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보첼리
출 생: : 1958년 9월 22일 출생지: 이태리의 라이티코 학력: : 피사대학 법률전공 데뷔앨범 : : 1997년 7월 우리나라에 상륙한 보첼리의 첫 인터내셔널 앨범 Roman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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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보첼리의 목소리
우리가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게 될때, 맨처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목소리가 지니는 흡인력이다. 이같은 흡인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현재 이태리의 가장 유명한 대중가수인 주케로의 목소리가 갖는 흡인력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목소리는 그에게만 특유한 어떤 내면적 정열에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선뜻 풀이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목소리로 거기에는 낭만적인 정열의 억제된 폭발, 목가적인 서정성의 자연스러운 유로, 명상적인 사유의 깊은 내면적 통찰 그리고 성스러움으로 향하는 인간적인 갈구 등의 요소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종류의 노래를 부르던 그이 노래는 우리들에게는 항상 신선한 충격이며 동시에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 예로 그이 두번째 앨범인 "보첼리"에서 그는 오페라 아리아로부터 성가곡인 아베마리아 그리고 이태리 민요인 칸쪼네에서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노래를 똑같은 감동을 자아내도록 노래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부른 오페라 아리아인 "공주는 잠못 이루고(Nessun dorma)"에서도 그이 해석은 서정성과 장엄성이 기묘하게 배합된 목소리의 질로써, 이곡이 포함하고 있는 격정적인 감정의 굴곡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살려내고 있기 때문에 그가 이 곡을 처음 불렀을때에 청중들은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안드레아 보첼리의 출현으로 대중음악과 고전음악 사이에 경계선에 구애되지 않은채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그의 목소리가 선사하는 음악예술의 세계로 모두가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길은 지금껏 우리 모두의 음악을 위해서 기다려 왔던 이상적인 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첼리, 느린 템포로 떠나는 낯익은 기억속으로의 여행
보첼리는 58년 이태리의 라이티코에서 태어났다. 그는 7살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노래하는 것에 또다른 매력을 느껴 보컬 트레이닝을 받기도 했다. 프랑코 코렐리,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모두 보첼리를 가르쳤으며 음악적으로 무시못할 영향을 미쳤다. 보첼리는 저 유명한 이태리 산레모 가요제에 출전해 노래하기도 했다. 그가 발표한 Bocelli라는 앨범은 통산 2집으로 이태리에서 공개되어 금새 인기차트 상위에 올랐고 네덜란드에서 3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앨범차트에서도 수주동안 1위에 올랐고 독일등 유럽 각국에서도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보첼리는 블라디미르 페도셰예프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세번째 앨범 Viaggio ltaliano를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95년 11월 이태리에서 공개되어 발매되자마자 차트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더블 플래티넘을 획득했다. 한편 보첼리는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프랑스 등을 돌며 공연을 펼쳤고 알 재로, 브라이언 페리, 슈퍼트램프의 로저 헛슨, 존 마일즈 등과도 함께 무대에서 클래식과 팝 팬 모두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전 앨범들을 세계적으로 히트시킨 행운아중의 하나가 되었다. 보첼리는 팝 아티스트는 물론 유명 성악가들과 함께 공연을 하며 팝과 클래식의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소위 "크로스오버"적인 활약을 보이고 있다. 94년 9월에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공연을 하고 브라이언 아담스, 안드레아스 볼렌바이더 등과도 협연을 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위대한 테너의 탄생 - 안드레아 보첼리
1996년 11월 17일은 독일 국민에게는 아마도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이달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복싱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독일의 국민 영웅 헨리 마스케가 그의 화려했던 복싱 인생을 마무리짓는 은퇴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많은 국민들은 이날의 경기를 승패에 대한 관심이 아닌 영웅의 모습을 본다는 의미에서 매우 설레였으며 한편으로 허전한 느낌으로 이 경기를 지켜봤을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 링 위에서는 간단한 기념식이 있었는데 그 중 하이라이트는 마스케의 친구이자 국제적인 명성의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의 고별 경기를 위한 노래였다. 곡명은 '이제는 헤어질 시간(Time to say goodbye)'. 이날의 공연에서 사라는 특이하게도 아직 독일에서는 무명이었던 한 이탈리아 가수와 듀엣으로 이 곡을 불렀는데 두 사람의 하모니는 숙연하게 이 경기장에 메아리쳤고 이 노래는 관중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미국 챔피온인 버질 힐과의 이날 경기는 그러나 아쉽게도 마스케의 판정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감동적인 장면은 이 때 벌어졌다. 상처 투성이의 얼굴로 링에서 내려오는 마스케를 향해 관중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경기전에 울려퍼졌던 'Time to say goodbye'를 다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스케 역시 뒤돌아서서 이 노래를 관중들과 함께 불렀고 독일인들은 이 노래를 마스케의 마지막 모습과 함께 기억하게 되었다. 이 노래에 대한 독일에서의 반향은 즉각적이었다. 'Time to say goodbye' 싱글은 발매되자마자 1위에 올라섰고 14주간 1위의 자리를 지켰는데 무려 3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100만장이 맥시멈이라는 독일 싱글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법학도에서 가수로
1958년 9월 22일 안드레아 보첼리는 이탈리아 농촌지역인 투스카니에서 포도와 올리브를 작하는 작은 농가에서 태어나 농촌이라는 환경 때문에 음악 교육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첼리의 부모는 그를 여섯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으며 이후 플롯과 색스폰을 가르쳤는데 그러는 중에 보첼리는 어린 시절을 유독 오페라 아리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불행히도 보첼리가 두 눈을 잃게 되는 것은 12세때의 일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였다.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머리를 부딪혔고 그리고 뇌가 상처를 입었는데 며칠 뒤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한 비극이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보첼리는 피사대학에 진학하여 법률을 전공했다. 그리고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전까지 몇 해 동안 법정 선임 변호사로 활약한 경력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그이 열정은 남다른 것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설적인 테너 프랑코 코렐리를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된다.
