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이야기

만년필 이야기 / 전수림       친구에게서 만년필을 선물 받았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수 있는 값비싼 만년필이다. 그 펜은 자신보다 내가 더 잘 쓸 것 같다며 펜의 라벨과 똑같은 잉크까지 주문하여 보내왔다.     덧붙이자면 그 만년필에는 내가 모르는 이름이 새겨져있기까지 했다. 사실은 친구도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쓰던 것을 선물로 받은 것이라 했다. 어떤 이유로 받게 된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낯선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이 내손에까지 들어왔다. 아무렴 어떠랴! 나는 평소 갖고 싶었던 펜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흥분되고 설레었다.      만년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뜩, 김소운(金素雲1907~1981)의 수필「외투」가 떠올랐다. 김소운이 청마(靑馬)유치환이 영하 40도의 북만(北滿)으로 돌아갈 때, 외투도 없이 추운 곳으로 떠나는 모습이 안타까워 외투대신 스승에게서 선물로 받은 값비싼 만년필을 유치환에게 쥐어주었다. 김소운이 외투를 입고 있었다면 벗어서 입혀 보냈겠지만, 그도 벗어주기 좋아한 성격 탓에 몇 년째 외투 없이 겨울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추운 북만으로 떠나는 유치환에게 외투 대신 만년필을 손에 쥐어주고, 외투 한 벌 입혀 보내는 기분이라고 한 그 글을 읽는 내내 나도 따뜻하고 행복했었다. 그것과 견줄 일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어림잡아 보고 있는 것이다.   <img src="https://t1.daumcdn.net/cfile/cafe/221E573A52046C080A" class="txc-image" width="633" height="496" style="width: 633px; height: 496px; clear: none; float: none;" border="0" vspace="1" hspace="1" actualwidth="1024" id="A_221E573A52046C080A142C"/>   소포를 뜯자 묵직한 잉크향이 풍겨났다. 학창시절 책가방을 열면 훅하고 풍겨나던 그 정겨운 냄새다. 책상에 잉크와 만년필을 나란히 놓고 이렇게 쥐어보고 저렇게 쥐어보고 써보는 시늉도 해본다. 나의 책상서랍하나가 몽땅 필기도구로 채워져 있지만, 모두 문구점에 널려 있는 것들뿐이다. 그래도 그 가운데 비싸진 않지만 고장 난 두어 개의 만년필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부턴가 서랍 한켠에 묻혀있다시피 한 만년필을 볼 때마다 고쳐서 써야겠다는 마음만 오래된 채였다.     만년필을 잡으면 고급스럽고 깔끔한 느낌이 든다.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써내려가는 글씨는 연필이나 볼펜이 주는 느낌과 사뭇 다르다. 마음은 차분해지고, 짙은 잉크 향은 은은함이 잔잔하게 퍼진다. 그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지고, 왠지 정성도 더 많이 쏟게 된다. 그렇게 만년필을 좋아하긴 하지만 수집을 한다거나, 욕심내서 값비싼 것을 구입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있는 것을 활용하고 있을 뿐인데 게으른 탓에 고장 난 것을 너무 오래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내게 필기도구가 많은 이유는 뭣이든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좋은 글을 필사하기를 즐겨한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뭔가 집중이 되지 않을 때, 마음이 심란할 때 등등. 필사만 하면 산만했던 마음들이 안정 되기 때문이다.      필사는 수시로 하는 편이다. 책상에서 쓸 때도 있고, 잠이 오지 않을 때 침대에 엎드린 채 쓸 때도 있고, 식탁에 앉아 압력 밥솥 추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쓸 때도 있다. 몇날 며칠을 연이어 쓸 때도 있고, 몇 달을 손에서 놓고 지낼 때도 있다. 책상에 놓여 있는 노트와 선별해 놓은 책은 날마다 눈도장을 찍으며 굴러다닌다. 그렇게 쓴 두툼한 여러 권의 노트는 책장에 줄맞춰 꽂혀진다. 아마도 친구가 그 필사본노트를 보고 내게 펜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만년필을 준 친구도 뭐든 주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펜을 줄 때는 글을 열심히 쓰라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책상 속에 보관만 하는 자신보다는 내가 만년필을 더 의미 있게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잉크병을 조심스럽게 열고 만년필 필터를 잉크병에 꽂았다. 잉크가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좋다. 잉크를 꽉 채우고 연습 삼아 써보니 길이 잘 들여져 있다. 손에 잉크가 묻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언젠가는 좋은 만년필을 하나 사서 애장품으로 지니고 다니면서 사인을 해야 한다든지 간단하게 뭔가를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쓸 요량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귀한 선물을 받은 셈이다.      아끼던 물건을 선뜻 내준 친구를 생각하니 머리가 가볍다. 많은 글감을 품고 있는 자신이 더 필요했을 터인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쥐어주던 그도 김소운처럼 행복했을까. 평생 가지고 갈 따뜻한 정하나 가슴에 심어 놓은 것 같이 뿌듯하다.      러시아 속담에 “중요한 것은 그 보내는 선물에 있지 않고 그 마음에 있다.”고 했다. 어떤 마음으로 주었든 내게는 소중한 물건으로 인연을 맺었으니 곁에 두고 오래토록 쓰고 또 써보리라. (에세이21 - 201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