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총회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프로야구 창립 총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11월24일이었다. 청와대 이상주 수석으로부터 이호헌에게 연락이 왔다. “희소식이 있으니 청와대로 들어 오라”고 했다. 창립 총회 준비 관계로 짬을 낼 수 없었던 이호헌은 만사 제쳐놓고 교문수석 비서관실로 이상주를 찾아갔다. “이 수석이 나를 보자 전에 없이 반가운 표정으로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선배님 됐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삼미그룹의 김현철 회장이 강원 경기지역을 맡기로 했다며 내일 총회에 참석할 것이라 했다.”(이호헌)
-------------------------------------------------------------------------------------- 창립 총회 하루 전 삼미그룹 경기 강원지역 맡겠다 자원
이호헌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삼미그룹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호헌이 알고 있는 삼미그룹은 삼일빌딩의 소유주에 철강과 해운에 주력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대대적으로 PR을 요구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업의 연고가 인천이나 강원 경기지역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쁘면서도 의아스럽기만 했다. “삼미 김현철 회장이 이상주 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자신을 소개한 뒤 미국에 유학할 당시 프로야구에 심취했다며 프로야구에 참여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딜 맡고 싶으냐고 했더니 인천(강원 경기 포함)지역을 맡을 기업이 아직 정해 지지 않았다면 자기 기업에 맡겨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호헌) 이래서 프로야구 창립 총회 하루 전 6개 구단을 구성할 기업체가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프로야구 창립 총회는 원만하게 치러지지 못했다. 롯데가 동일 업종인 해태의 참여를 못마땅히 여겨 이의를 제기했고 서울지역을 원했던 OB가 연고지 재조정을 요구한 반면 서울 연고를 고집한 MBC가 배짱을 부렸기 때문이 었다.
81년 11월25일은 프로야구에 있어서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날 저녁 7시 호텔 신라 12층 ‘오키드 룸’에선 6개 기업 대표들이 모여 첫 구단주 회의이자 프로야구 창립 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창립 총회는 기업들끼리 이해득실이 얽혀 원만하게 치러지지 못했다. “삼미가 나타나기 전 까지만 해도 5개 기업 만으로 프로야구 창립 총회를 열 계획이었다. 그런데 삼미가 창립 총회 전 날 극적으로 합류 의사를 밝혀 6개 구단을 만들 수 있는 골격을 갖추게 됐다.’(이호헌) 저녁 7시가 임박해지자 MBC의 이진희 사장을 비롯해 두산그룹의 박용곤 회장과 해태 박건배 회장이 속속 총회장에 도착했다. 롯데그룹은 신격호 회장을 대리해 민제영 롯데제과 전무가 참석했고 삼성그룹은 이병철 회장 대신 호텔 신라의 손영희 사장이 참석했다. 삼미의 김현철 회장만 도착하면 6개 기업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방 나타날 줄 알았던 삼미의 김 회장은 총회가 시작됐는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6개 기업 연고지 분배 이해 얽혀 프로야구 창립 총회 난항
“애가 탔다. ‘이 양반이 약속해 놓고 어떻게 된 것인가?’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상주 수석의 연락을 받고 김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총회 장소와 시간을 틀림없이 알렸는데 제 시간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룻밤 사이에 마음을 바꾼 것으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마냥 잡아 놓을 수도 없어 총회 개시를 선언했다. 연장자인 MBC 이진희 사장이 사회를 맡아 총회를 진행키로 합의를 봤을 때였다. 출입구 쪽에 키가 작고 가무잡잡한 사람이 얼씬거리는 게 보였다. 언뜻 보기엔 어느 회사 월급쟁이 같았다. 삼미의 김현철 회장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분을 확인해야 되겠다 싶어 다가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는 쑥스러운듯 ‘제가 삼미 김현철 입니다.’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이구, 김 회장님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기쁜 마음에 손을 잡아 미리 마련된 자리로 안내했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 삼미 김 회장을 만난 일이 없었다. 김 회장을 자리에 안내해 놓고도 저 사람이 정말 김 회장인지 긴가 민가 했다. 너무 젊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젊은이가 그룹을 움직이는 회장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이호헌)
-------------------------------------------------------------------------------------- 롯데 ‘불참한다’ 으름장, 과자업계 라이벌 해태 참여에 불만
김현철 회장의 나이는 이 때 31살이었으니 이호헌이 그럴 만도 했다. 이 날의 프로야구 창립 총회는 MBC 두산 해태 삼미만 오너가 직접 참석했고 삼성과 롯데는 대리인이 참석해 토의에 들어갔다. 프로야구 창립 의지는 모두들 한결같이 반겼다. 그러나 이해가 얽힌 연고지 문제가 거론되자 총회는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롯데의 민제영 전무가 동일 업종인 해태의 참여에 노골적인 불만을 품고 프로야구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한국프로야구 창립 계획서를 보면 ‘구단 선정 및 권한 지역’난에 ‘경쟁 대상인 같은 업종은 가급적 피한다’는 조항이 있다. 롯데를 대표해서 참석한 롯데제과 민제영 전무는 이 조항을 물고 늘어졌다.