그는 교습비를 마련하기 위해 클럽과 식당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미래 그이 부인이 될 엔리카를 만나게 된 것도 당시의 일이었다.
안드레아를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네
1992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록스타 주케로는 자신과 U2의 멤버 보노가 공동 작곡한 작품 'Miserere'의 데모테입을 만들기 위한 오디션을 열었다. 이 노래에는 주케로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를 테너가 필요했던 것이다. 주케로는 이미 마음 속에 자신의 친구인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결정하고 있었고 단지 데모테입 제작을 위해 테너 가수를 물색 중이었다. 그때 주케로는 안드레아 보첼리를 선택했고 그렇게 제작된 데모 테입은 파바로티에게 들려지게 되었다.
" 주케로~ 이 친구 누구야?" 파바로티는 깜짝 놀랐다.
"나를 위해 이 곡을 써준 것은 고마우나 이 곡은 그 누구에게도 부탁할 필요가 없네. 이 데모 테입을 부른 안드레아를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꺼야."
주케로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였죠. 그는 다른 테너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뭔가를 갖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목소리에 영혼을 불어넣는 능력이죠."
결국 'Miserere'는 주케로의 원래 계획대로 파바로티와 함께 녹음되었다. 이 곡이 유럽 전역에 히트가 되자 청중들은 그이 공연에서 이곡을 라이브로 듣길 희망하였다. 그때 주케로의 공연 스케줄에 맞출 수 없는 파바로티를 대신하여 주케로는 보첼리를 초대하였다. 당시 보첼리는 무명의 가수였지만 주케로는 내심 관중의 반응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것은 적중하였다. 보첼리는 주케로와의 공연을 통해 일약 그 이름을 유럽에 알리기 시작한다. 보첼리와 파바로티와의 관계는 이렇게 주케로를 통해 이뤄졌다. 그의 목소리에 감탄한 파바로티는 연말 자선 콘서트에 보첼리를 초청했는데 여기에는 브라이언 아담스와 같은 팝스타도 대거 참석하였다. 96년 전 유럽 투어인 "Night of Proms"에는 브라이언 페리, 알 자로우 등 거물급 팝스타들이 대거 출연하였는데 여기에 초대된 보첼리는 도합 50만명의 청중과 천만명의 시청자 앞에서 그의 매혹적인 소리를 들려주게 된다. 안드레아 보첼리의 레코딩 케리어는 93년부터 시작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밀란을 근거지로 60여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슈카 레코드의 사장 카테리나 카셀리는 주케로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가 그곳에서 'Miserere'와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르는 보첼리를 보고 즉각 계약을 서둘러 첫 앨범을 제작한다. 아울러 93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있는 산레모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독창으로 'Miserere'를 불러 신인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이 페스티벌에 다시 참가하여 대상을 차지하게 되자 그의 데뷔 앨범은 즉각 이탈리아 탑 10에 진입하여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95년에도 그는 전해 우승자로서 이 페스티벌에 초청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Time to say goodbye'의 원곡 'Con te Partiro(그대와 함께 떠나리)'를 불렀고 이에 감동을 받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프로듀서 마우리오 말라바시는 두 번째 앨범 Bocelli를 제작하여 이탈리아에서만 100만장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이것은 전 유럽에서의 성공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제는 전 세계를 무대로
1997년 7월 우리나라에 상륙한 보첼리의 첫 인터내셔널 앨범 Romanza는 발매되자마자 현재까지 클래식 차트 No.1을 기록하며 지칠줄 모르는 성공가도를 다리고 있다. 이른바 <보첼리 신드롬>으로 대변되는 그의 폭발적인 인기는 서정적인 노랫말과 클래식과 팝을 넘나드는 특이한 창법, 그리고 그에겐 보이지 않는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려는듯한 출중한 외모까지 한묶음되어, 가히 침범할 수 없는 그만의 영역을 만들어 놓았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분명 이 시대가 낳은 불세출의 스타임에 분명하다. 이미 Romanza 출시전부터 보첼리는 다음 레코딩은 '오페라 아리아'가 될 것임을 피력해왔다.
이미 보첼리는 95년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 러시아 아케데미 합창단과 함께 Viaggio Italiano (이탈리아인의 여행)을 녹음한 바 있는데 이 앨범에는 19세기말, 20세기초 이탈리아인들의 대규모 미국이민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여자의 마음', '생명의 양식', '무정한 마음' 등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와 민요등을수록하고 있다. 이는 판매만큼이나 자사의 레이블 이미지를 중시하는 폴리그램 그룹으로서는 보첼리의 클래식 아티스트로서의 자질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바로티의 전폭적인 지원과 이미 증명된 그의 탁월한 역량이 여실히 증명된 본 앨범은 현 테너 기근의 성악계에 '위대한 테너의 탄생'과 '확실한 쓰리 테너의 대안'이라는 모범 답안을 제시한 것으로 간주된다. |
첫댓글 Andrea Bocelli 의 음악 또한 은은한 매력에 좋아 하는 가수 입니다...오늘 주일에 좋은 음악 들을수 있서서 감사합니다....jemma"님 즐거음이 가득한 오늘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