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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산행을 마치고 백운동탐방지원센터로 하산하였다.
그러나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서 승용차를 주차해놓은 해인사 주차장까지 다시 귀환 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대중 교통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부르기는 하였으나 택시 요금이 해인사 까지 2만원 이어서 마음이 약간 편치 않았다.그러나 사전에 인터넷 등 통신 매체를 통하여 정보를 충분히 입수하지 못한 것이 나의 방심이라 여겨져 앞으로 산행은 물론 매사에 좀더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해인사에서 다시 승용차를 타고 합천 호를 경유하는 백리 벚꽃길을 유람 하면서 고령으로 이동하였다.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가야 산으로 둘러싸인 고령은 5~6세기까지 만 하여도 대가야의 도읍지로 번성을 누리던 곳이었다.
고령군 일대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 이후 청동기시대 부터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것은 고령군 양전 동 장기 리 마을 암각화를 통해서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기 리 마을 앞은 넓은 평야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뒷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멀지 않는 곳에 낙동강지류가 흐르고 있어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정도의 자연 조건이라면 이미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조성되어 사람들이 거주 했을 것이라 추측 되며, 본격적 농경이 이루어진 철기시대 부터는 농경과 연관된 태양신을 절대적으로 신성시 하고 풍요를 기원 하는 제사를 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한시대 이 지역 반로국이 주변 세력을 병합해 대가야로 발전 하더니 5세기 경 고구려가 남침해오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침략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후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금관 가야가 쇠퇴한 틈을 이용해서 가야의 맹주로 부상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지리 지를 보면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에서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16대에 걸쳐 520년간 존속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령은 낙동강 중류의 좌안에 접해 있어 예로부터 수운을 이용해 쉽게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며 가야산과 낙동강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 유리했을 것 같았다.
이를 바탕으로 대가야 시대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과도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562년(진흥왕 23년) 9월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이 이끄는 신라군의 공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대표적인 유적 지로는 700여 기에 이르는 고령 지산동 고분 군이 있으며 대가야의 고도 답게 고령은 천혜의 입지를 자랑하고 있다.
대가야는 500여 년 간 존속 하면서 찬란한 고대 문화를 창조 하였으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감추어진 신비의 왕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1977년 고령 지산동 44호∙45호 고분이 발굴 되면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가야 문화가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고령에 도착한 것은 너울이 서산을 수놓기 시작한 오후 5시 무렵이었다.
그러나 대가야 문화의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가야박물관 주차장에 주차를 해놓은 다음 곧바로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시대의 왕릉이 밀집해 있는 고령군 대가야 읍 지산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00년 9월에 개관한 박물관은 대가야왕릉전시관과 대가야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사적 제79호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 유물을 모아 전시해 놓았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무덤인 지산동 제44호 고분의 내부를 재현해 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전시관 건물 또한 무덤의 모양처럼 직경 37m,높이 16m 규모의 초대형 돔식 구조로 지어져 있어 독특하게 느껴졌다.
전시 물은 국보 제138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 및 복제품 등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가야박물관은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시대까지 대가야와 고령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을 개최하는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관람한 후 고분 군이 산재해있는 310.4m 높이의 주산쪽으로 한 발 한 발 이동하고 있었는데 오른쪽으로는 가야대학교 고령캠퍼스와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가 있었고 왼쪽으로는 고령읍내가 그림처럼 펼처져 있어 과거 대가야의 도성밖을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방에는 낙동강 중류인 회천과 안림천이 있어 원활하게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국론을 통합하여 지혜를 모은다면 적의 내침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것 같았다.
310.4m인 주산을 등에 엎고 있는 대가야는 회천과 안림천이 앞을 가로 막고 있어 낙동강 동쪽과 하류만 방어한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곡창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수자원으로 태평과 풍요를 구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산동 고분 군에 있는 분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 규모의 방대 함으로 보아서 당시 왕들의 무덤 이거나 귀족의 무덤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흔히 고대 왕들의 무덤을 능과 총 그리고 분으로 나누어 구분하기도 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총은 규모로 보아서 왕과 왕비의 무덤이 확실한 것 같은데 주인공을 알 수 없는 경우이고 분은 그외의 무덤을 말한다.