롯데의 불참 선언은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었다. 또 은근히 화도 났다. 가까스로 6개 기업을 꿰 맞췄는데 깽 판을 놓는 것 같아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다혈질인 이호헌은 참고 있지를 못했다. 냅다 한 마디 했다. “당신이 뭐요? 일개 제과회사 전무가 어떻게 해서 한다 안 한다고 선언하는 겁니까? 가뜩이나 호남을 푸대접한다고 욕을 먹고 있는 마당에 경쟁을 피한다는 이유로 해태를 빼자고 하니, 그래 해태를 빼버리면 프로야구가 잘 될 것 같습니까?” 그러나 민제영 전무의 고집도 대단했다. 주위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구단주와 잘 상의해서 결정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끝내 받아들이지를 않아 프로야구 창립 총회는 아무런 결론도 없이 깨지고 말았다. 소득이 있었다면 12월11일 롯데호텔에서 창립 총회를 다시 하기로 합의를 본 것 뿐이었다.
-------------------------------------------------------------------------------------- 롯데, 해태 참여 묵인 대가로 ‘서울을 연고지로 달라’
이호헌은 이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용일을 만나 롯데 문제를 놓고 상의를 했다. 결론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롯데건설로 신준호 사장을 찾아가 담판을 짓자는 거였다. 신준호 사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동생일 뿐만 아니라 롯데 구단주로 내정된 실력자였기 때문이었다. “딴 방법이 없었다. 롯데의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신준호 사장을 만났지만 민제영 전무와 똑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기 선에서 확답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일본에 있는 신격호 회장의 의사를 들어본 뒤 결정하겠다는 거였다.”(이호헌) 신격호 회장은 48년 일본서 ㈜롯데를 설립한 뒤 69년엔 프로야구 구단을 인수해 롯데 오리온즈로 이름을 바꾼 뒤 구단주를 겸하고 있어 프로야구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들은 얘기지만 신준호 사장이 해태 참여를 놓고 신격호 회장에게 불참할 뜻을 내비쳤다가 혼쭐이 났대요. ‘무슨 소리냐?’ 며 무조건 참여하되 서울지역을 연고지로 달라고 요구하랬대요.”(이용일)
-------------------------------------------------------------------------------------- 두산도 서울 아니면 경기 강원으로 연고지 변경 요구
이 때문이었을까? 이호헌이 다시 찾아가자 신준호 사장은 ‘안 한다’는 말 대신 해태 참여를 묵인하는 대신 연고지를 바꾸자고 했다. 부산은 흥행성이 떨어지니 서울을 연고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신 사장이 서울을 연고지로 요구한 데는 그 만한 까닭이 있었다. “일본의 롯데 오리온즈가 변두리 지역을 연고지로 한 탓에 항상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흑자를 올리기 위해선 서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고지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무슨 프로야구 염라대왕이나 되는가? 내 마음대로 바꾸게, 신격호 회장의 고향(울산) 까지 들먹이며 오랜 시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이호헌) 연고지 문제는 롯데 뿐이 아니었다. “롯데가 서울을 연고지로 요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번엔 두산그룹에서 경기 강원지역을 연고지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두산그룹이 프로야구 창단 의사를 밝혔을 때만 해도 연고지를 서울지역으로 잡고 있었다. 그러나 MBC의 독주에 밀려 어정쩡한 상태였다. 때문에 프로야구 창립 추진 실무자들은 충청 남 북도를 맡아주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동아건설이 프로야구 참여를 사양한 뒤 곧 이어 한국화약 쪽을 접촉하지 않은 것도 두산그룹을 염두에 뒀던 탓이었다.
“이 무렵 경기 강원지역은 현대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이나 청와대 쪽의 생각이었다. 현대와 접촉하기 전이었으므로 현대의 의향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90% 이상은 참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때문에 서울 아니면 경기 강원지역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 두산그룹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이호헌) 이 일은 두산그룹의 박용곤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이용일이 설득을 맡기로 했다. 사장이나 실무자들을 만나봐야 답은 뻔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은 MBC가 맡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경기 강원지역은 현대가 맡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두산은 충청남북도를 맡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이용일) 이용일의 말을 들은 박용곤 회장은 펄쩍 뛰었다. 충청도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데 대전을 왜 가느냐며 얼굴까지 붉혔다.
-------------------------------------------------------------------------------------- 두산 박 회장 충청 연고 제의에 ‘대전 못간다’ 고집
“박 회장의 얘기는 경기 강원지역은 현대가 맡는다고 해서 양보를 했는데 삼미가 맡는다면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삼미가 경기 강원지역에 연고가 있다면 양보하겠는데 전혀 연고가 없는 기업을 배정한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연고로 따지면 두산이 삼미보다 더 깊다며 경기 강원지역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이호헌) 두산그룹 자체는 경기 강원지역과 특별한 연고가 없지만 박용곤 회장의 선대들 고향(경기 광주)을 들어 연고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용일은 박 회장을 설득하지 못한 채 발 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난제였다. 그렇다고 경기 강원지역을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삼미에게 충청도를 맡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실무자들에게 일단 넘길 수 밖에 없었다. 프로야구 창립 추진위는 12월5일 무산된 뒤 각 기업에 담당 실무자를 선정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 업무 연락과 실무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MBC는 오래 전부터 기획실장인 김병주가 맡아왔고 삼성그룹은 동방생명 관리본부장인 김동영이 맡았다. 그 외 해태는 코래드 이사인 김명하가, 롯데는 롯데제과 상무인 한영국이 맡았다. 또한 두산은 오리콤 상무인 권태명이, 삼미는 이혁근 상무가 맡아 프로야구 창립 과정에서 일어났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했다.
-------------------------------------------------------------------------------------- 럭키금성 염두에 두고 롯데에 ‘부산 맡으라’ 반 협박
12월5일 창립 총회가 무산된 뒤 이들은 12월11일의 창립 총회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첫 과제가 롯데와 두산의 반발을 원만하게 마무리 짓는 일이었다. 12월11일의 프로야구 창립 총회를 6일 남짓 앞두고 4개 기업은 연고지가 확정된 상태였다. 서울은 MBC, 경북 대구는 삼성, 호남은 해태, 경기 강원은 삼미가 맡기로 한 것이다. 부산 및 경남의 롯데와 충청도로 내정된 두산만 OK하면 프로야구 창립 총회는 순탄하게 열릴 수 있었다. “롯데가 해태 참여로 못한다고 했다가 서울을 연고지로 주면 하겠다고 했지만 이건 억지였다. 서울지역은 MBC가 단독으로 맡겠다고 버텨 두산도 할 수 없이 충청도를 맡아야 할 판인데 롯데의 요구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모험을 거는 수 밖에 없었다.”(이호헌) 롯데 민제영 사장을 만나 반 협박 조로 나갔다. 서울지역은 MBC가 있으니 두 팀은 안 된다. 부산지역이 싫다면 태도를 분명히 하라. 롯데가 아니더라도 맡을 기업은 또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호헌이 이토록 강하게 밀어 부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롯데가 끝까지 거부할 경우 럭키금성그룹을 끌어들인다는 복안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호헌이 머리 속에 그린 기업은 럭키금성그룹이었다. 12월 초 교섭 차 이헌조 기획조정실장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헌조 실장은 “해외에 출장 중인 오너가 귀국하면 참여할 테니 보류해 달라”고 했었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럭키금성은 오너가 돌아온 뒤 프로야구 애기를 하자 오너가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 ‘무조건 참여한다고 할 것이지 왜 보류시켰느냐’ 며 이 실장을 꾸짖었다고 한다.”(이호헌) 이호헌의 반 협박성 설득은 즉각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강경 일변도였던 롯데의 태도가 의외로 수그러드는 기미를 보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고 부산 경남지역을 맡기로 한 것이다.