오늘 이곳 지산동 고분 군에서 바라본 분묘 들은 주인공을 거의 알 수 없는 무덤 들이었다.
그러나 신분이 왕 이거나 귀족 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분묘 문화는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 토광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다가 삼국시대가 되면서 그 양식도 다양화되고 주검과 부장품을 함께 묻는 고분문화 양식으로 변해갔다.
고구려 고분 양식은 북방민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지 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 형식으로 변해 갔다.
백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그 이유는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이민세력이 건국한 백제는 초기에 고구려 무덤양식인 돌무지 무덤을 만들었다가 점차 독자적인 형태의 벽돌 무덤과 굴식돌방무덤 형태로 변해갔다.
고구려고분양식을 본떠 만든 백제 초창기 무덤은 서울 암사동 석촌동고분을 들 수 있고 벽돌 무덤으로 는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 내에 있는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을 들 수 있다.
신라는 지형적인 고립으로 독자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었다가 중 후반기에 가서 고구려와 백제처럼 굴식돌방무덤 양식이 일반화 되기 시작하였다.
우연히도 삼국시대 후기는 굴식돌방무덤으로 단일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삼국이 국토가 분단된 독립된 국가 라고는 하나 문화적인 교류는 활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는 달랐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무덤 양식 외에 돌방무덤(석실 분)∙움무덤(토광묘)∙널무덤(목곽 묘)∙독무덤(옹관 묘)∙돌 널무덤(석관 묘)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등 이 때까지만 하여도 가야 지역은 다른 지역과 교류가 적어 돌 널 무덤(석관 묘)이나 움 널무덤(토광 목곽 묘) 등이 많았다.
움무덤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주검을 넣는 무덤형식으로 주로 김해∙창원∙합천∙부산 등지를 비롯해서 가야 영역 안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 매장방식은 청동기시대 말기에 처음 등장 하여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어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전통적 매장방식일 것 같다.
덧 널 무덤은 일반적으로 구덩이 안에 덧 널 시설이 마련되고 그 안에 널을 안치한 형식의 무덤이다.
독 무덤은 나무로 짠 널 대신 독 하나를 단독으로, 또는 두 개를 이어 붙여 사용한 것으로 널무덤과 같이 주로 낙동강 하류의 김해∙부산∙창원 등의 지역과 대구∙안동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돌 널 무덤은 판석을 네모지게 조립해 만들고 그 안에 주검을 넣는 방법으로, 널의 한쪽에 칸을 만들어 껴묻기용(부장 용)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며 머리쪽이 발치쪽보다 넓게 만들어져 있어 청동기시대 돌 널 무덤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덤은 구덩이 안에 돌 널을 넣어 만드는 것이 기본적인 방식이지만 부산 괴정동에서 처럼 돌 덧 널(석곽) 안에 독 널을 넣은 특이한 모습도 보이고 있다.
4세기 경에 이르러 서야 경주에서 돌무지 덧 널 무덤이 성행하고, 영남지역 일대에서는 구덩식 돌 덧 널 매장방식이 유행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돌 덧 널무덤만을 가야고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돌 덧 널 무덤은 깬 돌을 쌓아 네모진 돌 덧 널을 만들고, 다시 그 안에 주검을 넣은 나무널(목관)이나 돌 널(석관)을 배치한 방식이다.
이 고분분묘 제는 돌 상자무덤에서 변화 발전한 것으로 고인돌 이래의 전통이며, 움무덤과 함께 경상도 지방에 깔려 있는 기본 분묘 제라고 할 수 있겠다.