-------------------------------------------------------------------------------------- 롯데 신 회장 ‘부산도 좋다’, 기회 놓친 럭키금성 뒤늦게 후회
“이 때만 해도 신준호씨는 명목 상 구단주에 불과했다. 모든 것은 신격호 회장이 결정했다. 해태의 참여가 결정되자 못한다고 우기다가 서울을 연고지로 주면 참여하겠다고 한 것도 신 회장의 뜻이었다. 그러나 프로야구 창립 추진위에서 강하게 나가자 당황한 것 같다. 부랴부랴 서둘러 이 쪽의 사정을 일본에 있는 신 회장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프로야구가 상품 선전과 판매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롯데가 프로야구 참여를 보이콧할 기미를 보이자 화를 버럭 내며 "내가 서울을 연고지로 택하라고 한 것은 부산보다 시장성을 내다 보고 한 것이지 프로야구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부산이든 서울이든 프로야구는 만들고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이용일) 롯데의 항복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상큼한 맛을 안겨주었다. 두산만 설득하면 만사는 OK였다. 그러나 두산을 어떤 방법으로 설득해 충청지역을 맡겨야 할지 좋은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롯데를 설득하듯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정말 두산을 구슬릴 묘안은 없는 것일까? 이호헌과 이용일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것처럼 청와대 비서실 쪽의 이상주 교문 수석 비서관이나 이학봉 민정 수석 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엉뚱한 데서 찾게 됐다. 12월 5일의 1차 창립 총회가 무산된 뒤 각 기업을 대표한 실무자들은 수시로 만나 프로야구 정관과 진로에 대한 토의를 거듭했다. 삼성의 실무자로 참석했던 김동영(동방생명 관리본부장)이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 서울을 두 기업이 공동으로 관리토록 하자는 안이었다.
-------------------------------------------------------------------------------------- 삼성 쪽서 서울 양분 아이디어, MBC ‘절대 안된다’ 강력 반대
“두산 쪽과는 그 뒤에도 몇 차례 만났다. 경기 강원 쪽은 삼미가 맡는 것으로 기정 사실화한 가운데 두산 쪽과 애기를 했지만 씨가 먹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두산그룹의 박용성 기획실장이 ‘경기 강원 지역을 삼미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면 서울 지역은 MBC 단독으로 맡게 할 것이 아니라 양분 해서 두 팀이 관리하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다. MBC와 함께 두산도 서울을 연고지로 하겠다는 뜻이다. 최악의 경우엔 그 방법으로 밀고 나가야 하겠기에 검토해 보자고 했다.”(이호헌) MBC가 양보하면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MBC의 실무자인 김병주(관리이사)는 처음부터 난감한 표정부터 지었다. “이진희 사장이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며 운도 떼지 못하게 했다. “좌우지간 어떻게 되든 뜻이나 전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김 이사가 정색을 하며 ‘무슨 소리요? 이 사장 성깔을 몰라서 나더러 앞장 서라는 것이냐?’며 자기는 죽어도 못한다는 거였다.”(이호헌)
12월5일 신라호텔서 프로야구 창립 총회가 열렸을 때만 해도 MBC 이진희 사장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김병주가 “이번 총회에서 사장님을 프로야구 총재로 추대할 예정입니다,”라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롯데의 민제영 전무가 해태 참여를 문제 삼아 깽판을 놓는 바람에 심기가 뒤틀려 있었다. 이런 마당에 “두산이 서울을 양분하자니 들어줍시다.” 했다간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판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내가 가지.” 할 수 없이 이호헌이 이진희 사장을 찾아갔다.
“두산서 서울을 내놓으라고 한다면서요?”(이진희)
“서울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크다 보니까 일부분을 할애해 달라는 겁니다.”(이호헌) “여보쇼! 서울은 처음부터 우리 연고지였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두산 사람들을 만나거든 전하시오. 그 따위 요구는 안중에도 없으니 충청도를 맡든가 아니면 프로야구 참여를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하시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서울은 절대로 쪼갤 수가 없습니다.”(이진희)
너무나 완강한 이진희 사장의 말에 이호헌은 할 말을 잃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꺼냈다간 욕만 바가지로 먹고 쫓겨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아무 소리 못한 채 물러나와야 했다. 그러나 독불 장군 같던 이진희 사장도 청와대 비서실 이상주 수석의 말 한마디에 대꾸 한 번 못한 채 프로야구 추진위의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두산그룹이 충청지역을 기피한 것은 무연고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보다 속 깊은 이유는 야구 취약 지역이어서 앞으로 닥쳐올 불이익을 미연에 막아보자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 청와대 이상주, MBC에 ‘양보 안 하면 창단 불허’ 으름장
충청지역은 우선 팀 구성에 필요한 선수들이 서울 지역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악한 편에 속했다. 선수들이 부족하다는 것은 기량이 우수한 선수가 그만큼 적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고교야구 인기에 편승해 야구 열기가 전국적으로 뜨겁게 달아 올랐지만 이상하게도 충청지역 주민들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판국에 팀을 만들어 봐야 주민들이 열을 낼 성 싶지 않았다. 주민들이 외면하면 프로야구 운영에도 막대한 적자를 감수 할 판이니 노른 자위라 할 서울을 탐낸 것은 당연했다.
“두산과 MBC의 틈바구니서 그 어떤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이상주 수석이 대안을 내놨다. 충청도는 선수가 부족하니 서울 지역의 선수들을 MBC와 2분지1로 배분토록 하고 3년 뒤엔 서울로 올라올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게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당장은 이진희 사장이 펄펄 뛰니까 한 발 후퇴해 보자는 무마책이었다.”(이호헌)
이호헌이 생각해도 이 이상 더 좋은 묘안은 없을 성 싶어 지체 없이 두산 쪽에 이 방법을 제시했다. 두산이 두 말 없이 받아들일 줄 믿았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3년 뒤 서울에 올라올 수 있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맥이 빠졌다. 은근히 화도 났다. 그래서 옆에 있던 박용성 기획실장에게 화풀이를 했다. ‘도대체 두산은 야구를 할 생각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이 안을 내 놔도 싫다, 저 안을 내 놔도 싫다고 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했더니 3년 뒤 서울에 올라올 수 있도록 공증을 해주면 된다고 했다. 이 참에 서류 상으로도 완벽한 보장을 받아 놓겠다는 속셈이었다.”(이호헌)
그것도 6개 구단주들이 직접 사인을 하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었다. 이호헌은 또 뛸 수 밖에 없었다.
-------------------------------------------------------------------------------------- 두산에 3년 뒤 서울 입성 약속하고 프로야구 창단 OK 받아
“삼성을 시작으로 롯데 해태 삼미로부터 구단주들의 사인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MBC가 문제였다. 이진희 사장을 만났더니 ‘이 게 무슨 짓이냐’며 말도 못 꺼내게 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론 어쩔 수 없다 싶어 이상주 수석에게 그 동안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 수석이 ‘알았다’며 자기가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이호헌)
이상주 수석은 12월11일 창립 총회를 3일 앞두고 이진희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호헌씨의 말을 듣고 보니 이진희 사장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야구 창립을 추진한 이후 나는 청와대 일을 제쳐 놓고 뛰었는데 MBC로 인해 판이 깨진다면 큰 일이이다 싶어 이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이 땐 정말 이 사장이 말 안 들으면 프로야구고 뭐고 깨버릴 참이었다.”(이상주)
이상주 수석의 전화를 받은 이진희 사장은 호락호락 양보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공갈을 쳤다. “이 사장 정말 그러실 겁니까? 대세가 MBC 양보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혼자서 뻗대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 사장이 양보 안 하면 프로 야구고 뭐고 다 깨버릴 테니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전화를 동댕이치듯이 끊어버렸다. 이진희 사장은 뜨끔할 수 밖에 없었다.
이상주 수석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자 이진희 사장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화를 낼 수 없는 사람이 화를 낸 탓이다. 이진희 사장은 누구보다 이상주 수석을 잘 알고 있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대 강단에 섰던 학자였다. 웬만한 일에 큰 소리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이진희 사장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버틸 만큼 버텼으나 적당한 선에서 양보할 참이었다. “이보시오. 전화를 그렇게 끊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 수석, 좋습니다. 서울은 할애할 수 없어도 자원은 3분지 1쯤 양보 하겠습니다. 그러니 공증이니 뭐니 하는 것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안됩니다. 선수도 주고 3년 뒤엔 서울로 올라올 수 있도록 합의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월요일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상주 수석의 말은 단호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상주 수석과 전화를 끝낸 다음 날(12월10일) 이진희 사장은 이학봉 민정수석 비서관으로부터 아주 불쾌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이학봉 수석도 처음에는 조용조용 설득조로 말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이진희 사장의 굽힐줄 모르는 고집 앞에 그도 한계를 드러냈다.