돌 덧 널 무덤들은 지면에 구덩이를 파고 강 돌과 포갠돌 등을 쌓아서 네 벽의 돌 덧 널을 만들어 위로부터 주검을 넣은 구덩식과 세 벽과 천장을 먼저 쌓은 뒤 터진 한쪽 벽으로 주검을 넣고 그 벽을 막는 앞트기식으로 구분되는데, 두 형식 중 구덩식이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돌 덧 널 무덤은 가야의 대표적인 무덤형식으로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차이가 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옥저에서 순장이 행해졌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한강이남에서는 순장의 형태가 없어 사실상 한반도 북쪽에서 만 순장이 행해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산동 고분의 유물을 관람하다가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곳 박물관 전시실에서 순장이 대대적으로 행해진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장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군장의 절대적인 권력과 경제력이 뒷바침 되어야 가능하였다.
그러나 대가야의 입지를 보고 이러한 순장이 한반도 남쪽에서도 가능할 것 같아 보였다.
지산동 고분 군을 살펴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어두워져서 모텔을 찾아야 하였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숙소 보다는 식사를 먼져 해야 할 것 같아서 읍내를 순회하다가 쾌빈 4길 쪽으로 좌회전하여 음식점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마땅한 음식점을 찾지 못하고 우륵로 쪽으로 다시 죄회전하여 고령초등학교 옆으로 진입 하였는데 마침 오른쪽에 설렁탕 집이 있었다.
오랫동안 밖에서 방황한 탓인지 몸과 마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음식점을 찾아 몸과 마음을 녹여보고 싶었다.
밖에서 바라본 음식점은 손님도 별로 없었고 겉은 허름하게 보였다.
그러나 실내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음식점 내부가 보기와는 달리 아주 청결하고 깔끔해 보였다.
주인 아주머니의 친절한 안내로 식당 안쪽 온돌방 아랫목에 자리를 잡았다.
추어탕과 설렁탕 2인분을 주문하고 잠시 눈을 감은 채 묵상하며 지산동 고분 군을 상상해 보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이 지산 동의 주산(310.4)을 덮고 있어서 놀랍고 감개 무량하였다.
역사를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가야국의 일부에 불과했던 대가야의 문화가 이렇게 다채롭고 찬란 하리라고는 미쳐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찬란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낙동강이 주는 교통 상의 이점과 곡창지대가 주는
경제적 풍요가 국가를 형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지형은 대체로 동고 서저의 형태를 이루고 완만 하기는 하나 비교적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많다.
하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림에 따라 퇴적 토가 하천 주변에 쌓이게 되어 서쪽과 남쪽의 하천 주변에 넓은 들인 평야가 형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한강의 김포 평야와 만경 강의 호남평야 그리고 낙동강의 김해평야일 것이다.
이들 지역은 역사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 부터는 본격적으로 농경이 진행되었던 곳이다.
우리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부터 라 할 수 있겠으나 간석기를 이용한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사고가 좀더 진화 되었을 뿐 아니라 현실적이어서 북방민족으로 부터 청동을 수입하여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동을 농기구로 활용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구리와 주석이 귀하고 구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동이 농기구로 활용되지 못하고 철기로 대체 되고 말았다.
사실 농경에 활용할 수 있는 농경 기구로는 철기가 적격이었다.
원료가 흔해서 구입하기 쉬웠을 뿐 아니라 재질도 단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는 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철의 융점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불씨를 높이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모색했으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19세기 말 산업혁명 전 발명가들 만큼이나 연구를 거듭한 끝에 획기적인 발명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풀무였다.
풀무가 등장 함으로서 불씨의 온도를 마음껏 올릴 수 있었다.
이제는 흔한 철을 녹일 수 있어서 농기구를 마음껏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서양에서 철의 사용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정확히 설명하기는 난해하지만 서양에서 철기를 맨 먼져 사용했던 사람들은 소아시아 지방의 히타이트족 이었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져 철제 무기를 만들어 주변 민족을 공격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평정하고 이집트를 공격하여 람세스2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들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해온 해상 교역로와 육상 교역로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교역로가 끊기는 바람에 구리와 주석 교역도 무너지고 말았다.