-------------------------------------------------------------------------------------- MBC서 두산 서울 입성 반대 ‘서울 선수 30% 양보’로 맞서
“이 사장! 하라면 했지 웬 말이 그리 많소? 내가 지금 사람을 보낼 테니 도장을 찍어 보내시오!” 이학봉 수석의 말은 명령처럼 들렸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진희 사장은 이학봉 수석의 말을 거역할 명분이 없었다. 이학봉이 누군가? 전두환 대통령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실세 가운데 실세였다. 제5공화국을 창출한 주체 세력의 일원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막강한 힘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말을 외면한다는 것은 그와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학봉 수석이 강하게 밀어부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 날 청와대서 이상주 수석을 만나고 나온 이호헌은 경남고 출신으로 기업은행서 선수생활을 한 박종환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박종환은 이진희 사장을 움직일 힘은 없었지만 이학봉 수석을 끌어들일 힘은 있었다. 두 사람은 경남고에서 동문 수학한 죽마지우일 뿐만 아니라 모교의 야구를 위한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사이였다. “박종환씨는 고교 졸업생들이 모여 모교의 이름을 달고 뛰는 80년 ‘전국야구대제전’ 때부터 경남고 총감독을 맡아 왔다. 전에도 말했듯 프로야구의 싹은 이 때부터 트기 시작했다. 이학봉씨와 만나면 프로야구가 생겨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좋은 자리에 있을 때 프로야구 창단에 앞장서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때마다 이학봉씨도 국민화합 차원에서 야구의 프로화는 꼭 필요하다는 말로 화답했다. 때문에 81년 5월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학봉씨의 주도로 야구의 프로화가 손쉽게 채택될 수 있었다고 본다.” (박영길 전 롯데 감독) 이학봉 수석은 야구의 프로화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었다. 때문에 프로야구를 아무 말썽 없이 성사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이진희 사장의 고집은 안중에도 없었다. 여차하면 MBC를 프로야구 대열에서 제외시킨다는 복안까지 갖고 있었다. “박종환씨는 프로야구 창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MBC가 서울지역 독식을 고집할 때 이학봉 수석으로 하여금 압력을 넣게 한 것도 박종환씨의 숨은 공이었다”(이호헌)
-------------------------------------------------------------------------------------- MBC, 총회 하루 전날 도장 찍어 두산 서울 입성 보장
프로야구 창립 총회를 하루 앞둔 12월10일 이호헌은 청와대의 연락을 받고 지체 없이 달려갔다. 박종환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MBC 태도를 엿보고 있던 터라 이학봉 수석의 호출은 가뭄 속의 단비 만큼이나 반갑기만 했다. “MBC 이 사장이 애를 먹이고 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4개 구단주들은 모두 동의했는데 MBC가 선수만 양보해주겠다며 버티고 있습니다.” “내가 전화를 하면 되겠습니까? 내 전화를 받고도 끝까지 버티면 MBC는 빼버립시다.” 이학봉 수석은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프로야구 창립 총회를 하루 앞두고 MBC가 빠지면 그 또한 큰 일이었다. 다른 기업을 끌어들일 시간이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좋은 말로 MBC를 설득하는 것 뿐이었다. “이 수석이 처음엔 좋은 말로 이 사장을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끝내는 고함치듯 이 사장을 닦아세우며 전화기를 내동댕이쳤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것으로 보아 이 사장이 끝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은 것 같았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나는 목을 움츠린 채 ‘괜히 왔구나’ 후회하고 있었다. 혹을 떼러 왔다가 혹을 붙인 격이 되었으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수석은 언제 화를 냈나 싶게 껄껄 웃으며 이 사장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기가 꺾였을 테니 도장을 받으라고 했다.” 이진희 사장을 찾아간 이호헌은 미안한 마음에 그를 바로 처다 볼 수가 없었다. 무어라 말도 못한 채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이진희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장을 찍어야 한다구요?” “예, 두산이 5개 구단주들의 동의가 없는 한 대전을 못 간다고 해서.” 호랑이 같던 이진희 사장도 할 수 없이 두산이 3년 뒤 서울 입성을 보장하는 구단주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진희 사장이 마지막으로 사인한 동의서를 들고 MBC 사옥을 나선 이호헌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감개무량했다. 프로야구 탄생을 위해 뛴 지난 5개월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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