청동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철기를 써야만 했는데 이때 마침 풀무가 등장했다.
신석기 혁명이 단행된 것이다.
그러면 동양은 언제부터 철기가 사용 되기 시작 했을까.
소 아시아에서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철기가 중국에서 사용된 것은 춘추전국시대로 보고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우경이 시작되어 쟁기가 사용되었는데 쟁기에 사용된 보습은 필수 적이었다.
때문에 이전보다 생산량이 늘어나 농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게 되었다.
이철기가 검으로 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청동이 철기로 대체된 것은 주나라 왕실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제후들의 독립 움직임이 보이면서 구리 공급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청동기 대신 철이 사용 되게 된 이유이다.
우리나라에 철기가 전래된 것은 중국 주나라 말 전국 7웅 중의 하나 였던 연 나라와 관계가 있다.
주나라 무왕은 사실상 주나라 창업주라 할 수 있다.
아버지 문왕의 뜻을 이어받아 은나라 마지막왕인 주왕의 대군을 격파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무왕은 지금의 시안 부근인 호경을 도읍지로 정하고 아우인 주공 단(旦)과 공신 태공망 여상 및 소공 석 등의 보필을 받아 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주공 단은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토벌한 공으로 노나라 제후로 봉해 졌으나 봉지로 가지 않고 자신의 아들인 백금에게 노나라를 맡겨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호경으로 돌아와 무왕의 아들 어린 성 왕을 보좌하여 주공이 되었다.
태공망 여상도 제나라 제후로 봉해지고 소공 석도 연나라 제후로 봉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건국된 주나라 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국이 혼란하게 되었다.
이때 전국 7웅 중의 조나라 에서 태어난 영정이 있었다.
그는 장양왕과 자초와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양왕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것을 파악한 대상인 여불위는 장양왕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산해진미가 가득한 음식과 술을 제공하고 자신의 애첩인 자초를 몰래 장양왕의 침대로 밀어넣었다.
그후 자초는 1년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정월 달에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정이라고 하였다.
이가 진나라 시황제다.
시 황제는 13세에 즉위 하였으나 여불위가 권력을 장악하여 8년 후에 서야 친정을 하게 되었다.
시 황제는 이사를 등용하여 전체주의적인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부국 강병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韓)ㆍ위(魏)ㆍ초(楚)ㆍ연(燕)ㆍ조(趙)ㆍ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가 탄생 되었다.
또한 민간인들의 무기소지를 금지 시키고 법률을 비롯하여 도량형, 문자, 화폐 등을 통일하였다.
전국적인 도로망과 운하를 건설하고 북쪽의 흉노 족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만리장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아방궁과 도로를 수축하는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진행시켜 국력을 낭비 하였으며 많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에 혹사시키는 등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 이라는 오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전국각지를 순찰하고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비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불로초를 구입하기 위하여 여생을 낭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유학자 들은 이러한 진 시 황제의 정책과 행위가 못마땅하였다.
그래서 유학자 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나라 때 실시한 옛 봉건제로 다시 회귀할 것을 건의하여 시 황제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시 황제는 이사의 주장대로 의서와 점술과 같은 복서 그리고 농경에 관한 서적과 진나라의 역사기록 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그를 비판 하였던 유학자 들을 생매장하고 말았다.
이건이 분서갱유다.
그러나 이러한 시황제도 전국 각지를 순례하다가 객사하고 말았다.
시 황제의 유서가 있었으나 환관인 조고가 재상 이사와 모의하여 큰 아들 부소를 죽여버리고 정신이 맑지 못한 둘째 아들 호해를 왕위에 옹립 함으로서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진나라 말 중국은 또 한번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항 우와 유방 과의 결전이었다.
항 우와 유방의 결전은 한 치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를 달리고 있었다.
항우가 광무산에서 10달 넘게 유방과 대치하면서 초나라 군인들은 굶주리고 항우에 버금가는 맹장 용저도 한신에 의해서 잃었다.
반면 유방 군은 서광무의 곡창 덕분에 굶주리지 않았기 때문에 항 우는 퇴각을 결정하였다.
항 우는 협상을 통해 인질로 잡혀있던 유방의 가족들을 유방에게 인도하고 초군이 팽 성에 입성할 때까지 한 군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이 추격할 것을 진언하여 유방은 정예 10만으로 항우를 뒤쫓다가 고릉에서 초군 3만에 대패해 군사의 절반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조참과 관영의 지원군과 합류해서 다시 10만 병력을 모았다.
진 성에서 항 우는 기선제압을 위해 한 군에 돌진 하였으나 군사가 적어 도리어 포위 당하게 되자 포위망을 뚫고 해하로 이동하였다.
유방은 한 신과 팽월, 경포 등을 불러들여 군대 30만으로 항우를 뒤쫓고 있었다.
항 우는 자신이 이끈 5만 군사와 계 포의 3만 군대를 연합시켜 군사를 8만에서 10만까지늘렸다 .
한신은 군대 30만을 이끌고 좌 군으로 공 희, 우군으로 진하, 전군 등을 포진하여 항우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사기가 상승한 항우의 군사들이 갑자기 돌진하자 전군이 뚫리고, 중 군까지 뚫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양전동 암각화
만약 옆구리가 뚫리게 되면 한군 30만 군대는 아수라장이 될 것 같아 한신은 미리 좌, 우익 공희와 진하에게 옆구리를 공격 하라고 지시하여 초나라 군사들의 반격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이에 놀란 초군은 당황하여 패배하고 말았다.
초 패왕 항 우는 한왕 유방에게 구리산에서 대패하여 강동에서 재기 하려 하였으나 해하 전투에서 남은 부하 28명과 한 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한군1,000명과 한나라 장군9명을 죽였다.
그러나 항우 측은 2명만 전사 했을 뿐이다.
오 강에서 정장이란 자가 배를 타라고 하였으나 천하가 이미 나를 버렸다 라고 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며 오 강에 투신하고 말았다.
천하의 백수 유방이 천하를 얻은 것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유방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처 여태후 때문이었다.
그러한한 여태후가 유방 사망 후 황후가 된 것이다.
여태후가 중국 역사를 뒤흔든 측천무후나 서태후와 함께 3대 악녀 중의 한사람이었으니 한나라 초기가 얼마나 불안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태후에 의해서 한신은 토팽 당하고 개국공신들은 이슬처럼 사라졌다.
어찌보면 인과 응보란 말이 맞을듯싶다.
이에 개국공신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드디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것이 5초7국의 난이다.
유씨 성이 아닌 노 관은 신변이 불안하였다.
노 관은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연나라 제후였다.
늘 노심초사하여 시름을 놓을 수 없었다.
중앙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노 관은 결국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저항 하였으나 실패하여 흉노 족에게 도망가고 그의 부장 위 만은 고조선에 입국하여 지배계층이 되었다.
위만이 고조선에 입국할 때 무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철기를 가지고 있는 자도 있었다.
철을 제련하여 검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은 한반도에서는 드물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기술은 중국에서만 가능 하였는데 차츰 한반도에 까지 전래되어갔다.
그것은 기원전 4세기로 보고 있다.
이러한 철은 한반도 남쪽 변한지역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중국의 핵심기술이 접목되어 한반도 남쪽에서도 철을 마음껏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돌맹이 처럼 된 덩이 쇠가 흔히 발견되어 제련과정을 거쳐 검은 물론이고 갑옷과 재갈, 편자와 같은 마구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반주로 곁든 소주 몇잔이 기분을 들뜨게 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텔을 찾아 꿈을 꾸어야 하였는데 마땅한 모텔이 없어 우왕좌왕하다가 고령으로 들어올 때 입구에서 언뜻 보았던 비너스모텔이 생각났다.